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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제목강설(화엄경 원효소 서문강설)
(大方廣佛華嚴經題目講說)
대방광불화엄경
진리의 바다에
한량없는 꽃으로 장엄된 경이여!
여기 일체만법을 포함 했으니
온 천하가 화엄도리 아님 없도다.
크다고 한다면
끝이 없으니 태허공 보다 크고
작다고 한다면
극소하여 어떠한 모양도 없다.
대방광불이여!
이것은 일심진공(一心眞空)을 표방했고
화엄경이여!
언제나 천백억 묘유(妙有)를 나타냈도다.
한마음 가운데 큰마음이여!
이것이 대방광불화엄경이네.
오늘 화엄경 강좌에 오신 여러 불자님들 참으로 반갑습니다.우리는 이제 지혜의 배를 타고 화엄이라는 거대한 진리의 바다를 향해 첫 출발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변화의 시작이며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 합니다. 사실 화엄경 하면 모든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난해하여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불교철학이고 사상이며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화엄경이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최고의 가르침을 통해 최상의 길로 나아갈 길을 등지는 것이 되니 어찌 지혜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금을 버리고 흙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되니 산승은 이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위대한 화엄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화엄경요점강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엄경은 모든 면에서 가장 완전한 경전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경이 다 위대하지만 특히 화엄경은 우주 만법의 모든 세계와 이치를 가장 언어로서 표현 할 수 있는 곳까지 온전하게 표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위대한 화엄경을 같이 공부 할 수 있다는 것은다겁생 동안 함께 같이 선근을 닦고 수행한 인연이 아니면 이러한 법회에 같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산승은 부족하지만 우리 불자님들과 함께 부처님의 큰 원력을 함께 실현하고 이 나라의 불교가 중흥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본 강의를 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제목강설을 먼저 하겠습니다. 모든 경제목에는 본문의 뜻을 함축했기 때문에 경제목을 통해 본문의 전체적인 뜻을 개략적이라도 이해를 하기 위함입니다.
화엄경의 본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 합니다. 그럼 대방광불(大方廣佛)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본각(本覺)을 의미하고 다음 화엄경(華嚴經)이란 시각(始覺)을 뜻하는데 이 경제목 전체를 해석한다면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으로 장엄한 중중무진법계(重重無盡法界)로 가는 길(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더 간략하게 표현한다면 일심(一心)의 도리로 만덕(萬德)을 장엄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본각(本覺)이란, 본래부처의 뜻이니 일체만물의 본성을 말합니다. 중생마다 불성이 있으니, 이것은 태초에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생겨남이 없고 따라서 소멸할 것도 없습니다.(無生無滅) 때문에 그 자리는 본래청정하기에 본각(本覺)이라 부릅니다.
시각始覺)이란 중생이 미혹하여 본각(本覺)을 등지고 오랜 세월 허상에 떨어져 지내다가 어느날 선지식을 만나 발심하고 수행하여 마침내 본각(本覺)에 계합하면 이것은 닦아 이룬 부처라 합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6년 동안 고행하시다가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시각始覺)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어느 누구나 본래 청정한 불성은 가지고 있지만, 무명에 의해서 본각을 미혹하고 생사윤회가 생겨났으나 후천적인 수행으로 인해 다시 본각에 계합할 때 그것을 시각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大方廣佛)이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 하고 이 본래불의 일심(一心)도리를 도(道)의 체성(體性)이라 합니다. 이 체성본불(體性本佛)의 공덕을 도(道)의 체상(體相)이라 하며, 이 도의 체상(體相)에서 묘한 작용이 있는데 이것을 천백억 묘용의 화엄경(華嚴經) 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도(道)의 묘용(妙用)으로써 십조구만오천사십팔종의 만행의 꽃으로 장엄된 가르침이란 뜻이 됩니다. 이것을 쉽게 말한다면 일체만법이 화엄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心)이라는 체성(體性)과 체상(體相)과 체용(體用)으로 오랜세월 수행하여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부처님의 공덕상이 될 때 청정법신(淸淨法身)과 원만보신(圓滿報身)과 천백화신(千百化身)이란 완전무결한 경지에 들어 일체법을 총섭하고 일체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방광불화엄경 제목 속에는 무념무상무주라는 근원적인 체성 속에 광대무변한 원만보신의 공덕을 지니고 천백억화신 대자대비 묘용(妙用)으로 팔만사천 화엄(華嚴)세계를 완성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처럼 화엄경(華嚴經)에는 중중무진한 이사무애의 세계가 끝이 없으니 불보살의 원력도 끝이 없습니다.
