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著書)이야기
임병식 rbs1144@daum.net
산책을 하면서 종종 들르는 곳이 있다. 도서관인데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데다 산책하기 좋도록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어 즐겨 찾아간다. 이 도서관은 고장에서는 제일 규모가 크다. 거기에는 한쪽에 지방 문인들의 서가를 마련해놓고 있는데 내 저서도 모둠으로 꽂혀있다.
수년 전 도서관을 개관을 하면서 한쪽에 코너를 마련해준 것이다. 당시 나는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을 배정받았다. 그것은 내가 펴낸 저서가 비교적 많고 중학교 교과서에 글이 실려있어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하여 대접해 준 것이다.
나는 그동안 16권의 책을 펴냈다. 그런만큼 지역작가를 외부에 홍보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듯 하다. 나의 저서는 서실을 들어서면 바로 보인다. 그러데 보관된 저서들은 모두 ‘대출제한’이라는 스티카를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이 책들은 대출을 해주기 보다는 지역작가의 활동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론 그렇게 해둔 것은 대출로 인한 책 분실을 막고자 하는 뜻도 있는것 같다.
1990년 4월에 첫 수필집 ‘지난 세월 한 허리를 ’을 냈다. 등단한지 1년만이었다. 그렇게 신속히 책을 낸 것은 그만큼 써두었던 작품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도 등단만 하지 않았지, 내 무의식 속에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잠재의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실제로도 직장과 관련된 잡지사에 매월 두 차례씩 수필을 연재하고 있었고, 직장에서의 각종 기념사나 추모사 등을 단골로 집필을 했었다. 여순사건과 관련된 48 페이지짜리 ‘여수경찰 수난사’도 작성한 터였다.
첫 수필집을 내면서 원로 선배경찰관의 도움을 받았다. 이기진 시인님이 중앙문단에서 활동을 했는데, 등단 추천을 받게 해준 것은 몰론, 여러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특히 책 표지화에 들어간 그림은 시인님이 배려해준 것이었다. 들녘의 농가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림인데, 여간 정감이 가는 것이 아니다. 이 그림에 이끌린 것은 화가의 이력에도 관계가 있다. 그림의 주인공 정영태화백은 시인이자 수석애호가인데 일찍이 그분이 펴낸 ‘수석의 입문’이라는 책을 통하여 수석의 묘미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시인께서 그분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어 표지화로 사용할 수 있었다. 표지화에 유명화가의 그림을 넣은 것은 내 저서 중 이때가 유일하다.
첫 출간된 책은 여러 면에서 지역에서는 기록을 세웠다. 우선 지역에서 책을 펴낸 후 ‘출판기념회’라는 제법 격식을 갖춘 행사는 지역최초로 행해졌다. 그것도 중앙원로 문인 7,8분이 참석하고 평론가가 직접 내려와 작품해설을 했다. 이 행사는 직장에서 거서적(擧署的)으로 해주었는데, 교통안내까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한 배려에 힘입어 책이 재판을 하게 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 덕분에 부채를 하나도지지 않고 출판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 비치된 저서를 일별하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무엇보다도 생각나는 것은 2002년 8월에 펴낸 ‘당신들의 사는법’이다. 이 책을 펴낸 시기는 직장에서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인데, 나는 서문에다 이런 말을 언급했다.
“수필은 아무래도 도기류(陶器類)보다는 석물(石物)에 가깝다.”
이것은 그 어떤 문학이론가나 평론가가 한 말이 아니고, 내가 경험에 의해 스스로 창안한 말이었다. 수필을 쓸 때 여러 이야기를 도기를 만들 때처럼 덧붙여서는 아니 되고 조각가가 석물을 이용하여 구상한 작품을 조각하듯이 해야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이것은 많은 작가로부터 동의를 받고 있다. 특히 당시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으로 계시던 조경희회장님은 그 언급한 서문을 보셨는지 내게 “임병식씨는 수필이 무언지 알고 쓰는 작가”라는 전화를 손수 걸어주기도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내 글이 교과서에 실린 일이다. 어느 날 걸려온 전화를 잊을 수가 없는데, 하루는 전화를 받으니 “ 작품을 교과서에 싣고자 하니 양해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양해는 무슨 양해인가.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는 나에게 그쪽에서는 이렇게 정중하게 말을 하였다.
