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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득 채운 학대와 시기 4:1~6
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5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6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친구의 유익 4:7~16
7 내가 또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14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
15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16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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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학대자 손에는 권세가 있지만 학대받는 자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전도자는 살아 있는 자보다 죽은 자가 복되고, 출생하지 않아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는 더 복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고, 세 겹 줄은 쉽게 안 끊어집니다. 가난해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한 왕보다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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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한 인생(4:1~6)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 가운데는 불공평해 보이는 일들도 있습니다. 학대받는 이들은 괴로움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그들을 위로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 권세가 있어
그들의 횡포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불의를 바라보며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까지 말합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는 시기와 질투가 가득합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재능을 살려서
노력하고 수고해 어떤 일을 성취하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시기합니다. 반면에 게으르고 미련한 자는
팔짱을 끼고 놀면서 제 몸만 축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계 21:4; 22:12).
물질에 욕심을 두지 말고 자족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 묵상 질문: 전도자가 본 세상의 학대와 시기는 어떠했나요?
- 적용 질문: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에서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동역자의 힘(4:7~16)
홀로 힘겹게 사는 것보다 이웃과 함께 협력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가족이나 신앙 공동체 없이
홀로 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고독하게 살면서 끊임없이 일하고도 자신이 가진 데 만족하지 못하고
재물이나 명예에 집착해 하나님이 주신 삶을 누리지 못한다면 매우 불행하고 허무한 인생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유익한 것은,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붙들어 주고 일으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넘어져도 돌봐 줄 사람이 없습니다. 서로 협력하고 하나가 되면 홀로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나누고 함께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는 하나님이 인생에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 묵상 질문: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살면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내가 넘어졌을 때 누구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나요? 오늘 내가 일으켜 줄 지체는 누구인가요?
오늘의 기도
쫓고 쫓기며 비교를 일삼는 경쟁 사회 속에서 영육 간에 절제하기가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신앙 공동체의 도움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시고,
나누고 도우며 함께하는 ‘같이’의 하루가 되도록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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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절 ‘해 아래’에는 학대당하는 자들의 위로자가 없지만, 하늘의 하나님이 진정한 위로자가 되실 것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억압과 착취와 폭력이 만연한 이유는 사람들이 학대의 참상을 보고도 학대자들이 지닌 권세가 두려워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괜히 나섰다가 자신도 학대당할까 두려워 겁을 냅니다. 하늘의 위로와 보응이 임하기까지 그저 학대를 피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것, 그것이 과연 신앙을 가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요?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2,3절 부조리와 비참한 현실은 하나님을 등진 세상의 모습입니다. 특정 시대, 특정 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만연합니다. 전도자가 죽은 자와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 산 사람보다 더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죽음을 미화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나을 만큼 고통스러운 이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만큼 악에게 해를 당하는 이들에 대한 정직한 인식입니다.
‘해 아래’에서는 하나님이 재판장이라는 것도 진실이고, 악이 지배하는 현실도 진실입니다. 너무 쉽게 설명하려 하지 말고 두 현실 모두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뢰와 세상을 향한 책임 있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4절 일의 성취와 보람을 비교와 경쟁 속 우위를 점하는 데서만 찾는다면, 그 누구도 축하받는 승자가 되지 못하고 상대적인 빈곤감과 상실감만 늘어납니다. 동료와 친구를 짓밟아야 살아남는 경쟁 사회는 모두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어쩔 수 없다고만 말하지 말고 양보와 배려와 사랑으로 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합시다.