화엄경을 공부할 때 먼저 이해해야할 단어로 두개가 있으니 하나는 유심(唯心)이라는 말과 법계(法界)라는 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화엄경은 유심사상(唯心思想)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의 법문에서 유심(唯心) 아닌 것이 없으므로 화엄경만 유심론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화엄을 유심사상이라 말하는 것은 법계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화엄의 유심이란 무엇인가요. 화엄에서는 우주만법의 본질을 마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이 곧 법계이므로 이법계와 사법계가 원융무애하여 일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심이 법계요 법계가 곧 일심이라 둘 아닌 도리가 됩니다. 여기에서 좀 더 법계와 일심의 도리를 화엄경 사구게에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엄경 사구게)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삼세일체불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응당 법계성을 관하라, 모든 것은 마음에서 짓는 바니라.
사구게 가운데 법계성을 관하면 법계 또한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했습니다. 만법은 마침내 마음으로 돌아가니 마음에서 만법을 내기도 하고 거두기도 합니다. 때문에 만법과 일심을 이와 사로 구분하는 것은 중생들의 이해를 위해 말한 것일 뿐 이와 사는 원융무애하므로 일심과 법계는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화엄의 법계성(法界性)을 관하고 일심이라는 진공묘유의 경계에서 이사에 걸림 없는 참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먼저 옛 선사들의 법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임제선사는 수처작주(隨處作主)요 입처개진(入處皆眞)이라 했으니 이 말은 일심법계(一心法界)에서 만법에 마음이 뺏기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무심 무아 무념 무주라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면 그대로 진정한 삶이 되어 저절로 이사무애를 이루게 됩니다.
법에는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이법계는 유심의 이치로 나타나고 사법계는 묘유의 이치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떠한 현상에도 마음이 고요함을 가지고 현실을 대한다면 이와 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중생은 이(理)를 보지 못하고 현실을 대하므로 어리석음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화엄에서 마음을 주제로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오직 선(禪)적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정진을 하지 않고 불심을 증득하지 못합니다. 마음을 선(禪)으로만 본다면 교는 선(禪)으로 보아야 뜻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은 날마다 비우는 일이요 교는 날마다 키우는 것이며 율은 가르침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선과 교와 율은 솥의 세 개 발과 같아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말한다면 무심(無心)은 선(禪)이고 묘유(妙有)가 교(敎)이며 정진(精進)은 율(律)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불자들은 이렇게 선교율을 동시적으로 수행할 때 화엄의 법계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팔만사천 법계가 중중무진하게 펼쳐져도 일심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일심에 의지하여 수행할 때 삼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화엄은 우리를 이사무애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경계에서 이사원융무애의 이치를 통해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먼저 생활 속에서 마음을 내려놓는 자세를 연습해야 합니다. 만일 자기라는 아상의 늪에서 벗어나면 화엄의 무애한 자유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 옛날 마조대사의 사대제자 가운데 하나인 염관제안선사에게 어느날 화엄경 전문법사가 찾아와 차를 나누다가 문득 제안선사가 화엄경 전문법사에게 물었습니다. 화엄경에 법계가 몇 개 되는가? 법사가 말하기를 크게 4개가 있고 펼치면 거듭거듭 다함이 없습니다. 선사가 이에 불자를 세우고 이것은 몇 번째 법계인가? 하니 법사가 말을 못했습니다. 선사가 말하기를 생각으로 헤아려 알려고 하면 사구에 떨어지니 오로지 진실한 수행으로 체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여기에서 산승이 사족을 붙혀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사가 불자를 들어 산승에게 “이것은 몇 번째 법계인가?”라고 묻는다면 “거기 일심법계의 오묘한 도리가 원융무애하여 능히 죽이고 능히 살리기도 합니다.” 라고 했다면 염관선사에게 따끔한 질책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법계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혹시 이 순간에도 세속경계에 끄달리고 있지 않은가요. 누가 만일 산승에게 무슨 법계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근본자리에는 어떤 법계도 용납하지 않지만 펼치면 높은 하늘에 가을바람 불어오니 온 산천의 초목이 물들어갈 뿐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화엄을 배우는 불자님들 진실로 이와 같은 화엄의 원융무애 법계도리에 입각하여 움직인다면 가는 곳마다 백화가 피어나는 화엄동산이 되어 마음 달을 희롱하고 청정무위 불국정토에서 쾌락 소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 화엄정신의 뜻을 펼친 매우 귀중한 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자 신라 원효대사의 화엄경소 서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 화엄의 위대한 세계를 느낄 수 있으므로 산승이 지금 원효의 화엄경소의 서문을 강설하고자 합니다. 원효대사는 안목이 특출했기 때문에 대사의 화엄경서문(序文)을 보면 명쾌한 해설과 명문에 감탄을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불자님들은 본 글이 비록 어렵더라도 일단 듣는 것만으로도 선근공덕이 되고 업장이 소멸되어 다음 생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인연이 되기에 산승의 강설을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어떤 도반 스님으로부터 우연히 원문을 받았는데 매우 귀한 자료이므로 원문 전체를 먼저 올리고 그 다음 강설하고자 합니다.
