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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보 제 2329호. 불기2568년(2024년) 11월 24일 일요법회 및 관음재일 법회
11월 마지막 주 법회일은 소설(小雪)이 지나서인지 많이 쌀쌀해진 아침입니다.
하지만 여느때와 다름없이 데스크 안내 및 법회보를 나누어 드리는 송파 17구 보살님들께서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 불광형제들을 맞이하고 계시고, 사무국 역시 바쁘게 봉사하는 모습이 활기차고, 불광 형제들이 보광당으로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송파 27구 엘리베이터 봉사팀의 해맑은 얼굴이 법회 참석하시는 모든분들을 행복하게 하시니 오늘도 좋은 날 입니다.
토요일이면 일요 법회에 배부할 주보를 정열하여 접어 준비하시는 봉사자 분들, 사 측에서 계속 떼어낸 안내 벽보를 빈 공간을 찾아 다시 붙이시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법회일 아침이면 반복하시는 거사님들, 법당 안내팀, 새법우교육팀. 미디어 촬영팀.
떡과 생수 보시하여 배분까지 하시는 송파 6구, 송파 7구, 송파 9구 중랑구 보살님들. 다도팀의 헌다 준비 팀.
천수경을 독경하시고 타종을 하시는 현수거사님에 이어 추담 사회자님의 안내로 부처님 전에 헌향, 헌다를 올립니다.
점점 냉기가 느껴지는 계절이지만 보광당엔 일요 법회 참석하신 불광형제들의 열기로 훈훈함이 느껴지는 법회 모습입니다.
금주의 법문 : 여여법사(문사수법회)
금주의 법어 :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다 - 知恩報恩
여러분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오늘 마침 관음재일을 모시는 날이기도 하죠. 먼저 관세음보살님 모시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오늘 주제 법문에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인기 있는 보살님하면 관세음보살님, 가장 인기 스타 보살님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게요. 관세음보살님은 나와 상대에 있는 분으로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분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넘칩니다마는 그것은 위험한 문제죠. 나와 관세음보살님을 둘로 보고 있다라고 논리적 함정에 떨어지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얘기하면 관음이라고 하는 건 보는 거죠. 본다는 것은 참여한다는 거예요. 참여한다는 것은 동일시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관세음보살님께서는 누구를 관하시는가라라고 하는 그런 종착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모십니다. 저는 누구한테 인사할 때 평상시에 이렇게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저는 부처님 모시는 여여입니다라고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를 모시고 있는가 관세음보살님은 누구를 모시고 있는가 그럴 때 우리는 형상으로서의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죠. 그때 관세음보살님이 이마에 정대했다고 그러죠. 관세음보살님이 모시고 있는, 높이 받들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시죠? 아미타 부처님. 다시 얘기하면 아미타 부처님이 따로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 가치가 무한 생명, 무한 광명, 무량 공덕으로 가득 차 있는, 무한 생명 무한 광명을 나는 항상 모시고 있는, 시쳇말로 표현한다면은 나는 아미타 제자라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가 가전제품을 시장에 가서 사실 때 이것은 어디 제품인가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제품 생산일을 따지면서 신뢰를 갖게 되고 그것을 쓰게 되는 거죠. 관세음보살은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문기명호(聞其名號)라! 다시 얘기하면 그 명호를 듣게 되는 건데, 명호는 다시 얘기하면 자기를 각성하는 행위니까 스스로가 생명 가치가 뭐냐라고 하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내 생명 가치는 뭐냐라고 하는 것을 잊지 않는 분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데, 어떤 생명 가치냐? 무한 생명 무한 광명으로서의 즉 무량한 공덕의 당사자라고 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라는 거. 그랬을 때 관음경이라고 여러분들 독송하시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 보문품이죠. 정확히 얘기하면. 관세형보살 보문품에 보면, 관세 음보살님은 왜 오셨습니까라는 문답을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님은 나의 생명 가치가 무한 생명 무한 광명으로 살고 있다라고. 이미 아미타세계에 살고 있는데, 아미타에 그냥 가만히 계시지 왜 오셨어요? 이 사바세계에 왜 오셨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아주 간단한 대답으로 원문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노사바 세계다. 사바세계에 놀러 왔다. 우리 논다라는 말을 자주 하죠. 근데 논다라는 말이 상당히 그 나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본래 국어학적인 입장에서는 놓는다는 의미였어요. 나를 놓고 관세음으로 산다라는 분이 관세음보살님이세요.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뜻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온갖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 찬 세계. 내가 살려니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인간 저 인간 떠올려봐야 다 그래. 하는 일도 어쩌다 보니까 잘 되는 줄 알았더니 또 내가 한참 쫄리고 있고, 짜증 나는 인생. 그런데 이 사바세계에 왜 왔을까? 알고 보니까 그것이 짜증 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 나의 무량한 공덕을 실현하려고 왔다라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태어남의 문제로 이제 연결이 됩니다. 관세음보살님을 뫼시러 관음재일날 오셨다라고 생각을 할 때 그런 날만 관세음보살님으로로 사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나는 관세음의 사명을 갖고 태어났고 관세음의 그 광명 속에서 관세음의 그 무한한 력, 그걸 관음력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 꼭 자기의 사명 내가 생명 가치가 뭔지를 잊지 않는 분은 그 에너지를 쓰게 되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들이 이럽니다.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집안이야 또는 난 어느 학교 나왔어 나 전공은 뭐야 그럴 때 그로부터 힘을 받아서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관음력을 발휘한다라는 것이 우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관음경 끝부분에 가면 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염념물생의(念念勿生疑)하라. 생각생각 의심치 마라. 우리가 무량공덕(無量功德)의 주인공임을 의심치 말라. 이것이 관세음보살 신앙의 엑기스입니다.
