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촌(栗村)마을
율촌 마을 유래
율촌은 소골(쇠골)로 불리다가 밤까실에서 율촌으로 변천되었다
마을의 형국은 밤송이 까진 형국으로 소쿠리 형국이라 한다.
조선조 명종때 영월신씨 장사랑 벼슬을 지넨 장몰룡이 영광에서 들어와 마을 터를 이루고
지형이 소쿠리와 같다하여 쇠골(쇠콜)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다가 주위에 밤나무가 많고
밤송이가 벌어져 까지는 형상이라하여 오랫동안 밤까실이라 불렀다.
1750년경 진주정씨가 거주하면서 양성씨가 집성촌으로 세거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율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부자 정계원 참봉이 대산면 중앙인 율촌리 지역에 세운 보통학교 설립부지 기증과
고창고보설립을 지원하여 신교육 발전에 공헌하였고 인재양성에 전력하는등
진주정씨 가문에서 만석꾼 참봉과 3~4대 국회위원 정세환을 배출했다.
현제는 주거의 변화로 여러성씨가 살고있다
마을 입구 등성이에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며 자연취락으로는 율촌과 성학이 있다
마을 북쪽 밭에 진주정씨 묘 4기가 정상부에 위치한다
유물은 경질토기편, 연질토기편 기와, 자기편 등이 수습되었으나
유규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진주정씨, 영월신씨를 주성으로 남양방씨, 김해김씨, 화순오씨, 광산김씨, 경주김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하음봉씨 재실이 있으며 구모정 주위에 150여년을 추정되는 당산나무(느티나무)가 있다
율촌의 자연환경
율촌마을은 시등(58.3m)에서 발달한 능선이 북서쪽으로 발달하다가 대산천에 멈춘 끝자락에 위치한다.
마을의 주산은 남쪽에 있으며 약 45m의 나지막한 구릉이나 개간되고 마을뒤로 숲을 조성하여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주산에서 발달한 좌청룡은 마을의 서쪽에 있으며 남쪽에서 발달하다가 북서쪽으로 발달하다가
대산천에서 멈추었다.
율촌마을의 좌청룡과 우백호는 주위 40m 나지막한 구릉이 감사고 있다.
마을은 북서쪽으로 열려있는 형국이나 마을 앞 안산(약40m)의 구릉이 발달하여 북서풍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수계는 마을 앞의 골을 따라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대산천에 흡수한다
마을의 내수구는 서부 좌청룡의 끝자락이며 외수구는 외백호의 끝자락이다.
마을의 좌청룡 사면에 있는 가옥은 동향이 많고 우백호 사면에 있는 가옥은 서향이 많다
성학(聖學)마을
성학마을 유래
대산초등학교 북쪽에 위치한 성학마을은 조선조 철종 말에 광산탁씨가 마을 터를 이루고 성학이라 불렀다.
1923년 마을 남쪽에 대산 보통학교가 개교했는데, 마을이 학교터가 된다는 것을 예견한
선현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성학마을에는 작은뜸 잿등을 비롯하여 10가구가 산재하여 살고 있다
성학의 자연환경
성학마을은 시등에서 북서쪽으로 발달한 능선의 북쪽에 위치한다.
마을은 대산 초교가 위치한 능선의 북쪽골 (순천골)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주산은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40m의 나지막한 구릉이나 지금은 개간되어 밭으로 경작되고
마을 경관은 모두 파괴된 상태이다.
마을 끝자락의 능선끝에 광산탁씨 묘가 위치한다.
수계는 마을 앞의 순천골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대산천에 합수한다.
마을의 수구는 북쪽의 좌청룡의 끝자락이다
마을의 가옥 입지는 서쪽 사면에 있어 대부분 동향이다
신기(新基)마을
신기마을 유래
신기마을은 예전에는 큰 사찰이 있어 대절신기라 불렀다.
그러다가 1740년 (영조 16년) 광산탁씨 원진이 익산에서 수도승으로
큰 절의 도량을 찾아 영광을 거쳐 대절신기에 와서 머물다가 절에 큰병이 와서 그 때는
의술이 없어 절에 불을 질었다.
그리고 전부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려는 날 밤, 신령의 정착현몽 교시를 받고 깨어보니
산지가 전답으로 변하고 샘이 솟아나는 기산천외한 현상이 일었다.
이에 원진공이 감복하여 정착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큰 사찰이 있었다는 절은 옛날 어느 때인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돌림병이 창궐하자 스님들이 떠나버려 없어지고 마을 부근에 좌불상과 옛 기와편이 출토되어
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마을에는 신흥교회가 있으며 광산탁씨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신기마을은 키(치)의 형국으로 마을 진입로는 키의 시작부분이고 쪽샘(속샘), 신기제는
하단부로 마을을 감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쪽샘의 물이 마라지 않고 수량이 많아 농업 용수로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한다.
축조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제 강점기 때 쪽샘 하단부인 쪽샘 주변에 저수지를 막고
나무를 심어야 곡식의 허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저수지를 신기마을의 농업용수로 사용하면서 신기마을이 부촌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예날에는 신기마을 앞으로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신흥오로 가는 뱀다리 주병네 1960년대초 탁명환의 논에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여울을 파는데 , 그 때 목선이 원형에 가깝게 발견되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대산 100년사 책에는 기록되지는 아니하였지만
내(탁경득)가 듣기로는 모정에서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중에 이상범이 논을 합배미하다가
배 밑짝 한쪽을 발견하였다며 여기까지 바닷물이 예전에는 들어왔는가보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마을의 공동 영천수는 신기마을의 실화가 전해오며 큰 사찰이 있을 때
수도승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우물 주변 논에 수랑이 있는데 수랑에서도 항상 물이 솟아 오른다.
내(탁경득)가 듣기로는 우물 청소를 하려고 물을 퍼내면 당골마을 우물이 작아진다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즉 당골마을과 연결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광장에 탁재신부인 죽산박 {竹山朴氏(朴換)}씨 쌍효비, 효열부남원채씨기적비, 경로당창건기념비.
신기모정기념비 외 기타 기념비 두개가 있다.
신기의 자연환경
신기마을 산계는 시등에서 북쪽으로 발달한 능선이 대산초등학교를 지나 북쪽으로 발달한
능선이 대산천에서 멈추었다.
마을은 대산천에서 멈춘 산계가 마을뒤 논사능골의 능에서 갈라지는데 그 갈라진
능선사이의 골에 있다.
마을의 주산은 남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5m의 나지막한 구릉이나
지금은 모두 개간되고 마을 주위의 좌청룡과 우백호는 모두 개간되어 옛 경관은 모두 잃어버렸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열린 형국이었는데 마을의 풍수형국이 키(치)의 형국이기 때문에
전면을 막아야 곡식이 빠지지 않는다 하여 저수지를 축조하고 제방에 소나물 심었으나
소나무가 성장하면서 소나무 뿌리 사이로 물이 빠져 나가 소나무를 베어 버렸다 한다.
수계는 마을 앞의 골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신기제 앞에서 북쪽으로 흘러
대산천에 합수한다.
마을의 수구는 서쪽 좌청룡의 끝자락이다
마을의 좌청룡 사면에 있는 가옥은 동향이 많고 우백호 사면에 있는 가옥은 서향이 많으며
북쪽으로 부속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