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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와 침몰하는 대한민국
도종환
미안함의 실체는 무엇일까?
“다 정리하고 떠날 거예요. 나 대한민국 국민 아닙니다. 이 나라가 내 자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내 나라를 버립니다.”
-- 전교 일등 하는 딸을 두었던 어머니
나라 전체가 상중(喪中)이다. 슬픔은 구름처럼 이 나라의 하늘을 가득 덮고 있다.
슬픔은 바람처럼 수시로 불어와 몸을 휘감는다. 세월호 안에서 상식을 믿고, 어른들의 말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살아나오지 못한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은 노란 리본에 매달려 한없이 흐느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이 나라 곳곳에서 함께 흐느낀다.
그러나 슬픔과 함께 분노가 동시에 몸을 흔든다. 참담하고 부끄럽다. 이 미안함 이 부끄러움, 이 분노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이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한 채 기관장과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비상통로를 통해 먼저 빠져 나오고 아이들을 버렸다는 데 대한 미안함이다. 그 뒤에도 아이들을 구조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 있었는데 구하지 못한 무능과 무력함에 대한 미안함이다. 싸르트르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 “믿음이 행동을 결정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자신과 타인들의 생사를 결정한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재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레베카 솔닛은 말한다. 이 의식을 우리는 윤리의식이라고 한다. 윤리의식의 부재가 302명의 인명을 버린 우리의 민낯이라는 걸 확인하면서 어른으로서 고개를 들 수 없이 미안하다.
‘우리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쨌든 먼저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은 강력하되 윤리의식은 실종된 채 살아온 것은 아닌가,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비겁함이 깊게 내면화 된 건 아닐까?’하는 부끄러움이다. 우리가 얼마나 후진이고 삼류인지 전 세계인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국민소득 2만6천 달러의 조선강국, IT 강국이라는 말이 무색해졌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 얼마나 오만한 말이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배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국가의 위기관리 체계는 전혀 작동할 줄을 몰랐다. 학생들의 신고를 받은 뒤 해경의 초동 대처, 청와대와 정부의 위기 대응, 현장의 구조작업, 탈출을 돕기 위한 신속성, 통합성, 헌신성, 절박함, 적극성, 진정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배가 기우는 동안 승무원들은 청해진 해운과 7번 통화를 했지만 회사가 빨리 승객들을 구하기 위한 조치를 하라고 명령했다는 말은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전화를 받고 회사가 한 일은 화물 중량 180톤을 조작하는 일이었다. 사람의 생명보다 보험료 계산이 먼저였다.
9시 반에 현장에 도착한 해경은 배 밖에 기다리고 있는 승무원들은 구하면서 학생들과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배 안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검찰조사에 의하면 학생들이 마지막 카카오톡을 보낸 시간이 10시 17분이다. 47분의 시간이 있었다. 승무원들은 구명벌을 바다에 띄우며 학생들에게 탈출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해경은 구명조끼를 입은 채 유리창 안에서 창을 두드리며 수없이 살려달라고 문자를 보내는 학생들을 구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안에서 3백 명이 넘는 승객들이 있다고 고함을 치거나, 학생들을 살려야 한다고 울면서 몸부림치는 승무원과 구조대원은 볼 수 없었다. 소방방재청 헬기는 이륙했다가 전남지사를 태우고 가라고 해서 10시 5분에야 재출발했고, 11대의 소방헬기도 해경의 반대로 구조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12시 4분에 도착한 해난구조대도 해경이 허락하지 않아 구조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고, 미군 구조헬기 2대도 국방부가 돌려보냈다.
구조 현장은 우왕좌왕하고 무기력하고 무능한데, 저녁 5시경에 “아이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왜 못 찾느냐?”는 대통령의 말은 그때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언론은 초기부터 구조자 숫자를 잘못 보도해 상황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데 일조했고, 진실을 외면해서 불신을 받았다.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는 바다와 사고 현장의 바다 상황이 너무 달라서 실종자 가족들은 분노했다. 그러는 동안 실종자 가족들, 학생들의 부모들은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며 배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는 자식들을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온 국민이 발을 구르고 땅을 치며 이 비극적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 장면은 기억의 충격이 되어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 입에서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질책이 쏟아졌다.