華嚴經 元曉疏 序文 (全文)
原夫無障無碍法界法門者 無法而無不法 非門而無不門也 爾乃非大非小非促非奢 不動不靜 不一不多 由非大故作極微而無遺 以非小故爲大虛而有餘 非促之故能含三世劫波 非奢之故擧體入一刹 不動不靜故生死爲涅槃 涅槃爲生死 不一不多故 一法是一切法 一切法是一法 如是無障無礙之法 乃作法界法門之術 諸大菩薩之所入也 三世諸佛之所出也 二乘四果之聾盲 凡夫下士之所笑驚 若人得入是法門法 卽能不過一念 普現無邊三世 復以十方世界 咸入一微塵內 斯等道術 豈可思議
(然依彼門 用看此事 猶是一日三出門外 十人共坐堂內 俓然之域 有何奇特 況乎須彌入於芥 子者 稊來入於大倉也 方丈內乎衆座者 宇宙內於萬物也 內入甚寬 何足 爲難乎哉 若乃鳳皇翔于靑雲 下觀山岳之卑 河伯屆乎大海 顧羞川河之狹 學者入乎此經普門 方知會學之齷齪也 然短翮之鳥 庇山林而養形微之魚 涓流而安性所以淺近敎門 亦不可已之耳)
今是經者 斯乃圓滿無上 頓敎法輪 廣開法界法門 顯示無邊行 德 行德無畏而示之階 階故可以造修 矣 法門無涯開之的 的故可以進趨矣 趨入彼門者 卽無所入故無所不入也 修行此德者 卽無所得故無所不得也 於是三賢十聖 無行而不圓 三身十佛 無德而不備 其文郁郁 其義蕩蕩 豈可得而稱焉
所言大方廣佛華嚴者 法界無限大方廣也 行德無邊佛華嚴也 非大方無以廣佛華 非佛華無以嚴大方 所以雙擧方華之事 表其廣嚴之宗 所言經者 圓滿法輪 周聞十方無餘 世界遍轉 三世無際 有情極焉窮常 故名曰經 擧是大意 以標題目 故言道大方廣佛華嚴經也
원효의 화엄소 서문 강설
(본문) 원부무장무애법계법문자(原夫無障無碍法界法門者)
(본문해석) 본래 무장무애(無障無碍)법계법문이라 하는 것은
(본문강설) 본 글은 화엄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원효대사는 화엄의 서문 첫 구절에 본 경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장무애법계법문이라는 것은 이사무애 사사무애를 가르키는 것인데 왜 법계법문이 무장무애라고 하는가요. 그것은 법이라 하면 법상에 빠지므로 법은 곧 무법이 되고 무법이나 법아님도 없으므로 걸림 없는 무장무애 법문이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야하는 것은 법이 없다 해서 무(無)에 떨어지면 그것이 바로 유위법이 됩니다. 즉 없다는 것은 바로 있다는 것이 되니 유위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佛法)이란 유무(有無)를 떠나 있으니 유무의 개념으로 법의 무장무애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법이라 하면 그것은 곧 법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법 아닌 것도 없다는 뜻을 원효는 무장무애법계법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본문) 비문이무불문야(非門而無不門也)
(본문해석) 문(門)이 아니지만 문(門) 아님도 없다.
