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후지지(身後之地)
임병식 rbs1144@daum.net
사후에 죽어서 묻힐 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살아 있을 때 미리서 잡아둔, 소위 신후지지(身後之地)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면서 고향 선산에 유택을 마련했는데 그곳은 수년 전에 돌아가신 형수님의 산소 옆자리였다.
그때 나중에 내가 묻힐 자리를 감안하여 약간 간격을 띄어서 묘를 썼다. 그리하다보니 옆에 자연스레 빈공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내를 땅에 묻는 황망한 중에도 그 빈자리가 여간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위치상 우리 마을이 건너다보이고 동구에 서있는 300년 넘은 당산나무 마주 보이는 곳이다. 그런 만큼 타지라는 느낌이 없고 온전히 고향의 품안에 안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윤후명의 단편소설 '산역山役'을 보면 주인공의 유언에 따라 바다가 보이는 곳에다 묫자리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주인공이 죽어서 바다를 조망하기를 소망했다면 나는 그렇게 간절히 소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왕이면 당산나무가 훤히 보이는 곳인 만큼 금상첨화가 아닌가 한다.
이 느티나무로 말하면 우리 마을의 역사와 함께하고 동고동락을 같이 한 나무이다. 조선중엽 영조시대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때 심어진 이후로 이 나무는 변함없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마을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는 터줏대감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마을이 쇄락하여 기껏 10호에 지나지 않지만 한때는 50호 가까이 살았고, 장정들이 넘쳐나 마을대항 배구대회나 축구경기가 열리면 넉넉히 한 팀을 만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외지로 학교를 다니는 학생 수도 10여명이 훨씬 넘었다.
가까운 곳에 장이라도 서는 날은 그 발길이 쉼 없이 이어지고 모내기나 풀베기를 할 때는 늘어선 길게 행렬이 볼만하였다. 그랬으니 얼마나 보고 들은 이야기 또한 많겠는가.
그런 측면 말고도 이 당산나무는 우리 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십 수 년 전에 강력한 태풍으로 몸통이 찢어지고 가지가 꺾이어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했는데, 군이나 면에서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를 아우가 나서서 사비를 들어 나무박사를 불러와 치료를 시켰던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각별한가.
지금은 당산나무가 완전히 회복이 되어 왕성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다. 이런 기세라면 앞으로 200년은 능히 더 생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 내가 죽어 혼백이나마 오래 지켜 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소설속의 주인공이 바라는 그의 소망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중 고향땅에 묻힌다면 고향에 얽힌 사연들을 속속들이 알아보고 싶다. 어떤 분이 어떤 삶을 살다갔는지 퍽 궁금해서이다. 영조시대 이후만 해도 국가적인 변란, 자연재해, 무서운 질병들이 훑고 지나갔던가. 탐관오리의 횡포로 얼마나 억눌린 삶을 살았으며 각종 민란과 기근, 일제의 침략과 해방공간, 6.25를 겪으며 얼마나 신산한 삶을 살았을 것인가.
한마을에 살면서 자작일촌을 했던 만큼 부계는 임씨의 피를 어어 받았지만 모계는 각기 달랐으니 그 혼맥(婚脈) 지도도 무척 궁금하다.
한 고을은 비슷한 언어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고장에 살던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서로가 융합되어 만들어낸 말들이다. 나는 어려서 보고 들으면서 어떤 언어습관이 퍽이나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것은 어른들의 어투가 상대방에게 말을 걸면서 일상으로 이런 말들을 쓰는 것이었다.
“어야, 말 좀 물어 볼라네.”
"내가 괜한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만."
이렇게 꼭 전재를 달았다. 그만큼 말을 조심하여 건넨다고 할까. 이것은 다른 지방에서는 즐겨 쓰는 말이 아니다. 내가 그간 여러 고을을 옮겨가며 살아 보았지만 이런 어법과 어투를 쓰는 곳은 고향사람 말고 달리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것 하나만 봐도 얼마나 독특하고 흥미로운가.