세월호는 출항 전부터 침몰하고 있었다
세월호는 출항 전부터 침몰하고 있었다.
정영석 해양대 교수는 세월호 침몰 사고의 원인과 관련해 다음의 여섯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청해진 해운 측의 선박 개조로 인한 선박의 복원성 문제
둘째, 청해진 해운 측의 화물과적과 화물 고박 부실 등 화물 관리 부실
셋째, 청해진 해운 측과 본선 측의 여객 및 선원의 승선 인원 관리 부실
넷째, 본선 선원의 화물 관리 부실
다섯째, 한국 해운 조합의 여객선 안전 운항관리 부실
여섯째, 선박직 직원의 직무상 과실과 자질의 문제
삼년 전 여객선 선령을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 받은 뒤 세월호는 객실 증축으로 한번 운항할 때마다 800만원의 수익을 더 올렸다. 화물 운임료는 8톤 화물차 한 대에 70만원, 트레일러 140만원인데 기준량보다 더 많은 화물을 실은 대가로 한번 운항할 때마다 4000만원 가까운 추가 수익을 올렸다. 한국선급 승인 선적 기준은 차량적재한도가 85대인데, 자체 운항 관리 규정에는 148대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일 적재한 차량은 185대였다. 그렇게 해서 연간 화물 수입 150억 원, 여객 수입 50억 원의 이익을 남겼다.
그런데 선장의 급여는 월 270만원이었다. 그리고 1년 비정규직이었다. 항해사와 기관사들의 월급이 200만원도 되지 않았고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다. 불법으로 취득한 수입은 기업으로 들어가면 선박직 직원들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 구조였다. 이런 저임금의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6,835톤 선박의 운행을 맡긴 것이다.
화물은 3배 정도 과적하는 대신 평형수는 4분의 1만 적재하였다. 평형수를 쏟아버릴 때 이미 이 배는 침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선박의 무게 중심은 상승하고, 화물 고정 장치는 부실하고, 안개 때문에 출항할 수 없어서 2시간 늦게 출발한 탓에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운항하였다. 사고 당시의 데이터를 분석하며 목포대 임남균 교수는 세월호가 19초간 45도, 즉 초당 2.6도를 선회한 것은 단순한 타에 의한 선회 이외의 다른 외력이 작용하였음을 암시한다고 말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타를 아무리 빨리 돌려도 1.8도밖에 돌아가지 않으며, 초보운전자가 운전을 못해도 자동차가 뒤집혀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언가 외력에 의한 급격한 회전이 발생했다고 보아야 하며 그 외력이 무엇인지가 사고발생 원인의 열쇠라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항 전 운항감독을 하고 과적과 고박을 점검해야 하는 해운 조합은 선박회사의 친목단체여서 과적을 이유로 운항을 정지 시킨 적이 없다. 해양수산부는 불법으로 개조한 배를 승인해 주었고, 연안여객선들이 영세하다는 이유로 특혜를 주었다. 해양경찰은 안전관리규정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해운업체는 ‘자동차 관리법’보다 못한 ‘선박 안전법’ 단속에 걸리면 과태료를 내더라도 여객과 화물을 더 선적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해왔다. 이번 세월호 사고 원인 중의 하나가 운송사업자의 운항관리규정의 미흡과 미준수로 볼 수 있는데 위반했다 해도 3백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불과하므로 사실상 안전운항규정은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 왔다.
지금 우리나라 대형 여객선 10척 중 9척이 20년 이산 된 노후선박인데 이 배들의 주기관, 조타장치, 항해장비의 노후화로 해양 사고가 발생하고 있는데 장비검사는 잘 안하고 배 외형만 검사한다고 해양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바깥에 구멍 뚫려 있는 배가 있겠는가? 부실은 이미 선박 속에 나 있는데.