(본문강설) 이것은,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門)을 따로 설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문(門)이 없다는 견해를 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지금 이렇게 화엄경을 배우고 무장무애의 이치를 배우는 이 자리가 문 없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엄의 문이란 본래청정하여 거래도 없고 모양도 없으니 이 당체는 문이라 하나 문이 아니고, 들어간다고 하나 따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화엄의 세계가 역력한데 문(門) 없다는 생각에 떨어지면 곧 그것이 장애의 문이 되므로 원효는 문아님도 없다 했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렇게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가 들음 없이 듣고 행함 없는 행을 한다면 저절로 무애자재한 행으로 원융무애한 불국토를 장엄하게 되니 이것을 이사무애한 화엄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이내 비대비소 비촉비사 부동부정 불일부다
(爾乃非大非小非促非奢不動不靜不一不多)
(본문해석)그것은 큰 것도 아니요 작은 것도 아니고 척박한 것도 아니요 사치스러운 것도 아니며 움직이는 것도 고요한 것도 아니요,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니다.
(본문강설) 무장무애(無障無礙)한 일심(一心)의 도리는 사사무애하니 당연히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며, 뻑뻑한 것도 사치스런 것도 아니고 움직임과 정숙함도 아니며 많고 적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일심의 미묘한 법문은 원융무애하여 공간성을 초월하여 절대경의 무애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유비대고작극미이무유(由非大故作極微而無遺)
(본문해석) 그것은 큰 것을 말미암지 않은 까닭에 극히 작음이라 할 수 있으나 거기에는 겉 그대로 속이 되어 크고 적음이 아니다.
(본문강설) 본 글은 불자들의 이해를 위해 본문해석을 의역 했으며 조금 보충번역 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상대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극대와 극소가 만나면 이 둘은 나눌 수 없으므로 공간성을 초월하게 되니 극대는 바로 극소하므로 거기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이비소고위대허이유여(以非小故爲大虛而有餘)
(본문해석) 작은 것이 아닌 까닭에 큰 허공보다 더 크니 작다는 거기에 오히려 여유가 있도다.
(본문강설) 이 큰 허공은 끝이 없으니 그것은 작다 크다. 라는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데 어찌 일심의 미묘한 무애법문을 사량분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법으로 말한다면 작은 그대로 여유로워 작은 것이 큰 허공보다 작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심(一心)의 도리는 본래부터 원융무애 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본문) 비촉지고능함삼세겁파(非促之故能含三世劫波)
(본문해석) 빽빽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을 능히 포함하고도 남음이 있고
(본문강설) 법계법문이라는 일심의 미묘한 여기에는 찰나지간이나 거기에 능히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가도 남음이 있으니 모든 시간성을 초월하여 순간도 아니고 영원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은 오직 일심의 법계법문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비사지고거체입일찰(非奢之故擧體入一刹)
(본문해석) 거기 여유로움이 없지만 온 우주가 미세한 티끌 속에 들어간다.
(본문강설) 화엄경에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간다.”라고 했는데 원효대사는 이 말을 좀 더 고도의 문장솜씨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법에는 여유가 없지만 전체가 들어가도 남으니 그 자리는 크고 작음을 초월한 것입니다. 법계의 이치와 이처럼 걸림 없으니 원융무애이치가 성립됩니다.
(본문) 부동부정고생사위열반(不動不靜故生死爲涅槃)
(본문해석) 움직임도 고요함도 아니지만 생사가 곧 열반이 된다.
(본문강설) 본래 움직임이 없으니 고요함이 없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는데 어찌 생사가 있으며, 본래 생사가 없으므로 열반은 고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생사를 바로 보면 그것이 열반이니 생사가 바로 열반이라 하는 것입니다.
원효대사는 본 글에서 법성은 본래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다 했고 원효의 도반인 의상대사도 화엄법성게에 모든 법은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諸法不動本來寂)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원효가 고요함도 움직임도 없다는 것은 고요함은 움직임에 의하지 않으므로 상반된 개념의 고요가 아니고 움직임도 고요함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그 자리는 고요함도 움직임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고요함이 움직임에 의해서 고요함을 말한다면 고요함 그대로 생사가 되어 유위법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원효는 처음부터 언어를 넘어선 경지를 표현했고 의상은 법성게에서 “모든 법은 본래부터 고요하다.”했습니다. 이것은 본각의 자리는 본래 움직임과 고요함을 떠난 절대성 고요를 말하는 것이니 이 말은 언어를 빌려 언어를 넘어선 경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원효와 의상은 같은 뜻을 조금 다르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원효의 말에는 고요함과 움직임을 절대부정하므로 저절로 절대긍정의 도리를 보여주었고 의상은 처음부터 긍정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법성은 움직임이 없으니 본래부터 고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요함을 넘으면 움직임 그대로 고요함이 되므로 있는 그대로 절대적 고요가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은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뜻은 살필 줄 모르고 부처와 중생과 똑같다고 착각하여 잘못된 견해를 내기도 합니다. 생사와 열반이 같다는 것은 열반을 증득하면 생사라는 망상은 본래 공했기 때문에 생사에 대한 그 반대개념의 열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불일부다고 일법시일체법 일체법시일법
(不一不多故 一法是一切法 一切法是一法)
(본문해석) 하나도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 법이 곧 일체법이고 일체법이 곧 한 법이 된다.
