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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병정신선양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약포 연보(藥圃 年譜)-약포 정탁
명나라 세종 가정 5년 - 국조 중종 21년 - 병술년(1526) 10월 8일 - 인시 - 에 선생은 예천군 북쪽 금당실〔金堂谷〕 삼구동(三九洞) 집에서 태어났다. - 삼구동은 곧 선생의 외가 동네이다. 모부인 한씨는 진사 한종걸(韓終傑)의 딸로, 일찍이 태양에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꿈을 꾸고 선생을 낳았다고 한다. 선생은 태어나면서 외모가 남다른 면이 있었고 영특하고 빼어난 자질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 의정공이 매우 사랑하였다. -
12년 계사년(1533, 중종28) - 선생 8세 - ○ 처음으로 수학하면서 즉시 대의(大義)를 통달하였고, 번거롭게 과정을 독려하지 않아도 문사(文思)가 날로 진취하였다.
13년 갑오년(1534, 중종29) - 선생 9세 -
12월에 모부인의 상을 당했다.
15년 병신년(1536, 중종31) - 선생 11세 -
의정공을 따라 안동 가구촌(佳丘村)에 갔다. - 가구촌은 아버지의 고향이기에 이곳에 다시 머물러 살았다. -
17년 무술년(1538, 중종33) - 선생 13세 -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과 함께 금사사(金沙寺)에서 독서하였다. - 백담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약포와 나이가 같고 사는 곳도 같아 친하게 지냄이 매우 돈독하였다. 약포는 13세 때 학질(瘧疾)을 심하게 앓았는데, 내가 몰래 병소(病所)에 들어가 보니 겨우 통증이 진정되었을 뿐인데도, 벌써 일어나 앉아서 산법(算法) 도구를 방에 가득 펼쳐 놓고는 기삼백(朞三百)ㆍ기삭(氣朔)ㆍ치윤(置閏)의 법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 재주가 영민(潁敏)하고 조숙함이 이와 같았는데도 지나치게 스스로 숨겨서 세상에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
19년 경자년(1540, 중종35) - 선생 15세 - ○ 선생은 어릴 때부터 중부(仲父)인 삼가 현감(三嘉縣監) 정이흥(鄭以興)에게 수업하였다. 선생 나이 겨우 15세에 경서(經書)를 통달하였고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의 책을 두루 읽었다.
21년 임인년(1542, 중종37) - 선생 17세 -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 선생은 어린 나이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서 심학(心學)의 요체를 들은 데다, 실천하는 공부를 더하여서 얕은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일삼지 않았다. -
24년 을사년(1545, 인종1) - 선생 20세 -
봄에 가구촌(佳丘村)에서 의정공을 따라 다시 금당실〔金堂谷〕로 와 살았다.
25년 - 명종 원년 - 병오년(1546) - 선생 21세 -
여름에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하였다. - 외가의 선영(先塋)인 못골(제동(堤洞))에 장사하였는데, 슬픔과 예법을 다하였으며, 시묘를 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
27년 무신년(1548, 명종3) - 선생 23세 -
6월에 상을 마쳤다.
○ 가을에 부인 반씨(潘氏)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 효자 관물당(觀物堂) 반충(潘冲)의 딸이고, 검열(檢閱)을 지낸 이구(李構)의 외손녀다. -
31년 임자년(1552, 명종7) - 선생 27세 -
봄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했다. - 이해 가을에 태학에서 유학하였는데, 재유(齋儒)들이 구두(句讀)만을 일삼았으나, 선생은 홀로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대해서 연구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
32년 계축년(1553, 명종8) - 선생 28세 -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독서하였다. - 진사 윤의정(尹義貞)이 함께 유학하였다. -
36년 정사년(1557, 명종12) - 선생 32세 -
늦여름에 《계몽전의(啓蒙傳疑)》 한 질을 월천 조사경 목(趙士敬 穆)에게 주었다. - 선생은 월천(月川)과 동문으로서 우의가 돈독하고 두터워 도학(道學)으로써 서로 권면하였다. 선생이 《계몽전의》 두 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질을 그에게 주어 퇴계 선생께 질정을 구하도록 하였다. 책 끝에 권면하는 뜻으로 적기를 “매암(梅巖)이 쓰다.” 하였으니 매암은 최초의 호(號)이다. 월천(月川) 또한 소지(小識)를 남겼다. -
37년 무오년(1558, 명종13) - 선생 33세 -
겨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 선생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을 때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공과 함께 산방(山房)에서 지냈다. 일찍이 밤에 앉아서 연구(聯句)를 읊었는데, 선생이 먼저 읊기를 “북두성이 하늘에 있으니,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보도다.〔星斗在天天下仰〕”라고 하니, 김공이 놀라며 “훗날 반드시 조정에 머물면서 태산북두의 촉망을 받으리라.”라고 하고, 이어서 읊기를 “파도가 바다에 몰아치니 바다 속 물고기들이 놀라는구나!〔波濤驅海海中驚〕” 했다. -
38년 기미년(1559, 명종14) - 선생 34세 -
교서관에 분속되었다. - 세상 사람들은 신진(新進)이 운각(芸閣 교서관)에 들어가는 것을 좌천이라고 일컬었으나, 선생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공정을 짜서 장인(匠人)들의 일을 감독하고 오자를 교정하기를 한결같이 지극정성으로 하였다. 당시에 눌암(訥庵) 홍 아무개가 제조(提調)로 있었는데, 감탄하며 말하기를 “큰 그릇이다. 뒷날에 반드시 대성할 것이다.” 하였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은 사람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는데 선생을 보고는 “이 관원은 암룡〔雌龍〕의 용모를 지닌 기이한 사람으로 훗날 반드시 크게 귀해질 것이다.” 하였다. 또 선생이 처음 교서관에 예속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를 두고 말하기를 “정승(政丞)이 교서관(校書館)으로 돌아갔다.” 하였으니, 대개 선생이 정승이 되리라는 인물망이 이미 벼슬길에 나아간 초기에 모아졌던 것이다. -
39년 경신년(1560, 명종15) - 선생 35세 -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 - 선생이 일찍이 향실에 숙직할 때 명종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장차 불사(佛事)를 하려고 향실에서 향을 가져오라고 명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교제사(郊祭社)에 쓰는 향이지 불공을 드리는 데 쓰는 물건이 아닙니다.” 하고 거부하면서 명을 따르지 않았다. 문정왕후가 크게 노하여 하급 관리에게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람들의 논의가 그를 위대하게 여겼다. ○ 선생이 일찍이 공적인 일로 영상(領相)인 인재(忍齋) 홍섬(洪暹)을 찾아뵈니, 공이 남다른 예로 매우 공경스럽게 대우하였다. 선생이 물러나간 뒤 그 자제(子弟)들이 지나치게 스스로를 낮춘 것을 괴이쩍게 여기자,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이 사람은 후덕하고 큰 도량이 있어 훗날 반드시 나의 자리에 오를 것이므로 평상시 체모로 그를 대우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40년 신유년(1561, 명종16) - 선생 36세 -
성천 교수(成川敎授)에 제수되었다. - 본 고을 향교에는 오래된 규례가 있어, 새로 교수(敎授)가 부임해 오면 여러 서생들이 비단으로 속수(束脩)의 예를 행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교수(敎授)는 유생들의 사장(師長)이다. 사제지간에 어찌 재화로써 예를 행해야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그것을 완전히 개혁하였으며, 예의로써 가르치고 차근차근 타일러 힘써 나아가게 하니 선비들의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
진주 교수(晉州敎授)로 옮겨 임명되었다. - 선생이 진주에 있을 때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는데, 매우 깊은 추허(推許 인정)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남명의)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 버티고 서 있는 듯한 기상’을 볼 수 있었다. 선생이 시종(始終) 절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때에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아들 윤저(允著)가 태어났다.
42년 계해년(1563, 명종18) - 선생 38세 -
여름에 명례방(明禮坊)에 집을 지어 우거하였다. - 퇴계 이 선생(李先生)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듣자 하니 남산 아래 아름다운 동산에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아마 벼슬에서 물러나 소요(逍遙)하며 진세의 피로를 풀려는 것이니 경하할 만하다. 그러나 긴요한 것은 또한 여기에 있지 않으니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아마 학문에 힘쓰라는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
43년 갑자년(1564, 명종19) - 선생 39세 -
박사(博士)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호송관(護送官)이 되었다.
○ 아들 윤위(允偉)가 태어났다.
○ 3월에 봄날 동산에서 감흥을 읊은 절구시 10수를 지어 퇴계 선생에게 올렸다. - 퇴계 선생이 차운한 시가 있다. -
44년 을축년(1565, 명종20) - 선생 40세 -
가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차(陞差)했다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발탁 제수되었다. - 퇴계 선생이 편지를 써서 축하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지금 미원(薇垣)에 들어갔다고 하니 오랜 교분으로 축하를 하네. 그러나 걱정과 책임감 또한 가볍지 않을 것이니 더욱더 힘쓰고 삼가서 시망(時望 당시의 여망)에 부응하시게.” 하였다. -
언사(言事)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서용되어 또 정언에 임명되었다. - 선생은 언관(言官)의 지위에 들어가 일이 있을 때마다 과감하게 말하여 옛날 쟁신(諍臣)의 풍모가 있었다. 맨 먼저 윤원형(尹元衡)이 제멋대로 독단하여 나라를 그르치게 한 죄를 탄핵하였고, 계속해서 이감(李戡)ㆍ윤백원(尹百源)ㆍ심통원(沈通源) 등을 논핵하니 조정이 숙연히 두려워하고 꺼렸다. -
45년 병인년(1566, 명종21) - 선생 41세 -
예조 정랑으로 옮겼다.
목종(穆宗) 융경(隆慶) 원년 정묘년(1567, 명종22) - 선생 42세 -
봄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선임되었다.
○ 병조 좌랑(兵曹佐郞)ㆍ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배(移拜)되었다.
○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전직(轉職)되었다.
○ 다시 수찬ㆍ부교리ㆍ교리가 되었다. - 선생이 경악(經幄)에 재직한 것이 모두 30년이나 되는데, 일에 따라 좋은 의견을 아뢰며 충성심을 다하여 품은 마음을 다 진술하였고, 격한 말로 임금을 자극하여 명예를 취하지는 않았다. 한결같이 성의로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임금 또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다. -
2년 - 선조 1년 - 무진년(1568) - 선생 43세 -
여러 차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병조 정랑(兵曹正郞)ㆍ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3년 기사년(1569, 선조2) - 선생 44세 -
5월 21일 조강(朝講)에 입시(入侍)하였다. - 대사헌 박응남(朴應男), 헌납(獻納) 민덕봉(閔德鳳), 경연관(經筵官) 신응시(辛應時)와 함께 진주 유생들의 옥사에 대해서 각자 진언했다. -
4년 경오년(1570, 선조3) - 선생 45세 -
12월에 퇴계 선생의 부고가 이르자 영위(靈位)를 설치하여 곡하였다. - 여러 동문들과 더불어 김학봉의 관소(館所)에 모여 곡하였다. -
26일 석강(夕講)에 입시하였다. - 홍성민(洪聖民)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게도 대유(大儒)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고가 도착하던 날 영의정을 추증하시자 경향(京鄕)의 신민(臣民)들이 감격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학문은 동방의 종사(宗師)가 되며, 학문을 집대성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나아가 말하기를 “동방에 학문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르나, 조예(造詣)의 정심(精深)함과 천리(踐履)의 순고(純固)함에 이르러서는 오직 이 한 사람뿐입니다. 그의 진퇴출처(進退出處)와 사수취여(辭受取予)는 모두 후인들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에게 병이 있다고 듣고서 특별히 명하여 어의를 보냈건만 미처 구제하지 못했으니, 슬픔과 한스러움을 어찌 이루 다 말하리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대신(大臣)을 대우하심이 극진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나 반드시 그의 도를 쓰신 뒤에야 비로소 현인을 대우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
5년 신미년(1571, 선조4) - 선생 46세 -
아들 윤목(允穆)이 태어났다.
○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의 사제문(賜祭文)을 지어 올렸다.