우리는 이미 출항하기 전부터 언제든지 침몰할 수 있는 배를 탄 채 죽음의 항로를 다니는 것이다. 이는 세월호와 노후선박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호라는 배 역시 언제든 침몰할 수 있는 상태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위험사회 대한민국
정부가 ‘자본의 안전’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원하고 협력하는 동안 ‘국민의 안전’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동안 ‘기업만 좋은 나라’로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위험은 고르게 분배’되는 사회가 되었다.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본증식이 지속 가능한 사회만을 만들려는 정책을 유지해왔다.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와 규제완화를 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국가 기강을 바로세우겠다고 공언했다. 이른바 ‘줄푸세’라 불리는 이런 정책은 박근혜정부에도 계속되었고, 세월호 사고가 나기 직전에도 대통령은 규제는 암덩어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암덩어리인 것은 규제가 아니라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규제 작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규제 완화야말로 암덩이가 아닐 수 없다. 불법, 탈법, 편법,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비리와 거래야말로 난치병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관료는 바뀌지 않는다. 이런 관료중심 사회는 해수부마피아, 교육부마피아, 원전마피아 같은 이름의 불패조직을 사회 곳곳에서 만들어왔다. 그들은 고시 합격 이후 평생 승진하는 길만을 걸어왔고 퇴임 후에도 해난사고의 원인을 눈감아주거나, 비리사학의 총장이 되어 비리재단 복귀의 길을 열어주거나, 불량한 원전부품이 납품되는 길을 터주었다. 이제 그들도 평생 누려온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청렴한 길로 가야한다. 오랜 유착, 전관예우 관행, 특혜를 누리고 봐주고 눈감아주는 일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런 관행과 유착과 비리가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배를 죽음의 항로로 몰고 가는 것이다. 정의, 원칙, 기준이 바로 서고, 윤리적인 사회와 투명하고 공정한 조직운영이 가능해야 국민을 실은 배가 생명의 항로로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김우창 선생의 말대로 지붕의 패널을 선정하고 볼트 하나를 박는 것과 같은 작은 일에도 성실한 윤리 의식이 따르지 않으면 마우나리조트 체육관처럼 붕괴하고 마는 것이다.“재난은 우리가 속한 지역사회의 건강과 사회의 정의가 우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레베키 솔닛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외형적인 성장, 양적 발전에 매달리면서 폭압적 근대화의 길을 걸어왔다. 폭압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대형 사고를 수없이 겪어왔다. 청주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1993년 1월), 서해 훼리호 침몰(1993년 10월),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 충주호 유람선 화재(1994년 10월),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6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2003년 2월), 올해 초 마우나 리조트 붕괴 사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고들로 전시보다 많은 인명이 희생 되었다. 울리히 벡은 이런 사회를 위험사회(risk society)라 부른다.
위험사회란 역사상 유례없이 거대한 풍요를 이룩한 근대 산업 사회의 원리와 구조 자체가 파멸적인 재앙의 사회적 근원으로 변모하는 사회를 뜻한다. 위험이 평상적 지각범위를 벗어나고 산업의 논리 속에서 체계적으로 재생산되면서 현대 산업사회는 위험사회로 이행된다고 울리히 벡은 주장한다.
재앙은 더 이상 묵시론적인 공갈이나 협박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묵시론, 즉 파멸이다. 현대의 위험은 더 이상 무릅쓸 수 있는 위험이 아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경제적 부를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경제적 부를 희생할지라도 위험을 사전에 철저히 봉쇄하는 것, 이것이 위험사회에서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발전경로이다. 성찰적 근대화, 성찰하는 근대화로 가야 한다.
이 책을 번역한 홍성태교수는 최근 ㅈ 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독일은 위험한 과학기술을 사용하지만 잘 정비된 선진국형 위험사회”라며 “하지만 우리나라는 위험한 과학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정비되지 않은 후진적 위험사회”라고 말했다. 이어 “독일처럼 구조적 비리가 거의 없고 잘 정비된 사회에서도 현대 과학기술 자체에 내재된 위험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게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이론이지만 우리나라는 여기에 비리구조까지 만연된 ‘악성 위험사회’가 됐다”고 비판했다.