(본문강설) 많다는 것은 하나에서 시작되는데 하나라는 그것은 망상경계 속에 짓는 분별망상이니 하나는 당연히 부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가 존재하지 않으니 많음도 존재할 수 없겠지요. 이것은 절대부정을 보인 도리입니다. 한 법이 곧 일체법이라 한 것은 일체법은 하나로 시작되었으니 하나가 곧 일체법이 됩니다. 이것은 절대긍정의 도리를 보인 것입니다. 앞에 문구는 절대부정이니 그것은 마침내 절대긍정과 같고 뒤 문구는 절대긍정이지만 그 긍정은 절대부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계이므로 절대긍정이 곧 절대부정과 같아 한 법이 곧 일체법이 되고 일체법은 곧 한 법이 됩니다.
(본문) 여시무장무애지법 내작법계법문지술
(如是無障無礙之法 乃作法界法門之術)
(본문해석) 이와 같은 무장무애의 법이 법계법문의 요체가 된다.
(본문강설) 원효대사가 화엄경 소의 서문 첫 문구에 대한 뜻을 지금까지 기술했는데 이것을 법계법문의 요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제대보살지소입야 삼세제불지소출야
(諸大菩薩之所入也 三世諸佛之所出也)
(본문해석) 이 법문은 모든 보살이 이 법으로 들어가는 곳이고 삼세제불은 그 법에서 나오는 곳이다.
(본문강설) 원효가 말한 원융무애법계법문으로 모든 보살은 닦아 들어가고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도 이 법문을 가지고 중생에게 회향하고자 나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들어간다는 것은 닦아 증득한다는 말이고 나온다는 것은 중생에게 회향하려고 세상에 출현해 가르침을 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마친 도인(부처)이란 중생에게 회향을 하는 자리이지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이승사과지농맹 범부하사지소소경
(二乘四果之聾盲 凡夫下士之所笑驚)
(본문해석) 소승(小乘)이나 하근기는 이 법문 들으면 귀먹은 사람 같고 속인이나 외도들은 들으면 놀라고 웃어넘긴다.
(본문강설) 소승이란 큰마음(대승)을 내지 못한 이기적인 사람을 말하고 오로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하근기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와 같은 초우주적인 가르침을 들으면 감당하지 못하므로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일반속인과 외도(삿된종교)들은 이러한 큰 법문을 들으면 놀라서 궤변이라고 하다가 그냥 비웃고 간다는 말입니다. 화엄경 법문은 초우주적 법문이라 큰 근기가 아니면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만일 듣고 믿기만 한다면 이것도 전생부터 선근인연이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화엄대법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면 참으로 소중하고 다행한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약인득입시법문법 즉능불과일념 보현무변삼세 부이시방세계 함입일미진내 사등도술 기가사의 (若人得入是法門法 卽能不過一念 普現無邊三世 復以十方世界 咸入一微塵內 斯等道術 豈可思議)
(본문해석) 만약 사람이 이 위대한 대승화엄법문에 들어간다면 곧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에 시방삼세에 두루 나타나리라. 하물며 시방세계가 미세한 티끌 속에 들어간다면 이 같은 도술은 불가사의 한 일이니라.
(본문강설) 이렇게 귀중한 법문은 선근 없으면 듣기 어려운데 만약 대승화엄법문에 증입한다면 바로 천백억 화신으로 시방세계에 신통을 보이고 이사무애 사사무애 경계에 들어가게 되니 이러한 경지는 참으로 불가사의하여 누구도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간생략) 아래 문단 원문 석줄 글은 서문 전체 문맥흐름과 맞지 않아 후대인이 끼워 넣은 느낌이 들어 참고삼아 원문은 그대로 두고 해석은 생략합니다.