5,6절 팔짱을 끼고 게으름 피우는 것도 우리 몸을 축내는 일이지만, 지나치게 열심히 수고하는 것도 우리 몸을 축내는 일입니다. 두 손 가득 가지려 하지 않고, 한 손에 적당히 가지고 만족할 때 평온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경쟁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한 손에 쥔 것에 자족할 줄 알면서, 남으면 나누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살 줄 아는 비결을 배워갑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3~16절 전도자의 화제는 다시 ‘지혜와 우매’에 관한 주제로 향합니다. 우매한 자의 헛됨과 지혜로운 자의 덧없음을 정치적 맥락으로 가져가게 되면, 이것은 정치권력의 무상함으로 읽힙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조악한 변덕 앞에서 지혜로운 왕의 슬기는 점차 그 빛깔이 바래고 우매한 왕의 어리석음도 차츰 잊히게 됩니다. 전도자의 이 비유를 뒤집어보면, 하늘 아래 하나님 외에, 영원한 분은 없다는 진리와 맞닿습니다. 세상에서는 기대와 실망을 반복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만은 변치 않는 지혜와 능력, 인자와 공의로 영원히 우리를 다스려주실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7,8절 꽃 심으면 안 필까 걱정하고 꽃 피면 또 질까 걱정하며, 피고 짐에 모두 시름겨운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앞서 상속자(2장 18,19절)로 인해 근심하던 전도자는 이제 상속자의 부재에 통렬한 아픔을 느낍니다. 전도자는 있음직한 이야기를 빌어 부재의 아쉬움과 애석함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는 물질적 풍요로움과 홀로 있음의 먹먹함이 극단적 대비를 이루며, 두 손에 가득하고도(6절) 만족하지도 행복을 누리지도 못하는 ‘불행한 노고’를 전합니다. 고립과 단절을 결합과 유대로, 고통과 외로움을 ‘더불어 삶’으로 이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임입니다. 끊어진 관계의 끈을 다시금 잇대는 기회를 마련해봅시다.
9~12절 ‘몫의 논리’에 의하면 둘보다는 하나, 다수보다는 소수의 유익이 큽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전도자는 홀로 된 부자의 불행한 노고(8절)와 대조적으로, 함께함의 유익을 제시합니다. 함께하면 수고를 덜고 일의 성취를 높일 수 있으며, 넘어지거나 위험할 때도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남을 이기고 나만, 내 가족만, 내 교회만 잘되어야 한다고 부추기는 악한 문화를 경계합시다. 남의 재산을 빼앗지 않더라도(1절) 부동산 투기나 무리한 전월세 요구는 모두 부조리한 이 세상의 구조에 영합하여 약한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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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 전도서 4장: 모든 학대를 살핀 후 학대받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없다고 말한다. 또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한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며 한 사람이면 패하고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고 세 겹줄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도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본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학대받는 사람과 가족 없는 사람의 슬픔을 보았고, 재물과 부를 모았음에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지나치게 많이 모아서 오히려 해가 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 같은 다양한 모습은 전도자를 더욱 허무하게 하여 바람을 잡는 것 같은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유행하는 허무주의와 전도자의 허무함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무엇을 하더라도 헛되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유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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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런데 구원의 이야기는 절망속에서 희망을 보게 합니다. 기억하십니까? 애굽의 학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신세를 탄식하며 부르짖음으로 출애굽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기쁜 소식은 탄식의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시작됩니다. 출애굽 한 후에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시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학대의 죄(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며, 이웃의 것을 탐내는)를 금하십니다.
이 뿐만 아니라 에수님께서 학대받는 자의 위로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소외받는 자들에게 복음의 기쁨으로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한다면 학대받는 자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를 물어봐야 합니다. 강도 당해 쓰러져 있는 자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학대받는 자들에게 참 이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 하늘의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학대받는 자들에게 참 위로자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4~6
이웃에게 시기를 받는 이유는 욕심으로 말미암아 원하는 것을 두 손에 가득히 채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학대하며 얻는 것으로 곳간을 채우려고 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두 손에 채워진 것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욕심을 잉태하여 끝없는 욕망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수고로 얻은 것을 한 손에만 채우고 평온함을 가지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기도는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간구가 아니라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어진 것으로 기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7~12
우리는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이 땅에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자들입니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함께 힘을 모아 건너가야 합니다. 개인의 능력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서로 힘으로 도와 격려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순종함으로 이루워내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영웅 같은 신앙을 가진 자라도 홀로 사탄과 싸운다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세 겹 줄처럼 묶여 있다면 사탄이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확신한 승리의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줄에 우리가 묶여 있다면 사탄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을 나눔으로써 함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13~16
전도서 4장에는 소망의 권면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지혜를 추구 했을 때의 유익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해 아래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가 있어도, 큰 부자 되었어도, 왕처럼 큰 명예와 권력을 가졌어도 끝없이 밀려오는 공허를 채울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 때문에 성도들은 하늘 위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올 소망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주는 참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땅에서 최선과 차선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주어진 오직 한 길(예수 그리스도)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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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는 자신이 아는 진정한 친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신실하셔서 결코 두 마음을 품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이 하신 약속대로 지켜 행하시는 분입니다.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숱한 허물과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실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위로를 구하고, 세상의 친구를 찾아 돌고 도는 인생이 되지 않고자 합니다.