○ 3월에 퇴계 선생을 회장(會葬)하였다. - 제문이 있다. -
6년 임신년(1572, 선조5) - 선생 47세 -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신종 만력 원년 계유(1573, 선조6) - 선생 48세 -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전직되었다가 의정부 검상과 사인으로 승진되었다.
○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천직되었다.
○ 장령(掌令)ㆍ사간(司諫)ㆍ집의(執義)로 천직되었다.
2년 갑술년(1574, 선조7) - 선생 49세 -
○ 가을에 부응교(副應敎)에서 통정(通政)으로 승차(陞差)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
3년 을해년(1575, 선조8) - 선생 50세 -
도승지 겸 경연 참찬관(都承旨兼經筵參贊官)ㆍ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ㆍ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ㆍ상서원 정(尙瑞院正)에 승차되었다.
4년 병자년(1576, 선조9) - 선생 51세 -
가을에 도승지(都承旨)를 사체(辭遞) 하였다.
5년 정축년(1577, 선조10) - 선생 52세 -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 예조 참의로 천직되었다.
○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 선생이 강원도를 다스리면서 정사는 너그러움과 용서를 숭상하고 백성들을 잘 어루만지고 보살폈으며, 형벌은 신중하게 심문하여 도내의 적체된 죄수들을 순서대로 형벌을 감량해 주었다. 춘천에 도착하여서는 관원들이 진공(進供)할 때 선생 앞에 젓가락 놓는 것을 잊어버렸으나 선생은 개의치 않았고 고을 수령이 그 죄를 다스리려 하자 급히 제지시켰다.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할 때 가마를 메는 중들이 힘들고 고생하는 것을 살펴보고 쌀과 베와 소금과 콩을 나눠 주었다. 더욱이 학문을 숭상하고 유학을 중시하여 이르는 곳마다 번번이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평해(平海)에 도착했을 때 어떤 정졸(庭卒)이 선비와 부딪혀 의건(衣巾)이 더럽혀졌는데, 마음속으로 군수가 무인(武人)이라서 유관(儒冠)을 천대하여 이런 일이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정졸에게 장(杖)을 쳐서 경계시켰다. -
7년 기묘년(1579, 선조12) - 선생 54세 -
봄에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는데, 다른 겸직은 종전대로 겸임(兼任)하였다.
8년 경진년(1580, 선조13) - 선생 55세 -
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승정원 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에 승수(陞授)되었는데, 다른 겸직은 종전대로 겸임(兼任)하였다.
9년 신사년(1581, 선조14) - 선생 56세 -
4월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경중(李敬中)의 파직을 요청하는 것을 선생이 따르지 않자, 마침내 각자 소견을 아뢰고는 피혐(避嫌)하고 물러났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계(啓)를 올려 선생을 체직(遞職)시키고 정인홍을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고 이경중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
○ 5월에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에 제수되었다. -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윤의중(尹毅中)을 형조 판서에 첫 번째로 의망(擬望)하여 낙점을 받았는데, 대사간(大司諫) 이이(李珥)가 반론을 제기하고 양사(兩司)가 합계하여 대신의 그릇된 천거를 탄핵하여 추문(推問)할 것을 청하였으나, 주상께서 다만 이조(吏曹)만 추문하고 개정(改正)하라는 계(啓)는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사체(辭遞)하였다. -
○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0년 임오년(1582, 선조15) - 선생 57세 -
흠경각(欽敬閣) 수리를 감독하였다. - 선생은 상수학(象數學)에 정통하여 젊은 시절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이미 혼천의(渾天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조정에 들어가서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하였다. 그러므로 선조〔宣廟〕께서 내린 교지에 “기형(璣衡)을 묘령(妙齡)에 만들었다.〔璣衡創妙齡〕”는 구절이 있다. -
○ 특명(特命)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ㆍ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다.
○ 겨울에 사명을 받들고 황경(皇京 북경)으로 갔다. - 선생이 북경에 있을 때 관상을 보는 사람이 선생을 보고 말하기를 “공은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 훗날 마땅히 만민(萬民)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 -
11년 계미년(1583, 선조16) - 선생 58세 -
봄에 북경에서 돌아와 복명하였다.
○ 4월에 행(行)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 8월에 휴가를 청하는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분황(焚黃)하였다.
○ 9월에 공조 판서와 다른 겸직들을 사체(辭遞)하였다.
○ 11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2년 갑신년(1584, 선조17) - 선생 59세 -
5월에 계(啓)를 올려 억울한 옥사(獄事)를 심리(審理)하도록 청하였다. - 이때 오랜 가뭄으로 인해 빈청(賓廳)에 명하여 각자 생각하는 바를 진술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계(啓)를 올린 것이다. -
13년 을유년(1585, 선조18) - 선생 60세 -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옮겼다.
○ 얼마 뒤에 이조 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옮겨 제수되었으나 여름에 사체(辭遞)하였다.
14년 병술년(1586, 선조19) - 선생 61세 -
봄에 장자(長子) 윤저(允著)를 잃었다.
○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6년 무자년(1588, 선조21) - 선생 63세 -
봄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 선생은 천성이 충직하고 신의가 있으며 공평하고 너그러웠다. 또 자애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여러 번 형조와 사헌부에 들어가 옥사를 다스리고 죄인들을 신문했으나, 매번 관대한 의론을 펴 많은 사람들이 형벌을 감면 받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간혹 처벌을 헤아리기 어려운 죄에 빠지면 비록 미천하거나 취향이 다른 자일지라도 반드시 말하기를 “오직 약포공(藥圃公)만이 나를 살려 줄 것이다.” 하였다. -
○ 10월에 이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었다. - 선생은 세 번이나 이조(吏曹)의 장(長)이 되었다. 이때에 조정의 관리들이 분열되어 각기 문호(門戶)를 세우고 서로 쟁탈하였으나, 선생은 무너지는 물결 속에 의연히 홀로 서서 조금도 치우침 없이 앞뒤의 전주(銓注)를 하나같이 지극히 공평하게 하였으며, 사사로이 찾아오는 것을 배척하고 멀리하여 부정한 길을 막았다. 일찍이 개인적으로 선생에게 벼슬을 청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의 재주는 당연히 천거를 받을 것인데, 어찌하여 나의 집에 발걸음을 하는가?” 하고는 결국 천거해 주지 않았다. -
17년 기축년(1589, 선조22) - 선생 64세 -
9월에 이조 판서에서 체직되었다가 곧바로 병조 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에 제수되었다. - 이때 일본 사신이 와서 조정에서는 보빙(報聘)의 편의(便宜)를 논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의연히 말하기를 “적에게 반역의 단서가 이미 보이니 아침에 사신을 보내고 저녁에 쳐들어온다면 이 강화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했다. 임진년에 이르러 선생의 말처럼 왜적들이 대거 침략하자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
○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들어가 정국(庭鞫)에 참여하였다.
○ 겨울에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어 임시 우의정 직함으로 사명을 받들어 황경(皇京)으로 갔다. - 아들 윤목(允穆)이 배종하였다. -
18년 경인년(1590, 선조23) - 선생 65세 -
2월 1일에 압록강을 건너 4월 그믐에 일을 마치고 황경에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언자(言者)들이 일찍이 최영경(崔永慶)의 동생을 추천하고 의망(擬望)했던 일로 죄를 씌워 파직을 논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 작년 정여립 옥사로 고사(高士) 최영경이 죄 없이 무고(誣告)를 입어 죽었기 때문에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선생이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 최영경의 동생 최여경(崔餘慶)에게 벼슬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파직을 논하였다. -
○ 겨울에 지중추부사에 서용되었다.
○ 예조 판서로 옮겨 제수되었다.
19년 신묘년(1591, 선조24) - 선생 66세 -
7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 지경연 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에 제수되었다.
20년 임진년(1592, 선조25) - 선생 67세 -
4월 임인일(13일)에 왜구가 대거 쳐들어왔다. 기미일(30일)에 어가를 호종해 서쪽으로 피난 갔다. - 당시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 지속되다가 왜구가 갑자기 이르자 조정이 허둥지둥했다.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을 보내어 이일(李鎰)을 계속 지원하여 적을 막도록 하였다. 날마다 승전 소식을 바라다가 패전하였다는 소식이 이르자 도성이 크게 요동쳤고 임금께서 갑작스럽게 도성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선생은 내의 제조(內醫提調)로서 약방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가솔(家率)들의 소재(所在)도 물어보지 못한 채 황급히 어가를 호종하게 되었다. 이날 밤 강가 주막에서 묵었다. -
○ 다음 날 어가를 호종해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렀다. - 3일간 머물렀다. -
○ 병인일(5월 7일)에 어가를 호종해 평양부(平壤府)에 이르러 그대로 머물렀다.
