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환란에서의 구원에 있는 천국복음의 능력
마태복음 24장 15-22절 /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병행구절. 막 13:14-20)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선지자가 말해온 바 구속(救贖)의 죽음을 당하시는 때가 임박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있을 때에 있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사로 잡혀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후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인데, 자기에게 맡겨진 구속 사역을 성취하실 때가 임박하여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순종하여 자신의 몸을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제물로 바치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에 있으시는 것은 옛성전을 헐고 새성전을 세우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요한복음 2:20-22에서 첫 번째 성전 정화의 사역에서 이미 알려주셨었습니다.1)
그러한 시기에 예수께서는 그분의 가르침으로서는 마지막인 종말론 강화를 하시게 됩니다. 이 종말론 강화는 제자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테복음 24장 1절과 같은 내용의 구절인 마가복음 13장 1절에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예수께 ‘주님, 저 성전 건물을 보십시오! 얼마나 훌륭한 건물입니까? 저 견고한 돌에 조각하여 새겨 넣은 이 벽을 보십시오!“ 라며 예루살렘 성전을 보며 감탄해 하였습니다.2)
제자의 이 물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헤롯에 의해서 지어진 성전이기 때문에 헤롯 성전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성전의 이름을 글의 흐름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 및 성전 또는 헤롯 성전으로 병행하여 사용합니다)의 무너짐을 말씀하시면서,3) 세상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세상의 종말은 전쟁이나 기근이나 지진이나 이런 재난(재앙)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징조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의 끝은 아닙니다.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그때가 세상의 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끝 날이 오기 전에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갑니다.
본문은 천국 복음에서 증거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악함으로 인하여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할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재앙을 당할 유대인들을 통해서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재앙은 이미 오래전에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말씀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는 선지자 다니엘이 한 예언(단 11:3)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기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선지자 다니엘이 한 예언은 그 예언한 그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는 일이 있으며,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께서 하실 일을 예언하신 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이제 그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가증한 것’은 다니엘의 예언에서 모두 세 번 나옵니다. 다니엘 9장 27절, 11장 31절, 12장 11절에서 각각 ‘미운 물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운 물건’(가증한 것)을 말할 때마다 ‘멸망’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미운 물건은 멸망케 할 가증한 것이기 때문에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은 곧 ‘멸망케 할 가증한 것’입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성전에서 제물도 바치지 못하게 하면서 그곳에 이 가증한 것인 ‘미운 물건’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증한 것인 미운 물건은 ‘우상’, 또는 ‘우상의 제단’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증한 것’이란 말은 우상이나 우상의 숭배 대상물을 가리킵니다. 현대어 성경도 다니엘에서 말씀하고 있는 ‘미운 물건’을 ‘우상’, 또는 ‘우상의 제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방 세력이 하나님의 성전을 훼파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 약 400년 후에 이 일은 성취되었습니다. B.C. 169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iochus Ⅳ Epipahnes) 왕이 성전의 제단 위에다 이방신 제우스(Zeus)를 위한 제단을 만들고 돼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다니엘에 의해서 예언된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우는 것’으로 있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를 이방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욕되게 할 것을 가리키시려고 사용하였습니다. 헤르만 리델보스(H. Ridderbos)는 이보다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였는데, “멸망케 할 가증한 것이란 말은 아마도 좀 더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함락 이전과 그 이후 동안 발생한 성전에 대한 모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15절의 말씀을 이야기 해 주심에는 이 모든 역사적 배경을 내다보시고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유대인들의 악함이 성전에 채워져 더럽혀지는 것에서 그들이 겪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재앙을 알려주시는 것이며, 이는 또한 후대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는 것으로 삼으신 것이라는 이해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헤롯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이 제사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배척을 하는 것에서 곧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배척하였던 그 악함으로 그들의 예루살렘 집이 불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처럼 동일한 이유로 온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이 