오직 참 친구가 되신 주님의 손을 잡고 동행하여 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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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6 손잡고 걷는 인생길이 복됩니다.
말씀요약:
학대하는 자에게는 권세가 있지만 학대받는 자에게는 위로자가 없다.
사람의 모든 수고와 성공하고자 하는 동기가 이웃에 대한 시기심임을 알고
모든 수고도 헛것임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한 사람 보다 났고 삼겹줄은 쉽게 끊어 지지 않는다.
가난해도 지혜로운 자가 늙고 둔한 왕보다 났다고 하신다.
묵상: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라고 시작했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는 인생이고, 수고도 헛되고, 육체적이 쾌락도 헛되고,
부귀영화도 헛되고, 지혜도 헛되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해 아래 사는 것의 허무함을 깨달은 전도자는 오늘도 계속해서 헛되다고 말씀하신다.
첫번째 언급하시는 내용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말씀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학대의 문제를 말씀하신다.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신다.(1)
솔로몬의 시대에서 21세기 지금의 시대에나 변함없는 사실은 학대가 있다는 사실이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위로하는 자가 없다.(1)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학대 받는 자에게는 위로자가 없다.(1)
같은 절에서 두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계신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학대나 억압은 열거하기 조차도 없이 많이 있다.
굳이 북한 인권이나 시리아 IS 같은 국제적인 이슈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어린아이 노인 여성들에게 동성에게도 마찬가지다.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성적인 학대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작게는 왕따에서부터 눈만 뜨면 뉴스에서 보는 내용들이 전부 이런 부류들이 아닌가?
문제는 이런 학대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가정내에서부터 전 지구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대안이 별로 없다.
지금 이시간에도 학대 받는 자는 눈물을 흘리지만 위로자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참 가슴 아픈 현실이다.
전도자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살아있는 자보다 죽어 있는자가 복되다(2)
죽은자 보다 더 복된자들은 아직도 태어 나지 않은자들이다(3)라고 까지 생각한다.
왜냐하면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통치하던 3,000년 전의 시대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나도 모르게 학대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학대의 문제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가?
두번째 전도자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고의 문제이다.(4)
전도자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의 놀라운 통찰력을 배운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고자 하는 동기가 자기 이웃에 대한 시기심이라고 한다.(4)
놀라운 통찰력인 것 같다. 이 시기심에 의한 수고가 뜬 구름 잡는 일이라는 것이다.
왜: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나는 시기심 때문에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해 보지를 않았는데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맞는 말씀인 것 같기도 하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없는 인간의 탐욕, 끝이 없는 시기심은 쌓여가는 재물도 눈에 차지 않고
도무지 물질에 만족할 줄 모르고 흡족해 하지 못하는 모습을 말씀하신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안한 것이 양손에 가득하고 고통과 번뇌가 있는 것 보다 낫다(6)고
말씀하신다. 자족하기를 배워야 한다.
세번째 인생에서 헛된 것은 가족이나 친구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 같다.(8-12)
전도자가 한 예를 들고 있다
어떤 사람이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다. 혈혈단신인데 끊임없이 수고한다.(8)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나?(8)
내 영혼이 왜 이렇게 누리지도 못하나?(8)라고 말하지도 않으니
이것 또한 허무하고 비참한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9)
왜냐하면 한 사람이면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줄 자가 없으니 얼마나 불쌍하며(10)
한 사람이 누워서는 어찌 따뜻해 지겠는가? (11) 반문하신다.
또 만약에 두 사람이면 둘이 함께 노력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고(9)
넘어지면 다른 한 동무가 일으켜 세워주기도 하고(10)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 지기도 한다.(11)
혼자서는 질 일도 둘이서는 능히 당 할 수 있고 삽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12)
위기의 순간에는 뭐니뭐니해도 가족이 소중하고, 친구가 소중하고, 공동체가 소중하다.
