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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5복을 중시합니다. 5복이란, 재물과 장수와 건강과 덕 그리고, 생명의 연한을 다하여 세상을 떠날 때, 평안히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된 우리는 여기에 2복을 더 추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구원과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입니다. 곧, 이 땅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고, 하늘나라에서 가서는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상급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죠?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이 복의 주관자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복의 근원으로 세워주신다는 겁니다. “복의 근원”이라함은, “복 그 자체”라는 겁니다. 그럼, 성도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복의 근원이 될까요? 하늘에는 비행기가 다니는 항로가 있고, 바다에는 배가 다니는 해로가 있으며, 육지에는 육로가 있듯, 우리의 삶에도 삶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이 길을 찾았고, 이 길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름을 이 땅에 남기고자 한 것 보다는, 후손들이 또는 제자들이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삶으로,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하길 원하시기에, 우리가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복된 삶을 살도록 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의 중심요결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이 있는 본장은, 오늘날의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알려주며, 본문 당시의 구약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성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금지입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섬기는 그것을 나무로 조각하거나 돌로 조각하여 목상과 석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것이, 아세라 목상, 바알 주상, 사람과 동물을 섞어서 조각한 석상입니다. 둘째, 안식일 준수하며, 성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지켜야 할 삶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여러 민족 가운데 특별하게 선택한 선민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들의 삶의 주인으로 온전히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본장에서 말하는 삶이며, 여기에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고, 이를 잘 구분해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관점을 중심으로 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축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시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복된 인생, 새로운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축복의 전제 조건입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시면,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들과 여러 규례로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수행하시기 위한 조건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본문의 끝에 있는 “준행하면”입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축복이 우리의 삶 속에 줄줄이 보장된다는 겁니다. “준행한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샤”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휘파쿠오”라 하여, 그 뜻은 “아래에서 듣는다, 주의 깊게 듣는다, 명령에 유의하다, 명령을 따르다”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평화를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학자 베이커는 순종이란 “주님께서 돌담을 뛰어 넘어가라 명령하신다면 그대로 하는 것이다. 뛰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넘게 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또한,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물리학자인 파스칼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나의 모든 것 몸, 마음, 물질, 시간, 명예, 그리고 영혼까지도 주님이 주장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합니다. 이것은, 어떤 이들이 말하거나 쉽게 풀어준다며 주장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것을 따르는 겁니다. 성경의 기록은 대부분 우리가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기록되어 있지, 어떤 특정인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실 때 보면, 남녀노소 누구나가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가르치셨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 620장인 “여기에 모인 우리”의 가사에도 이러한 삶의 자세가 나옵니다. 보시면,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사랑과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그 말씀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먹먹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조용히 되짚어가며,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종 어떤 특정인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고난의 이유나 고난의 끝을 알고자 함이며 또, 우리의 생활이나 건강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고, 확신 속에서 붙잡을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내가 있다”는 겁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시며, 나를 기억하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어떤 자리에서나 욥과 같은 자세로, 아브라함과 같은 자세로, 다윗과 같은 자세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억하여,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어,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 - 7절을 보시면,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만, 마음의 만족을 누리며, 평안히 거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샬롬”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낼 때, 샬롬 가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셨기 때문입니다. 낮의 해나 밤의 달이 그들을 해하지 못했고, 생수와 만나로 그들을 배불리셨고, 그들의 옷과 신발이 낡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므로, 샬롬은 성도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이 샬롬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지 않을 때가 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에 감사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앞세움으로, 불만 불평했을 때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내가”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누리는 평화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거듭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불만 불평을 할 때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거듭 강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들어가 있을 때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본문 속의 하나님의 거듭 강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사 66: 1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인 샬롬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늘에 보좌를 두시고, 땅에 발판을 두신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우리가 있을 곳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샬롬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세계 보건기구는, 우리의 “건강”에 대해,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강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육체만 건강한 것이 아니라, 생각도 건강해야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건강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인간적 행위가 일어납니다. 또, 일상에서는 비상식적으로, 상대야 어떻든 자신에게만 이롭게 하려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제과점에 들어가 진열된 제과들을 일일이 맨 손으로 만지고는 불평하며 그냥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맨손으로 만진 그 제과들을 우리 같으면 사겠습니까? 결국,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제과점과 여러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겁니다. 또, 개를 안고 들어갑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개이지만, 어쩌다 조그만 벌레가 있어도 그 매장을 이용하는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데, 그런 곳을 개나 고양이를 안고 들어간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직원이 말하면, 그것에 대해 불쾌감을 말하는 적반하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생각이 건강하지 못하고,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계 보건기구는 1998년 이후, 육체와 정신과 사회의 건강에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그것은, “영적 건강”입니다. 그래서, “건강”이랑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정상인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도 건강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방에서는 중풍을 100% 예방하는 방법이나 약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흥분을 잘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짜증을 잘 내는 사람들이 중풍에 잘 걸릴 확률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중풍을 예방하는 것은, 마음의 기를 다스려 화를 없애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로, 과음, 과식을 피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 2: 5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계속적인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이지 않았기에,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겪는 가운데, 마 27: 46을 보시면,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샬롬의 축복도 깨어집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이 땅에서 섬겨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샬롬의 축복을 누리며, 마음의 만족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 - 13절을 보시면,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성막”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처소”로, “성전”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성막을 세우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여 계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계신 것처럼, 우리 가운데도 임재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우리의 삶에 평화와 안정과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국제광고회사의 최고 경영자인 “팸 메이피스 래릭”은,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지만, 그 실수에 대응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사가 당신의 잘못을 지적할 때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과 2대왕인 다윗이 그러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적하셨을 때, 여러 가지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행위를 지적하셨을 때, 어찌했습니까? 삼하 12: 16을 보시면,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라고 합니다.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벧후 3: 11에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성도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그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가 뭐라 하든, 변치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하셨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에 맞지 않다며, 재해석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성경학자들 가운데만 있었지만, 현대에는 일반 성도들 가운데도 꽤 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욕심을 포함시키고 싶다는 겁니다. 마 5: 18을 보시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이요, 우리로서는 가장 지혜로운 행위요, 우리가 택한 가장 탁월한 선택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성실하게 준행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