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저녁의 안쪽
어둠의 기척으로 등불은 내걸린다
응집된 소리들과 분할된 소리들이
나직히 속살거리며 무게를 더는 시간
시선은 바깥으로 마중을 나간다
바람의 발자국을 경청하는 들녘에
나른한 젖은 노동을 끌고 오는 맨발들
더불어 걸어야할 시간들을 보았을까
어둠이 짙을수록 바람으로 흔들려도
서로를 다독거리며 지친 몸을 세운다
빨래터*
청명한 냇가에서 긴 머리 풀어 감고
머리카락 갈래지어 단단하게 매듭질 때
젖가슴 더듬어 찾는 어린아이 달래가며
가난한 과부의 생 꿋꿋하게 건너는데
서러운 시간인 듯 두드리는 방망이는
빨래 속 더러움들을 벼리고 벼리다가
탁탁, 튕겨나는 소리마다 비루**(飛陋)풀어도
춘복 짓고 하복지어 빨래하기 어렵더라***
힘겨운 시집살이를 서로에게 위로하니
슬픔도 눈물인 양 모짝모짝 말라가리
첩첩이 쌓인 일들 직수굿 풀다보면
비로소 서러운 매듭 속절없이 풀어지리
*빨래터 : 김홍도 풍속화첩 중 하나
**비루(飛陋) : 더러움을 날아가게 한다는 뜻. 직물이나 얼굴 씻을 때 팥, 녹두등을 갈아 씀
***조선시대 내방가사 중 여자 탄식가
모월모일某月某日
어둠비늘 벗기는 새벽빛 기척 속에
홀로 핀 해당화는 허공에 태胎를 묻고
비워도 차오르는 빛
애틋하게 뒤척인다
속세의 설화인 양 풀어지는 강물따라
갈대들의 마른 꿈들 서걱이며 흔들리고
바람의 발자국마다
인연의 끈 묶어지니
이윽고 순응하며 살아온 격정의 날들
서슬 퍼런 시름 딛고 일어서서 수런대며
힘겨운 세상 징검돌
가뿐하게 넘고 있다
박복영
- 62년 전북 군산 출생. 1997년 월간문학 시 당선. 2001년 방송대 문학상 시 당선.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당선. 2014년 천강 문학상 시조대상. 시집 “눈물의 멀미”외
제6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셔코항에서
깊이를 알 수 없이 던진 돌 빠져들고
수평선 너머 문득 배 한 척 가뭇없다
우콰이! 푸른 목청이 이방인의 귀를 끈다
함지마다 숨을 쉬는 비릿한 짐승처럼
몸으로 부대끼며 비린내로 살아있는
밑바닥 꿈틀거리는 비늘 달린 사람들
다음 생 몸을 바꿔 목어로 태어날까
몸으로 파닥이는 여기가 본 자리다
생물의 몸내가 물씬 항구 가득 퍼진다
*셔코항: 중국 심천 남쪽에 있는 항구
*우콰이: 위엔화 5원
토란잎을 듣다
뒤뜰의 텃밭에서 빗소리가 돋아난다
귀 활짝 열고 보니 빗소리만이 아닌
토란잎 비를 맞이해 제 몸 여는 소리다
설렘을 함초롬히 둥글게 빚은 소리
모였다 흩어지고 하나로 다시 모여
새뜻한 여름 첫 자락 은구슬로 빛난다
비 멎고 날빛 속에 가만가만 뒤척이다
슬픔인 듯 기쁨인 듯 살갑게 맺어진 것
한순간 다 내려놓고 맑게 씻긴 고요다
가을 끝에 이르다
제 빛을 한껏 내어 막바지 피는 꽃들
목숨의 화사한 끝 덧없음이 눈부시어
한 나절 그저 한 바탕 꿈이어도 좋을 듯
사뿐히 나는 나비 슬픔이 없는 걸까
몸을 가진 것들은 다 아픈 것이라고
서로를 가슴에 들여 뒤척이는 가을꽃
기우는 가을 한 쪽 온갖 꽃이 진 뒤에야
고요 속 서리꽃이 써늘히 피어나고
먼 곳이 한결 가까이 맑은 눈에 담기다
이윤훈
- 1960년 경기도 평택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현 중국 광동성 동관 한림학교 국제부 근무
제6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배웅
아버지 묻고 내려가는데 헛기침 들린다
돌아보니 노인 하나 웅크리고 앉아서
맨살의 마른 알몸을 붉은 노을에 씻고 있다
임종을 혼자 지켰다는 듯 귀신새가 운다
유언을 토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쏟아낸 암 덩어리 움켜쥐고 한 사내 저물었다
저 북쪽 어딘가에서 봄꽃이 다시 피고
30대의 모습 그대로 어머니가 손짓한다
먼 곳이 반세기 만에 가까운 곳 되려한다
못난 아들 발걸음이 팍팍하게 무너진다
아는지 모르는지 들꽃의 처연이 깊다
그 어떤 설움으로도 배웅이 될 수 없는데,
응달의 법칙
눅눅한 당신이 모퉁이를 돌아나가자
급하게 생긴 균열 구름이 덮고 지난다
그림자 끝나는 곳에 낯선 풍경 세워지고
목구멍 아래 눌려있던 울음이 꿈틀거린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모서리가
남몰래 자지러진다 옆구리가 서럽다
한발 옮기자 축축한 돌멩이가 밟힌다
두렵지 않다고 주문을 외워야 한다
양달과 응달의 경계가 짧고 강렬하다
어두운 곳에 처음 들어서면 까마득하다
그러다 아린 그늘이 몸 안에 스며들면
우둔한 내가 보인다 무엇도 될 수 없는,
일정하게 좁혀왔다가 일정하게 늘어나는 건
그늘만은 아니라 슬픔의 총량이다
오늘은 응달이 국경이다 발목이 자꾸 저린다
증언
6인실 안쪽 침대 위에 리모콘이 앉아 있다
채널을 두고 싸우던 최씨는 오지 않고
김씨는 끝끝내 울음을 토하고 말았다
9시 뉴스와 드라마 사이 다툼이 흘렀고
가족도 하나 없이 핀잔으로 떠돌던
고집의 주파수들이 그들은 맞지 않았다
먼저 가면 어떡해! 이 썩을 영감탱이
위를 70% 잘라내고도 의기가 양양했는데
울분이 급성으로 번져 넘치고 흘렀다
조경선
- 1961년3월15일 경기 고양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석사 졸업 2012년 『포엠포엠』 신인상으로 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