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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마감하면서 남긴 글- 서산대사와 노무현 그리고 전두환
서산대사,노무현,안중근,이승만의 유언
장자,알렉산더대왕,석가모니의 유언
공자,네로황제, 루이14세,등영초의 유언
2022년은 20대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임명되는 해이다.
2021년(불기 2565년, 신축년)에는 아픔의 역사를 안고 13대 노태우대통령과 11,12대 전두환대통령이 사망한 해이다. 이들 모두 89세로 사망했으며 노태우대통령은 박정희대통령이 총격으로 사망한 10.26사태와 같은 날이며 전두환은 유배지 백담사(769일)로 가는 날 (11월 23일)사망했다. 백담사로의 유배는 전두환 세력에 의한 상왕정치가 종식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노태우의 유서와 같은 글은 아직 재생되고 있지 않지만 전두환의 유언으로는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 민정기 전 비서관의 말이다.
유서다운 유서,국민이 듣고 싶은 그 속에서 용서할 수도 있는 유언은 없었다는 점을 뒤로 하고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와 같은 편지와 조선시대 서산대사가 남긴 글을 쓸쓸함의 위안으로 삼고자 한다. 세계 유명인사들의 유언도 담았다.
휴정 서산대사의 영정 글귀
서산대사가 73세 되던 해(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평안도 의주로 피난한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했다. 이에 휴정은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모집했다.
평남 평원 법흥사(法興寺)에 1천5백여 명의 승군이 집결했고, 그의 제자 유정(惟政)도 1천여 명의 승군을 이끌고 관동 지방에서 와서 도총섭의 승군과 합세했다. 유정은 승군의 대장이 되어 일선에서 실전을 지휘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2년 후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85세 되던 해(1604년) 정월, 휴정은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자신의 영정 뒤에 다음과 같이 썼다.
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80년 후에는 내가 그이구나.
이 보게 친구
서산 대사 시-
살아 숨 쉬는게 무언가/숨 한번 들이 마시고/마신 숨 다시 쉬어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들이 마신 숨/내 쉬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은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은/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모두 다 내 것인 양/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저승 길 가는대는/티끝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법이려니/쓸 많큼 쓰고/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 쥔게 원 많큼 되거들랑/자네 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 주고/그들의 마음 밭에/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천국이 따로 없네,/극락이 따로 없네.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죽음이란 한 조각 뜬 주름 스러짐이니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불타는 화로 위에 한 점 눈(雪)이로다
논갈이 소가 들 위로 걸어가니/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는 구나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짐이라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다네.
- 서산 대사 시-
장자,알렉산더대왕,등영초,이승만의 유언
* 장자(莊子)(?~BC327)
“땅위에 놓아두면 까마귀밥이 될 것이요, 땅속에 묻히면 벌래의 밥이 될 것이어늘 어찌 그들의 밥을 빼앗어야 되겠는가”
*알렉산더대왕(BC356~BC323)
“내가 죽거든 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 등영초(鄧潁超)(1904.2.4.~1992.7.11.,주은래의 미망인)
“내가 죽으면 일체의 추모행사를 하지 말고 유해는 의학용으로 해부한 뒤 화장하여 중국의 산하에 뿌려 줄 것. 남편이 함께 살던 집은 절대로 기념관 따위로 만들지 말며, 국가소유인 이 집이 전 인민을 위한 용도로 쓰여야하며 자신과 남편의 친척들에게 어떤 특혜도 주어서는 안된다”
* 이승만(1875.3.26.~1965.7.19.)대통령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바라옵건데, 우리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우리민족이 굳세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옵소서“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아들 이인수씨에게 남김,화진포기념관)
* 석가모니(BC565~BC485)
“비구들이여, 그러면 내가 말하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괴법(壞法)이니라. 방탕하지 말고 정진 하여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 (당시 나이는 80세, 잡아함경(雜阿含經))
* 공자(BC552~BC409)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7일 후 공자는 숨을 거두었다.)
