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도 자주 나오는 주제가 아닐까 싶은데. 천주교에서 신부들의 동성애 현장 발각.
그래서 퇴출되고, 뭐 어린소년들을 어쩌구 저쩌구 쏼라쏼라 불라 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한 남자를 사랑한 신부님의 불쌍한 스토리.그외에도 양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도 들어가 있다.특히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란. 그 느낌이란........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매순간 선과 악의 기로에 서있는다.
맹자가 ‘성선설’을 말하고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한 것처럼,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아주 정반대의 입장에 서기도 한다.
‘선은 좋고 악은 나쁘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 같지만, 실상 선한 일보다 악한 일이 더 많이 눈에 뜨이고 선한 행위보다 악한 행위가 더 흥미를 끄는 게 현실이다.
선과 악, 그것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인간이 선하고 악한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인가, 사회적으로 교육되는 것인가. 또 선은 이타적이고 좋은 것이며 악이 이기적이고 나쁜 것이라면, 악이 사라진 ‘선한 유토피아’는 과연 가능한것인지,
맹자가 ‘성선설’을 말하고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한 것처럼,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아주 정반대의 입장에 서기도 한다.
선과 악의 정의는 매우 주관적인것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매번 바뀌고 변화하는 가변적인것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의 그렉도 성직자의 신분이 아니었더라면 고민하고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그렉자신도 가변적인 성격을 지닌 선과 악때문에 성직자로써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그 자신은 선과 악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했다.
우리가 선을 훌륭한 모범으로 삼기는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실제로 악이 승리를 구가한다. 우리는 선을 접할 때에도 ‘선의 가면을 쓴 악’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선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악은 주의를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자신의 악을 선으로 감추고자 하는 ‘위장술’의 일반화가 더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왜 인간은 때로는 위선적이고, 때로는 자신의 선을 위해 악의 가면을 쓰기도 하는것인지.
악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유의 책임은 선으로 인도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악의 뿌리이다. 물론 선을 의식하면서도 악을 선택하는 한계상황들은 인간을 더욱 수수께끼로 만들어 놓지만, 악을 막으려면 우선 선을 행할 수 있는 책임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신의 선을 강조하기 위해 타인에게 악의 가면을 억지로 씌우는 우리의 세상풍토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