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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영화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물 및 이론
①미래주의
미래주의는 1909년 이탈리아 필립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so Marinetti)가 현대 기계화 문명을 찬양하는 선언문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유럽 각국의 모더니즘 예술이론으로 발전, 영국의 소용돌이파나 러시아 미래주의에 영향을 주게된다. 미래주의자들은 기술에 대한 믿음과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회변혁을 꾀하고자 했고, 예술과 노동을 하나의 형태로 보았다. 이는 20년대 러시아 영화인들에 의해 채택, 영화의 형식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시적 주제나 이미지 의 모티브 등을 형성하는데 주체가 된다고 보았다. 즉,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내용보다는 이미지 나 쇼트 를 통한 형식이나 장치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20년대 몽타주 이론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고 후에는 영화 기호학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②베르토프
러시아의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는 1923년부터 뉴스 영화 <키노-프라우다Kino-prauda>(1922-25)를 제작한 영화 감독으로서 '키노 아이' 즉 카메라의 눈은 인간의 눈보다 더 생생하게 실체를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영화는 인간의 눈이 갖지 못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영화적 기법은 허구화를 위한 것은 아니라, 각색 되거나 연출되지 않은 현실을 기록해서 사회적 부조리를 고발, 문제를 제기하고, 교훈을 주기 위해 필요한 영화기법을 의미했다.
베르토프는 생생한 현장에서 즉석으로 촬영된 이미지 들을 주제별로 세분화하는 편집 단계를 거쳐,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이미지들을 삽입하는 등의 방식을 취했다. 예를 들어 레닌의 높은 위상을 표현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대조적으로 삽입하는 식의 편집을 이용하였다. 베르토프는 감독의 역할은 영화 촬영 시, 무엇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고, 편집 시에는 무엇과 무엇을 연결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후에 편집에 있어서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1960년대 시네마 베리떼 (Cinema Verite)의 제작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③클레쇼프
쿨레쇼프(Lev Kuleshov)는 영화 구조, 특히 편집에 대한 실험을 통해 이를 통한 영화적 의미의 창출과, 비직업 배우가 세련된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을 발견하고, 전문 배우들의 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먼저 다음의 실험을 살펴보자. 쇼트1: 한 남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쇼트2: 한 여자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간다.
쇼트3: 두 사람은 만나 악수를 나누고 남자는 스크린 밖의 어떤 것을 가리킨다.
쇼트4: 넓은 계단들이 있는 크고 하얀 건물이 보인다.
쇼트5: 두 사람은 그 계단을 올라간다.
관객은 위의 쇼트 들이 연결된 씬 을 통해, 비록 편집되어 분절된 행위이지만 이를 연속된 행위로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사실, 이 쇼트들은 완전히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쇼트 4는 백악관, 쇼트 5는 성당의 계단을 촬영한 것이었다. 또한, 무표정한 남자 배우의 얼굴을 보여주는 쇼트 다음에, 각각 아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쇼트, 음식을 보여주는 쇼트, 죽은 이를 보여주는 쇼트를 연결하면, 아무런 연기를 하고 있지 않던 배우가 행복한 표정, 배고픈 표정, 혹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한편, 쿨레쇼프의 편집에 대한 실험과 연구는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의 몽타주 이론(Montage Theory)에 큰 영향을 끼쳤다.
