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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바구 길 -부산역 맞은편
위 글은 신문에 실린 글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고, 아래 내용 글은 신문 내용을 재정리해 넣었다. 아울러 직접 찍은 탐방 사진에 개인적으로 느낀 소감과 정보 공유의 글도 포함시켰다.
골목마다 이야깃거리… 釜山 '이바구길' 관광 봄바람
달동네서 관광 명소로… 1년 새 10만여 명 발길
인물사 담장·김민부전망대 등 근·현대사 흔적 곳곳에 담겨… 투어버스 가득 찰 정도로 인기, 쉽터 등 마을기업으로 운영해 지역 경제 살리는 데 큰 도움
부산 동구 초량동 부산역 맞은편 '금호회국수 전통보리밥집' 옆 골목길.
왼편으로 '초량이바구길'이란 입팻말이 서 있었다. '이바구'란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란 뜻. 2013년 3월 길을 연 '초량이바구길'이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1년 남짓 동안 10만여명이 다녀갔다.
그 전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장소가 아니었던 이곳에 투어버스가 생기고, 주변 집값이 오르고, 빈집들이 팔리고 있다. 작년 9월 중순부터 매주 토·일요일 운행하는 '산복도로 투어버스'는 인기 만점으로, 보름 전엔 예약해야 한다.
인근에 호텔 5곳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정영석 동구청장은 "부산항·산복도로 등이 있는 동구는 개항, 해방, 6·25전쟁 등
근·현대사의 흔적과 기억들이 점으로 곳곳에 남아 있다"며 "이바구길은 지역의 이런 점들(스토리)을 연결해 선(텔링)으로 만든, 다른 곳엔 없는 유니크한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했다.
이하 초량 이바구길을 걸으며 직접 찍은 사진을, 검정색 글씨의 신문 내용 글에 맞추어 정리했다. 그외 보라색 글씨는 개인적으로 덧붙인 내용으로, 정보공유용 설명이기도 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크게 재편집해 만든 초량 이바구길 안내 코스 사진이다.
이번 탐방코스는 부산역을 기점으로 코스를 따라 '유치환의 우체통'까지
올라갔다가 까꼬막을 거쳐 부산역으로 내려오는 원점 회귀 코스에, 근처 차이나타운 특구까지 포함했다.
지하철 이용 시 기점이 되는 부산역 7번 출구다. 도로 건너편에 부산역 건물도 보인다.
지하철 7번 출구에서 조금 올라가다, 첫 갈림길인 왼쪽 차도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부산역 쪽에서 올라와 안내판(붉은 원)이 표시된, 옛 백제병원을 만나고,
오른쪽 길로 더 들어가 옛 남선창고터를 보고서 되돌아 나온다.
이하 검정색 글씨의 신문글 내용 참조...
입팻말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50m쯤 걸어가니 오른쪽으로 5층 짜리 빨간 벽돌 건물이 나왔다.
1922년 지어진 국내 최초의 성형외과 의원이 있었다는 옛 백제병원 건물이다.
당시엔 주변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급'으로, 성형외과 외에 내과·치과 등 여러 의원들이 입주해 있었던 '메디컬센터'였다.
이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50여m를 가면 한 마트 옆에 '남선창고' 터가 있다.
남선창고 터는 표지판(붉은 원)이 붙어 있고, 붉은 벽돌 담장만 남은 마트 주차장이라 실망... 암튼, 이런 잔재도 이바구길 스토리에 넣어 놓았다.
빨간 벽돌 담만 남은 남선창고는 1900년대 초, 영남권에 공급되는 동해 명태의 집하지였다.
당시 이곳 주변의 명란젓 맛을 보고 반한 가와하라란 일본인이 귀국해 후쿠오카에 명란젓 공장을 세웠다.
이것이 '후쿠야 명란'이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명란 회사다.
이 스토리는 2013년 일본TV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됐다.
차도에서 초량이바구길 이정표(붉은 원)가 있는 골목으로 올라간다.