(然依彼門 用看此事 猶是一日三出門外 十人共坐堂內 俓然之域 有何奇特 況乎須彌入於芥子者 稊來入於大倉也 方丈內乎衆座者 宇宙內於萬物也 內入甚寬 何足 爲難乎哉 若乃鳳皇翔于靑雲 下觀山岳之卑 河伯屆乎大海 顧羞川河之狹 學者入乎此經普門 方知會學之齷齪也 然短翮之鳥 庇山林而養形 微之魚 0涓流而安性 所以淺近敎門 亦不可已之耳)
(본문) 금시경자 사내원만무상 돈교법륜 광개법계법문 현시무변행덕 행덕무외이시지계 계고가이조수이 법문무애개지적 적고가이진추이 추입피문자 즉무소입고무소불입야 수행차덕자 즉무소득고 무소부득야 어시삼현십성 무행이불원 삼신십불 무덕이불비 기문욱욱 기의탕탕 귀가덕이칭언 (今是經者 斯乃圓滿無上 頓敎法輪 廣開法界法門 顯示無邊行德 行德無畏而示之階 階故可以造修矣 法門無涯開之的 的故可以進趨矣 趨入彼門者 卽無所入故無所不入也 修行此德者 卽無所得故無所不得也 於是三賢十聖 無行而不圓 三身十佛 無德而不備 其文郁郁 其義蕩蕩 豈可得而稱焉)
(본문해석) 지금 이 경은 원만무상한 돈교법문이라 널리 법계법문을 열었으머 끝없는 보현의 실천과 덕을 나타냈고 실천과 덕이 걸림 없지만 닦는 문에는 단계와 절차가 있고 계단이 있으므로 닦음이 있다. 법의 문에 막힘이 없으니 곧 바로 나아갈 뿐이다. 진리의 문에 들어오면 들어오는 바가 없는 까닭에 들어오지 않음도 없다. 이렇게 수행하는 자는 곧 얻을 바가 없는 까닭에 얻지 않음도 없다. 이러한 삼현(三賢)과 십성(十聖)은 행할 것이 없으니 원만하다는 말도 안 맞고 삼신(三身)과 십불(十佛)은 덕이라고 할 것 없으니 갖춘다고 할 것도 없다. 글은 성성하고 그 뜻은 시원스러운데 어찌 그것을 얻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본문강설) 본 글에서는 화엄을 몰록 단숨에 깨달아 들어가는 경지이지만 수행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니 차례차례 잘 닦아 어느날 홀연히 돈교에 들어서면 얻을 바 없는 법을 얻고 따로 행하지 않아도 저절로 갖춘다고 했습니다. 삼현과 십성은 성류에 들어간 보살을 말하고 삼신과 십불은 이미 불과를 이룬 부처님을 뜻합니다. 본 글에서는 성류에 들기까지 부단하게 정진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본문) 소언대방광불화엄자 법계무한대방광야 행덕무변불화엄야 비대방무이광불화 비불화무이엄대방 소이쌍거방화지사 표기광엄지종 소언경자 원만법륜 주문십방무여 세계편전 삼세무제 유정극언궁상 고명왈경 거시대의 이표제목 고언도 대방광불화엄경야 (所言大方廣佛華嚴者 法界無限大方廣也 行德無邊佛華嚴也 非大方無以廣佛華 非佛華無以嚴大方 所以雙擧方華之事 表其廣嚴之宗 所言經者 圓滿法輪 周聞十方無餘 世界遍轉 三世無際 有情極焉窮常 故名曰經 擧是大意 以標題目 故言道 大方廣佛華嚴經也)
(본문해석) 대방광불화엄경이라 말하는 것은 이사법계라는 진리의 세계가 무량무변하니 이를 일러 대방광(大方廣)이라 부른다. 부처님이란 팔만사천 무량무변한 공덕을 행했으니 이 때문에 불(佛)이라 하고 또한 그것을 화엄세계라 한다. 대방(大方=불가사의한 이사법계)이 아니면, 불화(佛華=부처님의 공덕)를 넓힐 수 없고, 불화(佛華)가 아니면 대방(大方)을 장엄할 수 없다. 까닭에 쌍으로 대방(大方)과 화엄의 일을 들어 부처님의 근본과 위대한 덕을 장엄한다. 이른 바 경(經)이라는 것은 원만하게 구족한 부처님의 법을 시방세계중생들이 두루 듣게 하되 부족함이 없게 하되 과거 현재 미래제가 다하도록 법이 전하고 끊어지지 않게 하여 부처님 법이 모든 중생들의 표상(窮常= 궁극적 표상기준)이 되는 까닭에 경(經)이라 한다. 이러한 경의 대의를 가지고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경의 제목이 나오게 된 것이다.
