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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열심히 운동하여 건강해야 행복이 있지요.
감사합시다.
2024-2-8 황등 죽촌리 紆州黃氏 세천비석의 사연
자유인 조동화는 이 세상 김제땅에서 태어나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사는데 이유가 있을손가.
그냥 사는거여.
희로애락느끼며 눈이 즐겁고 입이 즐겁고 귀가 즐겁고 몸이 즐겁고 마음이 즐거우면 이세상 사는 보람이 있겠지.
젊은 한때는 호남선과 전라선 경부선을 3000마력의 기관차로 대한민국 산하를 운전하였던 조동화기관사도 세월을 이길수 없어 황혼의 시간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에 2024년2월 조동화는 황등 일원의 농촌 취약농가의 안전점검활동을 하는 소방 전기 가스 안전점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몇 년전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 안전점검원으로서 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전점검 활동은 2인이 조가 되어 이명조조장님과 같이 활동하게 되었지.
2/7 황등면 죽촌리 화농마을에 들어서니 마을 입구에 우주황씨 세천비석이 서 있었다.
우주황씨는 내가 태어난 용지땅에 집성촌을 이루며 종중활동이 많은 곳이기에 비석을 잘 살펴 보았네.
나의 죽마고우 황한용친구도 우주황씨여서 화농마을 입구의 우주황씨비석을 자세히 살피고 비석에 기록된 유래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혀.
오늘 안전점검에 같이 동행해준 황호권선생님은 우주황씨로서 화농마을에서 조상때부터 터를 잡고 살아오신 농부로 나보다 한 살위인 49년생이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황호권선생님은 성격이 넉넉하여 친절히 우리를 반갑게 대해주며 점검내내 안내해 주어 순박한 시골농부의 띠가 묻어나 있었다.
죽촌리 농촌마을에서 황호권선생님은 76세지만 한창 젊은 나이에 속한다고 했다.
한국사회 젊은이는 다 떠나고 늙은이만 남아있는 농촌마을은 장차 어떻게 될것인가 의문을 남기면서 안전점검을 실시했다.
고마우신 한 살위의 황호권형을 만나 순탄하게 점검활동을 하게 되어 감사하고 고마웠다.
세상살다보면 좋은 사람도 만나는가보다.
벗님들!
인자 설 연휴가 시작된다.
갑진년 청룡의 해 좋은일 많이하고
가족과 즐거운 설 명절 잘 보내세요.
세월을 낚는 친구들이여!
각자의 방식데로 지루하지 않게 세상을 살아가야지요.
시골농장도 가꾸어야 되고, 하루 걷는일 1만보도 실천해야 되고, 안전점검원 활동도 해야되고, IT콤퓨터 여가 취미활동도 해야되고, 옛직장 선후배들이 모이는 철도회관에 나가 심심풀이 고스톱 놀이도 해야 되어 2024년 2월도 빠쁘게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춘삼월이 돌아오겠지요.
하루하루가 소중한 황혼의 시절에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니다.
<고스락을 약2-3km 지나며 죽촌리 화농마을에 도착했다.
화농마을 입구 돌표지석에는 화농마을과 함께 수롱고지라고 세겨져 있다.
안전점검 활동에 동행해 준 부마마을에 사는 황호권선생님에 따르면 죽촌리에 우주황씨 종중 친척들이 20여가구나 된다고 했다.
죽촌리의 화농(禾農)마을은 도로를 경계삼아 부마(富麻)마을과 맞닿아 있는 마을로, 마을회관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죽촌리의 부마마을과 화농마을은 옛시절 양 마을 합쳐서 약 130여 가구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나, 현재는 80여호가 남아 있으나 빈집이 많아 실제로는 5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고, 시골의 고령화로 인하여 독거노인 혼자사는 가구가 몇가구 있었으며, 외지인들이 시골의 넓은곳에서 전원생활을 하고자 이사해온 가구가 몇가구 있었다.
화농(禾農)마을은 익산시 황등면 죽촌리에 속하는 마을로 화농마을의 옛 지명은 수렁고지였으며, 마을 주변의 논들이 전부 수렁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구먼.
