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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 김순영(시인, 충북작가회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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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417-????...”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어이쿠 깜짝이야. 이 뭔 소리여?”
판소리 춘향가중 사랑가 한대목이 한참 흘러나온 뒤에야 조동언 선생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가를 듣다보면 전화 거는 쪽에서는 마음이 푸근해진다. 민예총 행사장에서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이 또한 조동언 선생이다. 구수한 말씨! 경상도 사나이가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가면 참으로 숭늉냄새가 난다. 4년 전인가? 충북-제주 문화예술교류 때 삼방산 아래 바닷가에서 키 큰 사람들 틈에 끼어 매달리듯 박은 사진은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웃음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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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언 선생을 만나러 청주로 향하는 길목엔 퇴근을 서두르는 차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초록초록 봄비가 차창을 두드렸다. 청주백화점 앞 골목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널목을 건너는데 전화가 삐리릭 울렸다. 어디쯤 오시냐고....... 골목 앞에 나와 기다리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온다는 기별을 받고 마실 것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과일을 사러 나왔노라고 말하는 조동언 선생의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에 봄살을 이야기 하듯 새빨간 딸기가 옹기종기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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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셨어요?”
“넵, 선생님두요?”
“그럼요.”
국악원 문을 들어서면서 뭔가 달라진 모습이다.
“작년에 건물 새로 지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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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구나.
몇 년 사이 못 찾았더니 말끔하게 새로 지어진 건물 3층에 국악원이 자리하고 있다. 현관문을 열자 널따란 응접실이 있고 거기 연습실이 세 개, 아직 원생들이 올 시간이 되지 않았는지 조용하다. 강사 한 분이 오시고 원생 하나가 딸랑거리며 들어와 연습실로 들어가 가야금을 열심히 뜯고 있다.
연습실 문은 사각형의 작은 무늬 나무창살로 창호지만 발랐더니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구멍을 하도 많이 내서 아예 스티로폼을 덧대었다고. 벽에는 신문기사 몇 액자로 걸려 있다. 드러내지 않는 그의 품성으로 봐서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응접실 구석마다 항아리를 엎어놓고 사용하던 북을 하나씩 올려놓았다. 천정에도 문으로 쓰던 창살에 창호지를 붙여 간접조명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더 아늑하다.
“국악은 맨 처음 어떻게 하게 되었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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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향이 경북 예천군 감천면 돈산동이에요. 돈답과 산골이 합쳐져 돈산동인데 산골에서 태어났지요.”
“제가 고등학교를 두 번 다녔어요. 마을에 TV가 딱 두 대 있었는데 한대가 우리 집이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조상현 선생의 우리국악 한마당을 보다가 반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할 때 국악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다가 혼이 났지요. 결국 인문계로 진학하였는데 그해 여름 방학 때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어요.”
갑자기 그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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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경 가족이 모두 집을 비운 틈을 이용해 출가하기로 작정하고 어머니의 지갑을 열어보니 6천원이 들어 있더라고요. 다 가지고 가면 내일 아침 누님이 학교 갈 차비가 없을 것 같아 3천원만 빼고 이웃집에서 3천원을 빌려 무작정 서울로 향했지요.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큰길로 가면 붙잡힐 것 같아서 산등성이를 넘어 서울가는 버스를 탔지요.”