고독하게 살면서 끊임없이 일하고도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재물이나 명예에 집착해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 무익하고 허무한 인생이다.
무슨 일이든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역자 가족 친구 공동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 없이 해 아래 홀로 외롭게 살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합력해서 선을 이룰 동역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찾자.
네번째 전도자가 헛되다고 하는 것이 있다. 권력도 헛되다는 것이다.(13~16)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어리석은 왕보다 낫다고 한다.(13)
정치적인 능력과 명성도 결국에는 헛것이라는 말씀이다.(16)
해 아래에 이는 모든 자들이 왕을 따랐다 할지라도
그 후에 오는 세대는 그렇지 않기에 이 또한 허무할 뿐이라는 말씀이다.
솔로몬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통찰력이 삶에 많은 깨달음을 준다..
적용:
눈물 흘리고 있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자.
긍휼 사역지들(고아원, 양로원, 소년원, 요양원등등등)에 대한 관심을 좀더 갖자.
나에게도 친구가 필요하다. 먼저 친구가 되자.
이웃과 더블어 하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경험하자.
현재의 삶에 감사하자.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의 지혜를 배움니다.
이 세상에 학대로 인해서 고통 받는 자들이 너무 많음을 압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으나 위로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라 말씀하셨는데
우는 자들이 많지만 위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나로 위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인생을 살면서 내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좋은 관계들을 허락하셔서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에 덕이 되게 하시고
일상에서 함께하는 고마운 분들에게 늘 감사를 표현하며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없는 인생 살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영원한 친구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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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는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아들도 형제도 없이 수고하여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자신을 위하여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헛되어 불행한 것이지만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넘어지면 한 사람이 붙들어 일으켜 함께 좋은 상을 얻을 것이며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한 왕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나서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낫습니다. 한 사람이 넘어질 때 붙들어 일으켜 줄 수 있으며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연합을 이루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를 버리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도록 힘씁시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한 왕보다 낫지만 그 지혜로운 젊은 왕의 인기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인기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영원하신 왕, 예수님 안에서 복과 영생을 추구합시다.
하나님, 신실한 동역자를 허락해 주셔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세상의 인기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영원하신 왕, 예수님 안에서 복과 영생을 추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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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4:1~6절
❝더불어 함께 행복을 누리는 삶❞
❚ 자신의 부요함을 위해 탐욕과 시기와 학대로 수고하는 인생은 바람을 잡는 것같이 헛됩니다..
✔ 행복을 위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 억압이 아니라 위로의 삶이어야 합니다(1~3절).
전도자는 또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학대가 자행되고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상황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학대하는 자들은 권세가 있고, 반면에 학대받는 자들은 위로해 주는 자 업이 통곡의 눈물만 흘립니다. 그래서 그는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말하며, 한 단계 더 나아가 처참하고 비참한 상황을 경험하지 않은 자들이 더 복되다고 탄식합니다.
힘 있는 자들이 가진 권력을 가지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현실의 삶에서 많은 사람들은 분노를 토로합니다. 그만큼 이 땅의 악행이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도 억울한 상황에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땅에 억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된 위로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불어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시기가 아니라 사랑의 삶이어야 합니다(4절).
