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우애 : 지인인가 친구인가?(벧후1:5-7, 요15:12-14)
2024.9.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오늘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질문을 하면서 설교말씀을 시작한다.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지인인가, 친구인가?”
“지금 내 옆에 계신는 분들은 나에게 지인인가 친구인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더 어려운 질문을 생각해 보자.
“나는 지금 그들의(예수님, 이웃, 성도들 등) 지인인가 친구인가?”
지인과 친구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지인(知人)은 글자 그대로 “아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사람은 다 지인이다. 그런데 지인은 많은데, 친구는 없을 수 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나 동창생들이 다 친구 같지만 사실은 단순한 지인인 경우가 많다.
이웃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거리상 가까운 곳(옆집, 동네, 매일 함께 수다 떠는 모임, 같은 교회 등)에 산다고 해서 다 이웃은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어느 모임에서 한 사람이 안보일 때, 나머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비난하고 깎아내린다면 이들의 모임은 친구나 이웃이 아니라, 단지 “가까운데 사는 지인”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예수님은 변함없이 나를 친구로 대해주셨는데, 정작 나는 예수님을 단지 지인 정도로만 대하지는 않았는가?
지인은 자신의 필요나 이익을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친구는 사랑을 따라 움직인다. 보통 친구사이의 사랑을 우정이라고 부른다. 우정도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믿음의 성도들이 더욱 힘써야할 덕목 중에 형제우애와 사랑을 강조했다. 지인보다 친구가 되기를 더욱 힘쓰라는 권면의 말씀이다(벧후1:5-7).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여기서 쓰인 ‘형제’란 혈육은 나눈 가족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된 성도들을 뜻한다. “우애(필라델피아, 필레오)”는 친구로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형제우애을 더하라는 말씀은 곧 ‘가족과 성도들 사이에 친구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로서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보다 하위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사랑의 대상의 차이일 뿐 사랑이라는 본질에서는 동일하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지인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드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대해 주셨다. 그리고 친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요15:12-14). 다 같이 읽어 보자.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2-14)
예수님이 친구를 만드신 방법은 ‘당신이 먼저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버리심으로 우리(나)의 참된 친구가 되어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나를 지인이 아니라, 친구로 대해주신 사건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친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친구란 “사랑하므로 함께 있는 존재”이다. 언제까지? 고난의 자리 심지어 죽음의 순간이나 자리에 까지 함께 있는 존재가 친구이다. 이렇게 보면 부부도 친구이다. 부부는 서로에게 지인이 아니라, 평생 함께 하는 친구(동반자, 전우?)이다. 어려움이 왔을 때, 도망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친구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단지 지인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에서나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어떤 고난이 왔을 때, 그것 때문에 믿음을 저버린다면, 그동안 예수님을 지인으로 대하고, 친구로는 대하지는 않았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놀랍고도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나)를 친구로 대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나를 대해주시고,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를 향한 친구로서의 주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한다.
“내 주 예수 피로 죄 씻음 받았네 나는 비록 약하나 주 날 지키리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이 찬송의 가사를 잘 보라. 왜 우리에게 주님 같은 친구가 없는가? 나를 대신 하여 피 흘려 죽어주셨기 때문이고, 그분은 나를 지켜주시고, 그분은 나를 위해 천국을 예비하시고,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의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증표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목숨을 버려서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요15:12-13, 요일3:16)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2-14)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말은 곧 예수님처럼, 기쁘나 슬프나 심지어 죽음의 순간이 온다할지라도 변치 않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퍼붓거나 받기만 하는 짝사랑이 아니고, 서로 주고받기를 힘쓰는 사랑이다. 이것이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하기를 힘쓰는 모습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한 성도의 모습이다.
전도의 현장에서나 새신자들 또는 환우들 또는 어려움을 만난 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눈물을 종종 흘리는 모습을 본다. 그만큼 그들의 마음이 간절하다는 반증이다. 때로는 아스팔트의 갈라진 틈에서 피어난 작은 들꽃이 수없이 짓밟혀 문들어진 것처럼, 때로는 강한 비바람에 마음까지 젖은 작은 참새 같은 모습으로 주님을 찾는 그들의 모습에 함께 눈물이 난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연약함이며, 실존이다. 이럴 때,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거나, 떨리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왔을 때,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이 온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과 인생이 온 것이다.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였던 정현종 시인의 작품 중에 “방문객”이라는 시가 있다(사진). 이 시구처럼 한 사람이 나에게(주님께, 우리교회에) 오는 것은 그의 모든 일생이 함께 오는 것이다. 그의 부서지기 쉬운,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도 함께 오는 것이다. 시인은 바람이 부서지고 찢어진 마음을 품어주고 환대했듯이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기를 갈구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이와 같고,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이 이와 같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예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참된 친구와 형제우애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우리(나)를 품어주신 주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가 품어야할 형제우애(필라델피아)의 사랑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성도의 성도다움이다.
설교를 마치면서 우리의 마음 물 속에 서두에 드렸던 질문의 작은 돌을 다시 던져본다.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지인인가, 친구인가?”
“지금 내 옆에 계신는 분들은 나에게 지인인가 친구인가?”
“나는 지금 그들의(예수님, 이웃) 지인인가 친구인가?”
이제 우리(내)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