○ 6월 무술일(10일)에 차자를 올려 평양을 굳게 지킬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5월에 신할(申硈)이 패하여 죽고 임진강 방어가 무너져서 적들이 대동강(大同江)까지 밀어닥쳤다. 대가(大駕)가 영변부(寧邊府)를 향하여 출발하려 하자 평양의 군민(軍民)들이 길을 막고서 가지 말고 성을 지킬 것을 원하였다. 선생이 황급히 정원(政院)에 나아가 여러 사람의 뜻에 따라 본부(本府 평양부)에 머물면서 수호할 것을 청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간쟁(諫爭)하였으나 임금께서 따르지 않았다. -
○ 기해일(11일)에 대가(大駕)를 호종해 평양을 떠나 신축일(13일)에 영변부에 도착하였다. - 영변부에 도착하였으나 관리와 백성들이 먼저 무너져 상하(上下)가 진요(震撓)하여 이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분조(分朝)하기로 결의하였다. -
○ 임인일(14일)에 이사(貳師)로서 임금의 명을 받아 동궁(東宮)을 모시고 강계(江界)로 향하였다. - 이때 대가는 의주로 향하였고 왕세자는 영변부를 떠나 강계로 향하였다. 선생이 영의정 최흥원(崔興源)ㆍ판서 이헌국(李憲國)ㆍ참판 심충겸(沈忠謙)ㆍ참판 윤자신(尹自新)ㆍ승지 유희림(柳希霖)과 함께 분조를 호종하라는 명을 받들고 왕세자를 따라 희천(煕川)에 이르니, 우상(右相) 유홍(兪泓)과 우찬성 최황(崔滉)이 뒤따라 도착했다. -
○ 정미일(19일)에 종행(從行)한 재상들과 함께 대조(大朝)에 치계(馳啓)하고 춘천으로 길을 바꿨다. - 당초에 조정 논의가 강계(江界)로 갈 것을 요청한 것은 형편을 보아서 설한령(雪寒嶺)을 넘어 관북(關北)으로 들어가 험한 곳에 의거하여 난을 피하게 하려고 한 것인데, 왜적들이 이미 관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길을 바꾸어 춘천(春川)으로 향하였으니, 우상 유홍(兪泓)이 주장하여 건의한 것이다. -
○ 7월 무진일(11일)에 동궁을 모시고 밤에 이천현(伊川縣)에 도착하였다. - 산골짜기 길이 매우 험한 데다 계절이 장마철이어서 풀밭에서 잠을 자고 빗속에서 밥을 먹는 등 어렵고 고생스러운 것이 수만 가지였다. 선생은 아무리 경황없이 갈팡질팡하는 상황에서도 조급히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마치 치조(治朝)에 서 있는 것 같이 일에 따라 법규를 진계하여 도움 되는 바가 많았다. 이천에 이르러 동쪽 지역에 왜적들의 기세가 매우 거세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진할 수가 없어서 20일 동안 머물렀다. -
○ 기사일(12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동궁 일행이 잠시 이천에 머물면서 적의 기병을 상세히 정탐하고 형세를 살펴 거취를 결정할 상황에 대하여 논하였다. 아울러 “인재를 거두어 쓰는 일은 오직 벼슬과 상훈에 달려 있으나 이와 같이 어지러운 때를 만나서 상훈으로 줄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곡식도 없으며, 벼슬을 주는 일도 행재소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왕복하는 사이에 자칫하면 일의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니, 모두가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형편에 맞게 임의 처리하라는 명에 따라, 제때 응당 보충해야 할 관원을 차출하여 한편으론 일을 맡기고 한편으론 일의 결과를 아뢰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진술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이때 대가는 난을 피해 서쪽 변방에 있어서, 주토(誅討)하고 흥복(興復)하는 책임을 오로지 분조(分朝)에 위임하였으며, 벼슬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도 모두 형편에 맞게 임의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선생은 따르던 재상들과 함께 날마다 빈청(賓廳)에 출사하여 여러 업무들을 재결(裁決)하고 끊임없이 대조(大朝)에 치계(馳啓)하였다. 선생은 침착하고 조용하며 간결하고 과묵하여 임기응변에서 계책의 실수가 없었으니 그 조치하고 건의하는 일도 대부분 선생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
○ 갑술일(17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분조 일행이 험한 산골짜기를 지날 때 따르던 관원들이 흩어지고 낙오되었는데, 이천에 당도하자 난을 피한 조사(朝士)들이 차츰차츰 모여들고 달아나 숨었던 수령들도 점차 관소로 복귀하여 체모가 조금 이루어지고 호령(號令)이 또한 행해졌다. 군세(軍勢)도 점차 떨쳐 일어났으나, 여러 고을들은 왜적들의 분탕질을 겪었기 때문에 분조에 바칠 군량미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각 고을에 이문(移文)을 돌려 보병(步兵)들의 번포(番布)와 공물을 반감(半減)하여 쌀로 바꾸어 분조에 올려 바치게 했다. 또한 가까운 도에 공문을 보내어 알리고, 번군(番軍)을 멈추어 관례에 따라 번을 서도록 하였으며, 해서(海西)는 관서(關西)와 가깝기 때문에 행재소로 기송(起送)하게 하였다. 때문에 장계를 갖추어 치계한 것이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무인일(21일)에 총부(摠府 비변사)에 입직(入直)하였다. - 이때 왜적이 삼면으로 에워싸 핍박하고 있어서 전진할 길이 없었다. 병자일(19일)에 왜적이 이미 곡산(谷山) 땅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선생이 재상들과 동궁에 입대(入對)하고 저녁에는 비변사에서 숙직하였다. -
○ 경진일(23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각 도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어떤 이는 싸우다가 죽고, 어떤 이는 달아나거나 죽어서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살인과 노략질로 공격하고 겁박하였다. 이 때문에 박춘남(朴春男)을 임시로 차출하여 춘천 부사로 삼았고, 성영(成泳)을 여주 목사로 삼았으며,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시켰으며, 변수(邊琇)는 군사를 잃어버려 군율을 실추시켰기 때문에 종군(從軍)하여 전과를 올리게 하였다.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갑신일(27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양사(兩司)가 동궁을 모시고 강계를 버리고 위험한 지역으로 들어가서 앞장서서 주창한 이를 적발하여 죄를 주고자 했기 때문에 장계를 올려 자신을 탄핵하였으니, 장계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널 때는 여러 의견을 널리 수렴하여야 하나 간혹 스스로 계획하여 주창하였으니, 그 죄는 전적으로 신들에게 있습니다. 황공하여 치죄를 기다릴 뿐입니다.” 했다. 또 장계에 말하기를 “황해도는 적에게 함락된 지 이미 오래되어 백성들은 학살을 견딜 수 없어서, 모두 분연히 일어나 적을 토벌하려고 하나, 의지할 만한 장령(將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빈(李薲)을 파견하여 곡산(谷山)ㆍ수안(遂安) 등지로 가서 진무하면서, 한편으로는 해서 지역을 수습하고, 또 한편으로는 서경(西京)의 성원(聲援)에 응접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을유일(28일)에 동궁을 모시고 밤에 풍벽현(風壁峴)을 넘어 성천(成川)으로 향했다. - 왜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떠났으나, 적들이 동쪽 길을 막아 버려서 전진할 수 없었다. 험준하고 막히고 끊어진 길로 돌아서 성천으로 향하는데 일행이 겁에 질려 대다수 변복하여 행색을 속이고 앞설까 뒤처질까를 관망하였다. 선생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우리나라에 복을 내려 주셨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지만, 설령 불행하게 된다 하더라도 어찌 계략으로 모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대부분 자리를 비워 지키는 이가 없었고, 황해도와 강원도의 왜적들이 온 길에 가득 내왕하여, 백성들이 살해와 학대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고양(高陽)ㆍ적성(積城)ㆍ교하(交河)ㆍ양구(楊口) 등의 고을과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우선 임시로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적을 막도록 하자는 뜻으로 장계를 올렸다. 또 논계하기를 “분조가 가는 곳에는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귀부하고 있으며, 조정의 기맥이 여러 도(道)에 널리 통하여 적의 수급을 바치는 자가 날마다 찾아옵니다. 또 각 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회복(恢復)의 희망이 다소 있으니, 이시언(李時言)은 왜적을 만나 적진에 돌입하여 그 선봉의 목을 베어 드높은 명성이 매우 드러나서 모두가 그를 장수로 삼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황해도 방어사로 차정(差定)하였습니다.” 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8월 신묘일(4일)에 동궁을 모시고 비로소 성천부(成川府)에 도착했다. - 3개월간 머물렀다. -
○ 병신일(9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강원도 관찰사 유영길(柳永吉)이 산골짜기로 숨어 책응(策應)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강신(姜紳)을 임시로 차출하여 보냈다. 또 순변사 이일(李鎰)로 하여금 평양으로 전진하여 이빈(李薲)의 군사와 더불어 앞뒤에서 적을 대항하게 하였다. 왜적의 기세가 드세어 곳곳에 수령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임시로 대신할 사람의 성명(姓名)을 개록(開錄)하고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정유일(10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순변사 이일(李鎰)이 강동(江東) 길을 경유하여 곧바로 평양에 도착하여 이빈(李薲)의 군대와 함께 적의 길목을 차단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잠시 머물면서 정세를 관찰한 뒤에 갈 곳을 정하라고 하였는데,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또 말하기를 “안변(安邊)의 유생들을 통해서 관북(關北)의 수령들이 대개 공석이어서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나 왜적을 치고자 하여도 장령(將領)이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덕원 부사(德源府使)와 영흥 판관(永興判官)을 우선 차출하였으며, 마전(麻田)ㆍ연천(漣川) 두 고을의 임시 수령으로는 이형남(李亨男)과 김류(金騮)가 왜적을 방어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임시 차출하였습니다.” 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신축일(14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평양에 있던 적들은 과반수가 북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해서(海西)에 주둔하는 왜적은 또한 많지 않아서 경기도내에 주둔하던 군사를 모아 사방에 진을 구축하였다. 호남(湖南)의 근왕병(勤王兵)들은 형세가 곧바로 적을 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전라병사 최원(崔遠)과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에게 통보하여 그들로 하여금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을 경유하여 해서(海西)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먼저 소탕하고, 중화(中和)를 경유해서 곧바로 평양(平壤)을 치도록 하였는데, 모두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또한 과거를 시행하여 병사를 뽑아 분조(分朝)를 호위할 군졸로 충원하기를 요청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임인일(15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논계하기를 “경성(京城)의 왜적들이 송경(松京)을 왕래하고 관북(關北) 각 고을에도 주둔해 있는 곳이 많습니다. 혹시라도 평양(平壤)에 있는 적들과 서로 모여 합세(合勢)할까 걱정되니 이곳의 왜적을 소탕하는 것은 하루가 위급한 상황입니다.” 했다. 또 진언하기를 “각 관에서 공납(貢納)한 주포(紬布)는 배시(陪侍)한 백관(百官)과 장사(將士)들에게 지급한 것 이외에는 이일(李鎰)과 정희현(鄭希賢) 등의 군대에 나누어 보냈으며, 최근 공을 따져 포상하고 관직을 준 것 및 임시로 임명한 관리의 정목(政目)을 아울러 개록(開錄)하여 올려보냅니다.” 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계묘일(16일)에 동궁을 모시고 장사(將士)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위로하였다.
○ 경술일(23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빈(李薲)과 이일(李鎰)이 평양의 왜적들과 접전(接戰)하여 목을 베고 활을 쏘아 죽인 전과가 많았다. 이일(李鎰)은 정예병을 매복(埋伏)시켜서 무수한 왜적을 죽여 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기 때문에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아울러 진술하기를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이일(李鎰)이 이문(移文)을 잘못 띄운 실수를 가지고 불화를 빚고 있습니다. 이일이 실수를 하였더라도 그 뜻은 오로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다급하게 여긴 것인데, 이로 인해 죄를 얻게 된다면 각처에 있는 장사들이 반드시 모두 맥이 빠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갑진일(17일)에 선릉(宣陵)의 변고를 듣고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날 선릉의 사토(莎土)가 왜적에게 파헤쳐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 오산 도정(烏山都正) 이현(李鉉)과 선전관 이응인(李應仁)을 보내어 사수(射手)를 거느리고 말을 달려 가서 봉심(奉審)하도록 하였다.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
○ 신해일(24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분조(分朝)가 평양과 매우 가깝고 시위군(侍衛軍)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본부(本府)의 관방(關防) 퇴립군(退立軍) 및 상번(上番) 군병(軍兵)으로써 방수(防戍)를 면제하고 호위(護衛)만 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겠다는 뜻을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계축일(26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논하기를 “동궁을 시위하는 장사(將士)들이 대다수 차출되어서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왜적이 가까이 오게 되면 안주(安州)에 있는 대군(大軍)의 후방으로 옮겨 가서 정세(情勢)를 살펴보고서 나아갈지 물러날지 결정할 것입니다.” 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무오일(9월 2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논계하기를 “중국의 장수와 왜적이 서로 맹약하여 표(標)를 세운 뒤에도 왜선 20척이 강을 건너와서 불지르고 약탈하니 왜적의 모략을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했다. 또 진언하기를 “여주 목사 성영(成泳)이 왜적을 만나서 세 번 싸워 세 번 승리하여 참수와 노획이 매우 많았습니다. 장계를 올리면서 적의 수급을 바쳤고, 김신원(金信元)ㆍ이정암(李廷馣)도 또한 왜적의 수급을 바친 일이 있기 때문에 구별해서 논공행상해야 합니다.” 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9월, 신유일(5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왜적이 먼저 중국 장수와의 맹약을 깨뜨렸는데 우리 군사만 홀로 그 약속을 지키다가 앉아서 능멸을 당한 것이 매우 원통하다는 뜻을 논계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임술일(6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분조가 머물고 있는 근처에 오직 정주(定州)와 영변(寧邊)만 조금 완전하여서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편리한 곳을 가려서 옮기고자 하였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용강(龍岡)은 성이 험준하고 군량도 넉넉하며, 또 해서(海西)와 가까우니 적의 세력이 쇠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전세를 살펴 나아가거나 물러납시다.” 하여 논의가 일치되지 않자, 동궁(東宮)이 “한 걸음이라도 물러난다면 민심(民心)이 저상(沮喪)되고 군정(軍情)이 해이되어 왜적의 기세가 점차 치열하게 될 것이니, 이는 군친(君親)을 위하여 화난(禍難)을 구하는 좋은 생각이 되지 못한다.” 하였다. 이에 장계를 올리어, 동궁의 뜻을 따르고 받들어서 잠시 성천(成川)에 머무르면서 적의 형세를 살펴보겠다는 뜻으로 진술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갑자일(8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북도(北道 함경도)로 피난을 갔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동궁에게 품계하여, 선전관(宣傳官) 김극성(金克惺)과 한성령(漢城令) 이녕(李濘)을 파견하여 은량(銀兩)과 주단(紬段)을 가지고 함경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모든 계책을 다 써서 두 군(君)을 구해 오기를 기약하였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면서 아울러 상벌(賞罰)과 권징(勸懲)의 뜻으로 진술하였는데, 모두 4조목이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무진일(12일)에 또 정릉(靖陵)의 변고를 듣고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오산정(烏山正) 등이 돌아와서 “선릉(宣陵) 정자각(丁字閣)은 파괴된 곳이 있고, 정릉(靖陵)은 능위의 봉토가 파헤쳐졌다.”라고 말하기에 곧 오산정으로 하여금 장계를 가지고 행재소로 가도록 하고, 이어서 능침에서 거애(擧哀)하는 예는 우선 보류하고 다만 5일 동안 변복(變服)을 하겠다는 뜻으로 진술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신미일(15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리고, 인하여 비변사에 이문(移文)하여 일의 타당성을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 모두 십여 조목이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임신일(16일)에 동궁을 모시고 황제(皇帝)의 칙서(勅書)와 교서(敎書)를 맞이하였다. - 이때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이 행재소에서 황제의 칙서와 교서를 받들고 왔다. -
