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청량리역 구내에 진입했다. 순간 허리춤에 쇠갈고리를 찬 청년 5, 60명이 어둠 속에서 달려나왔다. 열차 속도에 맞춰 뛰던 그들은 잽싸게 화물칸에 매달려 익숙한 솜씨로 도르래 문을 땄다. 석탄이 좌르르 쏟아졌다. 몇몇 청년은 아예 석탄 운반차에 올라타 부삽으로 탄을 퍼 던졌다. 2km 선로 변에 석탄이 쫙 깔렸다. 이번엔 수십 명 부녀자들 차례. 부댓자루를 들고 일제히 뛰어나와 탄을 주워담는다. 이런 식으로 하룻밤에 대여섯 차례 대규모 석탄 도둑질이 이루어진다…"
"머리칼이 탐스러운 일곱 살 여자아이에게 십대 소년이 다가갔다. '뒷머리에 껌이 달라붙었으니 떼어주겠다'며 소년은 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냈다. 아이가 멈칫하자 사탕을 주어 달랜 소년은 익숙한 솜씨로 머리를 잘랐다. 달콤한 사탕 맛에 머리가 뭉텅 잘린 것도 모른 아이를 남겨두고 소년은 재빨리 달아났다. 단골 고물상이나 엿장수에게 팔면 최소 1천5백 원은 받을 것이고 그러면 하루 끼니는 거뜬히 때울 수 있다. 머리칼 도둑이 많아져 최근 경찰이 단속에 나섰지만 고물상 아저씨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가발장수들 역시 머리칼을 수집하면서 그게 어디서 난 것인지 묻지도 않는다."
석탄 훔쳐 먹고살던 서글픈 60년대
서울의 이색지대 청량리역 1960. 10. 26 [경향신문] 3면
'석탄 도둑'은 50년대 말 60년대 초 이야기, '머리칼 도둑'은 60년대 중반 사건이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절,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뭐든 훔치는 '생계형 도둑'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 이런 것도 훔치나?" 싶은 도둑질도 한 끼 때울 걱정이 태산 같던 당시엔 그저 흔한 일일 뿐이었다. 집에서도 도둑 걱정, 밖에 나가서도 뭔가 뺐기거나 뜯길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람들은 시달렸다. 뒤주를 뒤져 쌀을 훔쳐가는 건 예사요, 입은 옷을 벗겨가는 일도 왕왕 일어났다.
좀도둑도 도둑이니 합리화시킬 수 없지만 정말 헛웃음이 터지는 어이없는 사건도 많았다. 부피가 작기로는 아이들 머리카락이나 입은 옷, 신발을 훔쳐가고 크게는 탱크나 비행기 부품을 훔쳐 고철로 팔아먹는 일이 심심치 않게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맨홀 뚜껑이나 수도꼭지, 전주 위의 애자나 전선을 잘라가는 도둑이 있었고 장독대에서 고추장 된장 간장을 퍼가는 도둑도 적지 않았다.
닭서리나 콩서리 같은 동네 아이들의 '애교 도둑'과는 유형이 다른, 생계형 절도사건 때문에 경찰은 골머리를 앓았다. 못 먹고, 못 입고, 잘 곳조차 마땅치 않던 전후(戰後)시기의 우울하고 서글픈 풍경이었다.
석탄 도둑은 56년 경찰이 특별검거령을 내리고 용산역과 청량리역에서 일제단속도 벌였지만 근절되지 않았다. '도둑밖에 할 일이 없는' 역 주변 판자촌 사람들이 탄을 훔쳐 근처 다방이나 식당에 팔아넘겼다. 60년대 청량리역 도탄(盜炭)꾼들은 이런 판자촌 주민들과 계약을 맺고 전문적으로 석탄 열차를 털었다. 청량리역에는 밤 11시부터 새벽 6시 사이 탄을 싣고 들어오는 정기 열차가 5회, 임시 열차가 2-3회 있었는데 이 차들이 모두 표적이 됐다. 당시 경찰은 매일 밤 30톤가량이 도난당해 연간 1만 톤 정도가 역 선로에 뿌려져 사라지는 것으로 추산했다. 형사대가 출동해 권총까지 쏘며 도둑질을 막으려 했으나 청년들과 역 주변 주민들은 돌을 던지며 맞서기도 했다.
"석탄 도둑질 대신 먹고살게 해달라" 주민 성화도
이런 석탄 도둑 실태가 보도된 뒤에는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당국이 먼저 석탄 도둑 근절을 위해 청량리역 주변에 블록 담을 쌓았다. 담이 없어 철로 변에 사람이 무시로 드나들기 때문에 도둑질이 성행한다고 보아 아예 길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도둑질은 현저히 줄었다. 그러나 역 주변 주민들은 "석탄을 가져가지 못해 생계가 막연해졌다.
도둑질 대신 먹고살게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라고 진정하고 나섰다. 견디다 못 해 도둑질 통로를 차단한 당국이나 먹고살기 위한 도둑질을 원천 봉쇄당한 주민이나 모두 어쩔 수 없어 취한 조치요 행동이었다. 아무튼 블록 담이 생긴 후 "먹고 살게 해 달라."라는 주민민원은 계속 쏟아졌다.