전도자가 또 살펴보니, 모든 수고와 성취는 이웃에 대한 시기심에서 발생하였는데, 이것 역시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일의 성취가 순수한 의도보다는 사람들간의 질투와 시기에서 비롯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나누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랑이 결국엔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내 자신도 살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시기가 아닌 사랑의 실천을 통해 더불어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많음이 아니라 적음의 삶이어야 합니다(5~6절).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제 몸만 축낸다고 하지만,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함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새번역)고 말합니다.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수고는 어떤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기에 그것을 얻으려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거나 전력을 다해서 얻은 두 손의 가득함보다 차라리 한 손의 이익만을 얻을지라도 평화를 누리는 것이 더욱 유익합니다. 바람을 잡는 헛된 삶을 위해 내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적음에 대해 감사하는 삶을 통해 더불어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4:7~16절
➲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7~8절).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또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이나 형제도 없는 외톨이지만, 끝없이 수고하며, 자기 재산에 만족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누굴 위해 이렇게 수고를 하는가? 왜 나는 즐기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의 수고는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전도자는 너무 열심히 일에만 치중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빼앗아 버렸던 과거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결국엔 바람을 잡는 헛된 삶을 위해 인생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령 세상에서 많은 것을 쌓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데려가시면 모든 일은 신기루같이 아무것도 아닌 헛된 것이 될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울러 혼자만의 고립된 공간에 빠져 혼자만의 만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들 그것이 과연 그의 인생을 행복이 있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더불어 함께 나누고, 서로 어울리며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람을 잡는 허무한 인생의 길에서 벗어나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함께 수고하며 살아가는 삶이 풍성한 삶입니다(9~12절).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함께 일 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9절,새번역)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주지만,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없기 때문(10절)입니다. 또한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따뜻해질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능히 적에게 맞설 수 있습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11~12절)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좌절과 실패는 누구나 경험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때 일으켜 세우는 동료가 있다면, 어려움을 극복하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한 줄로는 버틸 수 없는 무게라 할지라도 세 겹 줄로는 버티고 줄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한 지체가 되었기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수고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서 악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서로를 의지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고통도 나의 것으로 여길 수 있을 때, 그래서 한 몸으로 살아가므로 풍성한 삶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기억된 삶입니다(13~16절).
전도자는 충고를 싫어하는 나이 많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소년이 더 낫다(13절)고 말합니다. 아랫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리더십의 특징이며 패망의 지름길(잠 11:14;15:22)입니다. 비록 한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다 할지라도 또한 감옥에도 간적이 있다 할지라도 젊은 그가 왕이 되면 모든 사람이 그 젊은이를 따르게 됩니다(14~15절). 그러나 그렇게 백성에게 인기가 좋았던 처음과는 달리, 나중에는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으니 왕으로서 통치한 것도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16절).
당시에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 보지만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 한 시대만 지나도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이룬 성공은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기억되지 않는 헛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아래서 함께 수고하고 섬기며, 사랑을 나누는 삶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지체를 사랑하고 아끼며 사명을 함께 감당함으로 수고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이 땅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기억해 주시는 그 이름이 되도록 거룩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서 더욱 사랑하며, 도우며, 섬기는 수고의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헛된 삶의 태도를 버리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전 4:7~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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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자가 되어 주라 >
오늘날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격려다. 여호수아 1장 18절을 보면 모세의 죽음으로 새로운 리더가 된 여호수아를 백성들이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격려는 목회자가 성도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도 목회자를 격려해 주어야 한다. “목사님, 괜찮아요. 우리는 반드시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저희가 힘써 돕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목회자가 얼마나 힘이 나겠는가?
에스라 9장 3절을 보면 에스라가 귀환 후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너무 슬퍼서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었다. 그때 회개 운동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스 10:4).” 얼마나 위대한 백성인가?
리더가 낙심할 때 리더를 격려해 주라. 리더의 기가 꺾이면 공동체의 기도 꺾인다. 사기가 꺾인 군대는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리더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말과 행동으로 격려해 주고 교인들끼리도 서로 그렇게 격려하고 세워 주고 사랑하라. 왜 교회가 존재하는가?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다. 현실은 어려워도 주저앉지 말고 사명감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새로운 내일을 향해 일어서라.
어느 날 고대 헬라 지역의 한 어머니가 현자에게 말했다. “현자님! 제 아들이 세상에 나가 정직하게 살면 세상이 미워할 테고 부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이 미워할 테니 그냥 집에서 키우겠습니다.” 현자가 말했다. “당신 아들이 세상에 나가 정직하게 살면 세상이 미워해도 하나님이 사랑할 테니 그냥 세상에 보내시오.” 현실이 어렵고 환경이 어렵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일어나서 행복을 찾아 나가라.