○ 정축일(21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인천 부사(仁川府使) 우성전(禹性傳)이 정병(精兵)을 모으니 김천일(金千鎰)이 우성전에 의지하여 경기(京畿)에서 거사(擧事)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행재소에서 우성전을 체직시켜 봉상시 정(奉常寺正)에 제수하였으므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무너져 흩어질 염려가 있을까 두려워 장계를 갖추어 올려 우성전에게 그대로 맡길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천 군수(信川郡守) 이덕남(李德男)이 전사한 후에 병사들이 통령(統領)이 없어서 임시로 이상민(李尙閔)을 차출하여 속히 부임하도록 했습니다. 운운” 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계미일(27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논계하기를 “용강(龍岡)은 성곽이 완전하고 뱃길이 해서로 통하여 동궁이 옮겨가 머물기에 합당합니다. 그리고 동절기가 점차 깊어 가는데 한구석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앉아서 백성의 신망을 잃게 되니, 나아가 수복(收復)하는 계책이 전혀 아닙니다. 동궁을 모시고 용강(龍岡)에 이주해서 적의 성쇠(盛衰)를 살핀 뒤 해서로 방향을 바꾸어 형편에 따라 점진(漸進)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또 진달하기를 “함경남북도의 병사(兵使)가 오랫동안 비었으니, 마땅히 빨리 차출해 보내어 제때 조치하여야 합니다. 강원도 관찰사는 한 번 영동으로 들어간 뒤로는 소식이 끊어졌고, 안협(安峽)ㆍ이천(利川)ㆍ평강(平康)ㆍ철원(鐵原)이 모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일의 형세가 긴급합니다. 그러므로 무력이 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이미 임시로 차출하여 보냈습니다.” 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10월 기축일(3일)에 왕세자를 모시고 교문(敎文)과 인장(印章)을 맞이하였다. - 이때 주상께서 왕세자로 하여금 국사(國事)를 임시로 섭정하게 해서 도승지 유근(柳根)이 교문(敎文)과 인장(印章)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선생이 동궁(東宮)을 모시고 따라온 신료(臣僚)들과 함께 예조의 의식 절차에 의하여 예를 행하였다. -
○ 임진일(6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전란이 일어난 지 오래되어 궤향(饋餉)하는 일이 가장 급했으나 여러 도(道)가 모두 병화(兵禍)를 입었고, 충청ㆍ전라 양도(兩道)만이 조금 온전하고 또 흉년이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계를 올려 해가 바뀌어 곡식이 귀해지기 전에 서둘러 해당 조(曹)에 명하여 곡식을 수합하는 계책을 빨리 마련할 것을 청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무신일(22일)에 여러 재상들과 비변사에서 회의하고 다음 날 동궁을 면대하였다. - 이때 평양에 있던 왜적이 병사를 증강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또 왜적이 북도에 주둔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평양의 적들과 합세할 것을 염려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난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에 모여서 의논하였다. -
○ 경술일(24일)에 왕세자를 모시고 안주(安州) 길로 향하였다. - 북도의 왜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궁을 모시고 황급히 출발하였는데, 눈의 깊이가 한 자이고 큰 바람으로 날씨가 추웠다. 밤이 깊어서야 성천(成川) 땅에 이르렀는데, 끼니를 거의 거를 지경이었다. -
○ 임자일(26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경기도 왜적의 세력이 더욱 거세어서 경기 관찰사 심대(沈岱)가 왜적에게 살해를 당했다. 그러므로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정형(李廷馨)을 임시로 차출하여 그를 대신하여 군사를 통솔하도록 하자는 뜻으로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11월 무오일(2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명나라 장수와 왜적이 50일 안에는 양국 간에 교전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였는데, 약속한 기한도 이미 지났고 군량미도 장차 고갈되어가서 때늦은 후회가 있었다. 그러므로 장계를 올려 장수들로 하여금 작전 계획을 세워 왜적을 토벌하도록 할 것을 청했다. 또 말하기를 “성천(成川)은 왜적 행로를 막아낼 요충지이나 부사(府使) 이제민(李齊閔)이 군사(軍事)를 알지 못하여 주부(主簿) 박진남(朴震男)을 임시 판관으로 삼아서 방수(防守)하고 차단(遮斷)하는 일을 전적으로 위임하였습니다.” 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임술일(6일)에 동궁을 모시고 안주(安州)에 도착하였다.
○ 을축일(9일)에 서애 유상국이 달밤에 내방하였다.
○ 병인일(10일)에 동궁을 모시고 숙천부(肅川府)에서 묵었다. - 안주(安州)에서 영변(寧邊)으로 가려 했으나,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부득이 다시 숙천(肅川)으로 향하였다. -
○ 신미일(15일)에 동궁을 모시고 용강(龍岡)에 도착하여 산성(山城)에서 머물렀다.
○ 을해일(19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분조가 용강에 도착하여 해서로 가려 했으나, 동궁이 가기를 과감히 결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면서 형세를 관망하여 진퇴하려고 했기 때문에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또 말하기를 “조인득(趙仁得)이 해서 방백(海西方伯)에서 갓 체직되어 막 행재소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본도(本道)의 사정을 잘 알기에 동궁께서 해서로 가신다면 서로 논의하여 책응(策應)함에 반드시 유익한 바가 있을 것이므로 우선 그로 하여금 이곳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하였다. -
○ 기묘일(23일)에 아들 윤목(允穆)이 고향에서 근친(覲親)하러 왔다.
○ 을유일(29일)에 도총부(都摠府)에 들어가 숙직하였다.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본현(本縣)은 성터가 높고 험준하여 성을 지키는 사졸들이 얼어 죽고, 성 안쪽이 너무 좁아 군마(軍馬)를 수용하기 어려워서 형세상 오래 머물기 어려우므로, 옮겨서 해주를 향해 떠나고 싶다는 뜻으로 논계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12월 기축일(3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경성(京城)의 백성들이 왜적들에게 박해를 받아서 날마다 관군(官軍)이 오기를 바라며 군기(軍器)를 모으고 갖추어 몰래 내응(內應)할 것을 도모하고, 향병(鄕兵)들이 단결하여 ‘의병(義兵)’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또한 많았기 때문에 장계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또 말하기를 “때가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민심이 적과 친압(親狎)해진다면 길이 들어 서로 빠져들어서 다시는 회복할 희망이 없습니다. 청컨대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기전(畿甸) 군병(軍兵)과 의병들을 독려(督勵)하도록 하소서. 그들을 통솔하여 경성을 향하도록 고무시켜 내외(內外)가 합세한다면 아마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들으니 적이 합병하여 서성(西城)에 전력(專力)하려 한다고 합니다. 만약 경성을 침공하여 뒤흔들어서 그 세력을 분산시킨다면 또한 평양을 공격하는 데도 일조(一助)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을미일(9일)에 아들 윤목(允穆)과 함께 객저(客邸)로 나와 머물면서 치재(致齋)하였다. - 모부인(母夫人)의 기제사가 다음날 있었기 때문이다. -
○ 병신일(10일)에 제사를 지냈다.
○ 정유일(11일)에 동궁에게 차자를 올려 이주할 것을 청하였다. - 이때 강나루가 얼어붙어 배가 통행하지 못하게 되어서 마침내 강화도에 머무르자는 논의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본현의 산성(山城)이 매우 협소하고 그늘을 등지고 있어 추위가 고통스러워서 성곽을 지키는 데 이롭지 않기 때문에 선생이 거듭 차자를 올려 이주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
○ 을사일(19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풍천 부사(豐川府使) 임윤용(任允容)이 파직을 당하여 남억(南嶷)을 임시로 임명하였다. 임윤용은 평소 민심을 얻었고 기계(器械)와 성지(城池)를 잘 수선(修繕)하고 수축(修築)하였으나 갑자기 대체되었다. 남억이 병사에 서툴러 일을 그르치는 실수가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므로 장계를 올려 임윤용을 그대로 유임시킬 것을 청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기유일(23일)에 왕세자께서 영상(領相)과 선생을 인견(引見)하고 영변(寧邊)으로 옮겨 가는 일을 의논하였다.
○ 경술일(24일)에 동궁을 모시고 떠나 을묘일(29일)에 영변부(寧邊府)에 도착하였다. - 그대로 머물면서 과세(過歲)하였다. -
21년 계사년(1593, 선조26) - 선생 68세 -
○ 1월 정사일(2일)에 동궁의 명을 받들어 안주(安州)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의 군영에 나아갔다. 아들 윤목도 따라갔다. 무오일(3일)에 복명하였다. - 제독의 군영에 《문견록(聞見錄)》을 올렸다. -
○ 경신일(5일)에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먼저 동궁의 명을 받들어 안주에서 명나라 장수에게 문안한 일을 진술하고, 계속해서 본부가 성은 넓고 군졸은 적어 방수(防守)가 허술함을 논계하였다. 지사(知事) 신잡(申磼)이 수성장(守城將)으로서 경리(經理)한 지가 여러 날 되었기 때문에 동궁에게 여쭈어 그대로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이 지나가는 곳에 말먹이와 양식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므로 백관(百官)의 짐 싣는 말과 말을 소유한 군사(軍士)들의 말을 모두 뽑아내어 마른 풀을 베어 관리를 차출하여 도원수가 있는 곳에 바치도록 하고, 본부의 콩 천 석도 숙천부(肅川府)로 운반하게 하였는데, 수일 내에 모두 수송을 끝낼 것이라고 했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계해일(8일), 밤에 총부에서 숙직하였다. - 이 제독이 이달 7일에 평양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
○ 갑자일(9일),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당초에 대가(大駕)가 평양을 떠날 때 종묘 각 실(室)의 신주와 영숭전(永崇殿)의 영정(影幀)을 관찰사 송언신(宋言愼)으로 하여금 비밀리 묻어두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평양이 수복되자 선생이 장계를 올려 “파묻은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히 찾아내어 봉안하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또 평양이 수복되었으나 북쪽에 있는 왜적들이 염려스럽고 명나라 장수가 일부 병사를 뽑아 나누어서 북쪽의 왜적을 무찌르려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정병 300명을 뽑아내고 군기 판관(軍器判官) 조신도(趙信道)로 하여금 거느리고 가게 하였으며, 명나라 장수가 행군할 때 응접(應接)하고 공돈(供頓)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청천군(淸川君) 한준(韓準)과 순찰사(巡察使) 홍세공(洪世恭) 등에게 한 길의 군량을 담당ㆍ관리하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진술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무진일(13일),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 이때 명나라 장수가 동궁이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말을 달려가 사례하지 않고 군량도 독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잘못을 질책하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가 평양을 떠나 매우 멀리까지 가서 형편상 뒤따라가기 어려웠다는 내용으로 장계를 올렸다. 또 말하기를 “종묘 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다니는 것이 온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논의가 일치되지 않으므로, 조정에서 지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피난일록〉에 자세히 보인다. -
○ 신미일(16일), 헌관(獻官)으로 차출되어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평양을 수복했음을 고했다.
○ 갑술일(19일), 동궁을 모시고 정주(定州)에서 대가를 맞이하여 배알하였다. 아들 윤목이 따라갔다. - 동행한 재상들 가운데 논의가 같지 않다는 이유로 협조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선생이 〈이동변서(異同辯書)〉를 지어 참판 심충겸(沈忠謙)에게 보였다. 대략적인 내용은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기 때문에 사람이 보는 것도 같지 않다. 진실로 의리가 있다고 여긴다면 이 또한 의리일 따름이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 성현들이 일을 논할 때 의리가 있는 바에 대해서는 각자 소견을 다 말하면서 구차하게 일치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남과 내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지공무아(至公無我)한 도인 것이다. 대가가 서쪽으로 행차하면서 동궁에게 적을 토벌하고 도성을 회복하라는 임무를 맡겼으니, 진실로 모시면서 호위하는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마음과 생각을 다하여 각자 그 생각하는 바를 말해서 가부(可否)를 서로 질정하여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해서 함께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 어찌 의견이 다르고 같음을 불평하겠는가.”이다. -
○ 경진일(25일), 대조(大朝)의 명을 받들어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용천(龍川)의 양책관(良策館)에서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아들 윤목이 따라갔다.
