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呂不韋: ?~BC 235)는 위(韋)나라 복양(福陽:지금의 하남성 복양 서남) 사람으로 양적(陽翟)의 대상인이었다. 그는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 장양왕(庄襄王)과 시황제(始皇帝) 때 재상을 역임하였다.
진(秦) 소왕(昭王) 40년에 진나라 태자가 죽자, 소왕 42년에 소왕의 차남 안국군(安國君)을 태자로 옹립하였다. 안국군에게는 자녀가 20여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 정실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안국군에게는 자초(子楚)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자초의 어머니 하희(夏姬)는 안국군의 총애를 얻지 못하였다. 자초는 진나라를 위해서 조(趙)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그때 진나라가 조나라를 자주 침공하였기 때문에 조나라에서는 인질로 와 있던 자초를 매우 박대했다.
자초는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매우 곤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번은 여불위가 조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에 장사차 들렀다가 자초가 겪고 있는 생활상을 보고, "이것은 정말로 얻기 힘든 소중한 보물이다!"라고 하면서 자초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자초에게 "나는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부귀한 천자로 만들어주겠소."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자초는 웃으면서, "당신은 먼저 자신부터 부귀해진 다음에 나를 부귀하게 하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여불위는 "당신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부귀는 당신이 부귀해진 다음에 실현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초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불위는 말했다.
"진나라 왕은 늙었으며 안국군이 지금 태자입니다. 듣자하니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가장 총애하지만, 화양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후계자를 추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화양부인 뿐입니다. 당신은 20여명의 형제들 중에서 서열이 중간인데다가 타국에서 오랫동안 인질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안국군의 중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설령 소왕이 돌아가신 후 안국군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해도 당신은 다른 공자들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초는 깊이 공감하면서 말했다.
"그러면 선생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여불위가 대답했다.
"당신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데다 타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친구들에게 줄 재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문하에 식객을 들일 수도 없습니다. 나는 비록 부유하지는 못하지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당신을 후계자로 지목하도록 설득해 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초는 급히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말하였다.
"선생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진나라를 나누어 선생과 함께 영화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불위는 금 500근을 자초에게 주어 생활비와 빈객을 받아들이는데 쓰도록 하고, 다시 금 500근으로 진귀한 보석을 마련하여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에 들어간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과 그녀의 친지들을 두루 만나면서 많은 보석을 선사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공자 자초의 재능과 덕망을 칭찬하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자초가 천하의 어진 선비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도, 항상 "화양부인이 나의 정신적 지주이며 나는 밤낮으로 부왕과 화양부인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는 말을 한다고 전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화양부인은 아주 기뻐하였다. 게다가 이미 여불위에게 매수된 화양부인의 언니가 화양부인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미색으로 총애를 얻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 미색을 잃어 버리면 더 이상 총애를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부인은 안국군을 모시고 계시니, 이러한 때에 부인이 후계자를 지목하십시오. 그러면 안국군이 왕위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안국군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가 왕위를 이어받으면 그때에도 영원히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백대(百代)의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총애를 잃었을 때를 대비해 두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 미색이 쇠하여 사랑이 시든 후에는 이런 말을 하여도 안국군이 들어주겠습니까? 지금 여러 공자들 중에서 자초가 가장 어질고 효성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서열이 중간이어서 국법에 따라 작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 그 어미도 총애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부인에게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부인께서 이러한 때에 자초를 후계자로 내세우신다면, 부인은 진나라에서 평생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화양부인은 이 말을 듣고 깊이 공감했다. 어느 날 화양부인은 안국군을 모신 자리에서 조용히 자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가 비록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지만 공자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효성스러워 조나라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울면서, "저는 대왕의 과분한 사랑을 입어 대왕을 곁에서 모실 수 있게 되었지만, 불행히도 슬하에 자식이 없으니 자초를 후계자로 삼아 자식이 없는 천첩의 한을 씻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안국군은 화양부인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이토록 간절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도록 승낙했다. 안국군과 화양부인은 자초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고 여불위를 자초의 스승으로 삼아 그를 곁에서 항상 보필하도록 했다. 이로써 자초는 제후들 사이에 그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여불위의 첩들 중에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 능한 여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어느날 자초는 여불위와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는 첫눈에 반해 버렸다. 주흥이 무르익자 자초는 여불위에게 술을 권하면서 그녀를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했다. 여불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이미 자초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이상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초에게 임신한 사실을 끝까지 숨기고 출산때가 되어서 아들을 낳았다.(BC 259) 그리하여 자초는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자초의 아들은 이름이 영정(?政)이니, 그가 바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시황제가 된다.