<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 >
행복하게 살려면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 두 손에 가득하지 않고 한 손에만 가득해도 평안이 있는 삶이 더욱 복된 삶이다(6절). 수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수고도 중요하지만 평안이 더 중요하다. 일할 때도 욕심을 가지고 일하지 말고 사명을 가지고 일하라. 두 손에 가득 채우겠다고 하면 평안도 잃고 인생도 허무해질 수 있다. 두 손을 다 채우려고 하지 말고 한 손으로는 힘써 채우고 한 손으로는 힘써 나눠주라.
솔로몬 왕국이 크게 번성하자 솔로몬은 탐닉과 물량주의에 빠졌다. 나중에는 공평하지 못한 조세 정책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계속 새로운 건축 프로젝트를 가동해서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처음에는 그런 건축 프로젝트가 백성들에게 흥분을 주었지만 나중에 과중한 부담으로 민심이 이반되었다.
유명한 독재자나 독재 군주는 성품이 건강하지 않고 대개 물량주의와 성공주의에 속박된 상태이고 사람 중심적이기보다는 목표 중심적인 경향이 많다. 솔로몬도 그런 성품을 가지고 살다가 그런 삶이 얼마나 허무한 삶인지를 노년에 깨닫고 ‘두 손이 가득한 수고’보다 ‘한 손만 가득한 평안’이 더 낫다고 고백했다. 얼마나 실감나는 고백인가? 이 솔로몬의 고백을 반면교사로 삼아 물량주의와 물질주의를 멀리하고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먼저 바른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가끔 보면 미래는 생각하지도 않고 현재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욕심으로 인해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공동체에 갈등과 분쟁과 소란이 그치지 않는다. 미래의 축복을 볼 줄 아는 성숙한 성안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줄 아는 영적인 영안이 있어야 한다. 멀리 볼 줄 알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시야를 가질수록 평안과 행복 가능성은 커진다.
< 진정한 친구가 있는가? >
어느 날 한 사람이 아내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갔다. 가보니까 벌써 수술 중이었다. 자정이 조금 넘어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나와 말했다. “미안합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수술실로 들어가 아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맥없이 나왔다.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지며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전화하려고 구내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 수첩을 폈다.
수첩을 펴 보니 친구 명단이 5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93명이었다. 그런데 막상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할지 전화다이얼을 돌릴 수 없었다. 한밤에 “내 아내가 죽었으니 와서 나를 좀 위로해 주게.”라고 말할 친구가 93명 중에서 하나도 없었다. 결국 수첩만 뒤적이다 전화 한 통 하지 못하고 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전화박스에서 나왔다.
그때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해서 엄청난 실망감이 밀려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어려울 때 전화할 친구가 하나 없으니 내가 이제까지 무엇하고 살았나?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그 후 그는 그때의 비참하고 가슴 아팠던 일을 생각하면서 먼저 진실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편이 되어줄 수 있는 진짜 친구가 있는가?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다면 잘 살아온 행복한 사람이다. 자기 수첩에 적힌 사람은 많지만 진짜 친구는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현대인의 삶을 묘사한 ‘군중 속의 고독’이란 표현처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참된 위로자는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가장 사교적인 것 같은 사람이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 서로를 선물로 여기라 >
부자나 권력자 옆에는 많은 사람이 다가오지만 그들은 대개 친구가 되지 못한다. 사심이 있기 때문이다. 부자와 권력자가 참된 친구를 더 그리워하는 이유는 사심이 없는 진짜 친구를 만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삶이 헛되지 않고 군중 속에서 고독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참된 친구를 얻어야 한다. 어떻게 얻는가? 내가 따뜻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따뜻하게 해주려고 함께하는 사람처럼 헌신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할 때 진짜 친구를 얻는다.
아무리 오래 사귀고 도움을 주고받아도 헌신이 없으면 그 관계는 참된 우정 관계가 아니다. 우정은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그의 헌신과 나의 헌신이 만나는 곳에서 진실한 우정이 이뤄진다. 실제적인 헌신의 대가가 지불되지 않으면 참된 우정 관계는 이뤄지지 않는다. 살면서 너무 바쁘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만 살지 말고 사람을 배려하고 이끌어 주는 것에도 시간을 쓰라. 사람을 위로하고 배려하는데 쓰는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교회에서도 많은 친구를 얻는 데 힘쓰라. 교회에서 친구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서는 얻기가 훨씬 힘들다. 교회 내에서는 고독한 군중이 되지 말라. 교인이 아닌 교우로 지내라. 서로를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보라. 요새 하나님의 은사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은사가 바로 자신 옆에 있다. 자신 곁에서 함께해 주는 교인도 하나님의 은사, 즉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참된 친구를 얻기 위해 섬기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이름을 알면 불러 주고 서로를 향해 따뜻한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서로 기도해 주고 서로 관심을 기울여 주면서 시간을 내어 친구를 위해 헌신하라. 그것은 그를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힘써 이웃을 배려하며 살면 하나님도 만나고 이웃도 만나는 과정에서 기쁨과 행복은 극대화되고 슬픔과 불행은 극소화된다.
