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www.jeam.or.kr
연 락 처 : 3.1운동 순국기념관 031-369-1663
개 요 : 1880년대 전반 외래종교로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한국민족주의의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개항 이후였기때문에 1백년 먼저 들어온 천주교처럼 격렬한 탄압에 직면하지는 않
았지만 토착민족주의 세력은 개신교에 여전히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전파한 서구식 제도와 민주주의 사상은 근대민족주의가 싹트고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교회와 학교를 통해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배출됐으며, 자유와 평등, 자주 사상이 대중에게 전파돼갔다.
1919년의 3·1운동은 개신교가 한국민족주의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개신교는 천도교-불교와 함께 3·1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시위중 상당부분이 개신교신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그
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
도 화성군의 제암리교회이다.
일제 경찰은 1919년 4월 15일 오후 제암리교회에 신자들을 모이게 한후 문을 폐쇄하고 교
회에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이 때문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4월
5일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리교회에 대한 무자비한 보
복이었다.
1905년 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교회는 동족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 경찰은 이어 제암리의 가옥 30여채를 불태우고 5백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 천도
교 신자 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이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일대에서는 사
람과 가옥, 가축, 의류, 곡식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 밖까지 퍼져 나갔다고 전한
다.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 현장
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
사 스코필드박사가 며칠후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입구에 묻을 때까
지 방치됐다.
제암리교회는 1919년 7월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됐고, 1938년 현재의 위치에 기와집 예배
당이 만들어졌지만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은 광복 후까지 기다려야 했다. 1959년 4월 사건
현장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된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세워졌고, 1970년 9월에는
일본의 기독교인과 사회 단체들이 속죄의 뜻을 담아 보내온 1천만엔의 성금으로 새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됐다. 또 1982년 9월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유해 발굴작업이 실시돼 교회
옆에 마련된 묘소에 안장됐으며, 다음해 7월 기념관과 새 기념탑이 세워졌다.
이렇게 건립된 예배당과 기념관이 낡고 협소하여 이 건물들을 헐고 신축공사가 진행 중에
있는데 금번에 짓는 모든 공사의 건축비는 국비로 하고 있다.
현재 제암리교회는 국내의 개신교 성도들은 물론, 일본인 3천여명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매
년 약 4만명이 찾는 손꼽히는 참배 장소가 되었다.
도로안내 : 경부고속도로 오산I.C-발안-조암 방향으로 약 2㎞ 진행하면 제암리 마을 입구에
[3.1운동유적지 제암교회]안내판이 있음.
마을로 드어가면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음.
서해안 고속도로 발안I.C- 좌측 발안 방향으로 300m 진행하면
제암교회 안내판이 있음.
현지교통 : 수원터미널에서 발안, 조암방면 직행버스를 이용하여 발안을 경유하
여 조암방향으로 2㎞지점인 제암교회 앞에 하차.
(수원→제암리 21㎞)
정보제공자 : 445-920 경기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제암리 목사 (031)353-0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