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서정시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임강빈의 시는 저마다의 사물들이 펼쳐내는 다채로운 풍경에 주목한다. 시인은 그 풍경의 외부가 아니라 풍경의 내부에 거주한다. 사물들의 풍경이 시인의 ‘내면’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인은 사물들의 눈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구성한다. ‘관조(觀照)’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시인은 사물의 눈을 통해 사물의 심연과 조우한다.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195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니, 50년이 넘는 시력(詩歷)을 지닌 임강빈의 시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관조(풍경)’의 미학을 경유해야만 그 의미가 제대로 해독될 수 있을 것이다.
① 바둑판처럼 반듯합니다
마을마다
나락이 익고 있습니다
초록이다가 노란빛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 폭 그림입니다
기적도 숨죽이고
미끄러지듯 기차는 달립니다
허수아비도 만날 수 없는 이 적막에
느릿느릿한 것 같지만
열차는 직선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 넓은 평야에 마침내 황금빛 일색입니다
참, 조용한 평화입니다
- 「평화」 전문
② 살얼음
조심조심 밟다
어디선가
얼음 갈라지는 소리
버들강아지
물에 발을 담그다
고요히
얼음 녹는 소리
졸졸거리며
봄이 오는 소리
- 「소리」 전문
인용시 ①은 가을의 황금빛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보는 주체’의 시선이 드러나 있지만, 그 시선은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대상을 지배하는 시선이 아니라, 대상을 관조하려는 시선이 거기에는 있다. “조용한 평화”라는 시구는 이 시에 나타나는 주체의 시선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거니와, 시인은 ‘보는 주체’의 지배적인 시선을 배제함으로써 평화로운 세상의 풍경을 시화하고 있는 셈이다.
인용시 ②도 봄이 오는 평화로운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용시 ①의 관조적 시선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인용시 ②는 사물들의 미세한 ‘소리’를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소리는 시선의 외부에서 들려온다. 버들강아지가 물에 발을 담그는 소리나, 고요하게 얼음이 녹는 소리는 사물들이 순간적으로 내보이는 심연을 직관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듣는다’라는 말을 썼지만, 시인(화자)이 사물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소리가 시인의 귀에 ‘들려온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기(자아)를 놓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는 타자화된 소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보는 것만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소리의 세계는 온몸으로 반응해야 하는 우주의 진동만큼이나 아득하게 밀려온다. 「벼」라는 짧은 시에서 시인은 “서둘지 마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이 흐르면 “황금빛으로 익는다 / 그리고 숙인다”라는 벼의 진리를 시인은 자연의 진리로써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이다가 초록이다가 황금색으로 바”뀌는 “느긋한 이 풍경을 바라보면서”(「서둘 것 없다」) 시인은 속도의 삶 너머에서 피어나는 느림의 삶을 사유한다. 생명은 저마다의 삶의 속도로 저마다의 삶을 살아낸다. 여백을 두지 않는 빡빡한 삶은 인간의 삶을 속도의 경쟁에 익숙한 삶으로 만들어버린다. 임강빈은 속도의 저편에 여백의 미학을 새겨놓는다. 여백은 속도를 제어하고,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의 삶을 여백의 공간으로 이끌어낸다.
당신의 시에는 매력이 없습니다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부족합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길게 늘인다고 능사는 아닙니다
헉헉 숨막히게 하지 말아요
짧게 줄이세요
여백을 많이 두세요
서두르지 말아요
오두방정 떨지 말아요
그 알량한 매력이나마 죽이게 합니다
시는 감동입니다
감동을 흘리게 하는 매력입니다
- 「매력(魅力)」 전문
소위 ‘미래파’(권혁웅 용어)라 일컬어지는 젊은 시인들의 시는 공통적으로 말이 많다. 시인들은 끊임없이 중얼중얼대며,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이미지들을 시의 언어로 표현한다. 말이 많을수록, 그들의 의식은 여러 겹으로 분열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미래파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이상한 나라’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린다. ‘미래파’라는 명명이 의미하는바, 미래파로 통칭되는 젊은 시인들은 현실 이면에 잠재화된 세계를 현실 속으로 불러내는 작업을 계속적으로 수행한다. 그들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임강빈의 “시에는 매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분열된 세상을 관조하며 조화로운 세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비극적 현실을 외면한 처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시를 쓸 때 서두르지 말고, 숨막히게 하지 말고, 짧게 줄여 여백을 남기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시의 매력은 여백의 미학에서 뻗어나온다. 여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역설적인 노력을 통해 구현된다. 역설에 대한 인식이 없이 현대시의 광장에 발을 들여놓기는 힘들다. 빛(삶)과 어둠(죽음)의 경계에서 시를 쓴 보들레르의 시작(詩作)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일상에 익숙한 존재에게 시작은 무엇보다도 역설의 장소를 온몸으로 묻고 표현하는 힘겨운 작업으로 다가온다. 역설은 부재 너머의 다양한 의미의 세계를 포괄한다. ‘일자’로 환원될 수 없는 다자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역설의 시적 맥락이라면, 역설적 인식에 근거한 시작 역시 이러한 다자의 세계를 사유함으로써 비로소 그 맥락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한여름
무량사 매미와 만났다
오랜 세월 땅속에 있다가
겨우 삼 일 남짓 생을 마치는
매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애처롭다
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 따라
한결 시원하고
악쓰는 도시의 매미와는 차원이 다르다
서둘러라
넉넉한 건 아니다
무량한 시간 같지만 일순간이다
그 애절한 호소
산을 다녀온 며칠 후
우리 집 아파트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 달라 붙어서
무량사 매미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다
- 「매미 소리」 전문
임강빈의 시를 관류하는 관조의 정신은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에서 피어나는 깨달음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선인들의 시에 드러나는 관물(觀物)의 정신을 잇고 있는 임강빈의 시정신은 사물 속에서 사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적 삶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무량사에서 들은 매미 소리를 “우리 집 아파트”에서 다시 듣는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애절한 호소”로 들려오는 ‘매미 소리’의 의미를 되새긴다. “무량한 시간 같지만 일순간”이라는 역설적 인식은 “겨우 삼 일 남짓” 살기 위해 “오랜 세월”을 애벌레로 살아야하는 매미의 운명(삶)을 통해 구현된다.
악쓰듯 울어대는 매미 소리의 이면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이치가 스며들어 있다. 시인은 자연의 그러한 이치를 “아물아물 균형이 잡혀 있다”(「균형」)는 시구로 표현한다. 바다의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피력되는 균형의 미학은 “잡힐 듯하다가도 멀어지는 / 나의 균형”(같은 시)에 대한 시적 사유로 이어진다. 멀리서 보면 수평선은 고요한 듯하지만, 가까이 가 보면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물결이 치고 있다. 보는 것만이, 듣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은 보는 것 너머에서 무언가가 변함없이 생성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인공적인 이미지에 휩싸여 이미지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없는 존재들에게, 임강빈의 시는 주변의 세계를 끊임없이 관조할 것을 권유한다. “인생 팔십”을 살면서 시인은 “아팠던 시간을 전부 빼버리면 / 팔십 고개 / 긴 것만도 아니다”(「인생 팔십」)라는 서글픈 교훈을 얻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시집의 이곳저곳에 나타나듯, 시인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채워왔던 기억의 흔적들을 이제 하나하나 비워내려 하고 있다. 세상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그렇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그림자」)의 삶을 시인이 주목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