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산, 풍차가 있는 눈 덮인 겨울산의 먼 풍경에 반하다
1. 일자: 2023. 2. 4 (토)
2. 산: 태기산(1258m)
3. 행로와 시간
[양구두미재(09:25) ~ 바람개비동산(10:06) ~ 태기분교터(10:22) ~ 태기산 전망대(10:50) ~ 군부대/정상(11:05) ~ (점심) ~ 양두구미재(12:50) / 9.94km]
< 태기산 산행을 준비하며 >
모처럼 아름다운산하를 따라 산에 간다. 태기산이다.
산의 대강을 살핀다. 태기산은 강원도 횡성과 평창의 경계를 이루는 높이 1258m의 흙산이다. 진한의 태기왕이 신라군에게 쫓겨 성을 쌓고 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정상에는 길이 1km의 산성과 산성비가 있고 자장율사가 창건한 봉복사가 있다. 산성 주변에는 허물어진 성벽과 집터, 샘터가 남아 있으며, 산 아래 봉평면에는 이효석 생가가 있다.
월간 산 2019년 기사와 만화 그림을 근거로 갈 길을 그려본다. 미투리산악회 최대장님의 수염은 언제 보아도 멋지다. 산행은 높이 1000미터 어름인 양구두미재에서 시작한다. 들머리부터 고도를 거저 먹은 기분이다. 길은 너른 도로가 대세다. 등로에 풍력발전기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1km쯤 오르면 1142봉을 지나고, 1km를 더 가면 정상 인근이다. 정상은 군부대 탓에 오르지 못하고, 정상석이 있는 전망대가 정상 역할을 한다.
하산 길에 들어서 태기분교터를 지나 태기산성까지는 5km쯤 가야 한다. 고도는 800미터 안밖이다. 이후 5km를 더 가 신대리로 하산한다. 앞서 간 이의 기록을 보니 12km, 4시간을 걸었으며 누적고도는 400m가 되지 않는다. 높은 데서 시작해서 고도 부담이 적고 산세도 그리 사납지 않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도와 고됨에 대한 부담이 줄어 든다.
< 희망사항 >
강원도 1200미터급 산을 간다. 비고 250미터만 이겨내면 정상이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고산에서 설경을 즐길 수 있다. 노력에 비해 얻는 게 많아 좋지만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도 귀퉁이에 있다.
아산 카페에 올라온 태기산의 설경이 근사하다. 눈과 풍력발전기는 썩 잘 어울리는 단짝이다. 사진에서 흉물스러운 전봇대와 전선을 지워버리고 싶지만 이 역시 이곳의 풍경을 구성하는 주인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풍차에서 생산한 전기를 옮겨야 쓰임이 생기지 않겠는가.
눈 많은 올겨울 제대로 된 설경을 보지 못했다. 아산에서 고산의 설경을 마음껏 즐기고 근사한 사진 몇 장도 얻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다를 게다.)
< 횡성 가는 길에 >
아침 일찍 해안선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산방기간이라 태기산이 출입이 금지될 수 있음을 알리는 긴 글이 떠 있다. 대안으로 계방산을 제시한다. ‘고민 중에 지금이라도 상황을 알려 드리는’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며, 원하면 위약금 없이 비용을 적립하겠다는 말이 써 있다. 순간, 누군가 밤새 고민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 일 인 냥 느껴졌다. 어디든 가겠다는 짧은 답을 하고 집을 나선다.
사당에서 버스에 오른다. 평소 사진으로만 대했던 분들과 대면하고 가벼운 눈인사를 한다. 늘 새로운 만남은 긴장되지만 설레기도 한다.
휴게소에서 쉬고 갔는데도 들머리에 서니 시간은 9시 20분을 막 지난다. 무척 이른 행보다.
< 양두두미재 ~ 태기전망대 ~ 양두구미재 >
해발 980미터 고개마루에서 등산은 시작된다. 널찍한 도로가 길게 나 있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풍차와 전봇대가 이어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길가에는 눈이 꽤 쌓여 있다. 다행이다. 어제 조문을 다녀올 때 풍기에서 올려다 본 소백산에는 눈이 없어 걱정했는데, 강원도 고산은 다르다.