○ 4월 신묘일(7일),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 경략(經略)이 홍초(紅綃) 한 단(段)을 주어 예를 표하였다. -
○ 을미일(11일), 복명하고 대가를 호종하여 안주에 도착하였다.
○ 계묘일(19일), 대가를 호종하여 숙천(肅川)에서 유 총병을 만나 보았다.
○ 5월, 경략 송응창 군영에 사신으로 나아갔다.
○ 차자를 올려 사의(事宜)를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 모두 4조목이다. 문집에 자세히 보인다. -
○ 6월, 어가를 호종하여 해주(海州)로 향했다. 강서(江西)에 도착해서 비 때문에 머물렀다.
○ 8월 임오일(1일), 본직을 띠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ㆍ지경연사(知經筵事)ㆍ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임하였다.
○ 이융(李肜)의 옥사(獄事)에 대해서 논하여 아뢰었다. - 이때 이융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논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나포하여 행조(行朝)에서 국문하기를 청하여서 선생도 논계하였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 옥사는 매우 중요하므로 처리하는 데 마땅히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행조에 나포하여 와도 특별히 그 범죄 내용을 추궁할 수 없고 도리어 제독이 뜻밖에 불신하게 되는 단초를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제독의 군영으로 포박하여 보내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주상께서 ‘내가 아랫사람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이와 같은 변고가 생기게 되었으니 황공하기 그지없다. 삼가 나의 신하 아무개를 보내어 감히 죄인을 군영으로 송치하여 집사께 사과하노라.’라는 말로 전하면 곧 말이 근엄하고 뜻이 정당하여 진실로 체모를 얻게 되고, 주객(主客)이 서로 함께하는 도리와 천자 나라를 존경하는 의리가 그 가운데서 모두 행해지게 될 것이며, 제독 또한 반드시 그 노여움을 풀게 될 것입니다.”였다. 이때에 본부의 행문이첩(行文移牒)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다. -
○ 병신일(15일), 대조(大朝)의 명을 받들어 의주(義州)에 사신으로 나아가 황조(皇朝)의 여러 장관(將官)들을 전별하고 위로하였다. - 이때 삼경(三京)이 이미 회복되어 대가가 되돌아오면서 천조(天朝)의 장관들이 차례로 떠나 되돌아가므로, 선생이 전별연을 베풀어 위로하라는 명을 받아, 8월 신축일(20일)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그들의 행차를 전별하였다.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주선(周旋)하고 응접함에 그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그들의 환심을 얻었는데,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가정(家丁)으로 하여금 선생을 위해서 별소(別所)에서 잔치를 베풀어 특별한 예우를 보였다. -
유생(儒生) 호환(胡煥)에게 편지를 보내어 왜적 정세와 왜적을 제재할 계략에 대해서 논했다. - 호환은 총병(摠兵) 유정(劉綎)의 스승이다. 유정이 이때 남변(南邊)에 머물고 있어 호환이 막부(幕府)로 가서 찾아뵙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이 편지를 보내 왜적의 정세와 왜적을 방어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여 유정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하고자 했는데, 수천 여 글자에 가까웠다. 《용만문견록》에 보인다. -
○ 대가(大駕)가 해주(海州)에서 경사(京師)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 10월,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 명나라 사신 사헌(司憲)이 나와서 임시로 원접사(遠接使)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여 서울로 향했는데 평산부(平山府)에 도착하여 이항복(李恒福)을 만나 임무를 교대했다. 토산(兔山)에 도착하여, 동궁을 따라 남하하라는 명을 의식을 갖추어 받았다.
○ 11월, 도성에 들어가 복명하고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을 진상하였다. - 이때 남은 왜적이 여전히 남변(南邊)을 점거하고 있었다. 선생은 왕사(王事)로 서관(西關) 지역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근심과 울분으로 병이 나서 읊조리는 시편에 대부분 근심하고 애통해하는 뜻이 많았다. 여러 중국 장수들과 왕복하여 논난(論難)한 말을 기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고 복명할 때 이것을 바쳤으니, 대개 이 제독이 평양의 왜적을 물리친 뒤로부터 경략(經略) 이하 대소(大小) 장관들이 우리나라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잇달아 나와서 선생이 양조(兩朝)의 명을 받들어 접대하고 시중들고 음식을 보내어 위로하느라 거의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
○ 다음 날, 동궁의 행차를 뒤따라 전주부(全州府)에 이르러서 그대로 머물면서 과세(過歲)하였다. - 선생은 중도(中途)에서 동궁을 모시고 남하하라는 명을 받들게 되었으므로, 길에서 동궁을 배종하다가 도성으로 들어가 복명하였다. 다음 날 곧장 출발하여 동궁의 행차를 양호(兩湖) 사이에서 따라잡아 윤11월에 비로소 전주(全州)에 도착했다. 좌의정 윤공 두수(尹公斗壽)와 호조 판서 한준(韓準), 지사 이산보(李山甫),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대사성 김공 우옹(金公宇顒) 등이 뒤따랐다. -
22년 갑오년(1594, 선조27) - 선생 69세 -
봄부터 7월까지 동궁을 모시고 전주(全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 3주를 왕래하였다.
○ 동궁에게 품지(稟旨)하여 무사를 교련함에 있어 추위와 더위에도 그만두지 않도록 했다.
○ 홍주(洪州)에 있을 때 장(場)을 열어 기민들을 구휼하였다. - 이때 굶주린 백성들이 경내에 가득하여 무려 천여 명이나 되자 동궁에게 아뢰고 장을 열어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였는데, 선생이 구휼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아 비바람에도 그만두지 않고 날마다 왕래하며 마음을 다해 진휼하여 구제한 결과 보리가 익는 계절〔麥秋〕이 오지 않았음에도 온전히 생존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동궁이 휘지(徽旨)를 내려 말하기를 “이상(貳相)께선 숭반(崇班)의 연로한 분으로서 진휼(賑恤)하는 당상(堂上)의 임무를 맡아 날마다 가서 감독하느라고 수고롭고 편치 못한 일이 반드시 많았을 것이어서 내 심히 우려되노라. 이 뜻을 대신에게 말하여 나이 젊은 재상으로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체되었다. -
○ 8월, 대조의 명을 받들어 공주(公州)에서 동궁을 모시고 서울로 들어와 비로소 비변사에 출사하였다. - 선생이 남쪽에서 서울로 돌아오면서 성곽이 무너지고 풀이 무성한 것을 보고 상심하고 애통해 마지않아 〈한도감사(漢都感事)〉 시 2편을 지었다. -
○ 9월, 사직(社稷)의 옛 단에 봉심(奉審)하고 단자를 써서 입계하였다. - 전란 뒤에 사직단(社稷壇)이 무너졌는데, 이때 선생이 제조(提調)의 직임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봉심(奉審)한 후에 아뢰기를 “조종(祖宗)의 사당이 아직 수리되지 않았는데, 사직단을 먼저 수리하는 것은 때에 맞지 않습니다. 청컨대 먼저 가장 급한 곳을 수리하고 왜란이 평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조종의 사당과 동시에 수리하소서.” 하였다. -
○ 이틀 후에 일을 잘못 처리한 과실을 들어 스스로 탄핵하고, 이어서 새로 제수된 제조 직을 사양하였다. - 선생이 지난가을 용만에 나가 있을 때, 사직서 제조의 직을 사양하였으나, 아직 회답이 내려온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봉심한 뒤에 비로소 이미 전년 겨울에 체직되었음을 알았고, 이조에서 다시 제조로 의망하여 낙점을 받았으나, 선생이 일을 잘못 처리한 과실을 스스로 탄핵하고 아울러 제조 직을 사양했다. -
○ 6명의 동년(同年)과 함께 우거하는 집에서 연방회(蓮榜會)를 열었다. - 선생이 전쟁으로 분주한 나머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서울로 돌아오니, 동년인 이제민 경은(李齊閔景誾)ㆍ윤인함 양숙(尹仁涵養叔)ㆍ이거 중상(李蘧仲尙)ㆍ이민각 지윤(李民覺志尹)ㆍ홍용 자징(洪溶子澄)ㆍ정작 군경(鄭碏君敬) 여섯 사람이 각자 술과 안주를 마련해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고, 마침내 동년회(同年會)를 결성하였다. 각자 시를 지어 왜란 뒤에 만난 기쁨을 기록하였다. 이민각에게 부탁하여 〈동년중회서(同年重會序)〉를 짓게 하고, 선생 또한 시서(詩序)를 남겼다. -
○ 인재 천거에 대해서 아뢰었다. - 이때 주상께서 10개의 조건으로 선비를 취하는 조목을 작성하여 재상들에게 내려 각자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명하여서, 선생이 이에 단자를 써서 입계하였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재주가 있고 지혜로우며 식견이 있고 사려가 깊으며 병법에 밝게 통하여 장수의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이는 곽재우(郭再祐)요, 통솔하는 재주가 있는 이는 김덕령(金德齡)ㆍ권인룡(權仁龍)이요, 난국을 헤쳐 나가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박명현(朴名賢)이요, 학술이 있어 시무를 잘 알며 자애롭고 겸손하고 청렴하고 삼가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으며 재주가 수령을 맡을 수 있는 이는 홍경신(洪慶臣)ㆍ이광윤(李光胤)이요, 학술이 있는 이는 성협(成浹)이요, 시무(時務)를 잘 아는 이는 정기남(鄭基南)이요, 정간(精簡)하며 재략(才略)이 있는 이는 한백겸(韓伯謙)이요, 성품이 온화하고 어진 이는 안숭검(安崇儉)이요,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이 있는 이는 오장(吳長)이요, 배움을 향해 게으르지 않는 이는 최운우(崔雲遇)요, 담략(膽略)이 있고 사령(辭令)에 능하여 외국에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혹 적진을 출입하면서 적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이는 승려 유정(惟政)이요, 집에 있으면서 효제(孝悌)하여 한 고을에 모범이 될 이는 이기옥(李璣玉)ㆍ양극선(梁克選)ㆍ금응훈(琴應壎)이요, 문장이 특이하여 사명(辭命)에 능한 이는 홍춘수(洪春壽)요, 문장에 능하고 고사에 박통한 이는 정경란(丁景蘭)이요, 문사가 정련한 이는 이광윤(李光胤)이요, 문사가 숙련된 이는 홍경신(洪慶臣)이요, 용력이 있고 활을 잘 쏘면서 칼과 창을 잘 다루거나 무거운 것을 지고 잘 달리거나 담력과 기백이 있어 먼저 오르기를 두렵게 여기지 않는 이는 변홍달(卞弘達)이요, 농사짓는 일을 잘 알아 백성들에게 밭을 갈고 씨 뿌리는 일을 권하고 조습(燥濕)의 적절함을 잘 분변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둔전을 잘 짓는 이는 이영도(李詠道)ㆍ성협(成浹)ㆍ안몽열(安夢說)이요, 재산관리를 잘하며 바닷물을 데워 소금을 만들거나 산에 가서 쇠를 만들거나 이쪽을 옮겨 저쪽과 바꾸어 변통하고 무역하여 물품을 판매하여 이익을 늘이는 데 쓰임이 있는 이는 남서(南瑞)요, 산법에 아주 밝아 회계를 잘하여 군량을 알맞게 조절하고 조금도 실수하지 않는 이는 박이직(朴而直)ㆍ정몽헌(鄭夢獻)ㆍ박지인(朴至仁)이요, 성품이 공교하여 창검 제조에 능하고 염초(焰焇)를 구워 만들 줄 알아서 조총ㆍ대포와 소포 그리고 성을 지키는 기계를 만들 수 있는 이는 남서(南瑞)입니다. 신이 그 10개 조목을 가지고 보고 들은 것을 수합하여 위와 같이 나열하고, 각자 인명 아래 주석을 달아 그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밖에 한 가지 재주로 이름을 거론해서는 안 되는 사람도 있는데, 조목에 따라 기록하였기 때문에 중첩하여 기록하는 것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곽재우 등은 모두 통솔하는 재주가 이미 드러나 칭송되고 있으며, 이를테면 김덕령은 대장의 재주가 있어 지금 바야흐로 전진(戰陣)에 쓰고 있으나 하료(下僚)에 침체되어 있으며, 권인룡은 바야흐로 항오(行伍)에 편입되어 있어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각 인명 아래에 개략적으로 그 사람의 대체적인 특징을 들어서 표출하였습니다.” -
○ 왜놈들과 강화하지 말 것을 청하는 상소를 초하였으나 올리지는 않았다. - 당시 조정의 논의에 강화하자는 말이 있었는데, 선생은 끝까지 왜놈들은 간교하게 속여서 믿기 어려우며, 또한 군사를 끼고 위협하니 이는 진실로 협박으로 맹약하는 것이므로 결코 들어주어서는 안 되며,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보아도 전란을 평정할 조짐이 있다고 극론하였다. 상소의 초본이 이미 완성되었지만 화의가 다시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올리지 않았다. -
○ 11월, 경연관으로 입시하여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를 강론하였다. - 왜란이 일어난 뒤부터 경연이 폐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상께서 비로소 경연에 납시었다. 선생은 평소 역학에 뛰어났으므로 특명으로 입시하였다. -
23년 을미년(1595, 선조28) - 선생 70세 -
1월에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기축원옥(己丑冤獄)에 대해 논의하고, 이어서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정언신(鄭彦信) 등의 일을 논의했다. - 이는 진실로 당시에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선생이 능히 그 단서를 들춰내었는데, 뒷날 죄를 밝혀 누명을 씻는 근원이 되었다. -
○ 2월에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곧바로 사은숙배하지 못하다가 15일에야 비로소 사은숙배하였다. 이어서 다섯 번이나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사직서(社稷署)ㆍ내의원(內醫院)ㆍ귀후서 제조(歸厚署提調)의 겸임(兼任)을 허체(許遞)하여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 경연에서 《주역(周易)》 〈몽괘(蒙卦)〉를 진강(進講)하였다. - 강연을 마치고 기축원옥(己丑冤獄)의 누명을 씻어 줄 것을 청하고, 이어서 주상께 아뢰기를 “노수신은 어진 자질을 지니어 주상께서 중임(重任)을 맡겼으나, 하루아침에 인재를 잘못 천거한 일로 연좌되어 배척을 받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하자, 주상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출사하기를 기다렸다가 면전에서 이를 논의하겠다.” 하였다. -
○ 황정욱(黃廷彧) 부자(父子)의 옥사를 다른 대신들과 논의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 이때 양사(兩司)가 황정욱 부자의 옥사를 합계(合啓)하자, 의금부에서 논의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선생이 위관(委官)으로서 회계하여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수합하여 처결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마침내 여러 대신들의 논의에 따라 형벌을 정지하고 유배지로 돌려보냈다. 사간원(司諫院)에서는 황정욱 부자의 형벌을 정지시킨 일로 의금부 당상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
○ 4월에 영의정ㆍ좌의정과 더불어 백관을 거느리고, 동궁이 섭정하도록 한 명을 속히 거두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날 다섯 번 계문을 올리고, 다음 날 세 번 올리고, 또 그다음 날 두 번 올리고 나서야 윤허를 받았다.
