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낙안 왕소군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 漢書의 〈원제기 元帝紀〉와 〈흉노전 匈奴傳〉, 그리고 후한서 後漢書 〈남흉노전 南匈奴傳〉에 간략하게 보이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 土臺로 다듬어 놓은 왕소군의 슬픈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BC38),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본명: 왕장 王嬙)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 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다.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 서양의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기 3년 전. 동서양의 절세 미녀들이 비슷한 시기에 공존하였다) 한나라와는 적대적인 서 흉노와 갈라진 동 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동맹국으로서 문안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그러자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다.
그런데,
처음 본,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 자신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는 없었다.
원제는 연회가 끝난 후 급히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원제는 화공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황제의 자녀 중에 황후가 낳은 딸은 공주 公主다. 후궁이 낳은 딸은 옹주 翁主나 군주 君主로 부르고, 황제의 방계 혈족의 딸들은 현주 縣主로 칭하였다.
그러니,
왕소군 王昭君이란 호칭은 황제의 황은 皇恩을 얻은 후궁이 낳은 군주 君主로 신분이 급상승 急上昇한 것이다.
왕소군은 흉노 땅에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여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호한야의 본처 아들인 복주루(復株累) 선우가 왕소군을 취하려 하자,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성제(成帝)에게 서신을 올렸으나, 성제는 흉노의 습속을 따르라고 명했다.
왕소군은 다시 복주루의 연지(閼氏, 선우의 황후)가 되어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총(靑塚)’이라 하였다고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등의 각종 문학 양식을 통해서 그 형상이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중국의 4대미녀
시대순으로 나열하면,
서시를 침어(沈漁) (전국시대)
초선을 폐월(閉月) (삼국시대)
왕소군을 낙안(落雁) (한나라)
양귀비를 수화(羞花) (당나라)
등으로 표현하며, 역대 4대 미인으로 손꼽고 있다.
‘서시’가 서호 주변을 거니노라면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물속의 물고기가 반해 넋 놓고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것조차 깜빡 잊고 그만 호수 바닥에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沈魚) 미인이라 부른다.
범려(范蠡)는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대부(大夫)이다. 월나라가 오(吳)나라에 패하자 그는 와신상담 臥薪嘗膽의 유명한 고사 故事를 만든 월왕 구천(句踐)을 도와 월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미녀 서시(西施)를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친다. 그 당시를 ‘오월동주 吳越同舟’라고 표현한다.
부차는 서시를 너무 총애한 나머지 여색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월나라에 멸망 당한다
서시는 곤경에 빠진 모국을 구하기 위해 적국인 오나라 왕 부차에게 미인계 美人計로 보내진 첩자의 역할을 다하고 묘연히 사라졌다.
‘초선’은 부자 관계를 맺은 동탁과 여포 사이를 오가며, 이간질로 여포가 동탁을 제거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의 미모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밤하늘의 달이 부끄러워 구름 속에 숨게 하였다고 그를 폐월(閉月) 미인이라 부른다.
‘양귀비’는 본래 당나라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비였으나 첫눈에 반한 현종이 그만 자신의 귀비로 삼아 총애하였다. 그의 미모에 견주었던 꽃들이 오히려 부끄러워하였다고 하였으니 수화(羞花) 미인이라 부른다.
이들 4대 미녀 중, 초선은 (삼국지연의) 소설 속 가공 架空의 인물이다.
그럼, 초선을 제외시키면 역사 속의 실제 인물을 한 사람 더 추가하여야 한다.
누가 그 역을 담당할까?
시대적 時代的으로 국한 局限시켜보면,
삼국지 당시의 미녀로는 오나라 손권과 주유의 부인인 대교, 소교 자매의 미모 美貌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하지만, 원술의 둘째 며느리이자, 후일 조조의 며느리가 되는 견씨 甄氏가 유력한 후보자다.
조조와 조비, 부자간에 벌어진 미녀쟁탈전이 가관 可觀이다.
조조는 원소를 패퇴시킨 관도대전에이어 화북쟁란에서 원소의 아들 원담과 원상을 대파 大破시킨 후.
승전보를 보고 받은 조조가 호위대장 허저에게 은근하게 묻는다.
“원소의 둘째 며느리는 어디 있느냐?”
잠시 후,
조비가 먼저 잽싸게 원소의 차남 원희의 처, '견씨를 이미 탈취하여 갔다'는 보고를 들은 조조,
“이번 전투는 ‘비’를 위한 전쟁이 되어버렸네”라며 허탈해했다는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살펴보면,
춘추 전국시대의 달기와 포사, 초한지 유방의 후궁 박희, 항우의 우희,
원말 元末, 고려 출신 기황후(고려말 대신, 기철의 누이)
등이 '경국지색 傾國之色' (傾國, 경국: 나라를 위태롭게 기울게 함) 의 미모를 뽐낸 유력한 후보군 候補群이다.
(위 인물 중, 유방의 후궁이 된 박희는 유일하게 정권 교체 交替와는 연관이 없다.
조용히 몸가짐을 조신 操身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그 미모로 인하여 여태후(유방의 황후)에게 너무나 잔혹 殘酷스럽고, 짐승보다도 못한 갖은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았다. 손발이 잘린 채, 돼지들 속에 뒤섞어서 1년 이상을 고생하다가 돼지우리에서 비참 悲慘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들은
일생의 단시간, 잠시는 주위의 부러움을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맛보았으나,
대부분이 '미인박명 美人薄命'이란, 사자성어 四字成語 그대로 비운 悲運의 삶을 살았고 비참한 말로 末路를 겪는다.
-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