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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약1:5-8)
야고보서를 기록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늘 하나님앞에 무릎꿇는 삶을 살았기에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졌습니다. 야고보서는 스데반집사님의 순교를 기점으로 엄청난 핍박을 피해 전 세계로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 쓴 편지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목회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적인 입장에서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문제가 무엇이냐부터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한 첫 번째 문제가 지난 주에 살펴본 '시험'문제였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다가오는 시험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그 시험을 당했을 때 어떻게 감당해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는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실제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기도생활입니다. 기도없이 예수믿는다는 것은 참 무력한 태도입니다.
여러분, 어떤 분은 예수믿는다는 것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려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별일인가,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선한 마음으로 이웃에 사랑을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지,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예수믿은 후에 드러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잘 소통하려면 기도가 우선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기도생활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특별히 '기도' 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앞에 있는 말씀 '시험'과 '기도'를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합니다마는 그 기쁘게 여기는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기도입니다. 기도로부터 응답받아야 비로소 시험을 만나도 기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쁘게 여기라 했다고 무조건 기쁘게 여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은 기도의 응답에서 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시험'의 문제를 거론하고 바로 '기도'의 문제로 들어간 것은 그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을 지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방법도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합니다. 육신이 충만했던 사람이 기도하면 성령충만으로 내면이 바뀝니다. 기도하면 성령충만하고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니까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의 힘은 기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기도에 대해서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도의 대상(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기도의 대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기도를 하려면 기도의 대상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외우는 주기도문을 보십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의 대상부터 부릅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니 여호와니 전능하신 자니, 여러 가지 호칭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가깝게 느껴지고 가장 정겨운 호칭은 단연코 '아버지' 입니다. 기도의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거기로부터 자연히 기도의 자세가 나오고 기도의 내용, 곧 기도의 제목도 나올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목청을 높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보다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참모습을 알고 진실하게 내 모습 이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였을 지라도 내자신이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면 저는 미쁘시사 우리를 모든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막힌 죄가 없어야 그 다음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순서는 첫 번째가 찬양이고 두 번째가 회개이고 세 번째가 감사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간구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기도하면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넘치도록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우리가 자녀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넘치도록 주고 싶어하시는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마태복음 7장 9절로 11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못주시는 것입니다. 못받는 우리보다 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더 괴로운 입장입니다.
없는 것도 아니요 얼마든지 가지고 계신 하나님, 그런데 왜 못주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는 마음과 구하는 자세가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돈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달라는 대로 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돈도 없지만 있어도 함부로 주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한계를 정해놓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돈만 버리면 그나마 다행이요 자칫 자식까지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수준에 도달하여 훌륭한 인격이 된 다음에는 있는 대로 얼마든지 줄 것입니다. 지금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각에 넘치도록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뿐 만 아니라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다소 잘못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너그럽게 봐주십니다. 제 아무리 철저히 해도 하나님 앞에서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잘못되는 것이 있습니다. 실수를 아예 각오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참 하나님앞에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늘 똑같은 죄를 가지고 회개한다고 아룁니다. 그렇게 잘한다고 자부하더니 실수투성이고 고집투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 완고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존심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리고 성령을 슬프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자기만 사랑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기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돌이키길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중심과 폐부를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부족한 우리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허물과 죄까지도 꾸짖지 않으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십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시려고 간절히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요즘처럼 어려울 때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런데도 기도하지않고 적당히 보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사무엘이 말할 것처럼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금요기도회를 강조했는데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으신 하나님이라도 구하지않는데 어떻게 응답해주시고 통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해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의 제목(지혜를 구하라)
5절, "너희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무엇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환란을 만난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환란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받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돈많은 부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녀라고는 아들 하나인데 그 아들은 예루살렘에 유학 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병이 들어 오늘내일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불러 유언할 시간도 없고 유서가 아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재산은 많은데 참으로 큰일났습니다. 모두 아들에게 준다고 유서를 써놓았댔자 종들이 작당하여 찢어버리면 그만일 것입니다.