내가 관세음임을 알고, 그때마다 떠올리는 내가 관세음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한때 유행했던 영화가 하나 있었죠. 아바타라는 영화. 아바타 영화의 아바타라는 말이 우리 불가의 화신(化身)이라는 뜻이거든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나라는 자가 온갖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관리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공무원의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심지어 도둑의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세금쟁이의 모습으로,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와 관계짓고 있는 것이 사바세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모습으로 나타나신 관세음보살입니다.그러니까 어떻게 돼야 됩니까? 그 관세음보살이 직업을 갖고 있다 또는 나이가 몇이다 남녀의 성별이다라고 하는 것의 밑바탕은 뭐예요? 나는 무량 공덕으로 나타나서 내가 공무원 노릇을 하고 무량 공덕으로 나타나서 내가 엄마 노릇을 하고 내가 할머니가 되고 하는 거죠.
이 원초점을 잊지 말라. 만약에 이 원초점을 잃을 때 오늘 주제 법문에 해당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거죠. 자기 근본이 뭔지를 잊어버리고, 좋게 얘기하면 직업에 앞서 가버리고 엄마 노릇하느냐고 앞서버리고 또 남자 노릇하느냐고 앞서 버린다. 이거는 현상적 기준에서 다 무상법 따라서 변해가는 거죠. 그건 믿을 바가 못돼요. 집에서 귀여운 딸이었던 따님이 시집을 가면 누군가의 아낙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좀 이따가 누군가의 또 엄마가 됩니다. 그때마다 수많은 화신으로 탄생을 합니다. 그런데 너는 내 딸 노릇만 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아들을 만나면 엄마가 될 것이고 또 시부모를 만나면 며느리가 될 것이고. 그때마다 온갖 것에 망설임 없이 너의 무한한 공덕의 능력을 발휘해라.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죠. 이것을 제한해 버리면 배은망덕하다고. 이것은 사회적인 인권이 개입됐을 때 나타나는 배은망덕의 정도가 아니예요. 내 생명 가치가 뭔지를 망각하고 노릇하느냐고 바쁠 때, 우리는 내 생명의 근원, 나를 살려주신 내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은혜를 배반하게 된다는 겁니다. 흔히들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데리고 있던 사람이 나한테 은혜를 배반했다. 또는 자식이 배반했다 이런 얘기를 하죠. 은혜를 배반한다는 말이 너무 이렇게 속화되다 보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거래 관계의 기준점이 된 겁니다. 흔히 영어로 많이 쓰는 말이죠.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다. 니가 나한테 해준 것만큼 해주는 그게 은혜일까요?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부모님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부모님 은혜를 작사하신 분이 양주동 박사신데요. 양주동 박사가 어느 날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외시다가 보니까 그 어머님 은혜가 너무 떠오르고 그래서 지으신 게 부모님 은혜라고 그분 쓴 글에 나와요. 생각해 보면 부모님 은혜에 왜 우리는 감동을 하는가? 조건이 없으셨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우리를 길러주실 때 너 다음에, 내 노후에는 나를 이렇게 모실 것이며 나 그다음에 내가 뭐 먹고 싶을 때 이거 사줘야 될 것이며 조건 걸고 하는 분을 보면, 우리는 그러죠. 부모 자격 없다고. 부모가 내리신 사랑이라는 건 조건 없다는 뜻을 얘기합니다.
은혜가 나에게 왔다라는 것은, 은혜를 안다는 것이고, 은혜를 안다는 것은 조건 없이 태어났음을 아는 겁니다. 부처님 생명,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으로 태어났음을 아는 것이지 이것이 거래 관계에 서 있어서 내가 측정한 것만큼 받은 것은 은혜롭고, 측정한 것만큼 오지 않으면 은혜롭지 않다고 한다면은 우리는 은혜의 주인공이 못 되는 겁니다. 자격 상실입니다. 제가 고아로서 자라나서 자수성가 한 분을 상담을 했는데 처음에 오셨을 때, 이분이 당신이 자수성가한 것이 무척 기특하셨나 봐요. 그거를 이제 자랑하려고 하다가 보니 자기는 부모님의 은혜를 못 받았어요.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래서 갑자기 변색을 하고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은혜 받은 건데 우리 거기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래 갖고 대화를 풀어간 적이 있습니다. 우리 그런 얘기합니다. 부모님이 나 버렸어. 우리 사장이 나 그렇게 백골난망(白骨難忘)으로 그냥 회사를 위해서 일했더니 날 배반했어. 친구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그 은혜를 측정하다 보니까 배반의 사건이 널려져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럴까요? 제가 좋아하는 그 불서 중에 《구사론》(俱舍論)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구사론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아귀(餓鬼)를 기억하라!” 다들 “희망을 품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희망이 아귀의 이름이에요. 아귀에는 여러 가지 별칭이 많습니다. 여러분들 별칭이 있지 않습니까? 아까 아들이 부를 때 엄마라고 부르고 또 미스코리아 가면은 이거 대표 미인이라 그러고 저 같으면 별명 중에 하나가 미남입니다. 그런데 아귀의 이름이 희망이더라고요. 처음에 이 글을 보고 제가 잘못 읽었나? 그랬습니다. 희망은 뭡니까? 내가 이것이 될 거라는 것이 희망 아니에요? 그럼 아귀의 모습에 대해서는요. 경전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얼굴은 거무티티하고 배는 남산 만하게 나와 가지고 너무 커요. 근데 뭘 먹으려면 먹을 수가 없어. 딜레마예요. 왜? 아귀 눈에는요 마시려고 하는 물이 뭐불로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 먹어요?