< 지혜가 있어야 한다 >
히브리인들은 나이 든 사람을 지혜롭게 여기고 존경했지만 본문에서 언급된 늙은 왕은 지혜가 없다고 했다. 왜 지혜가 없는가?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즉 들을 귀가 없는 것이 문제다. 들을 귀가 있는 것은 지혜가 있는 것이고 들을 귀가 없는 것은 지혜가 없는 것이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수많은 경고가 주어진다. 그 경고를 들을 줄 알라. 들을 귀가 없으면 미래는 어둡게 되지만 들을 귀가 있으면 미래가 밝게 된다.
들을 귀를 가지고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인간의 영화는 금방 사라진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지혜로운 소년이 나중에 왕으로 높여져서 수많은 사람이 그 왕을 떠받들어도 다음 세대에서는 그 왕의 공적을 잊어버린다(15-16절). 그처럼 인간적인 지위와 명예는 헛된 것이다. 결국 참된 지혜는 해 아래 아무 것도 영광스런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고 사는 것이다.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약하다.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갖췄는데 돈 앞에서만은 무력하다. 어떤 사람은 돈에는 초연한데 이성 앞에서는 무력하다. 어떤 사람은 이성 관계는 깨끗한데 명예욕이 크다. 어떤 사람은 지혜로운 것 같은데 기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교만하다. 어떤 사람은 충성은 하는데 나누는 일에서는 인색하다. 어떤 사람은 열정은 있는데 말이 험하고 고약하다.
모자라도 문제가 되지만 넘쳐도 문제가 된다. 사랑을 너무 받아도 문제가 되고 사랑을 너무 못 받아도 문제가 된다. 돈이 너무 많으면 영적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커지고 돈이 너무 적으면 비굴해질 때가 많다. 축복을 너무 많이 받아도 문제가 생기고 축복이 너무 없어도 문제가 생긴다. 사람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때 가장 당당해진다.
< 늘 하나님 편에 서라 >
요셉은 어려움 중에도 늠름하게 살았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는가? 하나님을 배경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배경으로 삼는 사람에게 역경의 때는 믿음을 훈련하는 때다. 어떤 사람은 역경을 만나면 얼굴과 마음과 인격이 찌그러진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같은 역경 중에도 마음이 더 밝아지고 맑아진다. 고난의 위기를 발전의 기회로 여기기 때문이다. 고난 훈련을 극복하면 그 다음 단계는 좀 더 쉬워진다.
어느 날 한 목사가 일부 교인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친구 목사가 말했다. “자네, 드디어 목회대학원을 졸업했구먼. 이제부터는 괜찮아질 거야.” 그 말대로 다음 목회지에서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었다. 인내를 통해 웬만한 문제는 잘 견뎌 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똑같이 군대를 가도 한 사람은 걱정이 마를 새가 없지만 다른 한 사람은 아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사실로 인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똑같은 상황에서 생각과 태도가 180도 반대로 펼쳐진 것이다. 기왕에 당할 어려운 일이라면 그 어려운 시간을 희망과 감사가 넘치는 시간으로 만들어가라. 어느 정도 고생은 필요하다. 그래야 순금 같은 믿음이 생긴다. 결국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참된 승리가 주어진다.
마귀는 영물이기에 혼자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이 내 편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도 중요하는 사실이다. 다급한 문제와 기도 제목이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지 말고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늘 하나님 편에 서라. 그러면 하나님도 내 편이 되어 주셔서 최상의 모습으로 문제 해결의 역사를 허락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