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曉峰) 스님 법어] 9.
1949년(己丑年) 5월 15일
상당법어-해인사 가야총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옛 사람의 말에
"신령스런 광명이 어두어 지지 않아 만고에 빛난다.
[神光不昧 萬古徽猷 신광불매 만고휘유].
이 문 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入此門內 莫存知解 입차문내 막존지해] "하였으니,
알음알이는 모두 정(情)에 속하고
일념(一念)은 곧 도(道)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道)라는 한 글자를
나[曉峰 효봉]는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산승(山僧)이 오늘
특히 대중을 위해 문[八字門]을 활짝 열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리니,
삼세 부처님[三世諸佛]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으며,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 선지식(天下善知識)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고, 산승도 또한 이 문으로 드나든다.
그러므로 이 모임의 대중들도
이 문으로 드나들려거든 내 뒤를 따라오라.
옛날 마조(馬祖)스님이 일원상(一圓相)을 그려 놓고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않아도 친다 하였다.
그러나 오늘 산승은 활짝 문을 열어 놓았으나
들어가도 치지 않고 들어가지 않아도 치지 않는다.
마조스님의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않아도 치는 것과,
이 산승이 들어가도 치지 않고
들어가지 않아도 치지 않는 것과
그 거리는 얼마나 되는고?
이 산승의 열어 놓은 팔자문(八字門)은 말할 것 없거니와
마조스님이 그런 일원상(一圓相)은 지금도 멸하지 않고
원만한 그대로 있으니 대중은 그 일원상을 보는가?
만일 그 원상을 본다면 그것은 곧 마조를 보는 것이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불자(佛子)가 이런 경지에
머무르는 것은 곧 부처님의 수용(受用)이 되느니라.
만일 언제나 그 가운데 머물면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친히 가고 친히 오면서,
각자의 한 가닥 신령스런 광명이
고금(古今)을 꿰뚫고 천지를 다 덮어
어떤 물건도 장애되는 것이 없고
어떤 일도 상대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당장에 그런 줄을 믿으면
그것을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온몸의 소유가 될 것이니
어찌 분외(分外)의 일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이른바 소를 타고 소를 찾으며
불을 들고 불을 찾는 것이니 대중은 아는가?
한참 있다가 이르시기를,
만 길 벼랑에 몸을 던져버리니
바로 옛날의 그 사람이다.
만일 그것을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본래 청정한 것이거늘
무엇하러 문자(文字)와 언설(言說)을 빌릴 것인가.
다만 어떤 경계에도 마음이 없으면
그는 곧 무루지(無漏智)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이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일체의 언설 등 유위법(有爲法)에 집착하지 않으면
입을 열고 눈을 깜박이는 것이
모두 무루법(無漏法)이다.
슬프다. 오늘날 말세에
이른바 선(禪)을 공부한다는 무리들은
모든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면서
왜 자신의 그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지 못하는가,
생사(生死)를 벗어나려 한다면
그 마음이 마른 나무나 돌멩이와 같고
불 꺼진 찬 재와 같아야
비로소 조금 상응(相應)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다른 날 저 염라 늙은이의
철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가사(袈裟)를 입고서도
사람의 몸을 잃는다면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게송을 읊으시되,
一條活路爲君開 (일조활로위군개)하노니
速速遲遲任往來 (속속누누임왕래)어다
日暮若無捿泊處 (일모약무서박처)어든
忽逢明月出塵埃 (홀봉명월출진애)니라.
한 가닥 활로(活路)를 그대 위해 열었나니
더디면 더딘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마음대로 오가거라
해 저물어 혹 머무를 곳 없어지면
문득 밝은 달을 만나 티끌 속을 벗어나리.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한 번
울리고 자리에서 내려오시다.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