어떤 다른 표현에서는 피고름으로 얘기해요. 여러분이 드시는 주스가 있는데 그 주스가 피고름으로 보일 때 그걸 자시겠습니까? 아마 내 눈에 그렇게 보이면 안 할 겁니다. 그러니까 이 딜레마는 뭐냐 하면은 먹고 싶은 게 그렇게 많은데, 목구멍은요. 바늘구멍보다도 가난해. 그래서 막상 넘기려면요, 밥 하나만 넘겨도 여기가 어때요? 여러분 편도선 아파 보시면 얼마나 괴로운지 아시잖아요. 얼마나 아파요? 찢어지는 듯 아파서 먹지도 못해. 그런데 얘는 항상 배가 고파. 아귀는요. 항상 배고파. 배고프니까 먹을 건 항상 옆에다 챙겨 놓아야 되요. 근데 옆에 있는 이웃이 그 아귀한테 가서 너 안 먹으니까 나 좀 나누어 줘. 그럼 줄까요? 안줘요. 나 먹을 거야 그래. 저는 요. 이 아귀 얘기만 나오면, 꼭 현대인들의 우리 모습 같다고 생각해요. 누굴 비난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냉장고에 다음에 먹어야지 넣어놨다가 버린 거 많으시죠?또 우스게 얘깁니다만 베란다에 비싸게 산 그 운동기구 내놓고 빨래대로 쓰는 분들 계시죠? 저는 남의 집 방문하면 거기부터 갑니다. 제가 운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의 거 얻어다가 저는 운동을 하거든요. 거기 가보면 100%예요. 거기 빨래 양말 올려서 이거 안 쓰시죠? 그러면 저 쳐다봐요. 제가 소문이 나가지고 내일부터 할 거예요. 이건 무슨 얘기냐면 뭔가 바라는 희망하는 것을 끝간데 없이 항상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내가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 거예요. 쓰고 있지 않고, 먹고 있지 않은 거죠. 이게 딜레마예요. 아귀의 딜레마인데, 한마디로 나는 못 받은 게 너무 많아, 주변에 너무 악다구니들만 살아, 나는 외로워 라고 하는 거예요.
과연 그분은 은혜를 못 받은 걸까요? 이것을 저는 말씀드려서 착각이라 그래요. 태어났다는 그것만으로 이미 무한한 은혜의 주인공입니다. 어떤 조건은 그 다음 아닙니까? 여러분 한때 유행했던 유행가 중에 타타타라는 노래 있지 않습니까?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를 풀어놓은 가사 아닙니까?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데 옷 한 가지는 건졌잖소라는 얘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요. 우리가 태어날 때 빨가 벗고 태어났어요. 최소한 몸뚱이를 기준으로.그럴 때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옷을 입었고 얼마나 많은 신, 그 안에서 변화가 있었을 것이며 또 우리가 많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너무나 가지는 게 많아요. 그게 뭐예요? 은혜죠. 그 덕분에 산 겁니다. 그 덕분에 산 겁니다. 이렇게 볼 때요. 결국은 은혜로 가득 찼는데 은혜를 받은 바가 없다는 사람에게는 아까 그랬습니다. 생활은 어둡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은 다 뭐예요? 다 내 거 뺏어갈 사람. 투쟁과 투쟁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반목할 수밖에 없고, 수많은 사람들과 경쟁이라는 이념 하에서 어떻게 됩니까?너를 짓누를 수밖에 없어.
과연 그럴까요? 모든 삶이라는 게 알고 보면,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살려지는 건데 그것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살려니까 힘든 겁니다. 내 힘만으로 내 그 알량한 머리 만으로 또 얼마나 대단한 경험이 있다고 그 경험칙 갖고 세상을 판단하기는 힘듭니다. 아까 그런 말씀드렸죠. 관세음보살님은 아미타 제자다. 무한 생명 무한 광명으로 태어날 때 나는 아미타제자다라는 자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때 힘이 나오는 겁니다. 나는요 가방끈이 짧아요. 저는요.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도 없어요. 저는요. 학교를 좀 나쁜 데를 나왔어요. 저는 몸이 건강치가 못해요. 온갖 핑계를 듭니다. 상대적인 평가죠, 그렇죠. 상대적인 평가 하에서는 불만과 불평이 난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순간에도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난 것입니다. 그때마다 새로운 탄생을 하고 있는 내가 아닙니까? 오늘도 태어나고 그것도 뭐로?관세음보살로!
저는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는 분들에게 꼭 이렇게 당부드립니다. 관세음보살로 사세요. 그러면 어떤 분은 또 이렇게 반문하시데요. 건방지게 제가 어떻게 관세음보살로 삽니까? 건방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미타 제자인데 왜 우리가 중생살이를 합니까?왜 못난 물질 생명으로 삽니까? 부처님 생명으로 살아야죠.