남선창고 터에서 백제병원 건물로 되돌아와 산쪽으로 큰길 따라 50~60m 올라가
오거리에서 11시 방향으로 20~30m 걸으면 '광복사'란 간판집이 나온다.
그 옆으로 폭 2m쯤 되는 골목이 나오며 꼬불꼬불한
'이바구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곳부터 경사 급한 좁은 골목길을 지나며 '산복도로'로 올라간다.
'산복도로'란 산허리쯤에 난 도로다.
6·25 전쟁통에 피란민들이 산비탈에 모여 살자 길이 생겼다.
계단을 올라 왼쪽에 위치한 초량초등학교에도 잠시 들어가 본다.
7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다.
초량초등학교에서 되돌아나와 골목 오른쪽에 위치한 초량교회도 확인해 보고...
1892년에 설립되어, 원래 이름과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12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진 교회다.
초량교회 - 안창호, 이승만대통령이 다녀갔으며, 주기철 목사가 목회 활동을 한 곳이다.
초량초등학교와 초량교회 사이 골목을 들어서자,
담장에 이바구길 안내도가 붙어 있고, 담장갤러리에 동구 인물사, 동구를 이어온 사람들, 초량초등학교 출신 한류 스타, 동구 초량의 삶과 마주 보기 등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 당시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다.
'동구 인물사 담장'에는
정치인 장건상·허정·박순천, 경제인 강석진·신덕균, 문화인 유치환·이윤택·박칼린,
한류스타 나훈아·이경규 등이 이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공부했다. 인물사 담장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김민부는 "일출봉에 달~뜨거든…"으로 시작하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가사를 지은 시인이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이곳 동구에서 살았다.
<담장갤러리에 전시된 사진들>
박순천
박기출
장기려
초량 출신 예술가들
<오윤택>
초량초등학교 출신 한류스타
이어 코스 왼쪽에 지난 2월에 새로 지어졌다는 '이바구정거장'이 보인다.
뭔가 가봤더니, 덧붙인 메뉴를 파는 간이식당 겸 휴게쉼터로 마을에서 운영하는 모양이다.
168계단. 스키장 상급코스만큼이나 가팔랐다.
발 아래 부산항과 도심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복도로로 들어서 동쪽으로 가면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 모체인 청십자병원을 운영했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더 나눔센터', 갤러리·찻집·전망대 등을 갖춘 '유치환의 우체통', 게스트하우스인 까꼬막(산비탈의 경상도 사투리),
마을카페 등을 만난다. 해가 지고 나서 '유치환의 우체통' 전망대에서 보는 부산 야경은 일품이다.
방문객 이동환(47)씨는 "다른 곳에서 느껴보지 못한 사람 사는 이야기, 부산항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멋진 전망은 소중한 체험이었다"고 했다.
이런 '초량이바구길'이 봄바람을 타고 진화를 이어간다.
2014년 2월, '168계단' 가기 전 장소에 휴게 쉼터 '이바구정거장'이 문을 열었다.
다음 달 초에는 168계단 주변에 게스트하우스 '이바구충전소' '6·25 막걸리집', 시래깃국 등을 파는 '168도시락국'이 영업을 시작한다.
모두 주민이 종업원으로 일하는 마을 기업이다. 동구 측은 올해 좌천동 일대 '호랭이 이바구길', 범일동 일대 '부산의 부산이바구길' 등을 추가로 만든다.
이상으로 신문에 소개된 검정색 글씨의 신문글 내용은 마무리된다.
168계단은 조금 올라오면 그 당시 사람들이 음용했던 우물터가 있는데 우물터를 드려다 보면 지금도 물이 가득 고여 있다.
계단을 올라서자, 시락국밥 등을 파는 '168도시락국'이 보인다.
168계단을 오르는 중간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김민부 전망대'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석류'라는 김민수시에 김민부 시인의 약력(붉은 사각)을 확대해 사진 상단에 덧붙였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알려진 시인
김민부(1941~1972)의 '석류'
1956년 부산고1 때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조
'석류(石榴)가 입선
불타오르는 정열에
앵도라진 입술로
남몰래 숨겨온 말 못할 그리움
아 이제야 가슴 뻐개고
나를 보라 하더라
나를 보라 하더라
기다리는 마음 (작사 김민부
작곡 장일남
노래 조영남)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오지 않고
파도소리 물새소리에 눈물 흘렸네
*김민부 : 부산고 출신(32세에 요절)
이곳 김민부 전망대에도 세월호 관련 노란 본이 많이 달려있었다.