④프세폴로트 푸도프킨
1893년 러시아 볼가의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자랐다. 쿨레쇼프(Lev Kuleshov),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과 함께 몽타주 이론을 발전시킨 러시아의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이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본래 영화를 비천한 대중오락이라고 경멸했다. 졸업시험을 앞두고 1차대전에 징집되어 나갔다가 1915년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갖힌다. 수용소 생활 중 연극에 관여하면서 연극에 대한 관심을 키웠으며 1918년 그리피스 (D.W. Griffith)의 <편협 Intolerance>(1916)을 보고 영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다.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1920년 모스크바 영화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장인 가딘(Vladimir Gardin)의 밑에서 배우, 조감독 겸 대본작가로 일하게 된다. 1922년 쿨레쇼프의 워크숍에 참가한 푸도프킨은 역시 배우로 활약하면서 동시에 쿨레쇼프를 도와 <볼셰비키의 땅에서의 특별한 모험 The Extraordinary Adventures of Mr. West in the Land of the Bolsheviks>(1924), <살인광선 The Death Ray>(1925) 등의 작품에서 시나리오, 조연출, 편집, 세트 디자인 등 다양한 일을 담당한다. 1921년 <굶주림... 굶주림... 굶주림: Hunger... Hunger... Hunger...>를 필두로 직접 영화제작에 입문한 푸도프킨은 1925년 <체스열기 Chess Fever>등의 영화를 발표하였으며, 1926년 제작한 <어머니 Mother>를 통해 몽타주 이론과 실제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푸도프킨은 에이젠슈타인과는 달리 충돌보다는 편집의 연결성에 주목하였으며 사실주의적이되 자연스러운 연기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발현된 것이 <어머니>이다.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하의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어머니>는 쿨레쇼프의 배우 마네킹론과는 대조적인 실험으로 받아들여졌으나 현재에는 당시 발표되었던 영화들 중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진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1952년까지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1953년 사망하였다.
주요작품연보
<굶주림... 굶주림... 굶주림 Hunger... Hunger... Hunger...>(1921)
<체스열기 Chess Fever>(1925)
<뇌의 역학 Mechanics of Brain>(1926)
<어머니 Mother>(1926)
<성 페테스부르크의 종말: The End of St. Petersburg>(1927)
<아시아의 폭풍 Storm over Asia>(1928)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1932)
<승리 Victory>(1938)
<수포로프 장군 General Suvorov>(1940)
<조국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land>(12943)
<세가지 조우 Three Encounters>(1948)
<주코프스키 Zhukovsky>(1950)
<바실리 보르티코프의 귀환 The Return of Vasili Bortnikov>(1952)
⑤October
<시월:October>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 감독의 1928년도 작품이다. 917년 러시아 혁명 10주년을 맞아 제작한 영화로서 에이젠슈타인의 핵심 영화 이론인 지적 몽타쥬를 완성한 작품이다. <시월>은 10월 혁명 당시의 신문기사, 뉴스 릴, 혁명 중 페테스부르그에서 일어난 사건을 찍은 슈브 여사의 필름과 역사적 사건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제작되었다. <시월>은 그 당시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들의 갈등에 의해 몇몇 부분만 선택되어 1927년11월 주빌리에서 상영된 후 재편집되어 1928년 3월 대중적인 상영을 하였다. 이 영화는 소비에트 영화 예술의 시조라는 극찬과 함께 노동 대중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관념적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은 작품이가도 하다.
⑥영화진실
1950년대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시작된 다큐멘타리 영화로 작고 가벼운 16mm 카메라, 동시 녹음, 고감도 필름 등의 기술적 발전을 기반으로하여 등장하였다. '영화-진실'이라는 의미를 갖는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는 1920년대 러시아의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키노 프라우다 (KINO-PROVDA)' 즉 '영화-진실'에서 온 용어로서 제작 철학 역시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 등장한 다큐멘타리 영화. 베르토프의 영향을 받았다. '시네마 베리떼'는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는 개입하지 않지만, 편집이나 인터뷰, 나레이션 등을 통해 영화가의관점을 드러낸 '분석 다큐멘타리의 한 형식이다. 그 스타일 적인 특성은 미국의 '직접영화 '(DIRECT CINEMA)와 거의 일치하는데, 롱 테이크 (LONG TAKE), 줌 렌즈 (ZOOM LENS), 동시 음향의 사용, 들고 찍기 (HAND-HELD CAMERA) 등의 기법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시네마 베리떼'는 '직접 영화'와는 달리 영화가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차이점을 갖는다.자주 이용되는 인터뷰는 영화가의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루어지고, 종종 영화가는 직접 영화의 주제나 제작 의도 등을 밝히기도 하며, 특히 편집 과정을 중요시 하였다. 일상적인 삶을 급진적인 관점에서 주로 다루었던 '시네마 베리떼'는 후에 프랑스의 급진적 영화 그룹에 영향을 미쳤으며 '서사 다큐멘타리'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는 '시네마 베리떼'의 선구자인 장 루슈(JEAN ROUCH)가 연출한 <한 여름의 연대기CHRONICLE OF A SUMMER>(1960)이 있다.