* 안중근(1879.9.2.~1910.3.26)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라, 우리들 이 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 공업,상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독립을 되찾으면 죽는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
순국직전에 남긴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네로황제(AD37.12.15=라티움 안티움~68.6.9=로마)
“내안의 위대한 예술가가 죽는 구나”(사형보다 자살을 택했다.)
* 윈스턴 처칠(1874.11.30=옥스포드셔 블렌업궁~1965.1.24=런던)
.“나는 나를 만드신 분과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 그 분이 나를 만나실 시련의 준비가 되 있느냐 없느냐는 전혀 상관없다.”
* 루이14세(1638.9.5=생제르 맹앙레~1715.9.1=베르사유)
“왜 우느냐? 넌 내가 영원히 살것이라고 생각했니? 나는 죽는 게 훨씬 어렵다고 생각했어.“
(루이14세는 죽기 전 5살의 증손자(루이 15세)에게 말 했다.)
* 조조(曺條)(155~220)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옛 법을 따를 수가 없다. 장례를 마치면 모두 상복을 벗어라. 장병들 중 변방을 지키는자들은 주둔지로 떠나지 말라. 각 관리는 각자 임무를 다하라. 평소에 입던 옷으로 염을 하고 금은진보를 같이 묻지 말라“ (낙양에서 병들어 사망,명나라 장부집(張溥輯)이 쓴 삼조걸(三曺傑)에 조조의 유언 3부를 수록)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서와 같은 편지
노무현(16대,2003.2-2008.2,경남김해,1946.8.6.-2009.5.23.혈액형 O형)
앞으로의 대한민국,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연일 제 가족과 측근들에 대한 의혹으로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몰랐다고, 모함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냐고 따져 묻지도 않겠습니다. '노무현'답게 하겠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누구든 벌을 받아야 하며, 전직 대통령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제 제가 할 선택으로 상처받을 이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어떤 꾸중과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 서운하고 노여운 마음, 부디 저의 마지막 진심을 담은 이 편지로 조금이라도 달래지기를 빕니다.
누군가 저의 인생을 '싸움'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정말로,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치인이 되기 전 인간 '노무현'의 삶도 그랬습니다.
그 최초의 상대는 '가난'이라는 녀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은 단지 불편한게 아니라, 사람을 비겁하고 치졸하게 만드는 고약한 놈이었습니다.
어쩌다 먹을거리가 하나 생기면, 형제들이 볼새라 저만의 비밀 장소에 감춰두고 먹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옳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나 배가 고파 나눠 먹을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집이 풍족하여, 화기애애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눠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저의 꿈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가난과의 긴 싸움을 끝냈을 때, 저는 어느새 처자식을 거느린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무 전문 변호사로 돈을 좀 만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제 아이들이 어린 날의 저처럼 먹을걸 숨겨두고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양보해라, 나눠 먹어라, 힘주어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려 요트도 타고 멋도 좀 부렸습니다.
안사람은 그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종종 추억하곤 합니다.
정말로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 행복은...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나이가 되도록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눈앞에서 나와 내 가족의 목을 죄는 가난과 싸우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몸은 풍요와 여유에 취해갔지만, 눈에는 자꾸 그런 것들이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곧, 세상엔 수없이 많은.. ‘노무현’들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죽어라 이 악물고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먹을걸 숨길 수 밖에 없는 건.. 예전의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럴까.
왜 나라는 성장하는데, 가난한 이들은 왜 학교에조차 갈수 없는 가난을 자식에게까지 대물림하게 되는가. 점차 사회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곡된 역사가, 도처에 널린 반칙과 특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늦은 깨달음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들을 외면하고, 저 혼자 소시민적 행복을 느끼며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저의 삶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인권변호사가 되었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청문회에 나가 이름도 얻었고,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늘 예전의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돈이 없고 힘이 없어 세상으로부터 매맞고 짓밟히는 이들 편에 서고자 했습니다. 그 눈물을 멈추게 할 힘이 내게 없다면, 최소한 내 손등으로 닦아주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대세’니 ‘주류’니 하는 것에 우루루 몰려갈 때, 원칙을 지키며 버티려 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비웃음 살때도, 그 바위가 잘못된 것이라면 내 몸이 박살나더라도 부딪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야 그 바위가 잘못되었다는 표시라도 나지 않겠습니까.