필요악? 석탄 훔치기 1960. 12. 22 [경향신문] 3면
결국 '석탄 도둑을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한 긴급회동이 60년 12월21일 청량리경찰서장실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석탄 공사의 청량리출장소장과 청량리역장, 경찰서장, 관할 동대문구청 사회과장이 참석했다. 주민대표격으로 전농1동 동장도 자리에 나왔다. 회의에서는 "석탄 도둑 외에 뾰족한 생계수단이 없는 주민들이 청량리역 블록 담 설치로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 회의 참석자들이 그들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마련에 적극 노력하며 관계 기관에도 이 실정을 알리자"는 결론을 끌어냈다.
살기 위한 '원초적 본능' 옷 도둑
쌀 도둑서 권력형 부정까지 1978. 8. 23 [동아일보] 7면
살기 위한 '원초적 본능' 도둑으로는 옷 도둑을 빼놓을 수 없다. 전쟁 직후 입을 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에는 '동태 도둑' '낚시 도둑'이란 말이 유행했다. 얼린 북어, 동태나 낚싯대 따위를 훔쳤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 아니다. 겨울옷 도둑이 동태도둑, 여름옷 도둑은 낚시도둑이었다. 한겨울 빨랫줄에 걸어놓은 옷이 동태처럼 꽝꽝 언 것을 들고 간다 해서 동태도둑이요, 한여름 더위 탓에 열어놓은 창문으로 낚싯대를 집어넣어 걸린 옷을 채 간다 해서 낚시도둑이었다.
도둑도 도둑이지만 도둑맞은 사람도 잃어버릴만한 물건이 별로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집에 든 도둑이 장롱 등을 뒤져 가져갈 게 없으면 벽에 걸려 있는 옷을 들고 가는 일은 항용 있는 일이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용점퍼를 까맣게 물들인 옷이 고급 방한복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으니 가죽점퍼나 조금 두꺼운 겨울옷은 사실 가난한 서민이 쉽게 사 입을 것이 못 됐다.
자연히 옷 도둑이 성행했고 주부들은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이 제대로 있는지 틈만 나면 감시의 눈길을 돌려야 했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중고생 교복은 물론 내의를 들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선생님 사칭해 아이들 옷 벗겨가기도..
그래도 이들 도둑은 몰래 훔쳐가는 정도였지만 아예 입고 있는 옷을 벗겨 달아나는 도둑도 적잖았다. 61년 11월27일 서울 H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 교수를 사칭하는 여자가 들어와 학생 6명을 꾀어 데리고 달아났다. 이 여자는 담임선생이 조회에 참석하느라 반을 비운 사이 교실에 들어와 아이 몇을 지목해 데리고 나갔다. 아이들을 택시에 태워 으슥한 곳에 데려간 여자는 그럴듯한 거짓말로 아이들 윗도리를 벗긴 뒤 그대로 보자기에 싸들고 도망쳤다.
더 큰 피해는 없었지만 학교 측과 부모들은 아이들이 발견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64년 11월에는 서울 창천동에서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가던 초등학생 12명 앞에 건장한 청년이 나타났다. 자신을 유명한 농구선수라고 소개한 그는 "교장 선생님이 너희에게 농구를 가르치라고 해 찾아왔다"며 상의를 벗게 한 뒤 달리기를 시켰다.
어린이 집단 유괴 사건 1961. 11. 28 [동아일보] 3면
농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아이들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와보니 청년도, 벗어놓은 옷도 보이지 않았다. 청년이 훔쳐 간 옷은 털 스웨터나 가죽점퍼 등 당시로써는 꽤 고가품이었다. 이처럼 어린이들을 꾀어내 옷을 벗겨가는 교묘한 수법의 도둑이 빈발하자 신문들은 일제히 사설과 칼럼을 통해 도둑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다.
어린이 옷벗기는 도둑 1962. 4. 9 [동아일보] 2면
64년 '어린이 옷 벗기는 괴한을 잡자'는 제하의 한 신문사설은 우선 "해마다 겨울만 되면 어린이옷을 벗기는 도둑이 그치지 않으니 이는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라며 개탄했다. 이어 "젊은 자들이 할 일 없이 어린이 옷이나 벗기고 소일하는 일이 없도록 일할 수 있는 자에게 일터를 마련해주는 일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요즘 말로 하면 청년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줘 그들이 생계형 범죄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회구조적 처방을 제시한 셈이다. 그런데 다음 주장이 재미있다. "가정주부들의 사치현상이 심해 철없는 어린 자녀들까지 허영으로 공작새처럼, 또는 인형처럼 차려 입히고 시위한다."고 나무란 것이다. 좋은 옷을 입힌 것이 도심(盜心)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이요, 위화감도 조장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가발 수출 활기에 머리칼 도둑도 활개
입은 옷을 벗겨가는 것만큼 어린이들을 두렵게 한 것이 머리칼 도둑이다. 60년대 중반부터 가발 수출이 활기를 띠며 머리칼도둑 또한 활개를 쳤다. 옷 벗기기 도둑처럼 머리칼도둑도 항거능력이 없는 어린이를 희생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분을 샀다. 또 옷과는 달리 신체의 한 부분인 머리카락을 범행대상으로 삼았던 만큼 피해자들의 저항도 거셌다. 사탕으로 유혹당해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머리칼을 잘릴 뻔했던 여자아이들이 범인 팔뚝을 이빨로 물고 도망친 사례도 있었다. 어린이 상대 옷 도둑, 머리칼 도둑은 도둑이라기보다 강도에 가까웠지만 경찰의 검거실적은 그리 높지 않았다.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형의 도둑이 성행하게 된 소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