○ 두 황씨 옥사로 회계하였다. - 이날 삼성(三省)에서 황혁(黃赫)에게 형벌을 가해야 한다고 번갈아 간쟁(諫爭)하였다. 윤허가 내려진 뒤에 하교하기를 “황정욱(黃廷彧)은 대려훈신(帶礪勳臣)으로서 무덤의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이 되었는데, 형신(刑訊)에 죽는다면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하시니, 선생이 회계하기를 “황정욱은 죄가 무거워 비록 죽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상의 염려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심의하고 훈구 대신을 보전하려는 뜻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대간(臺諫)들이 참여하지 않고 나갔기 때문에 의계(議啓)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 다시 두 황씨의 옥사 때문에 대신들과 논의하여 입계(入啓)하여 윤허를 받았다. - 양사(兩司)가 또 계를 올려서 의금부 당상과 색낭청(色郞廳)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
○ 명을 받들어 이조 판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벽제관(碧蹄館)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 어가를 호종하여 두 명나라 사신이 있는 곳에 가서 잔치를 베풀었다.
○ 어가를 호종하여 남별관(南別館)에서 두 명나라 사신을 만나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 거듭 차자를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이때 양사가 두 황씨의 옥사 때문에 의금부 당상을 (파직시킬 것을) 논하고, 인하여 선생이 위관(委官)으로서 경솔하게 논의한 과실을 언급하자, 선생이 두 번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 또 차자를 올려 사양하니 윤허하였다.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옮겨 제수되었다.
○ 7월에 사은(謝恩)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차자를 올려 치죄를 기다렸다. - 이때 선생은 병환으로 오랫동안 사은숙배하러 가지 못했다가 7월에야 비로소 사은숙배하였다. 이에 사은(謝恩)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차자를 올려 치죄를 기다렸다. 치죄를 기다리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 -
24년 병신년(1596, 선조29) - 선생 71세 -
봄 2월, 석방을 청하는 소로 인해 헌의(獻議)하여 김덕령(金德齡)을 신구(伸救)하였는데, 석방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 4월, 임인일(6일)에 정릉(靖陵 중종의 능)에 봉심하는 일로 헌의(獻議)하였다. - 이때 정릉(靖陵)이 난리를 겪은 뒤라서 의심할 만한 곳을 봉심하고자 대신들과 수의하였는데, 선생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기 때문에 감히 가볍게 논의하여 입계하지 않았다. -
○ 무오일(22일)에 명나라 사신 전위사(餞慰使)로서 벽제관(碧蹄館)에 갔다. 아들 윤목이 따라갔다.
○ 5월 정묘일(1일)에 서애 유 상공이 찾아왔다.
○ 병술일(20일)에 아들 윤목이 고향 영남으로 내려갔다.
○ 갑인일(6월 18일)에 참판 김우옹(金宇顒)이 찾아왔다.
○ 아들 윤위(允偉)가 송라도 찰방(松蘿道察訪)에 제수되었다.
○ 차자를 올려 능행(陵行)을 중지하여서 하늘이 내리는 경계에 근신하기를 청하였다. - 이때 대내(大內) 가까이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는 변고가 있었는데도 장차 능침(陵寢)에 행차하려고 하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천계(天戒)를 삼가고 때가 아니면 거둥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극언하자 마침내 능행(陵行)을 정지하라는 명이 내렸다. 그해 가을에 호서(湖西)의 역적 이몽학(李夢鶴) 등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5월 사이에 능을 배알하러 가는 거둥이 있다는 말을 듣고, 흉도(凶徒)를 나누어 보내어 부거(副車)를 범하려 했습니다.” 했다. 듣던 사람들이 마음이 오싹해지며 모두 선생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
○ 8월에 영돈녕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판중추 윤두수(尹斗壽)와 함께 동궁에게 섭정하도록 한 명을 속히 거두라고 청했는데 비답이 없었다. - 대신들은 그대로 남아 대궐 아래에서 밤을 지새웠다. -
○ 여러 대신과 함께 연일 계를 올려 청했지만 비답이 없었다.
○ 병으로 대궐에 나아가지 못하고 차자만 올렸다. - 대략적인 내용은 “성궁(聖躬)께서 틈을 내어 옥체를 보양(保養)하시는 것이 어찌 신하의 지극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저 왜적들의 정황이 진실로 예측하기 어렵지만 온 나라의 수군(水軍)들 또한 조금이나마 완전하니, 만약 수륙(水陸)으로 함께 나아가서 열흘 내지 달포만 버틴다면, 오랑캐의 소굴에서는 밖으로는 땔나무하고 물 긷는 길이 단절되고 안으로는 식량이 고갈되어 형세가 장차 절로 위축되고 절로 바닥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면려(勉勵)하고 자강(自彊)할 마지막 기회임에도, 주상께서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갑자기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전교하시니, 만약 이 교지가 전파된다면 나라의 인심이 요동칠 뿐만 아니라 장수와 군사들이 맥이 풀릴 것이니, 진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였다. -
○ 계속해서 내선(內禪)의 전교가 있어서 또 차자를 올려 쟁론하였다. - 이때 내선(內禪)한다는 명이 갑자기 내려져 인심이 위기를 느끼자, 선생이 차자를 올려 《대역(大易 주역)》 ‘시(時)’자의 뜻을 인용하여 정사를 그만둘 때가 아니니, 명을 거두라는 뜻으로 극진히 진술하였다. -
○ 기인(其人)의 일로 헌의하였다. - 절검(節儉)을 몸소 행하시어 민막(民瘼)을 구제하자는 뜻을 극언하였다. -
○ 차자를 초하여 김덕령(金德齡)을 신구하자는 논의를 하려 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 이몽학의 옥사에서 나온 초사가 김덕령에게 연루되어서 나포하여 국문하였으나 실제가 아닌 것이 많았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신구하려고 초본을 이미 갖추었으나, 다시 신구에 보탬이 없을 것을 염려해 그만두었다. -
25년 정유년(1597, 선조30) - 선생 72세 -
○ 1월에 차자를 올려 스스로 남쪽 변방으로 가서 인심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이때 왜적이 다시 기승을 부려 호남과 호서지방을 연이어 함락시켜서, 급보가 빗발치듯 답지하니, 선생이 차자를 올려 자신이 스스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정 아무개가 차자를 올려 몸소 양호(兩湖) 지방으로 가서 민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려 하니 나라를 돌보는 정성이 지극합니다. 다만 이원익(李元翼)이 이미 사도(四道)를 체찰하는 임무를 제수 받았으므로, 대신들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것은 일의 체모가 다시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
○ 2월에 다시 차자를 올려 떠나기를 청했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정 아무개가 적의 기세가 위험하고 급박하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다시 차자를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드시 몸소 남방(南方)으로 가서 덕음(德音)을 널리 펴고 인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려 하니, 그가 시국을 걱정하고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지극합니다. 다만 도체찰사가 바야흐로 사도(四道)의 일을 관장하고 있는데, 대신이 또 내려간다면 형세가 편치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 선생은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상수(象數)ㆍ병가(兵家) 등에 널리 통하였고, 팔진(八陣)ㆍ육화(六花) 등의 병법에 더욱 마음을 쏟았다. 왜구들이 재차 침입할 때 선생은 연세가 이미 칠순을 넘었음에도 오히려 용감하게 앞장서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으니 비록 충분(忠憤)이 북받친 바가 있어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기는 하나, 또한 평소에 강구(講究)해 온 가운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
○ 봄에 영국필(寗國弼)이 자문(咨文)을 가지고 온 일로 인해 헌의하였다. - 이때 명나라에서 본국(本國)의 삼경에 순무사를 두고 팔도에 사도(司道)를 설치하고자 영국필을 보내어 자문(咨文)을 보여주었다. 선생이 헌의하여 그것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 3월에 통제사 이순신이 체포되어 추국을 당한 일로 인해 헌의하였다. - 이에 앞서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여러 번 적을 격파했는데,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이를 근심하여 이간질하는 계략을 꾸며 이순신으로 하여금 죄를 얻어 자리에서 떠나가도록 하려 했다. 조정에서 그 말을 믿고 병사를 거느린 채 머뭇거린다고 하여 붙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고 대신들에게 논의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헌의하여 그것이 무고임을 강력히 변론하고, 전공(戰功)과 능력(能力)을 따져 은전을 특별히 베풀어서 그로 하여금 사형을 면하게 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보답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
○ 다시 차자를 올려 구원을 논의하려 했으나, 결국 올리지는 못하였다. - 초본(草本)이 이미 수백 자 작성되었으나, 전의 헌의(獻議)가 입계(入啓)되어 윤허를 받아 특별히 사형을 면해 주라는 명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
○ 여름에 병 때문에 오랫동안 휴가를 얻기 위해 차자를 올려 본직(本職)과 겸임한 제조(提調)를 사퇴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차자를 올려 계책을 결정하여 적을 칠 것을 청하였다. - 이때 천병(天兵)이 다시 출병하자 합세하여 적을 소탕할 기회가 있었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수륙(水陸)으로 병진(幷進)하여 협공하자는 계책을 진술하였다. -
○ 가을에 중궁전(中宮殿)과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수종(隨從)하여 해서(海西)로 향했다가, 신계현(新溪縣)에 도착하여 소명(召命)이 내려와서 동궁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 겨울에 도성에 머물라는 명을 받았다. - 이때 양 경리(楊經理)가 남하하자 임금이 뒤를 따르고 여러 재상들이 호종하였는데, 선생을 임명하여 유도 대신(留都大臣)으로 삼았다. 선생이 마땅히 따라가야 할 조건들을 일일이 적어서 임금에게 아뢰고 인하여 해당 부서에 명하고 아울러 다른 대신들에게 물어 강정(講定)하여 시행할 것을 청했다. 이때 형 군문(邢軍門)이 입경(入京)하여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국왕에게 남하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가(大駕)는 행차를 멈추었고 유도 대신으로 도성에 남으라는 명도 거두었다. -
26년 무술년(1598, 선조31) - 선생 73세 -