진 소왕 50년, 진나라는 대장 왕전을 보내어 조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공격하였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조나라에서는 자초를 죽이려고 하였다. 자초는 여불위와 상의한 끝에 황금 600근으로 감시자들을 매수한 후 조나라를 탈출했다. 조나라에서는 다시 자초의 부인과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자초의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급히 숨어서 목숨을 건졌다. 진 소왕 56년, 소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왕위를 이어받자, 화양부인은 왕비가 되고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조나라에서도 자초의 부인과 아들 영정을 진나라로 돌려보내 주었다.
안국군 효문왕(孝文王)은 즉위한지 1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태자 자초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의 어머니 화양왕후는 화양태후(華陽太后)에 봉해졌으며, 생모 하희는 하태후(夏太后)로 추대되었다. 장양왕 원년에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后)에 봉한 다음 하남(河南) 낙양(洛陽)의 십만 호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장양왕도 3년 후에 세상을 떠나고 영정(후세의 진시황)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진시황 시대에도 계속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중부(仲父)라는 존칭을 받을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유지하였다.
당시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선비들을 예로써 대우하고 그들을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여불위는 자신의 명성이 그들 4군자에 미치지 못하자 그들을 따라가기 위하여 널리 천하의 선비들을 초빙하여 후한 선물을 주고 식객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여불위의 식객은 무려 3천여명에 다달았다. 당시에는 순자(荀子)와 같이 변설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며, 그들의 책이 크게 유행하였다. 여불위는 자기의 식객들에게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술하게 하여, 그것을 하나로 묶고 ≪여씨춘추(呂氏春秋)≫라 하였다. ≪여씨춘추≫는 8람(八覽), 6론(六論), 12기(十二紀)의 총 20여만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진시대 각 유파의 학설이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여씨춘추≫가 완성되자 여불위는 그것을 함양(咸陽)의 시장에 내놓고 거기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 천금을 주겠다는 현상금을 걸었다.
진시황이 장성하였으나 태후의 음욕이 그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발각되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여불위는 성기가 크기로 유명한 노애라는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그에게 음탕한 짓을 하게 하고 성기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걸고 다니도록 했다. 이 일이 태후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여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연 이 이야기를 들은 태후는 그를 얻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를 태후에게 바치고 사람들에게 노애가 죄를 지었으니 부형(腐刑: 성기를 거세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헛소문을 내게 하였다. 여불위는 태후에게 몰래 말했다.
"노애에게 부형을 가짜로 시행하면 그를 매일 궁궐에 둘 수가 있습니다."
태후는 형을 집행하는 관리를 매수하여 가짜로 부형을 실시하게 하여, 노애의 수염과 눈썹을 뽑고 그를 내시로 발탁했다. 태후는 그를 가까이 두고 그와 사통하면서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얼마 후 태후는 임신을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궁을 옹(雍)으로 옮겨 피신하였다. 노애는 매우 많은 상금을 하사 받고 태후를 곁에서 모시면서 모든 대소사를 관장했다. 그리하여 노애의 집에는 하인이 천여명이나 되고 식객도 천여명이나 되었다.
진시황 9년, 누군가가 노애가 환관이 아니고 태후와 사통하여 아들을 둘이나 낳았으며, 진시황이 죽은 후 그녀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하였다. 진시황은 즉시 당사자들을 모두 붙잡아 진상을 밝혀내고, 상국(相國) 여불위가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해 9월, 노애의 3족을 멸하고 태후의 두 사생아를 죽인 다음 태후를 옹(雍)에 거처하게 하였다. 진시황은 여불위도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는 선왕을 보좌한 공이 너무도 많아 그 죄를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다.
진시황 10년 10월, 여불위를 상국에서 해임시켰다. 그리고 태후를 옹에서 함양으로 돌아오게 하고, 여불위를 하남의 봉지로 돌려보냈다. 그해 말, 각 제후국들의 사신과 빈객들이 엄청나게 몰려와서 여불위의 죄를 용서할 것을 청하였다. 진시황은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렇게 썼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로를 세웠기에 진나라에서 그대에게 하남의 10만호를 식읍으로 내려주었소? 그대는 진나라와 무슨 연분이 있기에 중부(仲父)라는 존칭을 가지게 되었소? 이에 여불위와 그 가족들은 촉(蜀)으로 이주할 것을 명하노라." 이에 여불위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주살될 것이 두려워 독주를 마시고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