풍차가 쐬쐬하며 돌아가는 첫 전망대 위에 선다.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산맥들의 자태가 넓고도 아아(峨峨)하다. 얼마만에 보는 확 트인 풍경이란 말인가. 눈을 머리에 인 겨울 산의 골격미에 반해 한참을 바라본다. 길을 나서길 잘 했다.
바람개비 여럿이 서 있는 테마공원 같은 곳에 올라서니 태기산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군부대의 철탑과 막사가 햇살을 받고 서 있다. 이 역시 하늘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시원하다. 당초 이곳에서 정상 부근으로 치고 올라 전망대로 내려올 것이라 여겼는데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우회하여 전망대로 오를 모양이다.
길고 구불거리는 도로를 한참이나 내려선다. 등로는 단순했지만 먼 풍경이 시원하여 걸을 만하다. 발전기를 관리하는 시설들을 지나 태기산 생태탐방로를 알리는 커다란 조형물과 만난다. 부근이 태기초교터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이곳에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정상을 거쳐 이곳에서 태기산성으로 하산했을 것이다.
응달에는 눈이 녹지 않았다. 눈을 밟으며 걷는다. 발 밑 감촉과 소리가 참 좋다. 긴 오르막을 기쁜 마음으로 오른다. 길가에 우리 말고도 트레킹을 온 이들이 많다. 플라스틱 눈썰매를 가지고 온 이도 여럿 있다. 예상 밖이다. 그만큼 이곳이 걷기에 좋다는 반증이다.
멀리 풍력발전기가 줄 지어 서 있는 광경이 조망되는 언덕에 선다. 눈 맛이 최고다. 그 중심에는 흰 풍차가 있다. 풍차 뒤 멀리 마을도 조망된다. 한가로운 맑은 겨울날, 고산에서의 정취는 시원 그 자체다.
10시 50분 정상석이 서 있는 전망대에 선다. 군부대가 서 있는 우듬지 대신 정상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해안선님이 인증 샷을 찍어 준다. 긴 줄이 이어진다. 이어 10분 거리인 정상 인근으로 이동했다. 정상 주변을 서성인다. 고도를 오를수록 발 아래 풍경은 더 화려해지고 더 멀리까지 조망된다. 이곳 풍경의 주인 역시 풍차와 파노라마 치는 산들의 출렁거림이다. 화려한 조망을 원 없이 보았다.
길을 돌려 내려온다. 전망대 밑 풍차 옆에 식당이 차려진다. 겨울 볕이 참 좋았다.
하산 길에 들어선다. 일행들은 흩어져 저마다의 걸음으로 왔던 길을 내려선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먼 산을 보니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았다. 어느 산악인의 ‘강은 시간(의 흐름)이고 산은 시간의 멈춤이다’라 말을 현장에서 또 실감한다. 햇살 좋은 겨울날, 강원도 어느 높은 설산에 올라 느끼는 서정은 ‘멈춤’이다.
4km 넘는 거리를 1시간 만에 내려온 것 같다. 아침과는 다르게 차와 사람들로 양구두미재는 분주하다. 서울행 차는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출발한다. 내가 기억하기론 가장 이른 시간에 귀경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쁘지 않다.
< 에필로그 >
산에 오르고 걷는 건, 내게 놀이이다. 누군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답으로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를 제시했다. 놀기에 대해서는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될 범위 안에만 있다면 밝은 마음으로 당당하게 즐기는 게 좋다고 한다. 난 오늘 산에서 재미나게 놀았다. 정상에 못 올라도, 갔던 길을 다시 걸어도 평소와 다르게 기분이 괜찮았다. 눈 덮인 먼 풍경을 원 없이 봐서 그런가 보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간 막 넘는다. 씻고 차 한 잔 앞에 두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큰 화면으로 사진을 본다. 지우고 색 보정하고 남은 몇 장을 다시 본다. 산에서의 내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흐뭇하다. 작은 성취감에 젖는다.
산행을 다녀와서 후기를 쓰는 내내 어제 길에서의 나를 만나고 태기산을 다시 오른다. 준비하고, 행하고, 훗날을 위하여 그리고 함께한 이들과 나누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내겐 언제나 행복한 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