민부 전망대의 휴게 쉼터
'메리카노 천원'라는 착한 가격 가게에
방객들이 슬슬 모인다.
부산역 건물이 보이고, 그 뒤로 이번에 개통한 부산항대교(북항대교)도 보인다.
168계단을 올라서자, 산복도로가 나오면서 이바구충전소를 만난다.
이바구충전소의 안내판(붉은 )을 덧붙였는데, 게스트하우스라고 한다.
앞쪽 쓰러질 듯한 건물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뒷편 붉은 벽돌의
신축건물인 것 같다.
이어 갈림길 도로 오른쪽 내리막으로 초량2동 공영주차장앞을 지나,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 모체인 청십자병원을 운영했던 장기려 기념관이 있는
'더 나눔'센터에 도착.
장기려 기념관에는 관련 다양한 자료와 영상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1층에 있는 북카페 휴식공간으로 내려가 뻥튀기도 사먹고,
커피 한잔 마시며 잠시 휴식...
'더 나눔'센터를 나와 망양로를 따라, 다음 코스 '유치환의 우체통'으로 향한다.
'유치환의 우체통'은 붉은 화살표가 있는 지점 근처인데, 그 왼쪽 붉은 건물은 부산컴푸터과학고다.
저곳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헷갈리며, 일단 선화여중 정문을 찾아서, 그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된다.
성막교회 위쪽 차도로 올라가, 망양로 산복도로를 향한다.
버스가 다니는 망양로 차도에서 바라본, 장기려 기념관(붉은원) 방향 풍경...
장기려기념관에서 아파트쪽 산복도로로 올라가,
화살표 방향으로 돌아서 이곳까지 왔다.
산복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왼쪽 선화여중으로 올라가,
정문에서 오른쪽 포장길로 오른다.
유치환의 우체통
'유치환 기념관' 옥상에 있는 우체통
아래층 쉼터에서 우표와 엽서를 구입해 이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받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움 놀이)
행복 - 청마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유치환의 우체통 건물 내 쉼터 모습.
청마 유치환 관련 시화와 영상자료가 있고, 부산 여류작가 초대전도 열리고 있었다.
여성 관리인에게 '정운 이영도 시인' 없었다면 시인 '청마 유치환'도 없었을 텐데, 어찌 이영도 시인과 관련된 자료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이곳 초량과 인연이 없어서란다.
지나온 장기려 기념관 방향 풍경으로,
오른쪽에 민주공원의 충혼탑이 보이고, 왼쪽에 영도의 봉래산도 보인다.
바로 아래 부산고등학교가 보이고, 그 너머로 최근 개통한 부산항대교(북항대교)가 보인다.
산복도로 따라 잠시 내려가자, 까꼬막 이정표(붉은 원)가 보이고,
오른쪽 시멘트길로 내려간다.
잠시 후 까꼬막 전망대를 만난다.
까꼬막은 '산비탈'의 부산 사투리다.
전망대 왼편에 마을 카페인 '까꼬막 페'도 보인다.
재미있고 다소 수다스런(?) 아줌마가 주인인데, 시간 있으면 머물러 보는 것도 괜찮은 쉼터다.^^*
전망대 직전 오른쪽에는 게스트하우스 까꼬막도 보인다.
까꼬막 망대 오른쪽 내리막길로 원점 회귀하던 중에,
설립된 지 오래된 초량성당 앞을 지난다.
원점 회귀 지점에 가까운 부산역 앞, '초량 차이나 타운 특구'로 들어간다.
차이나타운 특구 입구 모습. 건너편에 부산역이 보인다.
차이나 타운은 외국인들(중국, 러시아인 등)이 많이 찾는 거리로 중국 음식점들이 골목길 양옆으로 있고, 화교 학교가 있는 거리이다.
