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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ㅡ 마하리쉬 ㅡ
「나는 누구인가?」는 「자기탐구」와 같은 시기에 쓰여 졌다. 이것은 초기 헌신자 중의 한 사람인 시바쁘라까샴 빨라이가 제기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되었다. 빨라이는 그 질문과 답변들을 정리하고 다듬은 뒤에 그것을 바가반께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런 뒤에 그것은 '문답' 형태로 출판되었는데, 나중에는 연속적인 '서술' 형태로 바뀌었다. 이 판에서는 원래의 문답형 판본을 수록한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불행 없이 늘 행복하기를 바라고, 누구의 경우를 보더라도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한 지고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데,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이유이므로, 자신의 진정한 성품인 행복,
'마음이 전혀 없는 깊은 잠의 상태'에서
체험되는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지(知)의 길,
즉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의한 탐구가 주된 방법이다.
1. 나는 누구입니까?
일곱 가지 기질(humours)로 이루어진 이 거친 몸은 내가 아닙니다.
소리를 듣고, 감촉을 느끼고, 색을 보고, 맛을 느끼고, 냄새를 맡는 다섯 가지 지각 기관은 내가 아닙니다.
말을 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행위 기관은 내가 아닙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쁘라나 등 다섯 가지 생명 기운은 내가 아닙니다.
생각하는 마음조차도 내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잔류 인상만 지니고 있을 뿐,
아무런 대상도 아무런 기능도 없는 '무지' 또한 내가 아닙니다.
2. 이것이 다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앞에서 말한 것들을 모두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라고 부정한 뒤에
단 하나 남는,
‘내가 있다’는 자각입니다.
3. 그 자각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 자각의 본질은 존재-의식-지복입니다.
4. 언제 진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보이는 대상인 세계가 사라졌을 때,
'보는 자'인
'진아'(眞我)에 대한 깨달음이
있게 될 것입니다.
5. 세계가 (실재한다고 여겨져) 눈앞에 존재하는 동안에도 진아를 깨달을 수 없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6. 왜 그렇습니까?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은 밧줄과 뱀의 경우와 같습니다. 환(幻)인 뱀에 대한 그릇된 앎이 사라지지 않으면 바탕인 밧줄에 대한 앎이 일어나지 않듯이,
세계가 실재한다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바탕인 진아(眞我)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7. 보이는 대상인 세계는 언제 사라지겠습니까?
모든 인식과 모든 행위의 원인인
마음이 가라앉을 때,
세계는 사라질 것입니다.
8. 마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진아 안에 거주하고 있는
경이로운 힘입니다.
그 마음이 모든 생각을 일으킵니다.
생각과 별개의 마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생각이 곧 마음의 본질입니다.
생각과 별개로, 세계라고 하는
어떤 독립된 실체도 없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세계도 없습니다.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 생각들이 있고,
세계도 있습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몸 안으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자신의 밖으로 세계를 투사했다가
그것을 다시 자신의 안으로 흡수합니다.
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세계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세계가 (실재하는 것으로) 보일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고,
진아가 나타날 때(빛날 때)
세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본질을
끈질기게 탐구해 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만 (잔여물로) 남겨놓고
소멸됩니다.
여기서 진아라고 하는 것은
아트만입니다.
마음은
늘 거친 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하며,
홀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미세한 몸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도
바로 이 마음입니다.
9.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탐구의 길은 무엇입니까?
이 몸 안에서 ‘나’로서 일어나는 것이
마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몸 안의 어디서 ‘나’라는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지를 탐구하면, 그것이 심장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곳이 마음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나’, ‘나’를 생각하기만 해도 그곳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 중에서
‘나’라는 생각이 첫 번째 생각입니다.
이것이 일어난 뒤에야
다른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1인칭 대명사가 나타난 뒤에야
2인칭과 3인칭 대명사가 나타납니다.
1인칭 대명사 없이는
2인칭과 3인칭 대명사도 없을 것입니다.
10. 어떻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겠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에 의해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을 소멸한 뒤에,
화장터의 장작불을 뒤집는 데 쓰이는
막대기처럼
마지막에는 그 자체도 소멸됩니다.
이때 거기서 진아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11.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붙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하고 꾸준히 물어야 합니다.
이때 나오는 답은
‘나에게’일 것입니다.
