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개흥사(開興寺)
임병식 rbs1144@daum.net
나이 들수록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 바로 고향에 대한 기억으로 유년시절의 추억이 그것이다. 다른 것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차차로 사라져 가는데 유년의 기억은 그렇지 않고 물리 법칙을 벗어나 가역성을 보인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태어나서 인지능력이 생기고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를 거치면서 눈으로 본 사물들을 마음속에 고스란히 새겨놓은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일까. 치매환자나, 오랫동안 마취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이 어렴풋이 기억을 되찾은 것은 최근의 일보다는 오래전의 일을 더 많이 떠올린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내 기억 속에는 열 살 전후 기억이 뇌리에 박히어 요지부동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기억 속에는 처음으로 마주한 큰 바위, 지네처럼 긴 새까만 기차, 사람을 압도하던 노거수 당산나무도 해당하지만, 그밖에도 실체를 만나보지 못한 것도 있다.
나는 어렸을 적 어른들로부터 태어난 고을에 아주 큰 절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절은 개흥사(開興寺). 오봉산 아래에 있었는데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 절은 인근에 작은 절과 암자를 여개나 거느렸다고 한다.
그 말을 들고서 ‘얼마나 대단했을까.’ 하고 늘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다가 소년이 되었을 때 2km쯤 떨어진 오봉산 부근에 사는 친한 친구가 생겨서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나와 연배가 비슷해서인지 아는 게 없이, 다만 절 골의 땅을 파보면 도자기 파편이 나오고 오봉산 골짜기에서는 기와조각도 나온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 무렵에 내가 만나본 것은 돌장승이었다. 특이한 형태의 것이 수문으로 가는 어느 마을 양편에 서있는데 한눈에 보아도 위압적인 것이었다. 하나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다른 하나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었다. 무섭게 생긴 형상으로 보아 악귀를 쫓거나 주술적인 장승으로 보였다.
그런데 수년전, 그 석장승의 반출지가 드러났다. 그것은 2013년 오봉산에서 개흥사지가 발견되고 군에서 발굴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이 석물은 본래 개흥사 입구에 새워져 있었는데 절이 폐사가 되자 조운선(漕運船)의 안전을 위해서 지금의 해창 바닷가 가까운 곳에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이후에 학술조사를 통하여 절의 규모도 밝혀졌다. 대가람의 위용을 보여주는 방대한 크기가 드러난 것이다.
절 배치는 계곡 양단에 4.8m의 석축을 쌓아올린 가운데 중선루(仲宣樓),남루(南樓 ), 서원(西院)과 동원(東院)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중정(中庭)이 위치했다.
본당에는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그 불상은 나중에 송광사 동암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절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17세기중엽, 천광사 박사형(朴士亨.1635-1705)이 재차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절의 계수스님이 1674년 (현종15년)에 해평 옛 나루터에 석교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 이 석장승도 함께 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절은 수차례에 걸쳐 폐사와 복구가 이루어진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당대를 살다간 문인의 시문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즉, 오봉(五峰) 정사제(鄭思梯.1556-1594)선생의 시에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바로 “옛 사찰에서 종소리 들려오고”라는 대목을 시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선생이 폐허가 된 사찰을 보고난 후, 선생보다 조금 후대인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1573-1654)선생의 글에 그 정황이 나타난다. 다시 개흥사를 둘러보았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중창사업의 시기를 엿볼 수 있다. 그럼으로 개흥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폐사가 되었다가 20여년 후인 1620년경에 다시 재건 된 것이다.
오봉선생은 오봉산을 사랑하는 시인이었다. 살아생전 애마를 타고 오봉산에 올라 기이한 절경에 취하고 용추석벽에 ‘龍湫)라는 친필을 새겨놓기도 했다. 선생은 벼슬길에서 잠시 내려와 모친상을 치르던 중 왜군이 내륙에 진출하여 백성을 도륙하자 의병을 일으켜 남원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해가 1594년. 선생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그나마 충복(忠僕) 보리쇠가 말을 타고 유품을 챙겨 돌아와 그것으로 초혼장을 치렀다. 나중에 보리쇠와 말이 죽자 그 아래에다 나란히 묻어주었단다. 오봉산을 사랑했던 분인 만큼 오봉산 산자락에 유택을 지은 것이다.
나는 종종 개흥사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얼마나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을까. 전면에는 큰오봉산의 산줄기가 감싸고 동편에는 작은 오봉산의 기암괴석이 즐비하니 얼마나 운치가 있었으랴. 거기가다 눈앞의 칼바위는 멋을 더했을 것이다.