○ 11월 〈우회(寓懷)〉 시가 있다. - 이때 서애(西厓) 상공이 논핵(論劾)을 입어 고향으로 내려가서 선생이 5언시 한 수를 지어 회포를 부쳤다. 시에 읊조리기를 “큰 집이 기울어지려 하던 날, 전심하여 한 나무로 지탱시켰지. 홀로 고생한 것은 뭇사람이 잘 알고, 외로운 충정은 주상께서도 아신다네. 오랜 우정 때문에 애가 끊어지고, 새롭게 작별함에 눈물이 하염없네. 어디쯤 눈서리 덮인 길을, 끝없이 홀로 가고 있을까.〔大夏將傾日 專心一木支 獨賢衆人諳 孤忠聖主知 腸因舊好斷 淚爲新別滋 何處氷霜路 迢迢獨去遲〕” 하였다. -
○ 12월에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시와 서문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 국조의 옛 관례(慣例)엔 재신(宰臣)으로 나이 70이 되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이때는 대란을 겪은 뒤여서 기로(耆老)로서 남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직 서교(西郊) 송찬(宋贊) 상공과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 상공이 나이가 모두 80여 세이고 선생 또한 나이가 70이 넘었다.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야외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꽃밭에 앉아 풀을 깔개로 삼고 술잔을 돌리며 즐겼다. 선생은 두 수의 시와 별운(別韻)을 지었으며, 또한 연회가(燕會歌)를 지어서 슬프고도 기쁜 마음을 표현하였다. 여러 재상들이 번갈아 서로 창화하여 그 시를 모아 1권으로 만들고 《수역풍소대성집(壽域風騷大成集)》이라 이름 하였다. 또 《연회화첩(燕會畫帖)》도 남겼다. -
27년 기해년(1599, 선조32) - 선생 74세 -
○ 4월에 동궁을 모시고 수안군(遂安郡)에 가서 중궁전(中宮殿)에 문안했다. 윤4월에 동궁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 고려 대장군 정의(鄭顗)의 사당을 세우는 일로 헌의하였다. - 이에 앞서 주상께서 각도 도호부(都護府)에 명하여 고려 때 공이 있는 장수들을 제사하여 무사(武士)를 격려하게 했다. 성천 부사(成川府使) 정구(鄭逑)가 조정에 아뢰어, 고려 대장군 정의(鄭顗)를 그의 고향에 봉향하고 최춘명(崔春命)을 배향해 달라고 청했다. 선생이 헌의(獻議)하여 그것이 따를 만하다고 말하니, 헌의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
○ 헌의하여 조당(朝堂)에 방을 내걸지 말 것을 청하였다. - 정유년 가을에 왜적이 다시 준동하자,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황급히 피난을 했으며, 조정의 신료 또한 흩어져 달아났다. 조정에서 먼저 나간 자들을 가려내어 방을 내걸고 장차 죄를 주려고 하였는데, 선생이 헌의하여 방을 내걸지 말고 넓은 은전을 보여 주도록 청하였다. 우선 멈추라는 명이 내려졌다. -
○ 차자를 초하여 조보(朝報)의 금지에 대해 논하였다. - 이에 앞서 조보를 금지함이 있었는데, 대신들의 계문으로 인해 일품(一品) 아문(衙門)과 육부(六部) 삼사(三司)가 모두 예전처럼 그대로 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서사(庶司)에서의 금함만 남게 되었다. 선생께서 차자를 올려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을 논하려 했다. 차자의 초고가 이미 작성되었지만, 금령(禁令)이 그쳤다는 말을 듣고서 올리지 않았다. -
○ 9월에 차자를 올려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러 갈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아 그날 떠났다. - 선생이 체직되어 우의정에서 중추부로 옮겨갈 때에 벼슬이 성만(盛滿)함을 매우 두렵게 여겨 이미 물러날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남쪽 변방에는 왜적이 주둔하면서 여전히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떠난다고 고하는 것이 의리에 합당하지 않아 억지로 종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변방의 우려가 점차 안정되어 갔고, 조정에서는 좋지 않은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용퇴(勇退)를 결의했던 것이다. 비록 전례대로 휴가를 청했지만, 실제로는 벼슬에서 물러나 여생을 마칠 계획이었다. 오음(梧陰) 상공 윤두수(尹斗壽)가 한강에서 송별하는 시에 “급류에서 용퇴하니, 고니가 구름 밖으로 날아가네.〔急流勇退 鵠飛雲外〕”라는 시구가 있었고, 선생이 귀향하자 또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대감과 작별한 이후 세상일이 구름처럼 변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견디기 어렵게 합니다. 멀리 떠나가려고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대감의 선견지명은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했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도 작별시를 지어 주었는데 “옷에는 8년 동안 원안(袁安)의 눈물이요, 가슴속의 한 계책 가부(賈傅)의 글이었네. 황각에서의 새로운 사업을 부질없이 그만두고 창주(滄洲)에서 다시 옛 나무꾼과 어부를 찾는구나.〔八年衣上袁安淚 一策胸中賈傅書 黃閣謾拋新事業 滄洲還訪舊樵漁〕”라고 했다. -
○ 10월에 비로소 예천 고향집에 도착하여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여 분황(焚黃)하고서 가묘(家廟)에 제사를 올려 고유했다.
○ 11월에 안동 집에 있었는데, 병으로 기한 안에 상경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유를 갖추어 소를 올려 본직과 겸대한 봉상시 도제조(奉常寺都提調)를 면직하여 달라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12월에 또 소를 올려 병세가 더욱 깊어지고 아울러 낙상(落傷)까지 당하여 상경 길이 가망 없는 상황을 진술하고 인하여 본직과 겸대를 면직하여 달라고 청했다. - 다만 봉상시 도제조에서 체직되었을 뿐이다. -
28년 경자년(1600, 선조33) - 선생 75세 -
2월에 좌의정에 올랐다.
○ 3월에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같은 달 다시 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여 윤허를 받았다. 체직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붙여졌다.
○ 4월에 글을 올려 상황을 진술하고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상소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신은 분수에 넘치게 잘못되게 성은을 입어 외람되게도 정승의 직임을 제수받았습니다. 병 때문에 고향집에 머물면서 부름에 나아가지 못하여 어기고 태만한 죄가 끝이 없으나, 성상께서 관용을 베푸시어 벼슬에서 물러남을 허락하시고는 곧바로 판중추부사 직에 임명하셨습니다. 제 분수를 헤아리건대 도에 넘쳐서 성은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오나 질병이 오래되어 곧 죽게 될 형편에 있습니다. 앞뒤로 내려 주신 성은에 대해 모두 나아가 사례하지 못하고 직함을 띤 채로 고향에 머물려 있으니 죄와 잘못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저의 위급함과 간절함을 굽어살피시어 특명으로 체직시켜 주시고 또한 사직을 허락해 주시어 죽어서 선친의 무덤 곁에 묻히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였다. -
○ 6월 정미일에 의인왕후(懿仁王后)께서 승하(昇遐)하시어 본군(本郡)에 나아가 슬픔을 표하였다. 계축일에 성복(成服)하고, 무진일(7월 27일)에 노병(老病)이 깊어져 조정에 나아가서 곡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글을 올려 죄를 기다렸는데,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 9월에 산릉(山陵)으로 발인(發靷)하는 날이 다가왔기 때문에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풍기군(豐基郡)에 도착하여 희방사 승사에 우거하며 병을 조리하였다. 장계를 올려 스스로를 탄핵하였다. - 돌아오는 길에 영천군(榮川郡영주)에 당도하여, 군수가 술과 과일을 올리려 하자, 선생이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런 때에 술로 예를 차려서는 안 된다.” 했더니, 군수가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
○ 차자를 올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 터를 여러 차례 다시 잡느라 장례를 지연시킨 실책을 논하였다. - 이때 산릉을 임시로 풍양(豐壤)에 정했다가 또 교하(交河)로 바꾸었기 때문에 기한이 넘도록 장례를 지내지 못할 염려가 있었다.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소(疏)를 초하여 술가(術家)를 믿기 어려운 실상과 대례(大禮)에 시기를 넘긴 실책을 강력히 말했다. 소가 이미 올라갔으나,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공이 이미 시기가 지나 말을 해도 무익하다고 하여 입계(入啓)하지 않았다. -
○ 겨울에 서애 유상공이 사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선생은 서애 유상공이 사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아들 윤목(允穆)에게 부친 편지에 “유상공께서 사면되었으니 시사(時事)가 위안이 된다.” 하였다. -
○ 11월에 손자 정시형(鄭時亨)에게 시를 부쳐 학문을 권면하였다. - 시에 이르기를 “구름 속 산사(山寺) 책상 앞에 앉아, 독서에 열중함을 멀리서도 알겠네. 세월이란 무엇보다 아껴야 하니, 한시라도 헛되게 보내지 말거라.〔安榻雲山寺 遙知好讀書 光陰殊可惜 莫謾度居諸〕”했다. 대개 이때 산사(山寺)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
○ 12월에 국상(國喪) 이후로 지방에 있으면서 조정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차자를 올려 스스로 탄핵했는데, 주상께서 너그러운 비답(批答)을 내려 주었다. -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산속에서 쉬면서 세상에 뜻이 없는 것 같았으나, 조정의 득실(得失)을 들을 때면 근심과 기쁨이 문득 얼굴에 나타났다.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성은을 입고도 보답하지 못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나의 자손 가운데 내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알고 내 뜻을 이어갈 자가 있다면 나는 유감이 없겠다.” 했다. 항상 임진왜란 이후에 능침(陵寢)이 모욕을 당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한 것을 쓸쓸하게 여기면서 종신토록 음악을 듣지 않고 잉첩이나 시종도 두지 않았으니 쓸쓸히 한낱 가난한 선비 같았다. -
29년 신축년(1601, 선조34) - 선생 76세 -
○ 1월에 음식을 하사하라는 명이 있자 선생이 전(箋)을 올려 사례하였다. - 주상께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 김신원(金信元)에게 전교하기를 “정탁은 원훈 대신(元勳大臣)으로서 외방에서 퇴로(退老)하고 있으니, 새해에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아울러 음식을 보내라.” 하였다. 이에 김신원이 예천 군수 이춘영(李春英)을 보내어 쌀과 콩 다섯 섬 및 어류 몇 종을 보내와서 선생이 전(箋)을 올려 사례한 것이다. -
본도(本道)에 명하여 호종 공신(扈從功臣) 일품(一品)의 녹봉을 보냈다.
○ 4월에 고평동(高坪洞) 계약문(契約文)이 완성되었다. - 선생은 여씨향약 가운데 오늘날 시행할 만한 것을 채집하여 동민들과 함께 조항마다 과목을 정하고 명분을 정하여 예양(禮讓)을 숭상하고, 충효를 권면하고 신의를 돈독히 하여 상(喪)을 당한 자를 구휼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제했다. 매년 봄가을에는 동회(洞會) 유사(有司)가 좌중(座中) 앞에서 한 차례 강독(講讀)하고, 농사꾼ㆍ장사치ㆍ천민ㆍ노예들에게는 우리말로 번역해서 이해하도록 하였다. 지금까지도 폐지하지 않고 예천 사람들이 향당(鄕堂)에 걸어놓고 준수하고 있다. -
○ 5월 경자일(3일)에 의정공(議政公) 묘소에 가서 성묘하였다.