내가 알기로 교과서에 글을 싣는 일은 풀판사측에서 작가에게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듣고 있다. 교육차원에서 학생들에게 배움을 열어주는 문제이므로 일방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해를 구하다니 놀라웠다.
중학과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글쓰기의 중요성, 퇴고의 중요성을 잘 알릴 수 있는 작품을 찾다가 내 글이 눈에 띄어서 채택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내가 따로 의견을 제시할 입장도 아니어서 고맙다는 말만 하고 끝났다.
이후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전으로 치면 학습수련장같은 것인데 ‘나만의 노하우’라는 문제집에서는 작품에 관한 문제가 무려 80문제가 넘게 출제되어 있었다.
문제 중에는 저자인 나도 헷갈릴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문제가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학생들이 고득점을 위해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흐뭇해지곤 한다.
교과서는 나를 알리는 홍보를 톡톡해 내주고 있다. 그 바람에 얼마 전에는 70년 연대 등단작가 변해명, 유혜자, 이정림, 정목일이 펴낸 ‘시간의 대장장이’에 이어 80년대 등단작가 6인 선집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거기에는 현대문학에서 반숙자, 염정임. 월간문학에서 김학, 김수봉. 한국수필에서 한동희, 임병식이 선정되었는데 이중에는 벌써 고인이 된 분이 두 분이나 된다.
나는 글을 써오는 동안 몇 차례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되었다. 먼저 광주에서 1993년 펴낸 ‘금화문화’에서 <문인경찰관>이란 타이틀로 화보와 함께 집중 조명이 되고, 2008년에는 대한문학 가을호에 특집이 실렸다. 그리고 2014년에는 수필전문지 ‘수필세계’에 ,<우리시대의 수필작가>편에 소개가 되었다.
한편, 수필선집으로 2017년 선우미디에서 ‘선무명수필선’ 40번째 <왕거미 집을 보면서>가 출간되고, 작년에는 한국수필 100주년 100인에 선정되어 일곱 번째로 <오직 수필하나 붙들고>를 펴내기도 했다.
작품수를 헤아려보니 수필작품이 총 1547편, 단문이 70편, 수필작법에 관한 글이 80여 편이다. 그간 작품집을 16권을 냈지만 아직도 묶어내야 할 글이 두권 분량이 남았다.
글을 쓴 이력을 떠올려본다. 중학시절 ‘학원’지를 접한 후 그곳에 있는 ‘우리네 동산’에 글을 싣기 시작한 후부터 학원문학상, 작품공모에 참가하여 조선대 총장상, 서라벌예대학장상, 동국대총장상을 받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런 보상으로 작년에는 전라남도로부터 ‘명예예술인’으로 지정받았다. 동판이 전달되었는데 이것이 내 문학인생의 한부분을 보상받았다고 할까.
나는 아직도 문학에 대한 갈증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오직 아직도 작품다운 작품을 써내지 못했다는 자괴심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매진중이다. 마지막 불꽃같은 정열을 불태워 역작 하나를 꼭 남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이들어 없어진 잠을 아껴서 안두(案頭)에 않아 신열 앓듯이 골몰한다. (2024)
첫댓글 등단하신 지도 어언 35년이 흘러갔군요
수많은 문인이 등단을 통해 세상에 얼굴을 내밀어왔지만 선생님처럼 엄청난 다작을 출산하며 일가를 이룬 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첫 작품집을 출간하며 춯판기념회까지 성대하게 여신 이래 35성상의 굽이굽이 새겨진 수필 역정의 파노라마에 밀려오는 감동과 더불어 존경의 마음과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부디 건강을 지키시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가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문학동네를 서성였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글을 쓰야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매진을 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많은 글을 써왔는데 아직도 허기가 진 것은 작품다운 작품을 써내지 못해서 그러하지 않는가 합니다.
글을 쓰면서 이희순선생같은 참한 후배를 만난것을 큰 복으로 생각합니다. 늘 가까이 있어 주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