⑦TYPAGE
1920년대 러시아에서 영화의 몽타주 이론이 제기되었을 때 발생한 개념으로, 배우는 신체나 용모상의 특징으로 전형적인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특정한 사회적 계층이나 집단의 특징을 표현하려 할 때 그 대표성을 띄게 하기 위한 것으로, 몽타주를 적절히 이용했을 경우 오히려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는 것이 전형적 대표성을 묘사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방법론에 따라 1920년대의 러시아 감독들은 비전문적인 배우들을 출연시켰는데, <전함 포템킨 The Battleship Potemkin>(1925)에서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이 부두 노동자를 의사 역으로 캐스팅한 것이라든가, <아시아의 돌풍 Storm over Asia>(1928)에서 푸도프킨 (Vsevolod Pudovkin)이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몽고인 배역에 직업 배우가 아닌 일반인을 기용한 것 등이 그 좋은 예이다.
⑧몽타주 이론
몽타주는 불어에서 유래하였는데, 'monter'는 단순히 '증가하다'나 '조립하다'라는 뜻을 지닌다.미주1) 편집을 통한 이 조립하고 증가하는 일은 소련 영화감독들에게 있어 궁극적인 창조행위가 되었다. 20년대 소련 영화 감독들은 그리피스(D. W. Griffith)의 결합원리를 더욱 확대하였고, 소위 그들이 몽타주라고 부르는 주제적 편집을 위한 이론적 전제를 확립시켰다.
몽타주에 대한 모든 정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의미가 어떤 한 쇼트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쇼트들의 병치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이다. 몽타주란 영화 후반작업에서 감독의 예술적 감각이 명확히 드러나는 방식이다. 영상을 통해서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기도 한 것이다.
편집이 시간과 공간을 재편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의미마저도 새롭게 생산해 낼 수 있는 수단임이 입증된 셈이다. 소련의 영화감독들에 의해서 영화의 의미란 프레임 내에 갇혀있는 정지된 화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프레임들과 쇼트들의 관계에 의해서 파생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강렬한 주제의식이었던 혁명을 전하기 위해서, 이보다 효과적인 기법은 없었던 것이다
⑨표현주의
표현주의 영화이론은 영화란 물리적인 현실세계와 영화적인 현실세계 사이의 편차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감독은 단지 소리, 색조, 깊이, 시공간적 연속 등을 이용하여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세계를 만들뿐이라고 주장한다. 카메라가 잡은 과일과 우리가 잡는 과일의 지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단지 어떤 형식이냐에 따라 우리가 그 형식처럼 인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표현주의 이론가들은 이런 차이점을 지적하는 한편 '형식'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완벽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 완벽 하에 사물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실제로 영화의 표현주의적 특성을 저해한다고 믿는다.
2. 러시아 영화사
러시아에 처음으로 영화가 출현한 것은 1896년 5월 프랑스의 뤼미에르영화사가 페테르부르크에 영화관을 개설한 때였다. 그리고 러시아인의 손으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908년경이다. 그후 무대연극을 그대로 촬영하거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문예영화 등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및 1917년 러시아혁명을 맞게 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 영화란 곧 소비에트시대의 영화가 근간을 이룬다.