이런 자리를 잃어버릴 때 우리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현실과 싸우려고 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제일 좋은 것이 아마 영화 보는 걸로 비유가 되지요. 영화관을 가보면 온갖 영화들을 보는 분들 많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멜로 드라마를 보는 분도 있고, 서부 영화를 보는 분도 있어요. 취향 따라. 어떻게 보면 영화를 보는 것은 자기 취향의 그림자를 보는 거죠. 예전에 제가 중학교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 갖고 많이 돌아다녔는데 영화를 보게 되면 한 편 보는 게 좀 아까운 거예요. 돈도 없고 그래서 동시 상영관을 갑니다. 동시 상영관 가면은 제일 많이 상영하는 데는 한 번에 3개까지 하더라고요. 근데 대부분의 동시 상영이 보면은 미성년자 입장 불가인 영화들이 많아요. 또 일부러라도 그걸 찾아가죠. 대체로 동시상영관에 나오는 그 필름들이 어떻습니까? 오래됐겠죠. 개봉관에서부터 거기까지 가는 동안 필름이 낡아서 비가 내립니다.지금도 궁금한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지평선은 말이 없다’라는 영화인데 그게 미성년자 불가 영화였습니다. 근데 그 영화를 한창 보는데 감명 깊게도 드디어 키스 장면이 예고된 장면이 왔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막 달려옵니다. 기억나시죠? 그런 영화들 많았죠, 그때 뭐 미워도 다시 한 번 이런 막 뛰어가다가 괜히 돌뿌리도 없는데 넘어지지 않습니까? 막 뛰어옵니다. 막 뛰어가서 두 남녀 주인공이 분명히 주둥이 박치기 하는 그 순간 그 사이에 비가 내린 겁니다. 그럼 제 희망은 주둥이 박치기를 보는 겁니다. 그런데 비가 내려서 아직도 궁금해요. 했을까 안 했을까? 그런데 저는 분명히 못 봤습니다. 그러고서 나오는데 갑자기 누가 제 뒤통수를 딱 때립니다. 그때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 같은 불량 학생 이제 체크하러 오신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 녀석아 너 이거 못 들어오게 된 영화한테 너가 들어 왔다는 거예요. 제가 그때 항변한 게 있습니다. “저는 안 봤습니다. 선생님도 같이 보신 거죠?” 그랬더니 나중에 그거 갖고 대화가 돼서 그 선생님 많이 찾아뵌 기억이 나는데, 한마디로 내가 본 것이 현실인가? 이 얘기는 내가 보고 싶은 걸 본 게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내 안에 뭘 찍었느냐? 영화 감독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영화 하는 분들한테 특강을 간 적이 있는데 영화라는 게 창작 투어 아닙니까? 상상력. 시나리오를 잘 써야죠. 좋은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가 나오니까, 그럼 시나리오를 하려면 많은 상상력에 대한 소재가 필요해서 제가 이제 인도 신화부터 불경에 있는 자타카 얘기 많이 해주고 하다 보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 주인공은 누구를 내세울 것이며 남자 주인공은 누구, 이렇게 연기에 대해 얘기까지 나오게 되면서 결국은 시차적으로 시나리오를 씁니다. 그러면 감독의 상상에 의해서 그것이 구성이 됩니다. 그러면 필름의 단계입니다. 그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상영된 것을 구경을 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여기서 퀴즈입니다. 영화는 먼저 찍은 것을 보는 겁니까?지금 찍은 것을 지금 현재 보고 있습니까? 뻔한 얘기죠. 이미 찍은 겁니다. 그죠? 이미 찍은 거를 나는 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화도 내고 이러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찍은 거죠. 그게 내가 목도하는 현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제가 영화 얘기를 이렇게 한 겁니다. 우리들이 목도하는 것은 나라는 자가 내가 받았다라고 하는 이 생명의 에너지를 구상한 것을 현실로 만나는 거죠.
그래서 흔히들 이런 얘기합니다. 부부가 한참 싸웁니다. 싸우면 옆집에서 뭐라 그러죠? 똑같은 사람끼리 싸운다고 그럽니다. 자기네들은 분하지만, 비슷한 주파수를 갖는 사람끼리 만나서 싸운다는 것이죠. 좋아하는 고전 중에 하나가 또 장자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장주라는 사람의 얘기를 아주 멋있게 쓴, 이 장자라는 책을 보면 유명한 꿈 얘기가 나옵니다. 장주라는 사람이 어느 날 꿈을 꾸었어요. 잠을 자다가 꿈을 꿨는데 그때 나비가 됩니다. 나비가 돼서 훨훨 날아다니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꿈을 깼습니다. 그때 하는 물음입니다. 내가 꿈꾼 것이냐? 나비가 지금의 나를 꿈꾸는 것이냐? 그 유명한 명제입니다. 여러분들 꿈꾸시지 않습니까? 꿈에 뭐가 되기도 하죠? 그죠? 뭐가 됐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꿈을 꾸는데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생각하던 이상적인 여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드리 헵븐! 언제나 오드리헵븐을 만나나 그러고 있는데, 그렇게 정성이 지극하닌까 나타나더라고요. 드디어 그녀가 왔어요. 오더니 자기 기다렸다고 그래서 손을 잡아요. 그랬더니 저한테 막 당겨 오기 시작을 한 겁니다. 그 순간에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다. 저희 어머니가 “밥 먹어라”, 그게 지금도 아쉽습니다. 꿈은 깨요. 근데 꿈을 깨고 나서 보면 진짜 헷갈릴 때가 있어요. 너무 생생한 꿈이란 말이에요. 생생한 꿈을 어느 쪽 시점에서 보느냐 입니다. 꿈속에서 보는 이게 꿈이냐 아니면 지금 내가 아까 한낮에 한 여름밤에 꿈같이 그런 꿈을 꾼 것을 꿈이라고 얘기할 것이냐, 그래서 오죽하면요. 상당히 자기가 감내하기 힘든 현실을 만나면 이렇게 되는 분들이죠.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이런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힘들어 감당하기가, 꿈인가 봐, 이런 분들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서 평상시에 내가 살아가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나는 꿈을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야. 진짜 나, 진짜 내가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맞이하는 현실을 분석할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이왕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까 영화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드라큐라>라는 영화를 보고 계십니다. 지금, 너무 무섭습니다. 근데 공포 영화를 보시면 어떻습니까? 소름이 끼친다는 분도 있고 아드레날린이 솟아서 내가 지금 어떻게 정신이 없다 이런 분들 많은데, 그 무서운 영화를 상쇄시키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옆에 있는 영화관에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면 되요. 자기가 공포 영화를 보면서 무서워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섭다 그럽니다. 그런데 아까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당신이 갖고 있는 내 내면의 소리 내 부처님 생명이라고 하는 무량공덕의 세계를 그때마다 자각하고 있으면 돼요.