홍 교수는 2008년 펴낸 『대한민국 위험사회』에서 “제도와 기술이 제대로 작동해도 문제인 판에 그마저도 부패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위험사회 한국’은 기술적 대응이 아닌 사회적 대응, 부문적 대응이 아닌 총체적 대응을 요청한다.”고 말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4월 16일을 안전한 사회, 국민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 가기 위한 출발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금 미안해 하는 마음의 내용다운 내용을 채울 수 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서해훼리호가 침몰하고 /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지하철이 불타도 /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을 것이다 / 분노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슬픔은 장마처럼 지나가고 / 아, 세상은 또 변하지 않을 것이다 (....) / 촛불시위와 행진과 민주주의가 더 큰 재난이라 여기는 / 저들이 명령을 하는 동안은, 결코”(백무산 시 「스물 두 살 박지영선장」중에서)
백무산 시인이 탄식하듯 이렇게 귀결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울리히 벡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위험은 특수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닌다. 지금까지 비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세월호 참사가 그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비정치적인 사고가 가장 정치적인 폭발력을 지니는 것이 위험사회의 특징이다.
박근혜대통령은 위기에 대해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정치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빠른 행보가 그걸 보여준다. 그러나 그에게 없는 것이 있다. 진정성이다. 진심으로 함께 슬퍼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이 안보인다. 국화꽃을 들고 합동분향소를 찾은 대통령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 최근 <창비 주간 논평>에서 박성우 교수는 박근혜대통령의 진도 방문을 “실종된 세월호 희생자를 찾기 위한 방문이 아니라, 실종된 대통령 지지율을 찾기 위한 방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종자의 가족이 무릎을 꿇고 울며 두 손을 모아 아이들을 찾아달라고 비는데 그걸 내려다보고 서 있는 대통령이어서는 안 된다. 통곡하는 가족들 곁으로 내려가 함께 끌어안고 우는 대통령이어야 한다. 국민은 그런 지도자를 보고 싶어 한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사과문을 읽는 대통령의 사과를 희생자 가족들은 사과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리더(leader)를 뽑아야 했는데 리더(reader)를 뽑았다며 한탄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함께 아파하는 리더(leader), 슬픔 속으로 뛰어드는 지도자, 재난 속에서 몸을 던지는 선장이 우리 곁에 없는 점이 우리를 더 참혹하게 한다.
“목숨을 거는 일은 내가 맨 앞에 서겠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배에 남겠다.”이렇게 지휘하는 선장을 우리는 갖지 못했다. “승객들을 구하다가 살아남는 사람도 있고, 남은 살렸지만 자신은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구하라. 그러면 신의 손길이 여러분을 붙잡아 주실 것이다. 어린 아이와 여자를 먼저 구하라.”이렇게 명령하며 위기를 헤쳐 나가는 선장을 우리는 갖지 못했다. 그런 점이 우리를 참혹하게 한다.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것인가?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를 모아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책을 낸 레베카 솔닛은 “재난 속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모임을 폭도로 여겨 두려워하지만 많은 이들은 (....) 시민사회의 경험으로 소중히 간직한다.”고 말한다. “재난은 피해자들을 다시 공적이고 집단적인 삶으로 돌아가게”하고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던 연대와 이타주의가 다시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라는 재난에서 참으로 부끄럽고 참혹한 우리 내면의 후진성을 보았다. 그 후진성이 원전사고처럼 초대형 사고를 불러올 가능성이 많다. ‘가만히 있으라’는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온 학생들의 침묵 시위는 ‘가만 있지 말라’,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역설로 읽게 된다. 이 경험은 위험사회를 불신사회로 만들어 갈 수 있다. 허무주의와 각자 도생의 길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이 절망적인 재난의 한복판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것인가? 어쩌면 정부가 아니라 민간에서 만들어질 확률이 높다. 재난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달려와 사람을 구하는 이들은 가까운 주민들이다. 마지막까지 남아 같이 위로해 주는 이들도 그들이다. 정부가 아니라 국민들이 희망을 만들어 낼 것이다.