화농은 본디 ‘수롱고지’, ‘수롱골’이라고 불렀는데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질퍽한 농토가 많았기 때문에 수렁골이라고 불렀고 그 지명이 ‘수농’에서 ‘화농’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육신과 뜻을 같이하다가 발각되여 순절한 사연이 기록된 우주황씨 세천비이다.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충신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를 말한다.
紆州黃氏世阡碑碑
장손파 황등 화농종중 설치
공은 태어나자 마자 재능이 뛰어났고 겨우 서당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자 자못 큰뜻을 품고 있었다.
처음 세종조에 벼슬하여 관이 별좌(별좌=정오품 또는 종오품)에 이르렀는데 단종의 손위(손위=왕위를 세조에 물려줌)에 미쳐, 공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통분하다가 마침내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유)과 연루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여 순절하였다.
광해군 무인년에 공주 동학사에서 초혼제(초혼제=순절한사람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왕명으로 지내었고, 신해년(정조15년 1791년)장능(장능=단종능)의 충신단에 배식(배식=종묘에 공신을 부제하는 것)하고 뒤에 숙묘전무에 따라 배향하였다.
동강 김영한이 선한 묘분에 이르기를 우주의(철인=현인 사물의 이치에 밝고 빛나는 붉은 마음에 죽기를 맹세코 변치 않으니 공의 충과 의는 진실로 성과 박의 여러분(성삼문 박팽년등 사육신)과 더불어 깊이 천추에 빛나도다 라고 하였다.
우주황씨 유래(由來)
우주(紆州)는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삼례읍, 비봉면, 익산시 왕궁면, 춘포면 일대의 옛 지명이다.
원래 백제(百濟)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우주현(紆州縣)으로 개칭해 금마군(金馬郡)의 속현(屬縣)이 됐다가 고려 현종때(1018년) 전주목(全州牧)에 속했다.
고려 충혜왕 5년(1345년) 우주현은 익산군에 병합되어 익주(益州)가 되면서 우주현이라는 지명은 사라졌다. 조선 1409년(태종)에 전주부(全州府)의 우동면(紆東面), 우북면(紆北面), 우서면(紆西面)으로 각각 나누어졌다.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1914년)에 따라 우동면과 봉상면을 봉동면, 우북면과 제석면을 왕궁면, 우서면과 창덕면을 삼례면으로 각각 통합하면서 1,800년 동안 불리던 우주라는 지명이 안타깝게도 사라졌다.
그러나 김정호가 1861년 발행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紆州(우주)’ 라는 지명이 삼례, 봉상(봉동읍의 옛 이름), 송치(비봉면의 마을) 사이에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다.
우주황씨(紆州黃氏)의 시조(始祖) 민보(旻甫)는 고려 중엽 우주에 토착(土着)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중윤(中尹)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공세(公世)는 검교신호위대장(檢校神虎衛大將)을 역임한 후 우주에 세거(世居)하였다. 몇 대를 내려와 9세 문용(文用)은 문하평리(門下評理, 종2품)를 지낸 후 광정대부(匡靖大夫, 정2품)에 추봉(追封)되었다. 고려 때 인물인 시조 민보(旻甫)부터 9세 문용(文用)까지 9대의 묘소는 화장문화가 일반화된 불교의 영향으로 실전(失傳)되었으며, 현재는 비봉면 내월리에 단소(壇所)만 남아있다.
이렇게 우주황씨는 일찍이 호남 내륙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문장(文章)과 도덕을 겸비한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기틀을 다졌으며, 조선 개국(開國)과 함께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명문(名門)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10세 중시조(中始祖)인 거중(居中)은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거중(居中)은 조선개국(朝鮮開國)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 공조전서(工曹典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역임한 후 낙향(落鄕)하여 우주(紆州)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우주로 삼았다.
거중은 고향인 왕궁면 장암(場巖)에서 꽃을 심고, 사람들을 평안하게 두루 만났으며, 거문고를 벗삼아 때로는 술과 시를 즐기시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으며, 여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유감(有感) 등 시(詩)와 여제생설(與諸生說) 등 문장(文章)이 있다. 거중(居中)은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김제의 구암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거중(居中)의 장남 기(圻)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고, 임피파(臨陂派) 파조가 되었다. 차남 육(陸)은 정읍 현감을 지냈으며, 슬하에 상주목사를 지낸 수정(守正)을 두었으나, 후사(後嗣)가 없어 대(代)가 끊겼다.