공포 영화를 보실 때 재밌게 보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이거 팁인데요. 볼륨을 꺼보세요. 볼륨을 끄고 보면요. 세상에 없는 공포 영화도 재미있습니다. 너무 웃겨요. 생각해 보세요. 드라큐라가 피를 쫙쫙 흘리고 막 다니는데 소리가 없잖아요. 코믹해요. 코믹해요.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구성하는 거예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아닙니까? 이 육근(六根)에 의해서 벌어지는 것을 내가 구성해 갖고 현실로 만들어놓고선 거꾸로 어떻게 돼요? 뭐 복잡하게 볼 거 없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걸 볼 때 우리는 현실과 싸워야 되죠. 또 그 과정에서 현실을 분석해야 될 여유도 없습니다. 바로 내가 보는 현실이 누구예요? 나예요. 당신이 누구냐 그런다면 나라 그러죠. 당신이 누구냐 그런다면 그게 다예요. 왜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으며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그게 나죠. 그런데 그 현실은 누가 주재하는가? 운명의 장난, 사주 팔자가 막 나빠서 이렇게 된 게 아니라 내가 관세음보살로서 은혜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제한시켜 놓은 것만큼 현실을 가져요.
이러한 제한에 의한 피해자 중에 대표적인 분을 예로 든다면요. 동화책에 나오는 만국의 고전이죠. 백설 공주 얘기 다 아시죠. 백설 공주의 스토리의 핵심은 백설공주가 그 어머니와의 갈등 아닙니까? 모녀 갈등인데,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백설공주의 어머니가 거울을 보면서부터 시작이 되요, 백설공주 어머니가 거울을 향해서 무슨 질문을 하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러죠? 그 속마음은 뭐예요? 내가 제일 예쁘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미 자기 딸이 더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딸한테도 질투한다니까요. 백설공주가 더 이뻐라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거울이 대답했죠. 백설 공주입니다. 그래갖고 질투심이 나서 이제 영 일을 벌이는 거 아니예요. 그래서 저는 이 백설 공주 엄마가 참 딱하다 하다 그래요. 남들은 악질이다 그러는데 저는 딱한 분이다. 왜? 현실에 의해서 스스로 잡아먹혔잖아요. 자기가 만든 현실의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현실에 자기가 잡아먹혔으니 딱한 사람이지요.
결론은요. 자기 생명을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에 잡아먹히지는 않습니다. 쫓기지도 않습니다.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과정을 보면 하나하나마다 그때마다 선택하는 겁니다. 무언가를 선택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하는 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학교 시절에 진로를 생각할 때 어느 학교를 갈 것이냐? 또 직장을 갈 때 어디를 택할 것이냐 할 때 하나만을 고려하신 건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 같은 경우에도 선생님이 너는 문과 성향이니까 문과를 가라 그래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것만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기 선택을 해서 그다음에 살아가는데 근데 지나고 보면요.후회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그 길로 갈 걸. 제가 여자 법우님들을 상담하다 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안 잊혀지는 분인데 내가 그때 첫사랑이 있었는데 그 사람하고 결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제가 그때 그러죠. 깨몽 그럽니다. 왜? 한마디로 얘기하면 지금의 남편과 그때의 첫사랑은 전혀 다른 경우에요. 그죠? 또 역으로 얘기하면 남편도 첫사랑이 있겠죠. 마찬가지예요. 내가 간 길이 그게 내 길이에요. 내가 간 길. 과거에 그랬다면이라는 이러한 가정법이 동원될 만큼 인생은 한가하지가 않죠. 유일한 길, 유일한 길. 내가 택했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한 길이라는 겁니다. 옆으로 볼 일이 없다. 비교할 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온전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길 그것을 갔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삶이 벌어지는 걸 보면 시간과 공간과 사람에 기초해서 선택을 합니다. 지금 축구 경기 한번 보십시다. 손흥민 선수가 왔습니다. 그래서 축구 경기를 간다고 그랬는데 잘못 들어서 야구장에 갔습니다. 야구장에 딱 들어갔어. 그러면 야구장에서 어디 축구 경기를 봅니까? 야구 경기를 보겠죠. 축구 경기장에 들어간 사람은 축구를 즐기러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축구장에 가서 야구 생각한다? 그럴 때를 외도라 그래요. 축구장에 갔으면 축구장을 실컷 즐기는 거고, 야구장에 갔으면 야구를 실컷 즐기는 거야. 그런데 야구장과 축구장을 왜 비교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선택은 완전한 조건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다른 조건과 비교하지 마세요. 관세음보살로 산다는 것은 비교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권세음보살로 산다, 완전한 생명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실제 이것을 선택하지 못할 때요. 수많은 패배자들이 생겨납니다. 인생 실패자야라는 분들이 넘치고 넘칩니다. 남들 보기에는 저만한 스펙에 저만한 것으로 갖고 있어서 괜찮으실 것 같은데, 개별로 만나면 고독하다는 분 또는 외롭다는 분, 자기 스스로 인생 실패했다는 분이 참 많습니다. 그럼 왜 이 패배자가 있을까요? 패배자는 하고 싶은 것을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죠. 하고 싶은 만큼 못했다라는 자기 진단 때문이죠. 그럴까요? 그 측정은 누가 했는데요? 제한된 생각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은요. 무엇도 선택할 수 있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이 법회를 모시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선택이 있었지 않습니까? 전화가 왔어요. 아까. 동창이 꼭 이 시간에 날 만나야 되겠대. 그런데 나는 법회를 모시러 갈래. 근데 그 동창은 아니야, 오늘 아니면 나 못 만나. 이런 선택이 우리 수시로 있습니다.