그 '나'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탐구해 들어가면,
마음은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일어났던 생각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수행해 나가면
마음은 그 근원에 머무는 법을
스스로 익히게 됩니다.
미세한 마음이
두뇌와 감각기관을 통해 밖으로 나갈 때,
거친 이름과 형상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심장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이름과 형상들이 사라집니다.
마음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심장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
‘안으로 향하기’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심장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밖으로 향하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심장 안에 머무르면,
모든 생각의 원천인 ‘나’가 사라지고
항상 존재하는 진아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나’라는 에고성(egoity) 없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행위하면
일체가 시바의 성품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12. 마음을 가라앉히는 다른 수단은 없습니까?
탐구 외에는 마땅한 수단이 없습니다.
다른 수단으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면
마음이 다스려진 듯하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호흡 제어를 통해서도 마음은 가라앉지만
그것은 호흡이 제어되는 동안만
그러할 뿐입니다.
호흡을 되돌려 놓으면
마음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잔류 인상들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헤매게 됩니다.
마음과 호흡은 근원이 같습니다.
사실 생각이 마음의 본질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마음의 첫 번째 생각이며,
그것이 에고성입니다.
에고성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됩니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제어되고,
호흡이 제어되면 마음도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깊은 잠 속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아도
호흡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때 육신이 유지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육신이 죽었다고
오인하지 않게 하려는 신의 의지 때문입니다.
생시와 삼매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제어됩니다.
호흡은
마음의 거친 형태입니다.
마음은 죽음의 순간까지
몸 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다가,
몸이 죽으면 떠나면서
호흡을 가지고 가 버립니다.
따라서, 호흡 제어의 행법은
마음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히는 방편일 뿐,
마음을 소멸시키지는 못합니다.
호흡 제어 수행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에 대한 명상이나 진언의 염송,
음식의 절제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신의 형상에 대한 명상이나
진언의 염송을 통해서
마음은 일념으로 집중됩니다.
마음은 늘 헤매기 마련입니다.
코끼리의 코에 사슬을 하나 쥐어 주면
그것을 코로 잡느라고 딴 짓을 하지 않듯이,
마음도 하나의 이름이나 형상에 몰두하면
그것만 붙들게 됩니다.
마음이 무수한 생각들로 분산되면
각각의 생각은 힘이 약해지지만,
생각들이 해소되면
마음은 일념이 되어 강해집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자기탐구가 쉬워집니다.
절제하는 규칙 중에서는
순수성 식품을 적당량 섭취하는 것과
관련되는 규칙이 가장 좋습니다.
이 규칙을 지키면
마음의 수순성이 증장되며,
그것은 자기탐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13. 대상에 대한 잔류 인상(생각)들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끝없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생각들은 언제나 없어지겠습니까?
진아에 대한 명상이 점점 깊어지면
그 생각들은 소멸될 것입니다.
14. 말하자면 시작도 없는 옛적부터 계속되어 온 이 대상에 대한 잔류 인상들이 해소되고, 우리가 순수한 진아로 남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 빠지지 말고
진아에 대한 명상을
끈질기게 붙들어야 합니다.
설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 나는 죄인이다. 이런 내가 어떻게 구원받겠는가?” 하면서
걱정하고 울면 안 됩니다.
‘나는 죄인이다’ 하는 생각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예리하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두 가지 마음, 곧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은
잔류 인상들입니다.
마음이 좋은 인상들의 영향 하에 있을 때에는 선이라고 하고, 나쁜 인상들의 영향 하에 있을 때에는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속적인 대상이나
다른 사람들이 관심 갖는 그런 문제에
쏠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 욕망과 증오심 둘 다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베푸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진리를 이해한다면
누가 남에게 베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자아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자아가 가라앉으면
모든 것이 가라앉습니다.
우리가 겸허하게 처신하면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마음이 가라앉게 되면
우리는 어디서도 살 수 있습니다.
15. 탐구는 얼마나 오랫동안 수행해야 합니까?
마음속에 대상에 대한 인상들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가 필요합니다.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이 탐구를 통해
그 생각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진아를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진아에 대한 내관을 밀고 나가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성채 안에 적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은 계속 공격해 오겠지만,
그들이 나타나는 족족 없애 버리면
성채는
결국 우리의 수중에 떨어질 것입니다.
16. 진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진아뿐입니다.
세계, 개인적 영혼 그리고 신은
그 실재 안에서 나타나는 겉모습들입니다.