헤롯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성전 제사를 빌린 것에 불과할 뿐이지 사실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에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가증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집이 불타고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지극히 유대인에게 국한한 부분적인 것이지만, 앞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겪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은 온전한 전체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있어서 전개되고 있는 여러 사건들, 예컨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에서나 또는 악한 소작인들을 진멸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조심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에 앞서 의인들의 피 값이 그들에게로 돌아감으로 지나간 세대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이 이 세대에 내려질 것을 말씀하신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멸망케 할 가증한 것’이라는 말로 하십니다. 그리고 이 ‘멸망케 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룩한 곳’은 ‘성전’을 뜻합니다. 따라서 멸망케 할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서거든 그때 유대에 있는 사람은 산으로 도망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게 되는 것을 통해서 멸망케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증한 것들로 말미암은 결과로, 곧 가증한 것에 의하여 성전이 더럽혀짐으로 말미암아 멸망케 되는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유대에 있는 사람은 산으로 도망치라!” 라고 선지자 다니엘이 멸망케 할 ‘미운 물건’(우상, 또는 우상의 제단)으로 표현하여 묘사한 이것이 예수님 때에 어떻게 성취되는 것인지요. 선지자 다니엘에 의해서 예언된 이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서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다니엘의 이 예언에 특별히 주의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 가증한 것인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인 우상(의 제단)이 성전에 세워져 성전이 더럽힘을 당할 것의 예언은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에 어떻게, 곧 무엇으로 성취될 것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유대인들의 악함에서입니다. 이들은 매 절기마다 성전에 제사에 바칠 제물을 가져오지만, 그 제물이 갖는 성격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믿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은 다만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바와 같이 헛된 제물로 마당만 밟을 뿐인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사 1:13). 이들이 성전에 드리는 제사는 우상 숭배에 불과할 뿐이며, 그러한 성전은 우상의 제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함으로 흉측한 악함은 그들을 멸망케 할 것으로 작용합니다. 해서 한갓 사람의 손에 의하여 지어진 헤롯 성전에 의지함으로 하늘과 땅 모든 곳에 서 계신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하여 성전을 더럽히는 그들에게 그들이 의지하는 것이 어떻게 그들의 머리에로 쏟아지는 피가 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될 것인지를 누가는 “예루살렘이 군대에 포위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 도성이 파멸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라”고 말하였습니다(눅 21:20). 이는 A.D. 66년에 로마 총독이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체납된 속주세를 받으려 예루살렘 성전에 쳐들어가 17달란트의 금화를 몰수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해 여름에 예루살렘에서 있은 유대인의 대규모 반란으로 야기된 로마군대와 유대인간의 전쟁을 예언함에 있는 것이니, A.D. 70년 디도(Titus) 장군에 의해서 있게 될 로마 군대가 어떻게 예루살렘을 훼파하여 성전을 모독할 것인지를, 그래서 대제사장을 비롯하여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또한 이들과 하나가 된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의지하던 성전의 돌이 자신들을 멸망케 하는 저주스런 화가 될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이 제사를 드리던 성전이 파괴될 것이며, 이때 성전 파괴와 함께 그들도 자신들이 의지하던 성전과 함께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니, 로마군대와의 항전에서 가나안에 거주하는 주민 240만 명 중 절반에 가까운 110만 명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는 유대인 전체 인구수인 700만 명에서 약 1/6에 가까운 숫자가 화를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항전에 있은 사람이 마사다에 집합하여 최후의 전투를 치렀는데, 이곳은 460m 높이의 바위절벽을 이루고 있는 천혜의 요새로 이곳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며 퇴로도 없었습니다. 이 마사다에서 로마군대와 항전한 사람은 엣세네파로 불리는 열심당원과 그 가족들로 어린이와 여자를 포함한 960명이 전부였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A.D. 72년부터 무려 2년을 로마의 10군단과 맞서 싸워 견뎠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마지막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는데 포로가 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아내와 여자는 욕을 당하며 자녀들은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기보다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자유인의 몸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과 마사다의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나 식량만은 남겨 놓음으로써 로마 군대의 포위에 의해 식량이 없어 비참하게 굶어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이 5명과 노약한 여자 2명만 살아남게 함으로 마사다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전의 주인이시오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함에 있어 성전이 더럽힘에 있음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임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듯이 그들 또한 철저하게 멸망을 당할 