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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독일 태생이었으나 프랑스 령 적도 아프리카(현 가봉공화국) 랑바레네 지역에서 흑인들에 대한 의료봉사로 한평생을 보낸 슈바이쳐 박사의 거룩한 스토리를 읽고 감격의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슈바이처 박사도 의사로서, 신학자로서, 철학자로서, 음악가로서 후세에 명성을 떨친 분입니다.
최근 수단으로부터 독립한 남수단의 톤즈 지역에서 성직자로서,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브라스 밴드 단장으로서 열정적인 봉사활동을 하시다가 48세의 젊은 나이(1962~2010)에 요절하신 남수단의 슈바이처 '고 이태석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혼자 간직하기는 아까워 여러분께도 전파하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48년 간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고 이태석 신부는 수단의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학교를 짓고,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 남수단의 명물 브라스 밴드로 키웠다. 이 신부는 어린이의 찢어진 이마를 꿰매주면서 "(피부가) 까매서 실이 안보여"라고 농담하며 어린이와 스스럼 없이 장난치고 어울렸다.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수단 어린이의 입에서 "산토끼" 동요가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부른다. 의사로서 안정된 생활대신 전쟁과 가난,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남수단의 오지 마을 '톤즈'에서 10년간 의료와 교육봉사를 하다가 정작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못해 2010년 1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 이태석 신부. 영화 '울지마 톤즈'는 그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이 신부의 고향은 부산이다.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삵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어릴적, 집 근처 성당은 그에게 놀이터였다. 거기서 벨기에 출신 다미안(1840~1889) 신부에 대한 영화를 봤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근처 몰로카 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로 숨을 거둔 인물이다. 이신부는 이 영화를 본뒤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제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그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어머니께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밝혔다. 이미 신부가 된 형, 수녀가 된 누나도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로 반대했다. 그는 "어머니께 효도도 못하고, 돈을 벌어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하느님께 자꾸 끌리는 걸 어떻게 하느냐"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리고 뒤늦게 신학대로 진학했다.
마침내 이 신부는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자청해서 아프리카 수단으로 파견되어 갔다. 내전 중인 남수단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역이었다. 말라리아와 콜레라 등이 창궐하였으나 약도, 치료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 신부가 거주하는 톤즈에는 이 신부가 유일한 의사였다. 거기서 이 신부는 헐벗고, 굶주리고, 다치고, 병에걸리고, 희망을 상실한 주민들에게 의술과, 예술, 따뜻한 가슴을 베풀었다. 톤즈의 배고픈 아이들, 밤낮 사흘간 걸어서 찾아 온 환자들, 수단인 조차 외면하는 한센인들을 정성껏 돌보고 치료해 주었다.
공간이 모자랐다. 이 신부는 손수 벽돌을 구워서 병원을 지었다. 전기도 없었다.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해 냉장고를 돌렸다. 상하기 쉬운 백신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이 신부는 학교도 지었다. 초, 중, 고 11년 과정을 꾸렸다. 손수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케냐에서 교사도 데려왔다. 톤즈의 아이들은 거기서 미래를 찾았다.
톤즈 사람들은 그를 "쫄리" 신부라 부른다, 그의 세레명 "존 리"(John Lee)의 현지 발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부에게 물었다. 의사로서 소외된 이웃을 도울 수 있고, 한국에서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 데 왜 굳이 신부가 되었냐고,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냐고...
이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 예수님께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신부를 돕던 사람들은 "이 신부는 사랑과 헌신을 통해 수단과 한국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 이어주고 가셨다."고 말한다.
얼마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남수단 독립기념식에서 축하 연설을 했다. 남수단 독립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서 주민들에게 꿈과 희망과 독립 의지를 심어 기틀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고 이태석 신부가 아닐까?
이 신부가 사망한 후에도 그가 심어놓은 사랑의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태석 신부의 활동을 돕기위해 2004년 결성된 '수단어린이 장확회(이사장 이재현)'의 회원은 이 신부의 선종 후 올해초까지 2300명에서 7830명으로 급증했다. 장학회는 올해부터 '슈크란 바바'(현지어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뜻)를 계간지로 발간하고 있다. 이 신부 후임으로 우경민 신부가 파견되었고, 의료 봉사자 2명이 상주하며 환자를 돌보고 있다. 장학회는 이 신부가 현지에서 짓다가 중단한 학교건물을 준공하고, 브라스 밴드 활동도 부활시킬 계획이다. 이를 위해 건축가, 음악지도 봉사자, 교육 봉사자도 파견할 계획이다.
현지 사람들은 "쫄리" 신부를 성자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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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울지마 톤지"는 불교계의 큰 스님들도 감명있게감상했던 영화라고 기사에서 본 적이 있는데.종교을 초월한 인류애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 그을 더욱 그리워하고 있겠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선자가 생겨나고 있다니, 뿌듯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사람이 할수있는 행위들중에서 가장 고결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 성자임,한국사람이었기에 더욱 존경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사랑을 베푼 분이셨기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영화랑 책 모두 봤는데 이태석 신부님이야말로 언젠가는 성인반열에 오르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엊그제 메스콤에도 63세 부부의사 와 건축가 친구부부가 남수단으로 남은여생을 봉사 하기위해 간다고 ,대단히 존경스럽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뜻이 계속 이어져 가는군요. 신의 섭리는 경외롭소이다.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고 무지한 사람을 깨닫게 하는 지혜를 몸소 실천하여 고아원과 양로원,병원과 학교를 세우니 가난을 구제하고 고통을 벗겨주며 무지를 깨닫게 한 이태석 신부님 이야말로 진실한 하느님 이십니다 아멘
우리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늘 말로만 남을 돕고 위로하며 산다고 할 뿐, 실천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나의 미약한 힘이나마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도우려 합니다.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 현지인 인터뷰를 보니까, 톤즈의 어린이들은 좀처럼 울지 않는다 한다. 아파도, 배고파도, 기타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그런데 이태석 신부의 죽음 소식을 듣고는 아이들이 흐느껴 울었다. 그리움에, 존경심에...그들은 이태석 신부가 성경에 나오는 성자라고 했다. 아이들이 이태석 신부로 인해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