마치 자개의 은과 같이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집니다.
진아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것을 ‘침묵’이라고 합니다.
진아 자체가 세계이고,
진아 자체가 ‘나’이며,
진아 자체가 신입니다.
모든 것이 시바이고 진아인 것입니다.
17. 일체가 신의 작품 아닙니까?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노력도 없이
태양은 떠오르는데,
단지 태양이 떠 있기만 해도
일장석(sunstone)은 화기를 뿜어내고,
연꽃은 피어나고,
물은 증발하며,
사람들은 갖가지 일들을 하고 나서
휴식합니다.
자석이 있는 곳에서 바늘이 움직이듯이,
신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 가지 (우주적) 작용
또는 다섯 가지 신의 활동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들은 그들 각자의 업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하고 휴식합니다.
신은 아무런 의지도 없으며,
아무런 업도 그에게 붙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 만물의 활동이
태양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고,
다른 4대 원소(지수화풍)의 성질이
일체에 두루한 허공(ether)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18. 헌신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헌신자입니까?
신, 곧 진아에게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헌신자입니다.
신에게 자기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생각도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진아 안에 부단히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신에게 어떤 짐을 맡겨도
그는 그 짐을 져 줍니다.
신의 지고한 힘이 만물을 움직이는데,
왜 우리 자신을 그 힘에 맡기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들로 계속 고민해야 합니까?
우리는 기차가
짐을 다 운반해 준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서도
왜 우리의 작은 짐을 기차 안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않고,
불편하게도 머리에 이고 있어야 합니까?
19. 어떤 것이 무집착입니까?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것을 아무 미련 없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무집착입니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가 진주를 캐내듯이,
우리도 각자 무집착을 갖추고
자신의 내면으로 뛰어들어
진아라는 진주를 캐내야 합니다.
20. 신과 스승이 영혼의 해탈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까?
신과 스승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뿐이지,
그들이 직접 영혼을
해탈의 상태로 데려다 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의 입 안에 떨어진 먹이가
도망칠 수 없듯이,
스승의 자비로운 눈길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스승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며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의 노력으로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추구하여
해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지의 눈으로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지,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라마라는 사람이
자신이 라마인 것을 알기 위해
거울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까?
21. 해탈을 열망하는 사람은 범주들(categoris)의 본질을 탐구해야 합니까?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사람이
쓰레기를 낱낱이 살펴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듯이,
진아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범주들의 개수를 헤아리거나
그것들의 특징을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진아를 숨기는 범주들을
모조리 내버리는 것입니다.
세계를 꿈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22. 생시와 꿈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까?
생시는 길고 꿈은 짧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생시에 일어나는 일들이
생시에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꿈속에서는 역시 그러합니다.
꿈속에서는
마음이
다른 몸을 갖습니다.
생시의 상태에서나
꿈의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23. 해탈을 갈망하는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든 경전들은 해탈을 얻으려면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 결론적인 가르침은
마음이 가라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끝도 없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무엇이 진아인지를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서 탐구해야 하는데,
이러한 탐구가
어찌 책을 통해서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지혜의 눈으로
자신의 진아를 알아야 합니다.
진아는 다섯 껍질의 안에 있지만,
책은 그것들의 밖에 있습니다.
진아는
다섯 껍질을 내버리고
탐구해야 하는 것이므로,
책 속에서
진아를 찾는다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자신이 (책에서)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24.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바로 진아의 성품입니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습니다.
세계의 어떤 대상 안에도 행복은 없습니다.
무지로 인해 우리는
어떤 대상에서 행복을 얻는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밖으로 나가면
불행을 경험합니다.
사실 마음의 욕망이 충족될 때에도,
그것은 마음이 자기 자리(근원)로 돌아가서 진아인 행복은 즐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잠, 삼매, 기절 등의 상태에서나,
마음이 바라는 대상을 얻었거나
싫어하는 대상이 없어졌을 때,
마음은 안으로 향해져서
순수한 진아-행복을 즐깁니다.
이처럼 마음은
진아 밖으로 나왔다가
안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면서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나무 밑의 그늘은 쾌적하고
그늘 바깥은 열기가 뜨겁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돌아다니던 사람은
그늘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늘 밑을
계속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늘 속에서 머무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브라만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무지한 사람의 마음은
세계 안을 맴돌면서 불행을 느끼는데,
잠시 브라만으로 돌아오면
행복을 경험합니다.