3남 균(均)은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고 김제파(金堤派) 파조가 되었으며, 4남 견(堅)은 부사정(副司正)을 지내고 전주파(全州派) 파조가 되었다.
중시조 이후에 가문을 또 한차례 크게 빛낸 인물은 15세 헌(憲)이다. 신동(神童)이라는 말을 듣고 자라 중종 16년(1521년) 20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 문과 을과(乙科)에 급제한 후에 이조판서, 한성판윤, 평안도 감사, 병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거쳤고,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자칫 질시와 모함의 대상이 되면서도 명종 4년(1549년)에 의정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 후의 주요 인물들을 열거하면, 15세 행은(杏隱) 응청(應淸)은 어린 나이에 호남 일대 제일의 군자(君子)라는 명성을 얻어 많은 유생(儒生)이 군자가 되겠다고 다투어 몰려왔으며, 주위에서는 과거에 응할 것을 권유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여 사서변의(四書辯疑) 3권, 시서변의(詩書辯疑) 2권의 문집을 남겼다. 김제 구암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16세 포(褒)는 덕행(德行) 및 향학(向學)이 뛰어나 주위에서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했으나, 응하지 않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중(喪中)인데도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우다가 고산(高山)전투에서 전사(戰死)하였다.
포(褒)의 아들 17세 명세(名世)는 이태백의 시(詩)에 왕희지의 글씨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는데, 병자호란때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싸우러가던 중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로 화합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 한 후 귀향하여 타계할 때까지 나들이를 금(禁)했다고 한다.
포(褒)의 손자 18세 자후(自厚)는 김장생(金長生), 주세붕(周世鵬)을 사사(師事) 하여 학문으로 대성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익산 금마의 화산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16세 죽봉(竹峯) 박(璞)은 158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서, 권율, 황진 장군 등과 함께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막아 응치(熊峙, 곰티재), 이치(梨峙, 배티재) 대첩(大捷)을 거두었으나 애석하게도 이치에서 전사하였고, 선무원종공신에 올랐으며, 병마절도사로(兵馬節度使)로 증직(贈職)되었다. 현재 이치에 전적비(戰跡碑), 충남 금산(錦山)에 충절비(忠節碑)와 충열단(忠烈壇)이 각각 설치되어 있으며, 김제 용지면 구암리에 정려(旌閭)를 세웠다.
한편, 중시조 거중의 후손들이 언제 왕궁면 장암을 떠나 여러 곳으로 이주했는지를 보면, 임피파는 14세 준(濬)부터 자양동에서 세거(世居)하였으며, 그 형제인 연(演)은 완주군 구이로 이주하였다.
김제파는 15세 응청(應淸)이 1545년에 김제 수동산으로, 16세 수복(壽福)은 좌의정 헌(憲)이 탄핵(1549년)된 후 함열로 각각 이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파는 왕궁면 장암 인근에 현재 견동(堅洞), 견우(堅紆), 우흥(紆興) 마을이 남아있어 파조인 견(堅)의 후손들이 꽤 오랫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13세 서문(瑞門)은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익산 함열로 숨어 이주하였다. 16세 유증(有曾)은 우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남 영암군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입향조가 되었다.
우주황씨의 태생지인 익산 왕궁면, 옛 우주 고을인 완주군 봉동 등에 현재 살고 있는 후손은 전주파 뿐이고, 임피파, 김제파 후손들은 모두 우주 고을을 일찍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이제 그곳에 더 이상 살지 않고있다.
물과 건강
(관동의대 제일병원 가정의학과 오한진)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물과 공기
인데, 특히 물은 모든 생명 탄생의 근원이라 할 수 있
다. 물은 체중의 55~60%를 차지하며 하나의 영양소
로 인체의 가장 중요한 물질이다. 사람은 몸의 지방과
단백질의 절반이 사라져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체내 수분의 10%가 감소하면 위험한 상태를 초래하
고, 20~22%가 부족해지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즉 60kg의 성인은 약 36리터(60%)의 물이 우리 몸에
있으며, 0.6리터만 없어져도 갈증을 느끼고, 5~6리터
가 없어지면 혼수상태, 10~12리터 정도를 잃으면 사
망한다. 따라서 우리 몸은 수분의 섭취와 배설이 균형
을 이루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성인은 하루에
호흡, 땀, 소변, 대변을 통해 약 2,500cc의 물을 배출
하므로 이만큼의 수분을 매일 섭취해야 한다.