(본문강설) 본 문단에서는 경제목을 통해서 화엄의 대의를 살펴보도록 했습니다. 화엄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경제목의 뜻과 화엄경 사구게에서 바른 견해를 지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바탕에서 본문을 본다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은 경제목에 있어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대방광불은 시공을 초월한 절대경의 도리로써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을 의미하고 화엄경은 부처님의 무량무변하고 무궁무진한 원만보신의 장엄으로 천백억화신의 묘용을 일으켜 모든 중생들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준과 표식이 되므로 경(經)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방광불화엄경 제목 속에는 이사무애화엄법계 도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화엄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이치와 사리를 둘로 보고 진공과 묘유가 현상에서는 차별이 있다고 보는 잘못된 견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신라 원효대사의 화엄소 서문을 살펴보았습니다. 본 글을 강설하면서 산승이 느낀 점은 원효는 타고난 언변과 대문장가로서 큰 기질과 호탕한 대기대용으로 써 내려간 이 아름답고 뛰어난 문장에 누구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부처님 뜻을 체득한 깊은 뜻으로 풀어내는 글은 그대로 문자사리가 되어 부처님 법을 크게 드날리고 1300년 동안 수많은 스님과 수행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는 것에 우리들은 대사의 큰 축복과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원효의 화엄소 서문은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법문이라 누구도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일 분별심을 버리고 순수하고 무심한 마음으로 보면 저절로 무시억겁의 업장을 녹여주는 기운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진리의 말은 중생의 무명을 깨뜨리는 법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화엄경은 부처님께서는 법신경계에 들어 모든 보살들에게 가피의 힘으로 설한 경이라 듣는 것만으로도 한량없는 선근이 됩니다.
성불하십시오.
※ 금강까페 회원님들 안녕하세요
산승이 지난날 화엄경 제목강설을 한 적 있었는데 본문 글을 수정하다가
화엄경 원효소 서문이 오늘날 어두운시대에 밝은 희망의 등불이 될 것 같아
금강까페 회원님들과 공유하고자 본 글을 올려 봅니다.
맑은 가을 하늘아래 단풍이 물들어 가는 이 좋은 계절에
대사의 글이 회원님들 모두에게 행복하고 좋은 삶이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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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공묘유 리사무애. 공염불이라도 되뇌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
만물이 열매맺는 천고마비의 계절
미국의 CORNER STORE 가게안에서
12년성상을 보내며 원효대사님의 가르침과
금타대화상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21세기에 화엄경을 세상에서 실천할수 있는
아미타불정토만다라에 의하여 무진장으로
생로병사의 기로에선 각종 외국인들의 애환을
응병시약하고 도피안하는 기쁨으로
산천의 울긋불긋한 색상감상을 뒤로하고
일만하고 있지만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정진함은 잊지않고 있읍니다
금타만다라의 사사무애법계 일으키는 정신 불성 문명은
신라 한국이라는 작은 지역을 벗어나
전세계에 부처님의 성소작지를 즉석에서
드러내어 문수행원,보현행원,관음행원,지장행원,약사행원,
통쾌하게 환희심충만 염감충만 비젼충만 사무량심충만 사명감충만하여
일대인의 자재경만덕 실천함으로
홍익인간 하고자 합니다
원효대사님의 법과
금타대화상님의 법이
장전된 아미타불정토만다라!
만나는분들은 금강삼매경론과 금강심론 실천하는
대방편으로 우울한 21세기 코로나 바이러스시대의
편운척영
벗김으로
처처에서
일심만능
홍익인간
금강삼매
요익중생
일심만덕
세계평화
대안대안
적시에 화엄경 읽게하여 주심
미국에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스님~법체 강녕하시죠?
오랜만에 뵙는 스님의 감로법문
귀하게 새깁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행복한 정진 속에
날마다 좋은 날이시길 두 손 모읍니다.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스님! 평안하시지요.
귀한 화엄경 원효소의 서문과 주옥같은 강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10.12 03:33
귀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유투브에 제목강설과 총강법문도 있으시네요. 그곳에서도 잘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