선택은 항상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계속 선택하고 있어요. 지금 법문 들으시면서도 혹시 집에 가스 불을 안 껐나 하고 선택하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걱정이 되니까 법문이 안 들려요. 거기에 메이고 있는 거죠. 이런 패배자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전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평상시 주로 상담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저로서는 불가능 합니다는 말을 거의 18번같이 하시더라고요. “불가능해요. 현실은요. 아무리 제가 부처님한테 빌어도요. 불가능해요.” 그래서 제가 그래요. “말은 제대로 합시다. 불가능을 제대로 합시다. 아니 불자께서 먼저 끊어보세요.” 그럽니다. “한번 끊어보실래요? 불가능하지 마시고 끊어서 불(不)! 가능(可能)!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아니! 가능해!” 아니 우리는 왜 자기를 갖다가 한정시킵니까? 가능하죠, 가능하죠.
가능이나 불가능이나의 잣대 문제에 대해서요. 아까 아미타제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아미타제라는 것은 아미타부처님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무량수경을 많이 드는데, 무량수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 48대원이라는 것이 있죠. 뭐 복잡하니까 부처님의 몸이 48대원(大願)으로 갖추었다, 48대원을 갖춘 분을 아미타불이라고 불러요. 48대원을 갖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쳐다보는 것이 성취됐다는 뜻입니다. 원은 이미 성취된 거라는 겁니다. 48대원중에 오늘 관세음보살님처럼 사는 것에 걸맞은 법문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부처님 생명으로 사는 나라를 흠모하는 시방의 중생들이 저의 참 생명 이름을 듣고 모든 공덕의 근본을 심어서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을 하면 저의 나라에 태어나게 하겠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나는 부처가 안 되겠어 이런 뜻입니다. 아까 우리는 보현행원품 수순분을 외우지 않았습니까? 수순을 한다는 것은, 따른다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 생명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뿌리를 어디에 박았다는 겁니까? 부처님의 무량 공덕에 뿌리를 박았다는 거예요. 뿌리가 시원치 않은 그 식물들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아시죠. 화분 하실 때 뿌리가 시원치 않으면 금방 뽑혀버립니다.
다들 아시는 학창 시절에 배운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첫 대목이 뭡니까?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아니 뮐세, 그 옛날부터 나오는 얘기입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요. 아무리 멋있어도 휙치면 그냥 부러져 나가버리죠. 말라비틀어지는 겁니다. 뿌리가 단단하면요. 잎이 나든 안 나든 걱정할 거 없습니다. 그건 시간의 차이일 뿐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 무한한 생명력을 항상 빨아들이고 그 주인공이라는. 우리 부처님을 한번 다시 한 번 모셔볼까요? 우리 여러분들을 이렇게 부처님을 모셨을 때 부처님이 하고 계시는 수인이 있죠. 수인은 시그널입니다. 이 시그널이 우리한테 법문하고 계신 거예요. 삼법인(三法印)이죠. 부처님이 삼법인을 모아 보면 뭐라고 그랬습니까? 삼법인에 대해서 절에 소풍 간 아이들이 제일 많이 하는 예기가 절에 가면 부처님은 돈 달라 그래, 심지어는 불교 몇 십 년 다녔다는 분도 그러더라고요. 절에 다니려면 돈 많이 들어 뭐 이런 분이 있더라고요.
다시 얘기하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 너의 진정한 소원이 뭐냐? 그 원은 이미 구족됐느니라, 나라고 하는 김 아무개나 박 아무개라는 상대적 존재의 소원이 아니에요. 진정한 소원이라면 진정한 소원은 어떠해야 됩니까? 절대적 소원이죠. 생사에 걸림 없는, 또 아름답고 추함에 걸림 없는, 모자라고 가득 참에 걸림 없는 완전한 성취를 갖는 원 위의 원일 겁니다. 나머지는 다 뭐예요? 욕심입니다. 아까 아귀에서 나오는 그 소원 그거는 나의 상대적 관점에서 나오는 소원에 불과하니까. 지금 우리는 완전히 갖춰진 원, 완전히 갖춰진 원 자리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죠. 그러니까 완전하게 갖춰진 원이라는 것을 스스로 뿌리박지 않고 뿌리는 거의 내려본 적도 없이 잠깐 보이는 거에 지금 사로잡혀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냥 세상에 넘치는 사람들이 병원의 병명으로 얘기하면 제가 봐서 소원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또 행복병 걸린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것도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죠. 소원 들어주겠다는 또 이 약장수들이 또 많아. 또 행복을 가르쳐준다는 그 엄청난 사람들이 또 시중에 넘칩니다. 내가 누구한테 행복을 줄 거야? 너 소원 여러 여러 비방이 있거든. 이런 장사하는 사람들이 넘치니 왜 수요가 있으니까. 아귀적 수요에는 아귀적인 공급이 있게 되는 겁니다.