즉 물의 하루 필요량을 살펴보면 우리 신체가 하루
에 배출하는 수분 양만큼 물을 보충해 주면 된다. 성
인은 하루 종일 호흡으로 0.5리터, 땀으로 0.5리터,
피부로 0.5리터, 그리고 대소변으로 약 1.6리터가 배
출된다. 모두 합해서 약 3.1리터 정도가 빠져나간다.
또한 우리는 매일 음식을 통해서 1~1.5리터의 수분을
섭취하고, 몸에서의 수분 재활용(세포 대사 중에 생긴
물)을 통해 약 0.1리터 정도 이용한다. 따라서 이 외의
부족한 1.4~2리터의 물이 더 필요하다. 물을 얼만큼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루 활동량이나, 체중, 날
씨 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또한 당연한 이야기지
만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물도 더 많이 필요하다.
물이 우리 몸에서 하는 작용은?
1) 체내 영양소의 공급과 노폐물 제거에 관여한다.
물은 용매로서 작용한다. 즉 여러 영양소를 물에 녹
여 체내에서 운반하고 또 조직으로부터 노폐물을 제거
한다. 수분은 피부와 호흡기로부터 증발되어 체온조절
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사람의 신장은 수분조절 기능
이 있어 물의 섭취량이 부족하면 소변량이 크게 줄고,
반대로 물의 섭취량이 많으면 소변량이 늘어남으로써
자체 조절을 한다. 체내 수분이 조금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는 것은 신진대사 과정에서 생성되는 노폐
물, 즉 암모니아 농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암모니아는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간에서 독성이
약한 요소(urea)로 전환시켜 소변으로 배설한다.
2) 체온조절을 한다.
영양소(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의 대사 과정에서
우리 몸에 열이 만들어 진다. 이 열을 낮추기 위해 피
부에서 수분을 발산시켜 체온 조절을 한다. 물은 체내
화학 반응에 관여하는 효소 작용의 최적 온도인
36.5℃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루에 약 1㎏의 수분이 증
발한다.
3) 신체 조직의 구성성분이 된다.
각 세포와 조직 및 혈액 임파액의 구성성분으로 물
이 포함된다. 지방은 20∼25%, 골격에는 10∼25%,
근육에는 75%가 포함된다. 또한 사용하고 남은 에너
지를 지방, 또는 글리코겐으로 지방이나 간 조직에 저
장할 때 반드시 수분이 포함된다.
4) 식욕과 음식 섭취에 영향을 준다.
우리 몸에 있는 수분은 독성물질 배출을 위한 희석
제 역할을 한다. 또한 체내 수분이 조금만 부족해도
혈액의 염분 농도가 높아져 갈증이 난다. 즉 체내 수
분량이 약 10% 감소하면(또는 음식을 짜게 먹은 경우)
갈증을 느끼면서 입이 마르고 뇌에 있는 갈증 센터
(hypothalamic thirst center)를 자극한다. 혈액 속
의 수분이 부족해지면 농도가 높아져 다른 조직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고, 이에 따라 침의 생성이 감소하
기 때문이다. 이렇게 갈증이 심해지면 식욕 감퇴로 이
어져 영양 섭취에도 영향을 준다.
5) 소화액과 여러 분비물의 주요 구성성분이 된다.
위의 분비물과 타액, 췌장에서 분비하는 소화액은
98%가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절 액과 양수를 구
성하며, 이는 외부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위와 장의 음식물 움직임을 원활하게 하여 변비
를 예방한다.
나이에 따른 체내 수분의 변화는?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
정이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수정이 되었을 때
의 수정란의 97%는 수분으로 구성된다. 이후 임신 초
기 태아로 성장하면서 80%, 임신 중기 70%, 아기로
태어나면서 약 65%, 청소년기 60%를 거쳐 50대의 나
이가 되면 50% 정도의 수분이 우리 몸을 구성한다.
즉 사람이 노화하면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분
의 량이 감소한다. 따라서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지 않
는다면 우리 신체는 노화가 빨리 올 수 있다.
탈수, 즉 수분 부족은 어떤 현상을 유발할까?
