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현대시조 한담>
가람 이병기 시조를 읽다
석야 신웅순
시인 정지용은 가람 시조집 발문에서 ‘가람 이전에 가람이 없고 가람 이후에도 가람이 없다’고 말했다. 일석 이희승은 ‘적어도 시조를 사랑하고 국문학을 운위하는 사람으로서는 시조! 하면 가람을 연상하게 되고, 가람! 하면 시조가 앞선다’ 고 말했다.
‘가람은 시조, 시조는 가람’이라는 등식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람의 시조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지대한 업적 때문이다.
기쁘나 슬프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할 수 없고나
- 「詩魔」 세째수
「시마」 첫수는 시의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다고 했다.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 성급히 그 모양을 찾아내기 어렵다고 했다. 선생에게 시조는 평생 영혼의 병이었다. 시조에의 애착과 집념은 어쩔 수 없었나 선생에게 지은 짐은 이렇게도 무거웠다.
묵직한 철책문이 덜그덕 닫히는고나
도몰아 이는 시름 가슴이 메어지고
하룻밤 지내는 동안 적이 壽를 덜었다
버버리 그저 입고 처녀는 어제 죽다
발도 걷지 않고 자리를 옮겨앉아
우러러 철창 너머로 달을 처음 보았다
법을 도가니 삼고 형으로 망치질하여
불로 녹이고 물로 식히고 하여
이 몸을 저의 맘대로 쇠와 같이 다루네
-「洪原低調」 1,2, 19째수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류되어 1년간 홍원 옥중에 있을 때 지은 시조「홍원저조」일부이다. 옥중 생활은 민족에게도 개인에게도 비통함 그 자체였다. 자유마저 박탈당한 양심과 정의가 마비된 일제하의 참혹한 참상을 이렇게 메시지로 전하고 있다.
어제 아침엔 촉촉히 봄비가 내렸다. 겨울도 갔다. 벙그렀던 매화가 터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겨우내 방안에 두었던 난분을 베란다에 옮겨놓았다. 난은 창가를 향해 부드러운 잎새를 흔들어 댄다. 바깥 세상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얼마 전 필자는 대학가 주택 2층집에 연구실 하나 마련했다. 앞에는 고매화가 있다. 향기가 그윽해 매화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여기에 달 하나 들여놓았다. 그래서 당호를 매화헌이라 명명했다. 이름을 지어주어 내 연구실은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매화헌은 나의 서재이기도 하다.
가람은 서울 계동의 당호를 매화옥이라 할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난매를 가꾸고 터득한 재배법까지 기록해놓을 정도로 난과 매를 무척 사랑했다.
봄마다 방긋방긋 구슬보다 영롱하다
낼 모래면 다 필 듯 벗들도 오라 하였다
진실로 너로 하여서 떠날 길도 더뎠다
오늘 아침에야 봉 하나이 벌어졌다
홀로 더불어 두어 잔을 마시고
좀 먹은 고서를 내어 상머리에 펼쳤다
-청매 1,3 수
바깥 공기는 아직도 차다. 따뜻한 두어 잔 술 때문에 매화 봉 또 하나 벌어질 기세다. 술도 두어잔 마셨다. 좀 먹은 고서를 상머리에 펼쳤다. 창을 열면 초저녁 달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나도 매화가 활짝 피고 달이 떠오르면 벗들을 불러야겠다.
가람에게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이 난이다. 시조하면 가람이요 난하면 또한 가람이다. 그의 수필 「매란과 새해」에서 ‘난과는 40여 년 깊은 인연이 있다. 나의 많은 파란과 함께 난도 환란이 많았다. 그의 수필 「풍란」에서는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라고 말 한 바 있다. 양주동은 「난초는 가람인가」라는 비유로 가람의 작품 세계를, 김윤식은 「가람론」에서 난을 시조의 예도로 평가한 바 있다.
오날도 온 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내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두고
장장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 「난초․3」
난과 선생은 바늘과 실이요 매화와 달이다. 난의 삶과 기품은 바로 선생의 삶과 기품이다. 나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난이다. 책을 넘길 때마다 향 또한 일고 있으니 나도 저를 못잊고 난도 나를 못잊고 있는가 보다.
40여년의 깊은 인연 속에 난은 나와 함께 많은 환난을 겪어 왔다. 굳은 듯 보드라운 잎새며 정한 모래 틈에 서려둔 뿌리이며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는 것하며 이는 가람의 고결한 삶이자 가람의 곧은 선비 정신이었다.
한국 전쟁이 터졌다. 국토는 초토화되었다. 동족상잔의 이런 비극이 지구상 어디에 있을까. 일제 때보다 더 큰 비극이 한국 전쟁이었다. 현대사는 혼란으로 점철된 비극 그 자체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 살 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갈아 봅시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 「고향으로 돌아가자」전문
전쟁을 고발한 작품이다. 평화롭던 고향은 잿더미로 변했다. 전쟁 후 우리 고향의 모습이이것이다. 헐린 터전에 주춧돌을 놓고 깨진 질그릇에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보자고 했다. 그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굳건한 재건의 아픈 의지를 보였다.
현대의 과학 문명을 비판한 작품도 있다.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하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냉이꽃」3수
동양 사상은 자연이 정복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하늘을 보며 기후를 예견했고 산과 들의 빛깔을 보고 계절을 헤아렸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자연이고 후세에 물려주어야할 자연이다. 선인들은 자연스럽게 평범한 오도의 경지를 터득했다.