수많은 희한한 종교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또는 요즘 심리 클리닉이나 이런 걸 통해서 사람들을 갖다가 또 요즘 널리 알려진 거, 가스라이팅 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모습은 뭐예요? 가스라이팅 될 준비가 돼 있죠? 그죠? 자기를 이런 가난한 사람, 모자란 사람, 중생살이하는 그 존재로만 자기를 제한을 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들은 말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을 살아가는 그 주인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오늘 특히 관세음보살을 모시면서 보니까 결국 알고 보니까 관세음보살은 아미타제다, 나 스스로 엄마 노릇할 때도 엄마라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사장 노릇할 때도 내가 사장이라는 관세음보살로 살아가겠다 이 말이에요. 이거에만 충실하면 되는 거죠. 잘하려고 못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완전한 생명 가치의 뿌리가 박힌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거죠. 이런 절대적인 소원에 우리가 주인공이 되었을 때, 소원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족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상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설법하고 계신 모든 내용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뭡니까? 부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그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는 분입니까? 우리를 향해서 너는 본래 무량 공덕의 주인공임을 일러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이 만난다는 구절이 경전마다 나옵니다. 이걸 불불상념(佛佛相念)이라 그럽니다. 부처는 부처끼리 연합니다. 지금 법당의 구도가 우리는 부처님을 향해서 부처님이시여!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여러분을 향해서 뭐라고 그러십니까? 여러분을 향해서. 나의 형제들이여. 부처님이시여!라고 똑같이 염(念)하십니다. 그 촉매를 뭐라고 그럽니까? 마하반야바라밀! 알고 보니까 그 마하반야바라밀에, 그 무한한 권능의 세계에서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현행원품 수순분 맨 끝에 보면 회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향이라는 말을 우리는 끝이다 생각을 하시는데, 끝이 아니죠. 안동에 가면 하회마을이 있습니다. 하회마을 가서 딱 가운데 앉아보시면 어떻습니까? 물이 돌아가죠. 물이 돈단 말이죠. 회향은 돌아가는 겁니다. 시작이에요. 그래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이에요. 부처님은 항상 회향하고 계세요. 누구에게? 우리에게! 부처님은 그 무량한 공덕을 우리에게 회향하고 계십니다. 그대여 중생살이하지 마라. 그대여 노릇에 빠지지 말아라. 부처님 생명으로 무량 공덕을 오로지 내어 써라. 아끼지 말고 내어 써라. 무한히 공급받으니까. 왜? 뿌리 박았으니까. 걱정하지 말라. 우리들이 이렇게 부처님의 회향의 당사자임을 알았을 때 어떻습니까? 안심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나를 위해 나에게 회향하고 계시네. 우리는 부처님의 회향에 참 멋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처님 생명입니다. 이걸 잊지 말자. 이렇게 살 때 어떠합니까?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삶들에서 혹시나 벌어지는 곤란과 액난이 있다고 합시다. 특히 권세음보살 보문품에 나오는 장면 중에는 우리에게 겪게 되는 많은 괴로움들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그 때 그 괴로움을 이기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괴롭다는 건 뭡니까? 우리가 수정(修正)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엄마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신입사원인 줄만 알았는데 그때마다 뭐예요? 내가 새로 태어나잖아요. 아이들이 성장통에 있듯이 그때 나오는 그런 괴로움이라는 현상이구나, 괴로움은 실체가 아니라 현상이라는 거, 곤란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곤란을 통해서 어떻게 돼요? 내 부처님 무량 공덕의 생명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딱쟁이 상처가 있어서 딱쟁이 있을 때 어떻습니까? 가렵죠. 간질 간질합니다. 그때 긁으면 상처나지 않습니까? 마치 그와 같아요. 나에게 곤란이 온다는 것, 어려움이 온다는 것, 또는 나를 향해서 삿대질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내가 성장하는 과정의 성장통이다. 오히려 선물입니다. 부처님께 회향받고 있는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부처님께 다시 회향해 드리죠. 내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볼 때 관세음보살님으로 산다라고 하는 우리는 부처님의 회향처임을 알았고, 부처님의 회양처로서 우리는 결국,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오로지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을 살아가는 주인공인 걸 이제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절인연 속에서 보면은 지금 연말입니다. 그렇죠 벌써 송년 시간을 갖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아무튼 이제 달력이 한 장 남았죠 그죠? 그러다 보면 여러 가지 상념에 젖으실 겁니다. 나는 무슨 일을 했지, 내가 이루는 건 뭐지, 그 안에서 치료의 약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고뇌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만히 있다 보면 생각나는 우리 절 집안에서 옛날부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니가 지금 한 해가 저물어 가는데 그동안에 너는 일년 밥값을 했는가? 흔히 탁자밥 내려서 먹는다 그러지 않습니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것을 우리가 내려서 자시지 않습니까? 내가 1년 동안 살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살려져 왔다는 것을 혹시나 잊어먹고 그것은 뒷자리에다 두고 내가 사느냐고 바쁘다 보니 그거 괴로웠던 거 아닐까요? 내라는 거 나 나 나 하면서 또 내 것이 어떠니라고 따지다 보니 살려지는 은혜를 우리는 배반했던 건 아닌가? 그러면 연말쯤 되면 스산해집니다. 쓸쓸해집니다. 뭔가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아 오늘 이 자리에서 앞으로 그래도 달력이 한 장 남았지 않습니까? 올해라고 하는 이런 단락 속에서 1년 밥값을 나는 어떻게 했던가? 지금이라도 그 살려줌의 은혜의 주인공이신 분들이 계십니다. 가장 가까운 분이 누구예요? 가족이겠죠, 또 직장 동료겠죠, 이웃이겠죠. 우리 동포들 아니지 더 나아가서는 세계인이 되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분들이 유정이든 무정이든 간에 모든 생명들께서 나를 살려 이름을 기억하든 말든 간에 감사해야 합니다.