사실 세계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가 사라질 때,
즉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마음은 행복을 경험하고,
세계가 나타날 때는
불행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25. 무엇이 지견(知見, wisdom-insight) 입니까?
고요히 있음을 지견이라고 합니다.
고요히 있다는 것은
마음을
진아 안에서 해소하는 것입니다.
텔레파시나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을 아는 것, 그리고 투시력 같은 것은 지견에 들지 않습니다.
26. 무욕과 지혜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무욕이 지혜입니다.
그 둘은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무욕이란
마음이 어떤 대상으로도
쏠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마음에) 어떤 대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진아 아닌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무집착 또는 무욕이며,
진아를 떠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27. 탐구와 명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마음을
진아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
탐구입니다.
명상은
자기 자신을
브라만,
즉 존재-의식-지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8.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속박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성품을
탐구하여
자신의 참된 성품을 깨닫는 것이
해탈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2)
1. 나는 누구입니까?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프라나 등의 다섯 가지 기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2.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순수한’ 앎(Awarenss)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3. 그 각성(Awareness)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의 본질은 실재-의식-지복이다.
4. 어느 때에 진아(진정한 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5. 현상계가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한은
진아를 깨달을 수 없습니까?
그렇다.
6.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과
진아에 대한 깨달음과의 관계는
뱀과 밧줄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길을 가던 사람이 길에 떨어진 밧줄을
뱀이라고 잘못 오인하는 경우).
그 뱀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밧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진아를 깨달을 수 없다.
7. 어느 때에 현상계가 사라집니까?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8. 마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마음이란
진아 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마음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또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잘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따라서 현상계도 없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나
꿈꿀 때에는
생각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도 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바깥으로 현상계를 투사했다가
다시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으며
진아가 나타날 때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진아가
바로 아트만이다.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9.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탐구해 들어가야 합니까?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나’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1인칭이 있고 난 연후에
2인칭과 3인칭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10. 어떻게 하면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계속 탐구해 들어감으로써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을
계속하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이
마치 다른 장작들을 다 태운 뒤에
스스로도 타버리는 불쏘시개 장작처럼
사라지는 때가 온다.
그러면 그때
깨달음이 드러난다.
11.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이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12. 다른 방법으로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까?
이 방법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
마음을 조절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호흡조절을 통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흡이 조절되는 동안만이며
호흡이 흐트러지면
마음이 다시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이고
최초의 생각은 ‘나’라는 생각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인데,
바로 이 에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도 조절되고
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때에는
마음이 사라져도 호흡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신의 뜻이다.
그럼으로써 육체가 유지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 육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는 상태와 삼매상태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된다.
호흡은
'거친 형태의 마음'이다.
마음은 죽기 전까지
육체 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며,
죽음과 동시에
호흡을 가지고 가 버린다.
따라서 호흡조절 훈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호흡조절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한다든가,
만트라를 외운다든가,
음식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신의 형상에 대해 명상을 하거나
만트라를 외우는 것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잡다하게 있으면
생각 하나하나의 힘은 약해지지만
한 생각만 있으면 마음이 집중되어
그 힘이 강해진다.
이러한 마음상태에서는
자아탐구가 쉬워진다.
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 중에는
과일·야채 등 채식을 위주로 하는
적당한 식사법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도 자아탐구에 도움이 된다.
13. 대상에 대한 잔류 생각들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 모든 생각들은 언제 없어지겠습니까?
진아에 대한 명상이 깊어짐에 따라
그 생각들도 사라져간다.
14.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계속되어 온 이 대상에 대한 생각들이 모두 없어지고, 순수한 진아로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를 따지지 말고
진아에 대한 명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설사 큰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될 수 있겠느냐’
라고 생각하여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우선 ‘나는 죄인이다’ 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모든 힘을 기울여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선한 마음이 따로 있고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세속적인 대상이나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에
쏠리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에게 나쁘게 대해도,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욕망과 증오는 둘 다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남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자신의 자아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자아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또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게 된다.
15. 자아탐구는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마음속에 '대상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 라는 탐구가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이 탐구를 통하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진아를 깨달을 때까지
완전히 진아에 몰입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요새 안에 적이 남아 있는한
그들은 언제고 다시 공격해 오겠지만,
나타나는 족족 없애 버리면
요새는 결국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16. 진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오직 진아만이 실재하며
현상계, 개아, 신 등은
진아 안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진아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곳이며
‘침묵’이라고도 한다.