아들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지도 않을 뿐더러 유서를 전해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칫하면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래 노인은 지혜를 냅니다. 많은 종 가운데 건장한 종 하나를 불러 "너에게 내 모든 재산을 다 주겠노라"하고 간단한 편지 한 통을 써서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하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산을 받은 종은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 많은 재산이 이제는 모두 자기 것입니다. 그는 주인이 남긴 유서를 그 아들에게 가져다 줍니다.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본 아들은 기가 막힙니다. 자기에게 남겨진 유산이라고는 종 한 사람뿐입니다. 많은 종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만을 남겨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그 유서를 가지고 랍비에게 가서 묻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종 한 사람만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랍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네 아버지의 재산을 다 물려받은 그 종을 네 종으로 삼으면 될 것이 아니냐." 종의 것은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아버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지혜를 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적으로 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그 귀한 지혜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첫째, 자신의 부족을 깨달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지혜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나는 항상 옳고 지혜로우며 남은 항상 틀린다"는 의식을 지니게 만듭니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사실은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영리하다는 것과 지혜는 다릅니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과 지혜가 있다는 말은 다른 것입니다. 지혜를 지니는 것은 내게 참 지혜가 없다고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부족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족을 느끼는 것만이 참된 지혜는 아닙니다. 나의 지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지혜 앞에 머리를 숙이는 그 지혜야말로 건전한 지혜입니다. 위대한 기독교의 인물들은 진실로 자신의 무가치함과 지혜없음을 그들의 고백록에서 늘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혜가 없다고 느끼십니까?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가 가까이 있으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혜없음에서 시작하십시오. 우리는 영리하기는 합니다. 나의 욕심의 유익을 위해서는 영리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함께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지혜로움은 본질적으로 내 안에 없습니다. 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인생을 보는 지혜와 안목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지혜를 누가 주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분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후히"라는 말은 "풍성하게"라는 말입니다. 인색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혜로 풍성하신 하나님, 언제나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십니다. 주실 뿐 아니라 꾸짖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두려움을 갖기 쉽습니다. 지난 달에도 어제도 구한 것을 또 구한다는 자책감으로 부끄럽지 않습니까? 똑같이 반복되는 죄를 이길 지혜를 또 달라고 구하는 것이 죄송하지 않습니까?
같은 것을 거듭 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행동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십니다. 자식은 아버지께 당당히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주시는 것을 즐기십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구하면 구할수록 더 기뻐하십니다. 풍성하게 주십니다.
솔로몬왕이 왕위를 즉위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작정하고 드립니다. 일천마리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대단한 헌신이요, 각오입니다. 천이라는 숫자는 전부를 의미합니다.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아, 네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네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
솔로몬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나이가 아직 어리고 백성은 많아서 이 국가를 다스릴 능력이 내게 없습니다. 잘 다스릴 수 있게 지혜를 주옵소서." 그 때 하나님은 감동하십니다. 솔로몬의 기도의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드신 것입니다.
왕상 3:10-13,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지혜 뿐 아니라 부귀와 영광을 허락하시리라고 약속하시며 이전에도 이후에도 솔로몬과 같이 지혜롭고 그처럼 큰 영광을 누릴 사람은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목으로 인생을 보기 원하십니까? 영리함도 아니며 세상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판별하는 능력도 아닌,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줄 아는 그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볼 때 시련은 나를 향한 테스트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당하는 시련이 내게 용광로가 되어서 더욱 정결한 인생, 더욱 멋진 인생, 더욱 순수하고 거룩한 인생, 더 성숙한 인생으로 정제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을 깨닫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합시다.
3. 기도의 방법(믿음으로 구하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되 믿음으로 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크리노'입니다. '디아'는 '철저히'라는 뜻이요, '크리노'는 '비판하다'라는 뜻입니다. 헤아리고 재어본다는 말입니다. 요리조리 헤아리고 재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까?', '하나님께서도 못하실거야' '모든 것이 끝났어'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서 기도하십시오, 결사적으로 매달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작정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약 4:2,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거나 믿음으로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의 약속을 붙잡고 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믿음은 그의 약속을 온전히 붙잡는 것입니다. 부흥회에 가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75세일 때부터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90세가 되어도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00세에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더욱더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4:19-22)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여러분은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며 갈급한 마음으로 구하고 있습니까? 그 부족함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모시는 하나님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까? 그를 향해서 온전한 신뢰를 두고 구합니까?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주십니다. 어느 때든지 내가 당하는 모든 역경과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잘 견디어 낼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놀라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기회 속에서 우리가 더 거룩하고 순결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주위의 사람들을 잘 살펴봐도 깊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의 능한 능력 안에서 더 빛나고 성결하며 순결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을 지켜볼 때 저는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저 정도의 고통을 받으면 저 사람이 무너져야 할 텐데 도리어 더 아름다운 인생을 살며 성숙해가는 것을 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6-8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예배하지 않을 때가 많으며, 믿음으로 찬송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을 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구해도 얻지 못합니다. 아무리 간구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기도의 응답이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왜 없는고!'하며 늘 답답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응답에 대한 기대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밖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인격이 되고 맙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준 것은 기뻐하고 감격하지만 응답이 없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걱정 근심과 연민에 자기 생애를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파도처럼 맡겨 버립니다. "두 마음을 품어"이 말의 헬라어 원뜻은 두 영혼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한 인격 안에 두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이중 인격자가 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는 찬송도 있고 영광도 있으나 교회 밖에 나가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이 되지 않는 삶을 삽니다. 두 가면을 쓴 사람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어떤 조건하에서는 악마가 되고 어떤 조건 하에서는 선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두 마음, 두 영혼을 한 육체 안에 가지고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난시에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주여, 이 시험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시험에 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앞에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주저 앉아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할 때를 잊어버리면 믿음을 빼앗길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주어진 역경과 시험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