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수출차, 전북 정읍의 천원차(川原茶) 재발견.
1. 머리말
1945년 광복을 맞기 직전인 1923~1945년 사이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일대에서 생산되었던 천원차(川原茶)가 있었다.
해방되기 직전까지 일본 오사카에 전량 수출했던 천원차는 일본인 오가와(小川)씨가 1913년부터 개간을 시작한 뒤 1923년부터 생산을 시작했고 무척 많은 인기가 있던 차였다.
아직도 천원리 인근 사람들은 천원차의 명성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 차가 우리나라 제다의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제다의 시작이었던 오가와씨는 우리나라 제다를 새롭게 써야할 중요한 인물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최근 5년사이 천원차가 보고된 뒤 속속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 뒤 천원차의 차통 포장지가 발견되었고 연이어 1928년~1929년 사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천원차밭의 전경 엽서가 공개되는 등 천원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에 정읍시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4백㏊의 녹차단지를 조성하여 차 산업을 일으켜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처럼 정읍차문화가 다시 떠오르는 까닭은 80년 전 천원차를 재배한 뒤 그 차가 일본에 수출했음을 내세워 차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1923년~1945년 사이 정읍 입암면 천원리 일대에서 천원차를 생산하면서 일본에 수출했던 80년전으로 돌아가 천원차를 새롭게 조명해본다.
2. 19세기 치열한 제다 시작
조선에 없어진 말차가 일본다도의 주류가 되고 조선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막사발이 일본국보가 된 사실만 보더라도 조선 사람들의 정신 속에 뚜렷이 차 문화의 향기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일본인들에 의한 일제 강점기 (1910년~1945년) 36년간 식민통치를 당하였고 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 땅 남녘에 차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들은 아암 혜장과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가 일으킨 다도의 맥을 일본류로 부흥시키려는 의도에서 차 문화에 눈을 돌린 것 같다.
일본이 조선에 차밭을 일군 결정적 계기로 중일전쟁당시 중국의 차를 소련의 비행기와 교환하는 것을 보고 조선의 차 또한 상품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견해에 따라 차가 많이 나는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조사한 정읍의 두승산, 입암산 등 정읍일대에 걸쳐 차밭을 일구어 차를 생산해냈다.
그렇게 된 동기는 1913년 전남도청의 산림기사들은 전북 정읍에 야생차가 무성한 것을 보고 토질과 기후가 적합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래서 일본인 오가와씨가 9정보(1정보는 3000평)의 차나무를 재배하게 되었다.
※ 천원 신면리 주민 유윤상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당시 한구역이 150마지기~200마지기(7,500~10,000평) 정도면적이었다고 한다. 6개의 구역(금촌, 창전, 대평농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넓은 면적에 차를 심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때당시 일본인 시리끼씨(우리나라이름으로 근태라 부름)등도 차밭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채록자 정읍내장산제다원 박동규)
3. 천원차의 소사(小史)
1945년 무렵 대상그룹의 전신인 미원그룹의 회장 임대홍(정읍 소성 출신)씨는 정읍시 입암면 하부리 일대에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이 귀국하며 버리고 간 차밭을 인수, 과수원으로 개간했다. 당시 차 산업이 전망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만약 그 시절 임대홍씨가 조미료 기술을 습득하지 않고 인수한 천원리와 하부리 차밭을 계속 경영하여 차를 생산하였다면 한국 차 산업의 역사가 바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태평양이 차 산업을 시작한 것은 1970년경이고 설록차라는 브랜드로 한국 차 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천원차의 제다법은 오룡차의 제조법과 유사하였다. 찻잎을 따서 유념한 다음 10시간 정도 온돌방에서 발효시킨 후 다시 볶은 후 말려 차약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연구 결과 천원차는 , 지금 우리가 손쉽게 구해 80도의 물로 우려내 마시는 녹차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의 녹차는 그 당시는 구하기 힘든 고급차였고 100도의 물에 우려먹는 녹차를 ‘오차’라 불렀다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당시 이 지역에 전해온 차민요가 있다.
오월이라 단오날에 / 냇가에 가면 /
겨울 잠깐 물소리가 / 봄소식에 웃음소리 /
붉게타던 작설나무 / 새싹잎이 완연하다 /
성님성님 사촌성님 / 배양냇가 물을 길러 /
진나락독 물채우고 / 지천골로 가기전에 /
차약이나 한사발하세 /
일본놈은 오차먹고 / 조선놈은 술마시고 /
양반댁은 물마시고 / 농사꾼은 일좀하고 /
우리애기 엄마젖 먹으니 / 에헤야 에헤야 상사디이여 /
(진주산업대 김기원교수 1967년 현지 채록)
민요에서도 전하는 바와 같이 당시 천원차가 민가에 골고루 전해져 왔으나 역사 속에 소멸되어 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천원차를 취재하면서 당시 일본인들이 심었던 차나무 중에서 비탈에 있는 두 그루를 확인하고서야 그 역사를 실감 할 수 있었다.
4. 우리차 제다가 시작된 땅 정읍
광복직전까지 생산되었던 천원차는 우리차의 수출에 효시를 이룬 역사적 사건이었다.
천원리 차밭정경을 담은 엽서가 일본에서 발행되었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엽서좌측에 재배반별(栽培反別) 3정 7반(三町七反) 연산제다(年産製茶) 7,000근이라고 적고있다.
위치는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立岩面) 천원리(川原里) 호남선(湖南線) 정읍면 남방 이리 십정여(南方 二里 十町餘)라고 설명을 붙였다.
발행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28년~1929년경에 발행된 것 같다.
그 처럼 당시 전북 정읍의 차밭은 일본의 엽서에 오를 정도로 명소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몇 해 전 개척기에 있는 정읍차의 역사가 박윤수 선생이 소장했던 천원차 포장지가 다시 발견되면서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 전북 정읍군의 다원인 천원원 엽서 사진)
소장자 : 최성림씨 (파란차사랑 회원)
5. 맺는말
지금까지 광복직전까지 전북 정읍의 입암면 천원리에서 생산되었던 천원차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정읍시도 천원차를 복원 발전시킨다면 정읍차의 부활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제다의 종가로써 면면이 이어가길 바라며, 우리 발효차의 효시를 이룬 천원차가 역사속에 뚜렸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우리차의 자존심과 동시에 정읍차의 새로운 발견과 발전, 비전이 아닐 수 없다.
참조 : 월간잡지 (차의 세계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