저를 굉장한 '싸움꾼'처럼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겁도 많고 무서운 것도 많은, 그런 보통 사람입니다.
'3당합당'에 반대하고 '재야의 길'을 선택하며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따논 당상이라던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도, 대통령 당선 확정을 통보받고도, 다리가 떨려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할만큼 두려웠습니다.
제가 대담한 강골이었다면 안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겁이 나도, 그런 선택들을 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힘 없다고 짓밟히지 않는 세상, 한번 가난하면 죽을 때까지 가난한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면 일어날 수 있는 세상, 명백한 부정에 타협하고 고개 숙여야 살아남는 세상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에 따라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세상에 내 아이들을 살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신 국민의 뜻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노무현은 짓밟혀도 됩니다. 무너져도 됩니다.
하지만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과,그들이 꾼 꿈은 짓밟히고 무너져선, 안 됩니다. 그 꿈은 이 나라의 미래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살아가야할 나라입니다.
언제까지 대결과 분열을 가르칠 것입니까.
언제까지 증오와 반목을 가르칠 것입니까.
언제까지 특권과 반칙을 가르칠 것입니까.
사실은 모두가 불안하고, 또 불행하지 않습니까.할아버지가 된지 오래지 않습니다. 자식들보다 더 귀엽습니다.
그애들이 자라나고 시집도 가는 걸 왜 보고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늘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해 왔습니다.
변호사 시절의 안락한 삶보다 눈 앞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국회의원 한번 더 하는 것보다.. 지역주의 보스정치에 저항하는 것이, 대통령 되는 것보다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2002년, 저와 여러분이 함께 꾸었던 꿈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키는 건.. 이 길 뿐입니다.
너무 슬퍼하거나 미안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의 운명입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작별인사 하겠습니다.
대통령이었음보다, 이 아름다운 나라의 국민이었음이 더 큰 영광이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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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국회의원도 아닌 종로에서 실업자 시절 충북 영동에 샘물공장인 장수천 사업에 대한 방향을 검토하던 시점이다.
당시 샘물협회 회장이던 설악산수 김노식회장(국회의원 역임)과 동행하거나 별도로 만났다. 샘물사업이 국내시판허용으로 전국의 땅을 가진 인사들은 샘물사업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이다. 정부 각료나 정치인들에게도 매력 있는 사업이었으며 정치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유망한 사업이기도 했다.
노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부산상고 동문, 정치적 인연을 맺은 풀무원등과 연계하면서 사업방향을 설계했고 공장 위치도 확보한 시기이다.
영동지역에 샘물공장 터를 잡고 기계설비는 외환리스로 자금을 마련하여 설비하고 판매는 풀무원 유통망을 통해 시판한다는 전략이었다.
환경국제전략연구소 김동환박사는 노무현 전의원에게(당시)“ 외환리스로 공장은 설립한다지만 영업비며 대리점마케팅에 소요되는 자금은 회수 할 수 없는 비용이다. 샘물시장 개방으로 대기업들이 대리점들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영업력을 확장하고 있다. 기계설비는 그나마 시설물로 남지만 마케팅비는 회수될 수 없는 자금으로 공장 투자만큼 소요된다.(30억원 예상)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본다.”라고 직언했다.
그러나 샘물 사업은 시작됐고 풀무원과의 약속한 날짜에 맞춰 생산하려 했으나 환경영향평가가 늦어져 공장허가가 제 때에 나오지 않았으며 때늦은 장마비로 공장이 침수까지 되어 납품일자를 지키지 못해 풀무원과도 거래가 성사되지 못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여 환경영향평가를 담당했던 금강유역환경청은 페쇄해야 한다는 강력한 지시가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환경국제전략연구소 소장 김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