진아가 곧 현상계이고
진아가 곧 개아이며
진아가 곧 신이다.
진아는 모든 것이다.
18.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입니까?
자기 자신을 진아, 즉 신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자기 자신을 신에게 던진다는 말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진아 안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신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
지고한 신의 힘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
왜 우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는가?
기차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다 운반해 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왜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19. 무집착이란 무엇입니까?
생각이 일어날 때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그 생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무집착이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에 내려가서
진주를 캐오듯이
우리는 무집착을 달고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진아라는 진주를 캐내야 한다.
20. 신 또는 스승이 인간으로 하여금
구속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수는 없습니까?
신과 스승은
벗어나는 것을 가르쳐 줄 뿐이지
벗어난 상태를 주지는 않는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일단 호랑이의 입 속으로 들어온 먹이는
다시 빠져나갈 수 없듯이,
일단 스승의 자애로운 은총 속으로
들어온 제자는
스승에 의해 구원받게 되어 있다.
물론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
자신의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22.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깨어 있는 상태는 길고
꿈꾸는 상태는 짧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 상태에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꿈꾸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꿈꾸는 상태에서
마음은 다른 체(body)를 가진다.
또 어느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23.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모든 경전에서는
해탈을 얻으려면
마음을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진아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책을 통해서 가능하겠는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지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진아를 알아야 한다.
진아는
다섯 가지 감각의 내부에 있으며,
책은 그들의 밖에 있다.
따라서 책 안에서
진아를 찾아봐야 소용이 없다.
자신이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24.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바로 진아의 본질이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다.
현상계의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우리는 무지로 인하여
어떤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이 밖으로 향할 때,
그것이 경험하는 것은 불행뿐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달성되면,
그 마음은 제자리로 돌아와
행복을 즐기지만,
그것 역시
진아의 행복이다.
즉, 깊은 잠을 잘 때,
삼매에 들었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면서
순순한 진아의 행복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경험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있다가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낀다.
그런데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그늘 아래서 안주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아를 떠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현상계를 헤매며
불행을 느끼고,
어쩌다가 한 번씩
진아로 돌아와서 행복을 경험한다.
사실 현상계란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현상계가 사라질 때,
즉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며
현상계가 나타날 때
불행을 경험한다.
26. 무욕과 지혜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무욕이 지혜다.
둘은 다르지 않다.
무욕이란
마음이
어떠한 대상으로도
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지혜란
마음속에 아무런 대상도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진아가 아닌 것을 구하지 않음이
무욕이고,
진아를 벗어나지 않음이
지혜다.
27. 자아탐구와 명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자아탐구는
마음을 진아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명상은
자기 자신이
브라흐만, 즉 존재-의식-지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8.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나는 누구인가」, 청하
* 17, 21, 25번 문항은 '나는 누구인가'
책에 미수록 되어 있음.
나는 누구인가? (3) - 연문형
1920년대 후반에 바가반이 문답형 판본을 토대로 답변을 쭉 이어 하나의 연문형連文形(질문은 생략하고 답변만 이어 쓴 형태) 판본을 만들었다. 타밀어판은 제3판(1940)부터 본 연문형을 채택했다.
모든 개아들은
불행이 없이 늘 행복하기를 바라고,
모두 그들 자신에 대한
더없이 큰 사랑을 가지고 있으며,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그 사랑의 이유이므로,
마음이 사라진 잠 속에서
그들이 매일 경험하는
그들 자신의 본성인
그 행복을 얻으려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지(知)의 탐구야말로
주된 수단이다.
나는 누구인가?
일곱 가지 구성 요소로 된
거친 몸은 ‘나’가 아니다.
소리, 감촉, 형상, 맛과 냄새의
다섯 가지 대상을 지각하는
귀, 피부, 눈, 혀와 코의
다섯 가지 지식 기관은
‘나’가 아니다.
말하고, 걷고, 붙잡고, 배설하고, (성적인) 쾌락을 즐기는 성대, 발, 손, 항문과 생식기의 다섯 가지 행위 기관은 ‘나’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쁘라나를 위시한 다섯 가지 생명 기운은 ‘나’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나’가 아니다.