것인데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 내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결코 그들의 생명을 안전히 보호받지를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산으로 도망해야 할 것이 말씀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생명은 안전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받을 심판이 얼마나 크고 두려우며 무서울 것인지를 미리 알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1)산으로 도망할지어다”에 이어서 “(2)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3)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4)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5)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미리 선전포고를 알려 준다면, 그래서 ”앞으로 일주일 후에 공격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라고 알려준다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다 도망할 것인데, 할 수만 있으면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손에 쥐고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다 지니고서 갈 것입니다. 금 은 보석 온갖 패물, 집문서, 통장, 어음 등..., 피난 가서도 그리고 또한 나중에 돌아오면 다시 쓸 수 있는 모든 재산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은 다 가지고 갈 것이며, 미처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마당의 땅을 파 숨긴다든지 또는 다른 곳에 감추어 놓는다든지 등의 조치를 취하고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차를 몰고 또는 걸어서라도 가느라 북새통의 난리를 겪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전혀 그럴 여유가 없는 것에서 말씀하십니다. 지붕위에 있는 사람은 집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려고 내려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서둘러 산 위로 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밭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시며, “아이를 밴 여자들과 갓난아기가 딸린 여자들은 그렇지 않은 여자들보다도 더 불행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자기 뱃속에 있는 아기의 생명을, 갓난아기의 생명을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이의 엄마 아닙니까? 그런데 자신만이 아니라 뱃속에 있는 아이도, 엄마 품에서 세상모르게 평안한 얼굴로 젖을 먹고 있는 갓난아기도 엄마와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아이를 배지 않은 여자가 복 있고 갓난아기가 딸리지 않은 여자가 복이 있게 여겨질 상황입니다.
그리고 또한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가 겪은 동족상잔인 6.25 전쟁의 경우 북한의 요청을 받은 중공군이 참전하여 인해전술을 써서 몰려올 때 1.4후퇴를 할 당시의 피난민은 한강물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피난을 가며 죽음의 위험에 처하는 큰 고생을 하였습니다. 특히 아이를 밴 여자들과 갓난아기가 딸린 여자들은 그 고생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그러니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은 겨울이 아닌 다른 철에 겪는 난리보다 그 겪는 고통과 고생이 클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그 당시의 안식일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면 그들이 도망하는 일이 여느 때보다 더욱 힘들고 어려울 것을 뜻하는 것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겪게 될 일은 ‘큰 환난’으로 말해집니다. 그것을 겪는 사람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을 일’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실제 이 큰 환란을 앞서 설명드린대로 A.D. 70년에 당하였습니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쳐들어와 에워싸고 수년을 공격한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멸망시킨 것입니다(눅21:20). 그런데 이때 예루살렘 백성들이 겪게 될 상황은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상황인 종말론적인 성격을 담고서 말씀되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겪을 일은 그 자신들에게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을 일’인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겪게 될 고통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곧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겪을 일로 말해지는 예언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백성들이 겪었던 큰 환란은 장차 다가올 큰 환란의 예비적인 징조의 성격을 띱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앞으로 예루살렘에 있게 될 일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창세 이후로 경험하지 못한 큰 환란이 예루살렘에 국한하지 않고 온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에게 임할 재난이 될 것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하여 안전하게 있으며, 저 산 밑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재난을 보면서 안도의 숨을 몰아쉴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저주의 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한 자들에게 임합니다. 옛날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보는 것은 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고 아주 제한된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화를 당함에 있는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있을 일을 알려 주십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그들에게 빼앗김을 당하여 잃는 것이 있게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를 얻음으로 그들에게 있는 하나를 내주는 전략적 빅딜에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를 얻음으로 자신들에게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빼앗김을 당하는 것이니, 박해로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이 배도와 배교하고 죄 가운데 다시 빠져 들어가 살며 사랑이 식어져 서로 배반하니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넘겨주므로 공회(법정)에 끌려가고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매질당하며 세상의 권력자 앞에 서는 등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음에 있게 되는 것에서 입니다(참조. 