러시아 영화는 엄밀하게 따지자면 1919년 8월 레닌이 직접 서명한 '영화산업 국유화 포고'가 발효한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에 앞서 레닌은 이미 영화의 선동성과 전달성을 간파하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은 영화이다"라는 구호 아래 선동영화와 기록영화를 제작, 사회주의 사상의 대중침투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영화예술이라는 측면에서 소련영화가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V.푸도프킨과 S.에이젠슈테인 두 사람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함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몽타주이론'을 체계화하여 주창함으로써 명성을 떨쳤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영화이론의 출발점으로 중요시된다.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과 푸도프킨의 《어머니》(1926)는 소련 무성영화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로, 영화 선진국인 미국이나 유럽 등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영화기법을 인정한 작품이다. 역시 무성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감독 A.도브젠코의 《대지(大地)》(1930)는 회화적인 아름다움과 서사시적인 수법을 화면에 도입하여 또다른 의미에서 소련영화의 특질을 드러낸 작품이다. 1930년경을 경계로 소련영화도 유성영화시대로 접어들지만, 때마침 이 무렵은 소련의 예술활동 전분야에 걸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친 시기였다. 그래서 영화제작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상과제로 삼는다는 선에서만 가능하였고, 또 그와 같은 기준에서 모든 영화작품이 평가되었다.
구소련이 국가적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은 1941년 히틀러의 독일군에 의한 침입이었다. 혁명 초기에 큰 구실을 톡톡히 하던 소련영화는 이번에도 그들의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에서 또다시 큰 힘을 발휘하였다. 기록영화가 다시 각광을 받으며, 모스크바·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등의 방위전을 기록한 전쟁영화가 잇달아 제작되어 전쟁의욕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또 극영화로는 우크라이나 농민의 대독(對獨)투쟁을 다룬 M.돈스코이의 《무지개》(1944)가 제작되었다. 1944년, 전쟁은 승리로 끝났으나 그것은 한편으로 스탈린주의라는 열악(劣惡)한 유산을 남겼다. 스탈린을 신격화(神格化)한 일련의 작품들이 요란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한편에서는 맥빠진 정치선전 영화가 판을 쳤다.
에이젠슈테인의 갑작스런 죽음을 초래한 것도 스탈린주의였다. 그는 당초 3부작의 구상으로 《이반 뇌제(雷帝)》 제1부(1944)를 완성하였으나, 당국의 가차없는 간섭에 충격을 받고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던 것이다. 53년 스탈린 사망 후, 해빙기(解氷期)가 찾아오자 영화도 겨우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소련영화의 해빙은 G.추흐라이의 《여저격병(女狙擊兵) 마류튜카》(1956), M.칼라토조프의 《학은 날아간다》(1957) 등에서 시작되어 역시 추흐라이 감독 작품 《병사의 노래》(1958) 《맑게 갠 하늘》(1961) 등으로 이어졌다. 소련영화에서 특히 두드러진 현상은 문예영화의 유행이다.
러시아문학의 고전작품을 물량(物量)과 시간 및 제작비에 구애받지 않고 70mm 대형화면 등으로 잇달아 촬영하였는데, 이것은 소련영화가 국영(國營)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스탈린시대에 경시되거나 배제되었던 러시아의 예술유산을 영상을 통해 대중에게 확산시키고 구소련의 국력(國力)을 영화작품을 통해 대외적으로 시위하는 한편 해외시장도 개척해 보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할리우드의 거대한 영화산업 자본으로도 벅찰 만큼 호화판인 대작(大作) 《전쟁과 평화》(1965∼1967)를 첫 작품으로 내놓은 이래 《안나 카레니나》(1967), 《카라마조프의 형제》(1968), 《죄와 벌》(1969), 그리고 투르게네프의 《귀족의 보금자리》(1969)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그 밖에 《햄릿》 《리어왕》 《돈키호테》 등 셰익스피어극을 비롯한 외국 고전문학작품에 대한 영화화에도 손을 뻗쳤다. 이와 같은 작품은 원작의 자유로운 현대적 해석을 피하고 원작의 충실한 재현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 하나의 특색이다. 또한 스탈린시대 같았으면 서구적이라거나 근대주의라는 낙인이 찍혀 틀림없이 탄압을 받았을 새로운 수법의 작품들이 때로는 문제를 일으키거나 국내적인 비판을 받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①1918~1929년도의 소련 영화
제1차 세계대전 전에도 러시아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문예영화 중심이었다. 그러나 10월혁명 이후 모든 것은 무(無)에서 출발했다. 먼저 지가 베르토프는, 영화는 연출을 가하지 않고 사실만을 촬영해야 한다면서 뉴스 영화의 일종인 〈키노-프라우다〉를 연속적으로 제작했다.
