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그리고 마지막 허 열 웅 시나 소설, 수필을 쓸 때 첫 줄은 신이 준다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뜻 일 것이다. 글뿐만 아니라 ‘첫’ 이라는 관형사가 들어가면 참신한 이미지와 함께 부푼 기대의 설렘을 갖게 된다. 첫사랑, 첫눈, 첫차, 첫인상, 첫 키스, 새해 첫날 등을 말할 때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고 무언가 이루어지리라는 큰 기대를 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도 첫 문장을 가장 고뇌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도 어렵사리 찾은 글의 주제를 생각해내고 책상에 앉아 첫 문장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신이 준 듯한 멋진 첫줄을 떠올린 적도 있다. 그런가하면 한 줄도 못쓰고 그만 둔적도 있다. 그래서 첫 문장을 썼으니 반은 쓴 거나 마찬가지라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유명한 작가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순신의 인간적인 생애를 다룬 김훈 작가는<칼의 노래> 첫 줄에서 조사 하나를 바꾸는데 몇 날을 고민했다고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로 할까? 조사하나 때문에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고뇌했다고 했다.
글의 첫 문장은 작품의 주제와 분위기를 암시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는 첫 줄을 읽고 손뼉을 치고, 또 다른 사람은 책을 덮었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첫 문장을 읽고 뒷줄거리가 궁금해 자세를 바로 잡으며 책 속으로 빠져들었던 몇 작품을 떠올려본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베스트셀러이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된다. 최연소 노벨문학상작가였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은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이다. 모두 다음이야기가 궁금하여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100만부 이상 팔린 밀레니엄 작품의 첫 문장을 살펴보자. 김성동의<만다라>는 “풀리지 않는 화두話頭의 비밀을 바랑에 담아지고 역마驛馬처럼 떠돌다가 백운사 객실을 열자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로 썼다. 절대 금기된 절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는 서두로 앞으로 벌어질 사태가 두렵기 까지 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이문열의 소설<금시조金翅鳥>에서는 “무엇인가 빠르고 강한 빛줄기 같은 것이 스쳐간 느낌에 고죽은 눈을 떴다”이다. 서화書畵는 예藝 입니까? 법法입니까? 아니면 도道입니까? 의 해답을 추구하는 예술의 근본을 묻는 것 같은 철학의 미로를 예감하는 문장이다. 명작을 번역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중에 여러 번역판이 나와 있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스콧비츠 제널드의<위대한 캐츠비>는 출판사의 책마다 문장이 조금씩 달라 오래 고뇌한 흔적이 보인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등 첫 문장만 뽑아 독자의 시각으로 품평한 싸이트도 등장했다. 그 만큼 첫 문장이 작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문장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주의를 집중시켜 독자를 붙잡아두는 것이다. 일곱 권의 책을 내면서 작품의 첫 문장을 고뇌한 것처럼 어떤 작품을 첫 번째로 내 놓을지도 오래 고민할 때도 있었다. 첫 문장 때문에 문단을 송두리째 바꾼 경우도 있었다. 첫 줄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면 마지막 문장은 글 내용을 어떤 감정으로 뇌리에 박히고 가슴에 머물 것인가를 생각하고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잔잔한 미소로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도록 끝을 내야한다. 제목에서 암시를 주었던 과정의 매듭도 풀어주어야 한다.
첫 문장과 마무리도 중요하지만 꾸준히 쓰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번쩍하는 영감이 떠오르거나 누가 어떤 주제를 가져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글 쓰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간절함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증폭시켜주고 힘이 생겨난다. 이제 눈이 침침한 노안도 오고 기운도 딸릴 때가 머지않았으니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심정으로 써야한다.
하루에 몇 줄이라도 써야하겠다는 결심으로 책상 앞에 앉는 엉덩이 힘도 필요하다. 오늘 다섯줄을 썼으니 내일은 몇 줄 더 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필요하다. 먼 곳을 바라보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글이 요구된다. 그림처럼 써내려가며 세상을 읽고 인간의 마음을 파고드는 수필을 쓰는 것이 잘 쓴 수필이고 좋은 수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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