막 13:12-13).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참음으로 주님께 가진 믿음에 견고히 있어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음에 있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이 다름 아닌 바로 세상의 끝 날입니다. 그러기에 해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13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천국 복음으로 온 세상에 증거하여 전파되게 하시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게 되고 또한 죽임을 당하는 것 속에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참게 하여서 그 이름을 의지함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능력을 행하십니다. 여기에 천국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 복음의 능력은 이것으로 말해지는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의 능력을 입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화로 미치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는 이 환란이 감하여 둘째 사망의 해(계 20:6, 14)를 당하는 환란이 없습니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인데,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여기서 ‘모든 육체'는 문자적인 뜻이 인간이나 동물의 '몸', 또는 '살'이나 이곳에서의 의미는 환란을 당함에 있는 대상인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으로서의 살아 있는 생명체’를 지칭하는 것이기에 ‘살아 있는 인간’을 말하는데, 일차적으로는 로마 군대의 공격으로 멸망을 앞 둔 유대인이나 종말적으로는 이 세상 마지막 날에 환난을 피해 살아갈 수 있는 없는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감하시리라’는 문자적인 뜻이 ‘짧게 줄여지다’인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는 환란의 날들이 짧게 줄여짐에 있게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주시고 있습니다.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했으면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어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다 뒤집어쓰고 꼼짝없이 당하여 영원히 멸망에 처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은 여기에서 구원 얻게 하시므로 그 큰 환란으로부터 감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까지 재앙의 심각성을 여러 표현들을 통해서 해 주신 만큼 이제 위로의 말씀을 몇 마디 덧붙이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택 밭은 자들을 생각지 않으시거나 그들올 위해 완화 대책을 세우지 않으시면 유대인이라는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라” 하는 이사야의 구절(사 1:9) 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바벨론 포로기에 임했던 하나님의 재앙은 바울이 증거하듯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다시 성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롬 9:29). 사악의 깊이가 깊을수록 재앙의 풍랑도 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만일 제한을 두지 않으셨더라면 유대인들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며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거저 베푸신 언약을 생각하시고 자신의 선택자들을 살려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 이것은 “너희 백성이 마다의 모래알 같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이 구원올 받올 것이다”하는 이사야의 여언 (사 10:22) 그대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가 전멸한 것처럼 보일 때까지 고난올 허용하시지만 그러나 얼마의 후손올 남겨두려는 의미에서 비록 극소수이지만 자신의 선택자들을 파멸에서부터 기적적으로 낚아채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모든 절망가운데서 사망의 손아귀를 빠져나오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독특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은 교회의 직위와 겉모양만 의지하는 나마지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칠 것으로 잘못 바라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여기서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가 사망에 내어줌을 당한다할지라도 기필코 그 교회를 구출하시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분을 발하시되 그들의 안전을 망가할 정도로 화를 내시지 않을 것이라는 바로 여기에 경건한 자들을 위한 위대한 위로가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처벌함에 있어서 무시무시할 정도로까지 불을 내뿜으시지만 그러나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불길을 억제하시는 가운데 선택자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구원이 유대에서부터 발원해야 한다는 점을 내다보시는 하나님께서 거의 메말라 버린 근원에서부터 단 몇 방울의 물을 모아 강물을 이루게 하시고 그것으로 온 세상에 물길을 대게 하셨다는 거기에 기적의 요소가 담겨 있다 … 하나님께서 맹렬한 분노를 억제하신 것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곧 모두가 멸망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 바울은 이를 로마서 11:5에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남은 자만이 보존되는 이유를 거저 베푸시는 선택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로를 제쳐 놓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뻐하심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구별이 필요 없으며 오직 선택받은 자들은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가는 “자기의 택하신 선택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리라” 하는 말로서 이 점을 더 명백하고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며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어찌 우리 일생을 주께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
...............................................