생명체를 말살시키는 무기 개발은 있어서는 안된다. 이를 비판하고 있다. 냉이꽃은 생명의 가치와 존엄의 표상이다. 아무리 수소탄 원자탄을 만든다해도 작은 냉이꽃에 과학 문명이 숨을 불어넣어 줄 수는 없다. 가람은 누구보다도 생명을 존중한 휴머니스트이다.
그의 비판 정신은 여기에 그치치 않는다.
그의 집 앞으로는 지나기도 두렵다
겹겹이 둘러 둘러 가시성을 쌓았노니
지금도 안치를 받을 무슨 죄를 지었을까
홍수 맹수보다 음악한 이 세상에
탱자울 커녕 철옹성인들 믿으리오
갈외고 저히는 도적이 맘속에도 있으니
- 「탱자울」전문
가시성의 주체는 누구인지 드러나 있지 않다. 나라의 반역자 아니면 정치 권력, 부정축재 일 것이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청옹성을 쌓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불안했으면 겹겹이 가시성을 쌓아놓았는가. 아무리 성을 쌓아도 자신이 버린 도덕과 양심은 감출 수는 없다. 청옹성을 쌓는다고 해서 죄의식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도적이 가슴 속에 있으니 보호는 커녕 자신의 치부만을 더욱 드러낼 뿐이다. 담의 위압감은 부정과 비리로 착취한 치부의 높이다. 한 사회의 만연한 불안과 불신 풍조를 이 시조가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가람의 시조는 한국적인 리리시즘이다.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려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오동꽃」
오동꽃이 달빛 아래서 한 두 송이 소리 없이 지고 있다. 떨어진 오동꽃을 보려고 발을 멈추고 돌아보고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한국적인 정서가 어디 있을까.
내 고향 빨래터에도 오동나무가 있었다. 어머니는 봄이면 거기에서 빨래를 했다. 오동꽃이 냇가에 떨어지면 보랏빛 오동꽃은 배가 되어 멀리 멀리 떠 가곤했다. 나는 떠가는 오동꽃을 따라 가곤 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오후의 봄햇살은 따뜻해서 오동꽃은 소리 없이 졌다. 어머니의 빨래하는 모습과 그 맑은 물에 떠가는 보랏빛 오동꽃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위자연, 물아일체는 동양 철학이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자연이 나였고 내가 곧 자연이었다. 자연에 맞게 집을 짓고 자연에 맞게 다리를 놓았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요 자연과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연은 경건한 대상이었지 정복의 대상은 아니었다.
「박연 폭포」는 「난초」,「고향으로 돌아가자」등과 함께 가람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가람 시의 키워드이다. 이 두 작품을 말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 가람 시조이다.
이제 산이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골 저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 밖에 없어라
봉머리 일던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이 흐르는 물이 긏지 아니하도다
-「박연 폭포」전문
가람은 시인 이전에 학자이다. 가람을 빼고는 현대시조를 논할 수는 없다. 가람이 현대시조에 끼친 영향은 그만큼 지대하다.
그는「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1932.1)라는 논문을 통해 현대시조가 나아갈 길을 ①실감 실정을 표현하자 ②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③용어의 수삼 ④격조의 변화⑤연작을 쓰자⑥쓰는 법, 읽는 법 등 최초로 현대시조 창작에 대한 이론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는 현대시조의 문을 확짝 열여준 혁신적인 시조 작시법이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 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 구 남매
따뜻한 품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 「젖」
쓰라린 괴로움을 차마 다할 수 없어 까만 젖꼭지를 내보이는 어머님의 모습, 매었던 옷고름을 풀고 가슴 내어 뵈던 8,9남매의 생명줄 젖. 그리움과 슬픔을 자아내게 만든 우리 어머니의 젖이다. 이것이 실감과 실정이며 이것이 격조의 변화이며 연작이다.
가람은 부르는 시조보다도 읽는 시조를 강조했다. 그러다보니 부르는 시조와의 화해는 고려하지 못했다. 시조는 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스러울 수 없다. 시조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연작의 문제이다. 시조는 전통적으로 3장 6구 12 소절의 독립된 존재였다. 하나의 제목에 의존, 여기에 몇 수가 통일되도록 짓는 것이 가람의 연시조이며 현대 시조의 작법이다. 이도 엄밀히 말해 시조의 전통적 연작법에서 어긋나 있는 것이다.
가람시조하면 현대시조이다. 선생이 이룬 현대시조의 업적은 사족이 필요없다. 우탁이 고시조의 중시조라면 가람은 현대시조의 중시조이다.
햇살이 소나기처럼 세차게 쏟아진다. 온 세상이 환하다. 꽃들은 기지개를 펴고 새들은 요란하다. 가람 선생의 책들을 꺼내 먼지를 털어 다시 제자리에 꽂아놓아야겠다.
가람 선생의 생가 수우제에 있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살아온 길’ 비문이다.
선생은 1891년 3월 5일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한 후 신사조에 눈을 뜨게 되어 열 아홉 살에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게 되다. 그 후 전주 제2 보통학교,여산 보통학교, 동광․휘문 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직생활 중 시조를 연구하며 창작활동 을 시작하다.
1921년 「청년」지를 통해 등단하여 본격적인 시조시인으로 활동하다 서울 대학교, 전북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국문학 전사를 펴냈으며, 신시조 정립의 선구적 역 할 등 선생의 업적은 국문학계의 태두로 공인 받다. 1958년 고향집 수우재로 돌아와 애란․애주․ 애서의 삶을 살다가 1968년 11월 28일 사랑하던 고서와 난 그리고 애시를 남기고 가시다.
1998년 10월 9일
가람 선생의 생가 수우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64-8 소재
서예문인화, 2016.4,116-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