이곳에서 중국음식을 주문해서 먹어 보는 것도 여행의 참멋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가신 장기려의사선생'과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사랑 게재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가신 장기려의사선생님
한국의 슈바이쳐라 할 수 있는 장기려박사는 1909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32년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과를 졸업하셨다. 졸업후 1940년부터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전까지 평양의과대학 교수 겸 외과과장 등으로 재직하시다가 전쟁 통에 아들 한 명만 데리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하셨다.
6.25전쟁 당시 영도에 천막병원인 복음진료소를 개설해 무료 진료를 하면서 가난한 이웃에게 인술을 베풀고 참 사랑을 실천하셨다.
전쟁 후에는 진료소를 복음병원으로 발전시켜 오늘의 송도에 있는 복음병원(고신대학교의과대학)이 있게 하신 분이다.
1958년에는 부산시 서구 토성동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 3년간 무료 진료하셨고 1959년 국내 최초로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해 '간 외과'발전에 공헌했으며, 간암에 대한 연구로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받으셨다.
1968년에는 의료보험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할 때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기치로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셨는데, 이는 20년 후,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의 효시가 되었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1979년 필립핀의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1975년 정년퇴임 후에도 집 한 채가 없어 복음병원 옥상에서 지내시며 봉사활동을 계속하셨다.
그 당시 주위에서 장 박사의 훌륭한 뜻에 동참하는 분들이 모여들었고, 드러나지 않게 복지시설이나 기관에서 장 박사의 훌륭한 뜻을 실천하고 힘닿는 대로 봉사활동을 하는 의사들이 많았다.
월남한 이후 평생을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을 그리워하면서 독신으로 사셨는데 살아 생전에 만나지 못하셨다.
돈이 없어 진료비를 내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병원의 뒷문을 열어주어 몰래 도망치게 한 일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환자가 수술을 받기 전에 꼭 병실에 찾아와 손을 잡고 기도해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줘 안심하게 수술실에 들어가게 하셨으며, 수술 후에도 병실을 찾아와 기도와 함께 좋은 말씀을 들려 주셨다고 한다.
병이 났으나 가난하여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한 평생 인술(무료치료)과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가신 장기려박사님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시며 후세에 길이 기억될 분이시다.
이에 부산시에서는 이 분의 아름다운 삶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바구길에 '장기려 기념관'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분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사랑>
유치환(柳致環, 1908년 7월 14일 ~ 1967년 2월 13일)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교육자이다. 호는 청마(靑馬)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외가인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출생하였고, 초등학교 입학 전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읍 본가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극작가 유치진의 아우이기도 하다.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9년, 첫 번째 시집 《청마시초》를 발표하였다.
학력
-경상남도 통영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도요야마 중학교 수료
-경상남도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 연희전문학교 중퇴
이영도 :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 시조 시인 이호우(李鎬雨)의 여동생이다.
-1945년 [죽순]동인으로 활동하며 등단함.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가는 고유의 가락을 시조에서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간결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줌.
-시집으로는 《청저집》(1954),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1968) 등
정운(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 살의 청마는 스물 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 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 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3년 동안 편지를 쓰고 시를 써댔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으니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유치환 -
통영 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 그녀는 일찍이 결혼하여 21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
청마는 1947년 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당시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 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 중앙 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마땅히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 가야 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 운영해 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1976년 3월 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탑(塔) 詩/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시인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20여년에 걸친 플라토닉사랑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 같을 것이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겹다
불장난이 아닌 충실한 사랑을 짙게 물들여 그의 장년기를 수놓는 제2의 청춘 가로 채웠던 그는 외로운 사랑을 했으며 죽음도 그 안에서 너그러운 사랑 속에 안길 수 있었다. 바로 <주는 사랑>의 행복한 연가로 폭을 넓히고 무르익었다. 영원한 것, 平常無事의 터득 속에서 익힌 온화한 자애의 소근거림을 펼쳐 보이고 있다.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이영도를 정신적으로 무척 좋아하였다.