(잠 속에서와 같이) 모든 대상적 지각과
모든 행위가 끊어졌을 때,
대상습하고만 연관되는 무지도
‘나’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니다 라고
부정한 뒤에,
초연히 남아 있는
'앎'이야말로 ‘나’이다.
앎의 성품은
삿찌다난다[존재-의식-지복]이다.
모든 앎과
모든 행위의 원인인
마음이 가라앉으면
세계에 대한
지각도 그칠 것이다.
상상의 뱀에 대한 앎이
그치지 않으면
바탕인 밧줄에 대한 앎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상상된 세계에 대한 지각이
그치지 않으면
바탕인
성품에 대한 직견(直見)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진아의 성품 안에 존재하는
'놀라운 힘'이다.
그 마음이
모든 생각을 투사한다.
생각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 보면,
따로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생각이야말로
마음의 성품이다.
생각들을 없애 버리고 나면
세계라고 할 다른 것이 없다.
잠 속에서는
생각이 없고,
세계도 없다.
생시와 꿈속에서는
생각이 있고, 세계도 존재한다.
거미가 그 자신 안에서
실을 자아내었다가
다시
그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그 자신 안에서
밖으로
세계를 투사했다가
그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여 해소한다.
마음이
자신의 성품에서
밖으로 나오면
세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세계가 나타날 때는
성품이 나타나지 않고,
성품이 나타날(빛을 발할) 때는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성품을 탐구해 들어가면
‘자기tan’야말로
마음인 것으로 끝난다.
‘자기’라고 하는 것은
진아의 성품이다.
마음은 늘
하나의 거친 사물(육신)을 쫓아서
존립하며,
독자적으로는 존립하지 않는다.
마음이야말로
미세한 몸이라고 하는 것이고,
개아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몸 안에서
‘나’라고 일어나는
그것이야말로 마음이다.
‘나’라고 하는 생각이
몸 안에서 처음 일어나는 곳이
어디인지를 탐색해 보면
심장 안에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이야말로
마음의 탄생지이다.
‘나, 나’ 하고 계속 생각하기만 해도
그것이 (우리를) 데려가서
그곳에 남겨둘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나’라는 생각이 최초의 생각이다.
이것이 일어난 뒤에야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1인칭이 나타난 뒤에야
2인칭과 3인칭이 나타나며,
1인칭 없이는
2인칭과 3인칭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에 의해서만
마음이 가라앉으며[사라지며],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을 태워 버린 뒤에
그 자신도
화장터의 부지깽이 막대기처럼
소멸될 것이다.
만일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것들을 완성하려 하지 말고
그 생각들이
누구에게 일어났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무슨 대수인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한 생각이 나타나는 즉시
그것이 누구에게 일어났는지를
탐구하면
‘나에게’ 라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탐구에 의해
마음은
그 탄생지로 돌아갈 것이며,
일어난 생각들도
가라앉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고 수행하면
마음이
자신의 탄생지 안에
확고히 자리 잡는 힘이 증가할 것이다.
미세한 마음이
두뇌, 감각 기관의 문을 통해 나가면
거친 이름과 형상들이 나타나고,
그것이 심장 속에 머무를 때는
이름과 형상들이 사라진다.
마음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심장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을
‘나를 향하기’ 혹은 ‘안으로 향하기’ 라고
부른다.
심장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을
‘밖으로 향하기’ 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마음이 심장 안에
확고히 머무를 때라야
모든 생각의 뿌리인
‘나’가 사라질 것이고,
항상 존재하는 자기만이
빛나게 될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는 곳이
성품(svarupa)이다.
그것이야말로
‘침묵’으로 불린다.
이와 같이 고요히 있음을
‘지견’이라고 부른다.
고요히 있음이란
마음을 진아의 성품 안에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 남들의 생각을 안다든가, 과거·현재·미래를 안다든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 등은
지견이라고 부를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진아의 성품뿐이다.
세계, 영혼, 하느님은
자개 속의 은과 같이
그것 안에서 상상된 것이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사라진다.
성품이야말로 곧 세계이고,
성품이야말로 ‘나’이며,
성품이야말로 하느님이다.
모든 것은 시바의 성품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탐구 외에 다른 적합한 수단이 없다.
다른 수단으로 제어하면
마음이 가라앉은 듯이 보이다가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조식으로도 마음은 가라앉는다.
그러나 생기가 가라앉아 있는 동안만
마음이 가라앉고,
생기가 일어나면
그것도 일어나서
원습의 지배 하에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마음과 생기의 탄생지는
하나이다.