서울로 가면서 자신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였는데
“첫째 조상현 선생님 아니면 소리를 배우지 않겠다. 둘째, 소리를 배우고 학교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 셋째, 명창이 되겠다는 것이었지요. 무작정 상경하여 마장동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조상현 선생님을 아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집 나올 때 가지고 온 돈 6천원 중 차비하고 남은 돈 4천원으로 보름 동안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조상현 선생님을 찾아 헤맸지만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공중전화로 114에 전화를 걸어 조상현을 찾았더니 안내원이 조상현이 한두 명이냐고 핀잔을 주었어요. 주머니 돈도 바닥이 나서 주변 가게에서 음식 배달해서 먹고 남은 만두 등을 주워 먹으며 지내다 식당 아주머니가 알려준 곳을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마장동에서 꼬박 한나절을 걸어서 조상현 선생님 사무실에 도착하니 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자장면을 시켰더라구요. 그동안 선생님 찾느라 잊었던 배고픔을 자장면 네 그릇으로 채우고 선생님의 사무실에서 사환 일을 하게 되었어요. 사환이라는 말이 처음엔 제자라는 말을 다른 말로 불러주나보다 생각했지요. 알고 보니 사환이라는 게 잔심부름꾼이라는 말이었어요. 청소며 잔심부름으로 3년을 보내고 나니 그제서야 '고생했다' 라는 그 말 한마디에 힘을 얻어 소리를 계속하게 되었고, 15년쯤 지나고 나니 선생님의 전수자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지금도 서울거리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입 언저리가 야무져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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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KBS공개홀에서 중앙국악원 11주년 기념 공연으로 창극 춘향전을 열었다. 자리를 다 채우고 계단통로까지 빡빡하게 채운 공개홀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대성황이었다. 공연 세 시간 전에 도착한 나는 리허설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웃느라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잠시 객석으로 올라온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왜 이렇게 일찍 오셨느냐고 반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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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춘향전>은 춘향전이 아니었다. <신 방자전>이었다. 출연진 중에 춘향, 이도령, 월매, 향단이는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는 서울국악예고 후배들. 20년 동안 호흡을 함께 한 후배들과 두 달 동안 연습을 하고 오늘 선보이는 것이다. 거기에 청주KBS가 놀이판을 만들어 주었다. 창극 춘향전은 그야말로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가가 아니라 방자와 향단이의 사랑가였다. 조동언 선생이 방자역을 맡아 연실 웃음을 자아냈는데 향단이 역시 방자 못지않은 역할로 관객들의 배꼽을 더 쥐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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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앙국악예술협회 충북지회를 맡고 있는 조동언 선생은 중앙국악원 원장으로 우리 국악은 기생음악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거칠 것 없이 내뱉는 그의 말들은 이제 소리로 다가온다. 12년 전 국악의 불모지에 둥지를 틀고부터 지역문화 활성화 한 부문에 조금 보탬이 되었을 뿐이라고 고개를 숙인다. 30대 초반부터 시민사회단체 회원들, 봉사단체 회원들, 금융인, 학교 교사, 학부모, 아이들의 방과후 활동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고 그의 강연장이었고 공연장이었다. 충북 국악 대중화의 저변확대와 국악운동의 효시이자 발로였던 선생은 지금도 길러낸 제자들과 청소년예술단을 구성하여 우리에게 국악공연의 흥과 재미를 더하여 주기도 한다.
국악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관객과 청중을 찾아가서 우리 국악을 알리는데 더 힘을 쏟았던 지난날들, 거기에는 세대와 세대를 넘나드는 젊은 소리꾼 조동언이 있었다. 돌아보면 사회와 격리되어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의 만남이 가장 뜻 깊었다고. 지역의 국악공연 문화를 변화시킨 그의 작은 체구가 오늘따라 거인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판소리와 가야금을 가르치고 있는 중앙국악원은 활동하는 제자만도 70여 명. 서울국악예고와 국립국악고등학교, 서울대 국악부, 중앙대학교 국악부에 수석 입학하여 스승보다 제자가 더 돋보인다고 웃음으로 답하는 조동언 선생의 얼굴이 환하다. 한때 지역 인사들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도 수없이 많았다고......이야기를 하다말고 빨간색 CD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너 하나를 위해 오늘은 온 우주가 있는 듯.....' 이철수 판화가의 판화가 새겨진 「가야美」의 25현 가야금삼중주단의 음반이었다. 십여년을 넘게 지역 국악을 위해 일하면서 가르치는 일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함께 강사로 일하던 사람들을 「가야美」로 만들었고 그들의 눈물어린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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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언 선생과 민예총과의 인연의 끈은 박종관 충북민예총 부지회장이다. 제자들도 초창기에는 민예총 가입을 망설였으나 십여년이 지난 지금은 민예총에 입회하려는 국악인이 늘고 있다고 한다.
“제 성격이 아주 단순해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끝장을 봐야만 직성이 풀려요. 그래서 지금까지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매주 수요일에는 조상현 선생님께 수궁가를 배운다. 벌써 2년 정도가 되었다니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고, 가르치고 배우고.........
또한 해마다 8천여 명의 국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특강으로 만나고 있다. 좀 더 대중과 호흡하며 대중과 밀착하는 것이 국악을 널리 알리고 우리 것을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직 인터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뜬다. 공군사관학교 강의가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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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TV 국악 프로그램을 보고 꿈을 키운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명창이 되어 충북지역문화예술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동언 선생은 소리가 밥이 되지 못해도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노라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데 뒤에는 아내의 배려와 이해가 매우 크게 느껴진다.
봄비가 촉촉하다. 개울물소리가 크게 들린다. 저 물소리, 빗소리도 국악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꿈이 점점 커나가면 명창이 될 수 있다는 것. 허투루 들리는 자연의 소리가 우리의 참된 소리라는 걸 아는 이 몇이 될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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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가요 - 가야지 / 작곡 : 박범훈 송문선 : 서울국악예고1. 중앙국악예술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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