1년 밥값의 결론은 감사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난 받은 게 없어, 넌 나한테 뭘 줬다고 그러냐 하고 계산하는 동안 우리 인생은 쫓기는 인생이 됩니다. 법우님들, 이랬을 때를 우리는보은(報恩)한다고 합니다. 보은한다. 우리가 은혜에 보답해야 될 거 아닙니까? 꼭 그 계산의 보답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회향처가 나라면 나 또한 부처님께 회향해야 될 거 아닙니까?안 늦었습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혹시 누군가한테 감사의 말씀을, 감사의 선물을 감사에 손잡는 것을 지금이라도 바로 합시다. 이것이 우리들이 지나온 살려 준 1년 동안의 은혜에 값하는 것이고, 이 값하는 것은 또 그분에게 은혜의 시발점이 돼서 그분을 살려주는 계기가 되고, 내가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때, 내가 만나는 사람,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 그리고 내가 가는 곳, 그것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거기에말로 불국토요. 또 마하반야밀로 울려 퍼지는 형제 자매들이 넘치는 곳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로부터. 나로부터지. 네가 은혜를 알라고 얘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은혜를 알았을 때 내가 만나는 모든 세상천지는 은혜로 충만할 겁니다.우리 법우님들 이렇게 은혜가 충만하신 도량에서 은혜로 가득 찬 그 얼굴과 그 말씀을 하시는 분들을 생각하니 이렇게 축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법우님들 참으로 축원드립니다. 은혜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청명 거사님 녹취)
♬ 찬탄곡 : 청산은 나를 보고(나옹선사 작사, 백영운 작곡,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
말없이 살라 하네 푸르른 저 산들은 티 없이 살라 하네 드높은 저 하늘은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우 우 우
발원문 낭독 : 송파 동대문구 명등 정혜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지난 10월 13일 불광법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때 불광법회 초대 회장(김경만 거사님)이셨던 한탑 스님에 대한 감사장을 아드님이신 여여 법사님께 드릴 계획이었습니다만 그 날 여여 법사님께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 오늘 감사장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여 법사님께서는 스님 영전에 올리겠다는 말씀을 하시니, 가슴 뭉클하며 스님 생전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릅니다.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2008년 불광 송년에 'Dancing Queen'에 맞추어 제작한 불광 각 부서별 율동 영상을 되돌려 스크린에 담아보았습니다.
다시 봐도 정말 멋지고 신나는 추억입니다
'2024년 불광 송년'에도 시류(時流) 따라 요즘 핫한 노래 '로제의 APT'에 맞추어 불광 형제들과 함께 다시 또 율동으로 신나는 영상을 제작하려고 합니다.
'2024년 불광 송년' 영상 제작에 한 분도 빠짐없이 참여하시길 바라봅니다.
법회가 끝나고 각 구, 법등끼리 모여 즐겁게 공양 및 담소를 하고 계신, 불광 법등 모임의 현장입니다.
법회를 마치고 귀가하시는 불광 형제들이 드시고 가실 수 있도록 보문부에서 관음재일에 올렸던 과일과 떡을 나누어 제공합니다.
법당 안내팀에서는 다음 법회에 만나 뵙기를 바라며 정중히 인사를 나눕니다. " 다음 주 12월 포살 법회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법회가 끝난 후 대웅전에서는 금강경 독송팀의 집전으로오늘도 여법하게 금강경 독송 기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법회후 1시 30분부터 보광당에서 불교기본교육이 진행되었습니다.
● 불교 교리 (연기설, 사성제, 팔정도) 진성 거사님
● 선의 세계 (간화선과 묵조선, 실참) 김홍근 교수님.
진지한 교육생들의 모습, 교육 봉사자 분들의 모습. 불광의 미래는 밝습니다.
지난주에도 조계사, 화광사, 봉은사, 동명사에서 1인 시위 정진을 하고 계신 불광 바라밀 형제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 측의 토요 법회 때 현관에 필요하신 분 가져가시도록 불광 문집도 제공하고 모든 분이 보도록 광덕문도 합의문 부착하였다.
불광 정상화의 염원이 담긴 불광 형제들의 굳건한 외침을, 스님들이시여, 토요 법회 형제들이시여 들어보소서!!
청정승을 모시고 재정 투명화를 이루어 반야바라밀 근본도량의 면모를 회복할 수 있는 그날까지 이 외침은 계속될 것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