신체 내에 물이 부족한 경우를 탈수라고 하며 주로,
설사나 구토, 발한, 수분 섭취가 부족한 경우에 나타
난다. 탈수상태가 되면 처음에는 수분이 주로 혈액에
서 감소하고, 점점 심해지면 세포를 구성하는 수분까
지도 부족하게 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 성분이
2~5% 감소되면 뇌에 존재하는 갈증센터가 즉각 확인
하여 먼저 갈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우리 몸은 이
미 수분 부족으로 인해 입술이 마르고 기운이 없고 맥
박이 빨라지고 체온이 올라간다.
이러한 증상은 물을 보충하면 사라진다. 만약 수분
감소와 함께 나트륨, 칼륨과 같은 전해질이 감소한 경
우엔 물과 함께 전해질도 보충해야 한다. 갑작스런 체
액의 감소와 함께 나트륨의 감소가 발생한 경우에는
혈액과 세포 사이의 균형이 깨져 혈액 순환을 구성하
는 혈액의 양이 감소한다. 따라서 혈압이 떨어지고,
허약감, 무감각, 근육 경련, 근육 부종, 어지러움 등이
발생하고 심한 경우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 증상부터
혼수상태까지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무더운 여름철
심한 노동이나 운동으로 인한 갑작스런 땀의 증가는
수분과 염분의 손실로 인한 문제 발생이 나타날 수 있
으므로 보충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은 어떻게 마시는 것이 좋을까?
날씨가 무덥거나 많은 신체 활동량으로 인해서 땀을
흘렸다면 물은 평상시보다 많이 마셔야 하는데, 간단
하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소변 횟수가 줄어들고 소
변 색깔이 짙어지면 몸의 수분이 부족한 것을 표현하
는 것이므로 수분을 보충해야 한다. 신장 기능이 정상
일 경우는 물을 많이 마시더라도 2시간쯤 후에는 소변
을 통해서 대부분이 배출이 되지만 한꺼번에 많은 물
을 마시게 되면 저나트륨 혈증이 발생하여, 뇌가 붓는
뇌부종이 발생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저나트륨
혈증이 발생이 되면 구역질, 현기증, 두통, 근육경련
등이 일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뇌의 부종이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갈증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
번에 0.5리터 이상의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 것은 이미 늦은 때라고 한
다. 미리 자주 물 마시는 습관이 필요하다. 변비가 있
다면 아침 시작을 물로 하면 좋겠다. 물을 마시면 장
운동이 활발해 지기 때문이다. 식사 30분 전쯤 물 마
시기는 공복감을 줄여줘 과식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
으며, 출출할 때, 피곤할 때, 졸릴 때도 바로 수분 섭
취가 필요한 경우이다. 하지만 취침 전에는 수분을 많
이 섭취하면 소변 때문에 잠을 설칠 수 있으니 가볍게
반잔 정도의 물이 좋다.
생물학적으로 사람에게 하루에 필요한 물의 양은 체중 1kg당 30ml라고 한다. 체중이 60kg인 사람이라면 1일에 약 1.8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여기에 운동이나 신체적인 활동에 필요한 물의 양을 200cc 정도 더해주면 1일에 필요한 물의 총량은 약 2리터가 된다. 그래서 하루에 열 잔 정도의 물을 마셔야 되는 것이다.
사람은 체내의 물 중 1/3을 잃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체중이 60kg인 사람의 몸에는 체중의 2/3가 물이다. 즉 40리터가 물인데 이중의 1/3이라면 약 13.3리터가 된다. 인체는 매일 약 800~1리터의 물이 소변이나 땀 등으로 배출되므로 사람이 물 없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약 15일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이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할지라도 장기에 손상을 입을 수 있고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즉 건강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은 사람의 생명활동을 위해서 꼭 필요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물은 우리 몸의 모든 기능에 관여한다. 인체의 모든 장기와 세포의 주된 구성원은 바로 물이기 때문이다. 뇌세포의 85%, 혈액의 82%, 근육의 75%, 뼈의 25%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인체의 수분이 극도로 부족해지면 생명을 잃게 되고 부족하기만 해도 노화현상이 일어난다. 사람의 피부 또한 물이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촉촉하고 건강한 피부를 위해서는 물을 자주 마셔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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