자신은 정식 직원도 아닌데“선원은 마지막까지 배를 지킨다!”고 말하며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아이들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끝내 죽음으로 돌아온 스물두 살 박지영 그녀가 우리들의 정신적 선장이라고 백무산시인은 말한다. 그녀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친구를 구하겠다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 정차웅군에게서, 그에게 살아 있을 때 고백하지 못한 사랑의 편지를 써서 유리병에 붙여 놓은 여자 친구에게서, 구명조끼 끈을 서로 묶던 학생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최후의 순간에 선택했던 “엄마, 사랑해 ”라는 문자에서, 그리고 그들이 동영상으로 남기고 간 마지막 기도의 육성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침묵하면 세월호는 계속됩니다”라고 말하며 거리로 나오는 엄마들, 그들의 노란리본에서 찾아야 한다.
아직도 남아 있는 슬픔이 많다. 지금 분노의 힘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는 실종자 가족들이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상실과 충격 속에서 분노는 곧 저항의 힘이며 공허감 속에 붙잡을 수 있는 하나의 닻이라고 한다. 분노의 강도가 감당하기 버거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사랑의 양과 비례하기 때문일 뿐이며, 그래서 분노를 허락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분노는 치유과정의 필수단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분노, 그들의 슬픔 곁으로 가야 한다. 학생들이 공포와 두려움과 비명 속에서 엄마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듯 우리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동안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널 보내니
가난만 남았구나
--어느 실종자 가족의 글
피해를 본 위도 주민 대부분은 1년을 못 버티고 뭍으로 나갔다. 바다만 바라보면 눈물이 나는데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잊으려고 노력하다가 못 견딜 정도가 되면 병원을 찾아갔다. 가서 링거 맞고 누워 있다 오곤 했다.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로 동생을 잃은 신명(59)씨
자식의 사망 소식 뒤에 살아남은 부모들이 견뎌야 했던 처벌은 우울증과 이혼이었습니다.(...) 조부모님들은 손자, 손녀 사고 후 3년 사이로 많이들 돌아가셨습니다. 정신없는 두어 달의 기간이 지나고, 외부에 분노하고 항의해도 어쩔 수 없음을 인식할 때 화의 방향이 내부로 향하게 됩니다.(...) 스스로 책망하기 시작할 때부터는 입을 열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스스로를 괴롭히다 살아도 당신의 삶이 아닌 삶을 살게 됩니다.(...) 살아남은 급우들끼리도 서로를 피할 겁니다. 많은 단원고 학생들이 자퇴를 할 겁니다. 살아남은 제가 그랬듯 제 친구들이 그랬듯 말입니다.
--2000년 부일외고 수학여행 참사 생존자 김은진
고잔동 한 술집 주인은 “어제 딱 두 테이블 받았다. 손님 셋이 와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술만 들이붓더라. 계산 하러 일어서서는 ‘진도에서 아들 건지고 왔다’며 울음을 터뜨리더라. 순식간에 가게 전체가 눈물 바다가 됐다.”고 전했다. 거리는 이미 상중(喪中)이었다. 동네 전체가 장례식장이라며 한 50대 남성이 한숨을 쉬었다.
--세월호 침몰 슬픔에 빠진 고잔 1동
많은 이들이 슬픔의 끝에 이런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들을 고통 속에 방치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들의 트라우마, 이들의 고통은 평생 갈 것이다. 이들의 고통, 이들의 가난 곁으로 가야 한다. 이들과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분노해야 한다. 이들이 바라는 대로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책을 마련하고, 이들의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긴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고, 중장기적으로 준비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지속지원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상처받은 희생자, 실종자 가족들의 일상이 회복되도록 돕고,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고잔 1동으로, 와동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들 한 분 한 분, 그리고 살아남은 학생과 단원고의 교사들을 도와야 한다. 특별법에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야 하고, 안산이 안전한 도시, 힐링 도시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것은 안산을 치유하는 일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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