생각이야말로
마음의 성품이다.
‘나’라는 생각이
마음의 최초의 생각이며,
그것이야말로 에고이다.
에고가 일어나는 바로 그곳에서
생기도 일어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생기도 가라앉고,
생기가 가라앉으면
마음도 가라앉는다.
그러나 잠 속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아 있어도
생기가 가라앉지 않는다.
이는 몸의 보호를 위하여,
그 몸이 죽었는지 여부를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려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생시와 삼매에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생기도 가라앉는다.
생기는
'마음의 거친 형태'라고
말해진다.
죽을 때까지는
마음이 몸 안에서
생기를 유지하다가,
몸이 죽는 순간
그것을 가지고 가 버린다.
따라서 조식은
마음을 제어하는
하나의 보조 방편일 뿐,
마음 소멸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조식과 마찬가지로,
형상명상, 진언염송, 식사조절 등은
마음을 제어하는 보조 방편이다.
형상명상과 진언염송에 의해서도
마음은 일념집중을 얻는다.
마치 늘 움직이는 코끼리의 코에
쇠사슬을 쥐어주면
그 코끼리는 그것을 붙드느라고
다른 것을 붙들지 않듯이,
늘 움직이는 마음도
하나의 이름이나
(신의) 형상으로 훈련시키면
그것을
꽉 붙들고 있게 된다.
마음이
무수한 생각들로 확산되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생각은
아주 힘이 약하다.
생각이 줄어들고 줄어들어
일념집중을 얻은 마음에게는
자기탐구가 쉽게 성취될 것이다.
모든 규율 중에서도 으뜸인
‘순수성 식품을 적당량 섭취하는
음식조절’에 의해
마음의 순수성이 증가할 것이고,
그것은 자기탐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예적부터 내려오는
대상습(對象習)이
바다의 파도처럼 무수히 일어난다 해도,
성품명상(svarupa-dyana)이
늘어나고 늘어나면
그것들이 소멸될 것이다.
‘이러한 습들을 해소하고
성품으로서만 머무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고
의식하는 생각이
일어날 여지를 주지 말고,
성품명상으로
끈질기게 붙들고 나가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하더라도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야!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며
한탄하며 울기보다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아예 내버리고
열심히 성품명상을 하면,
그는 반드시 큰 변화를 얻을 것이다.
마음 안에
어느 정도의 대상습이 존재하는 한,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가 필요하다.
생각들이 일어날 때는,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모두
탐구에 의해 소멸해 버려야 한다.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
무착심 또는 무욕이며,
(언제나) 자기를 떠나지 않음이
지(知)이다.
실은 이 둘(무욕과 지)은
하나이다.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허리에 돌을 달고 잠수하여
바다 속의 진주를 캐내듯이,
누구나 무욕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으로 잠수하면
진아라는 진주를 얻을 수 있다.
끊임없는 성품기억을 꽉 붙들고 나가면
성품을 성취하게 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채 안에 적들이 있는 한
그들이 계속 나오겠지만,
그들이 나올 때마다
모두 죽여 버리면
성채는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신과 스승은
실로 다르지 않다.
호랑이의 입 안에 붙잡힌 먹이가
돌아갈 수 없듯이,
스승의 은총의 시선에
붙잡힌 사람들은
그에 의해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며
결코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스승이 보여준 길을 따라
틀림없이 나아가야 한다.
진아안주 안에 완전히 몰입하여,
진아내관 아닌 어떤 생각도
일어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이,
신에게
우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신에게
아무리 많은 짐을 지워 드린다 해도
그는 모든 짐을 져 줄 것이다.
지고한 하느님의 힘이
모든 행위를 추진하고 있는데,
왜 우리가 그 힘에 맡겨 버리고
(편안히) 있지를 못하고
늘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기차가 모든 짐을 날라 준다는 것을
알면서,
왜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우리가
우리의 작은 짐을
기차에 내려놓지 않고
머리 위에 이고 있어야 하는가?
행복이라는 것은
자기의 성품일 뿐이며,
행복과 진아의 성품은
다르지 않다.
진아 행복만이 존재하고,
그것만이 실재한다.
세간의 어떤 대상에서도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서
행복을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분별이 부족해서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마음이 밖으로 나올 때는
불행을 경험한다.