거기다가 고향사람들은 ' 수말스럽네( 다소곳하고 착하다.)', '연득없이(나설 곳이 아닌 곳에서 나서다.), '영판(특별하게)'와 같은 말을 일상으로 사용하였다. 그런 분들이 생을 마친 후에는 모두 고향 산자락에 묻혀있다.
그분들은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해방공간을 거치며 농부로 살면서 농번기 때는 농사일에 매달리고 농한기 때는 목돈을 벌기 위해 가마니를 짜거나 새끼를 꼬았다. 그런 한편으로 목화를 거두고 삼을 재배하여 반제품으로 내다 팔아 가용에 보태었다.
나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 대한 강한 애향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마을은 조금 특별한 점이 있었다. 구성원들이 누구를 모함하거나 척을 짓고 사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여간 특별하지 않는데, 6.25를 겪으며 인동의 다른 마을에서는 난발하는 고발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으나 우리 마을만은 한건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밤손님(부역자)으로 활동한 사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고, 희생이 없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똘똘 뭉쳐서 보호해주어서였다. 그러니 얼마나 특별한가. 그런 점에서 나는 신후지지를 태어나고 자란 고향땅에 마련한 것을 퍽이나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밖에도 이 선산이 근래에 매입한 것이 아니고 오래 전에 조상님이 소유한 산을 물어 받았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내력을 잠깐 밝히자면 이 산은 증조모님이 친정에서 시집오면서 지참금(?)으로 가져오셨던 것이다. 그런 만큼 연조가 깊고 유서가 깊은 땅이기에 여간 의미가 있기도 하다.
나는 형님이 잘 들고, 형수님과 아내가 잠들어 있으며 나중에는 나도 함께할 이곳 아주 소중하게 여겨진다. 이곳에다 나는 앞으로 틈이 나는 대로 꽃나무를 심어갈까 한다. 수종으로는 기왕이면 한해살이의 꽃나무가 아니라 꽃이 피어 오래가는 백일홍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아무튼 이제 안식처는 정해져서 마음이 한결 놓인다. 벌써 내 나이도 어느덧 80 문턱이다. 사후의 신후지지가 아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는 나이이다. 누구 말마따나 이승을 떠나 소풍갈 때도 머지않은 것이다. 그때는 어릴 적 한 지붕 아래서 대식구가 오순도순 모여 살 때처럼 모여지내는 날도 머지않았음이다. 자연스레 마음이 숙연해진다. (2024)
첫댓글 고향산천의 신후지지를 관망하신 감회의 글을 대하니 자연 숙연해집니다.
조상님들께 고향에 얽힌 사연들을 낱낱이 알아보고 싶으시다는 대목에 이르니 불현듯 고조부님에서부터 조부모님의 산소와 부모님의 묘소가 눈앞에 전개되는군요.생전에 안식처를 마련해두셨으니 마음 든든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시대픙조가 하루 다르게 바뀌다 보니 수목장이나 산분장이 널리 행해지고 국민 절반 이상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지요.
"실례합니다. 말 좀 물어보겠습니다"는 제 전매특허입니다~
이전에는 딱히 묻힐곳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집사람의 묘를 쓰면서 자연스레 자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시름을 던 기분입니다.
바로보이는 곳에 300년 넘은 당산나무가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앞으로도 200년은 더 살것이니 혼령이나마
바라보며 지낼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야, 말 좀 물어 볼라네." "내가 괜한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만" 이말을 쓰는 고향 마을 300년된 당산나무가 보이는곳 이라면 정말 愛着이 가시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참으로 순박하고 겸손하니 얼마나 살기 좋은 마을입니까! 身後之地가 明堂입니다. 생전에 존경하는 형님내외분 사모님도 묻히고 있으니 安葬이지 싶습니다. 紫薇花가 피는 그곳이라면 후손들이 성묘할 때 마다 기쁨을 않고 찾아들 것입니다. 마음은 청춘인데 身後之地를 떠오르니 肅然한 기분입니다.^^
향토의 말은 몸안의 디엔에이와 같아서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끔씩 고향사람들이 쓰던 말, 어투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묘지는 다니면서 차차로 돌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