작은 오봉산 정상의 조새바위, 책상바위, 전망바위, 외계인바위, 각시바위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거기다 뒤편에는 높이 솟은 동석바위가 머리위에 소나무를 키우고 그 아래에는 두꺼비를 닮은 큰 바위가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두꺼비 蟾(섬)자를 따서 섬동이다. 오봉산은 이러한 기암괴석이 어울려서 그야말로 신비경을 보여준다.
나는 소싯적에 방학 때면 아랫마을 가장골 사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면서 가까이서 빼어난 오봉산 산수를 실컷 구경했다. 친구 집은 오봉산 뒤편에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색다른 멋을 풍겼다. 절벽경이 거의 3,4백 미터나 뻗어 내려서 그 정경이 보는 이의 눈을 압도했다.
나중에 화순 이서 적벽이 뛰어나다기에 보고나서 실망한 적도 있다. 가서보니 그곳은 내가 보기에 오봉산 뒤쪽의 비경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가 바라보던 절벽경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은 보름달이 뜬 날이어서 들녘에 나가 오봉산을 바라보았는데 그 경치가 환상적이었다. 바위는 달빛에 어려 몽환적인 정취를 풍기고 천 길 낭떠러지의 석벽은 마치 커다란 휘장을 두르는 듯하였다. 그걸 보노라니 시흥이 절로 일어났다.
나는 그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개흥사가 반드시 네 번째로 개창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어 한때 명성을 날리다가 사라진 보성 덤벙 분청사기 도요지 복원과 1950년대 구들장 유적까지 복원한다면 이 일대는 명실상부 이목을 끄는 명승지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돌아보면 화재가 난 사찰도 금방 다시 짓고, 전에 없던 사찰도 새로이 생겨나기도 하는데, 기존의 절터가 그대로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복원이 되지 않겠는가. 그대로 두고 방치하는 건 문제가 아닌가. 바라는 바는 부디 뜻있는 발원자(發願者)가 나타나 사라진 개흥사가 중창불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2023)
첫댓글 청석님의 고향 향수가 저에게도 메아리 칩니다. 고향의 큰 바위, 연기 뿜으며 칙칙폭폭 가는 새까만 기차, 노거수 당산나무는 저에게도 저 만치 눈에 선합니다. 보성에 그렇게도 웅장하고 멋진 개흥사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니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대원각 소유주 김영한 보살 같은 분이 나타나서 법정에게 시주하여 성북구 길상사를 세우듯 그런 일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없었던 절도 짓는데 개흥사 터지에 그절을 다섯번째로 복원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성 오봉산에 조새, 책상, 전망, 외계인, 각시, 동석바위와 같은 기암괴석이 많아 화순 이서 적벽보다 뛰어난 절경이니 참으로 아름다운 산수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버금가는 절경이지 싶습니다. 보성은 산수가 뛰어나 청석님과 같은 문재가 나왔군요!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산수가 좋아 고향을 지키며 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렵게 구들장을 뜨는 석공생활을 하고 지냈는데, 근자에 사업사는 아들이 잘 되어
고향에다 새집을 지었습니다.
그말을 듣고 산수화 한폭을 표구하여 걸어주었는데, 그만 그 친구가 작년에 작고를 했습니다.
전에도 감탄을 했지만 그날 보라보던 오봉산 졀벽경은 더욱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일대에 커다란 사찰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불사가 일어나 다시금 개흥사를 구경할수 있었으면 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상상으로나마 대가람 개흥사를 그려봅니다 그곳의 적벽을 보고 싶어집니다
추억은 아득한 시절을 건너 더욱 뚜렷이 펼쳐지는 마력을 지닌 것같습니다 저도 사라호 태풍에 쓰러진 고향 집 백양나무들의 모습이며 왕대나무 울을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의 고향사랑의 애틋한 정이
제 가슴에 그대로 전이된 듯합니다
개흥사는 복원되리라 믿습니다
한때 번창하다가 사라진 개흥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쓸쓸해 집니다.
이 고을은 예전에 아흡개의 정자가 있어 구정자라고 불릴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지금도 지명이 풍경정이란 지명이 있기도 하지요.
개흥사가 다시 세워진다면 관광지로도 크게 한몫을 할것인데 방치되고 있어서 답답합니다.
2023 창작수필 가을호
2023 경찰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