1) 요한복음 2:20-22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헐 것과 새성전을 세우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었다. 예수님은 성전이 본래 기능을 잃어버리고 더럽혀짐에 있자 이를 청결케 하시는 첫 번째 성전 정화에 있으시면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 것을 이야기 하시며 사흘 동안에 성전을 다시 일으키실 것을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무슨 의미로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계속 건축되고 있는 사십육 년 동안에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삼 일 동안에 일으키실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
2) (1)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Herod's Temple)은 헤롯 대왕이 B.C. 20년부터 재건에 착수하여 헤롯 사후 A.D. 64년 년경인 알비누스 총독 시대에 완공됨으로써 성전 완공까지 전체 기간이 84년이 걸린 대공사였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한창 공사 중에 있었다(Josephus). 따라서 유대인들이 ‘사십육 년 동안’ 이라고 말한 것은 B.C.20년부터 A. D.26년에 이른 기간을 합한 햇수이다. 46년이란 이 기간은 당 시 예수님의 나이를 알수 있게 해 준다. 예수님의 탄생한 연도는 B.C. 4년이므로 A.D. 26년 당시 예수의 나이는 30세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2:20에서 유대인들이 ‘사십육 년 동안 지은 성전’의 언급은 예수님이 구속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초기에 있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 A.D. 64년에 완공된 헤롯 성전은 웅대하고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의 예언대로(막 13:1-2) 완공된 6년 뒤인 A.D. 70년에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함께 불타버렸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에도 헤롯 성전은 완공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직도 건축 중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헤롯 성전은 84년간에 걸친 긴 기간의 건축에 비해 이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존재했던 기간은 단지 6년에 불과했다.
(3)이러한 헤롯의 성전을 짓기 시작한 헤롯 대왕(헤롯1세; 헤롯 안티파터)은 로마에게 돈을 주고 유대의 분봉왕이 된 자이다. 그에게는 유대인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의 증축을 시작했다. 이후 예수님 당시의 헤롯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46년을 걸렸던 엄청난 일이었다. 그리고 헤롯이 죽은 다음에도 계속 되어서 마침내 건축이 끝났을 때는 거듭 언급하는 바 전체 기간이 84년이나 걸렸다. 그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성전의 뜰은 솔로문의 시대의 2배였고, 아름다운 문으로 둘러싸여 있고, 찬란한 황금과 빛나는 대리석의 아름다움은 수 키로나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헤롯의 성전은 구예루살렘 도심의 6분의 1을 차지 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헤롯의 성전은 그 아름다움이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일 정도였다. 이는 헤롯 성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음에서 잘 알 수 있다. “황금으로 뒤덮인 성전의 외양은 찬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성전의 광채는 해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보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정도였다. 황금으로 덮이지 않은 대리석 부분은 순백색으로 눈부시게 빛나 멀리서 볼 때에는 마치 만년설로 덮인 산처럼 보였다."
3) A.D. 70년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의 거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점령해서 불을 질렀다. 디도 장군은 성전을 불사르지 말 것을 명했으나 성전으로 도망치던 반란군을 쫓던 로마군이 추격하다가 성전에 불을 냈고, 그 불에 뜨겁게 달궈진 돌에 의해서 입혀진 금이 녹아 내려 돌과 돌 사이로 흘러들어가서 황금덩어리가 되자, 그 금을 차지하고자 로마 군인들이 창과 칼로 돌을 무너뜨렸다. 결국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디도 장군은 성전의 기물을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로마의 개선문을 세우는데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