이미 처 자식이 있는 상태였던 그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에게 200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이영도 정운 선생이 1976년 예순의 나이로 타계한 뒤 무남독녀 박진아씨가 유품을 정리하니 미리 써둔 유서가 나왔고 유서에는 딸에게 사위에게 외손에게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알릴 사람의 이름과 화장해 달라는 말, 그리고 장례비에 써달라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꺼리고 신세를 지면 꼭 갚으려고 하는 분이었기에 당신의 죽음 역시 비록 딸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근검절약으로 일생을 부지런히 살았던 그녀는 택시를 타는 일이 거의 없고 값비싼 음식을 사먹는 일이 없고 물건을 쌌던 포장 노끈까지도 잘 간수했다가 재활용하고 원고지 뒷면의 활용은 물론 편지를 쓰다가도 틀린 곳은 다시 종이를 덧붙여 썼다.
철 지난 달력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잘 손질하여 화장실 부엌 같은 곳에 진열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근검 절약하면서도 남을 위한 배려는 돈독하였다.
후배 문인의 딱한 사정을 접하면 언제나 먼저 나서 도우고자 하였다.
냉기 속에서 청춘의 타오르는 불꽃을 오로지 시조로써 달래야 했던 정운 선생.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것은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54년)에 실렸던 작품('무제Ⅰ')으로,
경남 통영시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 선생이 청마 유치환과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정운 선생은 1940년 대말~50년 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고 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입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 길입니까?
끝내 만리 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 여기 지고지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정운 이영도의 시조를 적어 본다.
황혼에 서서 - 이 영도
산(山)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입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情)
진달래 - 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이 시조는, 산에 난만히 피어 있는 진달래로 부터 4·19 혁명 때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넋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추모와 자기 회한의 정을 읊은 작품이다. 선생의 무덤은 경북 청도군 내호 마을 선영 아래 오빠인 이호우 선생 곁에 있다.
정운 선생이 배출한 제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다들 괄목할만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20년 간 지켜간 그네들의 사랑은 불륜이라 치부하기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으로 흔히 나의 이야기는 '로맨스'고, 남의 이야기는 '불륜'이라지만, 이 두분의 사랑은 불륜이라 이름하기엔 너무 아름답다.
청마가 유부남이고 자신은 딸을 둔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지만 청마는 3년 동안 혼자서 변함없는 사랑을 보였다.
흔히 이별의 가장 많은 원인은 자존심 때문이기에 진정한 사랑엔 자존심이 살아있지 않음을 혼자서라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는 청마가 곁에 있는 이영도 시인이 부러웠다.
과연 청마 외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면 이영도의 가슴 아픔이 저려 온다.
싫어서가 아닌데..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마음을 그 누가 알까요? 한편으론 행복하고 한편으론 아팠을 그 마음 변함없는 사랑에 어쩜 유치환 보다 더 울었을 이영도, 사랑 한다고 할 만큼 아팠을 이영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픔이 얼마나 크게 아팠을까요.
그리고 바로 건너편 2층 집에 그토록 사랑 할 여인이 곁에 있었으니 어쩜 유치환은 행복하기만 했을까?
이영도가 있었기에 바위처럼 꿋꿋하기만 했던 청마도 애련의 글을 쓸 수가 있었다.
이영도는 청마의 시 세계를 넓혀주었다.
3년만에 청마에게 마음을 연 이영도로 인하여 그들은 20년 동안 사랑을 키웠다.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현대에서 분명 이들의 사랑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아마 유치환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지만 않았다면 더 긴 세월을 사랑했을 것이다.
유치환에게 받은 편지를 한 통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 이영도의 마음이 너무 예쁘다
훗날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모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거창하게 출판까지는 꿈꾸지 않았을것이다
유치환이 이영도를 사랑한 만큼 이영도는 유치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게 연서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세간에서 불륜이라기 보다는 참 아름다운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름해 주는 그런 사랑을 나의 태도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 나도 죽기전에 이런 사랑 한번 꼭 해보고 싶다.
-책과의 Teatime 중에서-
* 달밤 ( 이호우)-이영도의 오빠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문장>(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