이윽고 그는 서로 독립적인 실사(實寫)의 단편을 편집해 1편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도 실행했다. 그의 주장과 작품은 전세계의 영화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전후 프랑스에 있어서의 '시네마-베리테'가 그 최근의 예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도 '몽타주 영화'이지만, 정확한 의미에서의 몽타주 이론은 레프 쿨레쇼프, 에이젠슈테인, 푸도프킨에 의해 제창되었고 실현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몽타주 이론은 베르토프와 같이 카메라에 의한 진실추구와 그 표현보다도 현실을 초월한 영화적 현실을 창조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쿨레쇼프는 주로 영화작법으로서 몽타주 이론을 주장했고 에이젠슈테인은 쇼트 사이의 충돌로부터 관념이 탄생하기를 기대했으며, 푸도프킨은 관객의 심리파악에 이것을 유효하게 사용했다. 에이젠슈테인은 〈파업 Strike〉(1924)·〈전함 포툠킨 Battleship Potemkin〉(1925)·〈10월 October〉(1927)·〈낡은 것과 새 것 Old and New〉(1928)으로 이것을 실행했다. 특히 〈전함 포툠킨〉이 세계 영화계에 던진 충격은 컸다. 푸도프킨은 〈어머니 Mother〉(1926)·〈상트페테르부르크의 종말 The End of St. Petersburg〉(1927)·〈아시아의 돌풍 Storm over Asia〉(1928)을 제작했다. 〈어머니〉는 혁명가와 그 어머니를 그린 그의 심리적 몽타주의 걸작이었다.
이와 같이 몽타주 이론의 실현은 화려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것은 혁명의 완성을 비원으로 하는 그들의 열정과 그 사회적 정세가 합체되었기 때문에 그 예술성이 충분히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해가 지남에 따라 몽타주 이론은 형식적인 것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젠슈테인의 〈낡은 것과 새 것〉에는 이미 매너리즘이 나타나고 있었다. 에이젠슈테인과 푸도프킨에 이어 이 시대의 소련 영화를 대표하는 우크라이나의 감독 도프젠코는 〈즈베니고라 Zvenigora〉(1928)로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원천인 대지와 자연을 다큐멘터리풍으로 그린 〈대지〉(1930)에서 유례없는 서정성을 펼쳤다.
또 이 시기에 다큐멘터리 작품의 걸작 〈투르크시브 Turksib〉(1929)가 투린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도 특기할 일이다. 이것은 중앙 아시아의 철도건설 기록이다. 또 지가 베르토프도 같은 해에 카메라맨이 화면에 자유롭게 등장하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든 사나이 The Man with a Movie Camera〉(1929)를 만들었다. 요컨대 1920년대의 소련 영화는 혁명의 새 사회에 부응한 새로운 영화의 예술성을 밝혔다는 점에서 영화사상 획기적 의의를 갖고 있다.
②1929~1939년도의 영화들
1931년 니콜라이 에크는 부랑인의 갱생문제를 다룬 〈고생 안내서〉에서 현실을 교묘하게 왜곡한 뛰어난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후 소련 영화는 침체되었다. 여기에는 스탈린의 예술정책의 영향이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제약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에이젠슈테인도 몽타주 이론의 형식주의나 그 자신의 코스모폴리터니즘을 비난받고서야 겨우 1938년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몽타주적 효과는 별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양식적 구도에 특징이 있으며, 주제도 스탈린주의에 순응한 감이 있다.
③1952년 이후의 소련 영화
흐루시초프 시대에 이르러 영화계에도 해빙의 영향이 미쳤다. 그 선구가 된 작품이 카자토조프의 〈전쟁과 정조〉(1957), 추프라이의 〈맹세의 휴가〉(1959)였다. 둘 다 전쟁의 부정적인 면까지 기피하지 않고 개인적인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했다. 이것은 종래의 소련 영화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또 다네리아의 〈나는 모스크바를 걷는다〉(1963) 등은 클레르를 모방한 서정적 코미디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물결'(뉴 웨이브)은 흐루시초프 실각 후의 경화정책으로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까지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