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 한반도 울진에 삼국사기,삼국유사,그리고 중국사 신라전에 등장하는 '眞興王(540~576)'
이 聖留窟로 행차해 화랑도들의 수련을 살펴보고 순수 명문을 남겼다고 한다.그러면서 엉성한
명문 임에도 뭐가 있는것 처럼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 학예사들이 대들어 어제 합동으로 발표를
했다.필자는 알수가 없다.이런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억지를.그 명문 글자중 역사서에 등장하는
신라 진흥왕의 행적으로 증빙 받을려면 우선적으로 지금 한반도에서 진흥왕이 정무를 살폈던
1000년 고도 경주란 곳에 1000년 풍상을 겪은 왕궁(내성)이나 왕궁터가 분명히 그것도 확실하게
있은 연후에 말해야 한다.특히 헌강왕때 숯으로만 밥을 지었다는 인구 100만 규모의 경주와
부촌향기 가득한 1000년 고도 외곽성 흔적도 멋있게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것 없으면 모두가 허당이며 해석 권력을 가진 제도권 학자들이나 학예 공무원들의 역사 장난
에 불과하다.특히 1000년 고도의 기본중의 기본인 '내외곽의 성터,왕궁터,종친들과 귀족들이
살았던 金宅들'의 흔적들 조차 없는데,어떻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진흥왕이 지금
의 경북 울진 성유굴로 행차할수 있단 말인가? 그는 과연 유령의 진흥왕인가? 일부는 진흥왕
순수비를 거론하며 성유굴 명문을 반도의 신라와 엮으려 하나,巡狩는 진흥왕의 년호 사용처럼
황제만 한다.반도로 강제된 신라는 한번도 황제국 일때가 없었고,늘 변방의 제후였다고 제도권
제도권 사가들은 말한다.
2, 더하여 명문의 표기에 있다는 庚辰年 六月이 년표상 서기560년 진흥왕 시대의 흔적으로 지정
받을려면,최소한 진흥왕이 썼다는 년표상의 년호인 '開國 10년이든,아니면 開國 21년' 이란 년호
를 앞에 억지라도 지르고 나서 경진년 6월을 진흥왕 시대라고 우겨야 설득력을 얻을수 있다.그렇
지 않고 그냥 경진년이면 60년 마다 늘 반복되는 干支이기 때문에 신라 진흥왕 시대라고 말하기
는 정말 곤란하다.더하여 진흥왕이란 왕명이 크게 공명을 떨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사후에
명명되는 보통명사성이 있을 뿐이다.그가 신라의 진흥왕으로 명명된 연유가 재임시 불교를 진실
로 부흥시켰다는 의미로 眞興이 되었던 만큼,만약 지금 울진의 성유굴로 진흥왕이 행차를 했다면
많은 불탑,불상조상기,석불들을 억지라도 세워놓고 있어야 보증을 받을수 있다.
그렇지 않고 그냥 화랑도들의 수련장 이었다로 우겨서는 아무런 동의도 구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어느 역사서에 울진의 성유굴이 신라 화랑도의 수련장이라고 했던가? 화랑도 역시 儒佛仙
道의 수련을 중요하게 여겼던 만큼 지금의 울진 근처에 많은 유불선 유적들도 만들어 놓고 말해
야 설득력을 얻을수 있을 것이다.이제는 역사의 해석(금문이나 서류등)도 제도권의 전유물도
아니고 실력을 떠나 명함과 명패로 우겨서 되는 시대는 지났다.
3, 해설의 문제는 또 있다.지금 경주란 곳에서 지금의 울진으로 간 신라의 진흥왕이라면 그는
배를 타고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그런데 해설가들은 배를 타고 갔다고 억지를 쓴다.멍청한 신하나
왕이 아니고는 몇배의 비용이 더들고 인력이 소모되는 배를 이용해 지금의 경주에서 울진으로
갈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그들이 밝혔다고 말한 '잔교(棧橋)' 란 표현은 배가 아니고 계곡과
계곡 사이를 잇는 나무로 만든 줄다리를 말하는 것이다.그러니 여러명의 뱃사공도 필요 없었다.
구태여 있었다면 가는길 숲의 나무와 잡풀을 제거하는 길잡이 나뭇꾼들이 필요했을 것이다.실제로
지금의 반도 경주에서 배를 이용해 울진으로 가는 멍청한 사람은 왕이 될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반도 신라의 멍청한 진흥왕이 지금의 경주에서 신하들을 대동(50명)하고 울진으로 갔다고
해도,지금의 경주에서 동쪽인 포항의 해안가로 나와 해안을 따라 북으로 올라 가다보면 자연스럽
게 울진이 나오는데 왜? 힘들게 배를 이용해 위험을 무릎쓰고 노를 저으며 울진으로 행차 할 것인
가? 성유굴이란 글자가 의미하는 뜻은 성인이 머문 굴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반도 울진의 석회
암 동굴에 어떤 성인이 머물렀다는 말인가? 그냥 전설일 뿐이다.역사든 현실이든 진실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복잡한 신라 역사를 만들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