사실 우리의 생각들이
(욕망들이) 충족될 때마다
마음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진아의 행복을
체험하는 것일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잠, 삼매, 기절 상태와
바라던 것을 얻었을 때,
싫어하던 것이 사라졌을 때는
마음이 안으로 향해져서
진아의 행복을 경험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은 쉬지 못한 채,
진아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요동한다.
나무 밑의 그늘은 시원하다.
바깥의 햇볕은 뜨겁다.
밖에서 헤매던 사람이
그늘 안으로 들어가면
시원해진다.
잠시 머물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면
더위를 참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다시 나무 밑으로 들어온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늘을 떠나 햇볕 속으로 나갔다가
햇볕을 떠나 그늘로 오기를 반복한다.
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은
분별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나 분별심이 있는 사람은
그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인의 마음은
브라만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의 마음은
세계 속을 배회하며
계속 불행을 겪고,
잠시 브라만으로 돌아와서
행복을 얻는다.
세계라는 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가 사라질 때,
즉 생각이 그칠 때,
마음은 행복을 경험한다.
세계가 나타나면
마음이 불행을 경험한다.
욕망, 의지, 노력 없이
떠오른 태양이 있기만 해도,
일장석은 화기를 뿜어내고,
연꽃은 만개하며,
물은 증발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활동에 종사하여
그것을 하고
가라앉듯이 (활동을 그치듯이),
또한 자석 앞에서
바늘이 움직이듯이,
단지 신의 존재라는
특별한 성품 때문에 일어날 뿐인
신의 세 가지 활동
또는 다섯 가지 기능 안에
사로잡혀 있는 개아들은,
그들 각자의 업에 따라서
움직이고(활동을 하고) 가라앉는다.
그렇기는 하나,
신은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단 하나의 업도
그에게는 붙지 않는다.
그것은 세간의 행위들이
태양에게 붙지 않고,
다른 4대 원소(지수화풍)의
성질과 결함들이
일체에 두루한 허공에
붙지 않는 것과 같다.
모든 저작에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 마음제어가
(그러한) 저작들의
궁극적인 의도임을 알고 나면,
저작들을 끝없이 공부해 봐야
아무 이익이 없다.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탐구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저작들을 탐구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의 지(知)의 눈에
의해서이다.
홍길동이
자신이 홍길동임을 알기 위해
거울을 필요로 하는가?
‘자기’는
다섯 껍질의 안에 있는 반면,
저작들은
그것들의 밖에 있다.
따라서 다섯 껍질을 제거하고 나서
탐구해야 하는 우리 자신을,
저작들 안에서 탐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속박되어 있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탐구하여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아는 것이
곧 해탈이다.
언제나 마음을
진아 안에 두는 것만을
‘자기탐구’라고 부를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사뜨-찌뜨-아난다인
브라만으로 생각하는 것이
명상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쓰레기를 쓸어 담아 내버려야 할 사람이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봐야
아무 이익이 없듯이,
자기를 알아야 할 사람이
진아를 은폐하고 있는 범주들을
모두 한데 모아 내버리지 않고,
그것들이 이렇게 많다면서
그들의 성질을 자세히 조사해 봐야
아무 이익이 없다.
세상은
하나의 꿈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생시는 길고
꿈은 잠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차이가 없다.
생시에 일어나는 모든 활동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이나
꿈속에서 일어나는 활동들도
그때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속에서는
마음이 다른 몸을 취한다.
생시와 꿈 모두에서
'생각' 및 '이름'과 '형상'들이
일시에 일어난다.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라는
두 가지가 있지는 않다.
마음은 하나일 뿐이다.
원습들이 좋은
원습과 나쁜 원습이 있는 것이다.
마음이
좋은 원습에 지배될 때는
좋은 마음이라고 하고,
그것이 나쁜 원습에 지배될 때는
나쁜 마음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쁘게 보여도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좋아함과 싫어함 둘 다를
싫어하는 것이 옳다.
마음이 세간적인 문제에
너무 쏠리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남들에게 주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이 진리를 안다면
실로 누가 베풀기를 꺼리겠는가?
자기가 일어나면
일체가 일어나고,
자기가 가라앉으면
일체가 가라앉는다.
우리가 겸허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그만큼 선이 있다.
만일 마음을 제어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든지 있을 수 있다.
ㅡ 라마나 마하르쉬 저작 전집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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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