○ 정사일(20일)에 부체찰사(副體察使) 한공 준겸(韓公浚謙)이 찾아왔다.
○ 6월 계사일(27일)에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일(祥日)이어서 광적암(廣寂庵)에 올라가 상복을 벗었다.
○ 동호(東湖) 언덕 절벽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읍호정(挹湖亭)’이라 이름 붙였다. - 선생이 살던 고평리(高坪里) 집은 들판을 바라보고 물가에 임해 있어 녹야당(綠野堂)과 오교장(午橋莊)과 같은 승경이 있었다. 그 집에 편액하기를 ‘망호재(望湖齋)’라고 했다. 동호의 언덕 위에 초당(草堂)을 얽고, 또 호숫가 언덕 절벽 가파른 곳에 작은 정자를 지어 ‘읍호정(挹湖亭)’이라 했다. 집의 규모가 매우 작고 누추하였지만 그윽한 승경은 참으로 사랑할 만하였다. 물러나 한가롭게 지낸 이후로 소요부(邵堯夫)가 행와(行窩)를 만든 고사를 모방해서 견여(肩輿)를 만들었는데, 그 만든 것이 매우 가볍고 편했다. 두 어린 종에게 메게 하고는 매양 꽃피고 단풍드는 계절이면 마음이 내키는 대로 교외 언덕과 수석(水石) 사이에서 노닐었다. 고향 친구를 만나면 그때마다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면서 흥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농부와 시골 노인네들은 그가 예전에 재상을 지낸 분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 살펴보건대 읍호정을 세운 것은 그 연도가 자세하지 않아 우선 여기에 기록해 둔다. -
30년 임인년(1602, 선조35) - 선생 77세 -
○ 2월 갑자일(1일)에 매당(梅堂) 권욱(權旭)과 함께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 8월 계묘일(14일)에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였다.
○ 9월에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사당에 가서 배알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 배삼외(裴三畏)를 보내어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의 묘소에 치제를 올리게 하였다. - 제문이 있다. -
○ 가을에 외조부모님의 주사(主祀)를 위해 입의(立議)하였다. - 선생의 외조부모는 봉사손(奉祀孫) 한덕유(韓德輶)가 후사 없이 죽었다. 그의 아내 조씨가 임진왜란 때에 신주를 짊어지고 그의 형 집에 숨어 살았는데, 오래지 않아 조씨도 죽었다.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그 유적을 찾아보고서 비로소 그의 신주가 여전히 조씨의 집에 남아 있음을 알고 여러 외손과 함께 합의하여 재물을 내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봉환하여 종모제(從母弟 이종) 남응주(南應周)로 하여금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외가의 토지를 그에게 모두 귀속시켰다. -
○ 11월 신미일(14일)에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공의 부음을 들었다.
○ 12월에 〈옥동서원기(玉洞書院記)〉를 지었다. - 옥동서원(玉洞書院)은 진성현(眞城縣) 북쪽에 있는데 산수가 매우 수려(秀麗)하다. 고을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 퇴계 선생을 봉향하는데 선생에게 기문을 청했다. 옥동서원은 지금의 봉람서원(鳳覽書院)이다. -
31년 계묘년(1603, 선조36) - 선생 78세 -
○ 1월에 본도(本道)에 명하여 세궤(歲饋)로 쌀과 콩, 음식을 보내도록 했다.
○ 계미일(26일)에 정경부인(貞敬夫人) 반씨의 나이가 80에 가까웠기 때문에 쌀과 콩을 하사하라고 명하였으니 특별한 은전이었다.
○ 2월에 유자(柚子) 2매와 감귤 20매를 하사하였다. 4월에 글을 올려 사례하고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 6월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승수(陞授)되었다. 치사(致仕)하라는 명을 들었다. - 검열(檢閱) 정호관(丁好寬)이 와서 교지를 전달했다. -
○ 갑자일(7월 10일)에 본도(本道)에 명하여 월봉(月俸)ㆍ계주(鷄酒)ㆍ건어(乾魚)ㆍ유밀(油蜜)ㆍ백자(栢子잣) 등을 보내오자 전(箋)을 올려 사례하였다.
○ 아들 윤위(允偉)가 장수도 찰방(長水道察訪)에 제수되었다.
○ 8월 정유일(14일)에 의정공(議政公) 묘소에 성묘하러 가다가 비를 만났다. 그래서 그 아래에 신위(神位)를 진설하고 제사를 올렸다. -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매번 사시(四時)의 명절을 맞으면 반드시 몸소 묘소에 올라가 제사 일을 주관했다. 나이가 80이 되자 비로소 다리에 힘이 없어 몸소 갈 수가 없어서 명절이 되면 성묘하러 가지 못함을 슬퍼하였다. -
○ 가은(嘉恩) 용유동(龍游洞)에서 노닐었다. - 선생은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비록 나이가 80에 가까웠어도 그 고상한 취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은(嘉恩)의 쌍룡(雙龍)과 용유(龍游)의 승경을 듣고는 자력으로 한번 가서 수일 동안 두루 구경하였다. 돌아오다가 아차산(阿次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골짜기가 깊고 조용함을 좋아하여 온 가족과 함께 입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글을 지어 기록하였으며, 또한 〈동유록(同游錄)〉을 남겼다. -
○ 12월 정해일(6일)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부음을 들었다.
32년 갑진년(1604, 선조37) - 선생 79세 -
○ 7월에 호종훈(扈從勳) 3등에 녹훈되었다. 충근정량 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의 칭호가 하사되고, 회맹제(會盟祭)에 참석하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 선생은 노병(老病)으로 명을 받들어 갈 수 없다는 뜻을 상소로 진술하였다. 소의 대략적인 내용은 “나라가 다시 회복되어 회맹(會盟)의 길일을 잡았고, 신이 아직까지 죽지 않아서 이러한 경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공훈의 녹권을 더럽혔고 또 부르심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병으로 영남 고장에 체류하면서 축하하는 반열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또한 엎드려 생각하건대, 나라의 운수가 비색(否塞)함을 만나 섬나라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킴에 종묘사직이 파월(播越)을 하고 치욕이 선왕의 능침에까지 미쳤습니다. 신하 된 자로서 마땅히 제 몸을 잊고 적개심으로 복수하며 원수를 갚아야 마땅하지만, 신은 재주가 모자라고 지식이 짧아서 스스로 떨치지 못했사오니, 문책해야 할 죄는 있으되 기록할 만한 공은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풍신수길이 비록 죽었지만 잔당이 여전히 남아서 미친 듯이 허위 공갈을 치고 다녀 상하가 근심하며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나이를 핑계 대고 도성을 떠날 때가 아닌데도 신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지레 고향으로 물러나 마침내 고로(告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죄려(罪戾)가 여기에서 극에 달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특명을 내리시어 훈록(勳錄)에서 저의 이름을 깎아내어 저의 분수를 편안케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였다. -
○ 8월에 공훈의 사양을 불허한다는 비답이 내려왔고, 몸조리를 잘 하여 회맹제(會盟祭)에 참석하라고 명하였는데, 또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다. - 대략적인 내용은 “신은 삼가 성지를 받고 감읍하여 눈물이 뺨에 흘러내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천한 나이가 79세나 되다 보니 노쇠함이 매우 심하여 인사를 전혀 살필 수 없으며, 거기다 지난해부터는 도한(盜汗)을 앓아 원기가 거의 시들어 버렸습니다. 사지(四肢)가 마비되어 거동에 부축을 받아야 하며, 간신히 실낱같은 목숨을 유지하며 조석(朝夕)으로 목숨이 다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성명(聖命)을 받들어 나아가 다시 성상을 뵐 수 없을 것 같습니다.”였다. -
○ 9월에 충훈부(忠勳府)에서 화사(畫師)를 보내어 초상을 그려 갔다.
○ 11월에 화상축(畫像軸)과 교서축(敎書軸)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 12월에 본도 관찰사가 성지를 전하여 알리고 인하여 쌀ㆍ콩ㆍ꿩고기ㆍ술을 보내왔다. - 성지(聖旨)에 “도내(道內) 정탁(鄭琢)은 훈구 대신으로서 고향으로 퇴로하였으니, 세시에 장리(長吏)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이 특별히 쌀ㆍ콩ㆍ술ㆍ고기를 보내라.” 하였다. -
○ 주서(朱書)를 초록(抄錄)하여 《소학연의(小學衍義)》를 지었으나, 미처 책을 이루지 못하였다. - 선생은 경서와 역사서에 있어서 두루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매우 좋아하여 용력(用力)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만년(晩年)에도 여전히 밤에 묵송(默誦)하다가 혹 새벽까지 이르기도 했으며, 《소학》에는 더욱 복응하였다. 일찍이 허노재(許魯齋)의 ‘공경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고, 존경하기를 부모님처럼 하라.’는 말을 들어서 이르기를 “학자가 마땅히 이 책을 공경하고 믿기를 노재(魯齋)와 같이 한다면, 어찌 성현(聖賢)의 지위(地位)에 이르지 못할까를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주자(朱子)께서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장재(張載)ㆍ소옹(邵雍) 제현(諸賢)의 격언을 초록하여 이 책을 만들었는데, 뒤에 이를 계승한 이가 없었던 것이 한스럽다.” 하고는 이에 주자서(朱子書) 가운데 소학(小學)과 관련 있는 내용을 초집(抄輯)하고는 입교(立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의 의미를 넓혀 《소학연의(小學衍義)》를 만들었는데, 미처 책을 완성하지 못했다. -
33년 을사년(1605, 선조38) - 선생 80세 -
○ 1월에 음식을 하사하라는 명이 있자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황감(黃柑) 20매를 하사하시자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 3월에 본도(本道)에 명하여 봉조하(奉朝賀)의 녹봉(祿俸)을 내려 주는데, 글을 올려 극구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5월에 충훈부(忠勳府)에서 명을 받들어 중국산 청단(靑段) 1필과 책력(冊曆) 1건을 반사(頒賜)했다.
○ 9월에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다가 19일에 예천(醴泉) 고평리(高坪里) 집에서 운명했다. 부고(訃告)가 전해지자 주상께서 몹시 슬퍼하시며 3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도 더 후하게 하였다. - 도성의 백성들은 시전을 접고 거리에서 울었다. -
○ 주상께서 승지(承旨)를 보내었고 왕세자가 궁관(宮官)을 보내 조문하였다.
○ 10월 계해일(22일)에 주상께서 예관(禮官) - 좌랑(佐郞) 조정(趙靖) - 을 보내어 치제(致祭)했고, 왕세자가 문학(文學) 유성(柳惺)을 보내 치제했다.
34년 병오년(1606, 선조39)
2월 경신일(21일)에 예천(醴泉) 남면(南面) 위라곡(位羅谷)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터에 장사 지냈다. - 주상께서 귀후서(歸厚署)의 관원에게 명하여 치상(治喪)하도록 했고, 유사에게 명하여 장례 물품을 공급하도록 했으며, 또한 승문원(承文院) 관원을 보내 제주(題主)하도록 했다. -
41년 계축년(1613) - 광해군 5년 -
위성 공신(衛聖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숭정 8년 을해년(1635) - 인조대왕 13년 -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 청백(淸白)하게 절개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 하고, 한결같은 덕으로 게으르지 않은 것을 간(簡)이라 한다.〔淸白守節 一德不懈 曰貞 曰簡〕 -
13년 경진년(1640, 인조18)
사림이 군의 남쪽에 향현사(鄕賢祠)를 세웠다. 9월에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였다. - 문정공(文貞公) 조용(趙庸), 별동(別洞) 윤상(尹祥),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을 함께 배향하였다. -
숙종대왕 26년 경진년(1700)
사림이 읍호정 동쪽 언덕 소요하던 곳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계묘년(1723) 11월에 향현사(鄕賢祠)의 위판을 옮겨 봉안하고, ‘도정서원(道正書院)’이라 일컬었다.
금상(영조) 32년 병자년(1756)
5대손 옥(玉)이 좌승지(左承旨)로서 입시하였을 때 화상(畫像)을 보겠다고 명하고, 어제(御製) 화상찬(畫像讚)을 지어 옥에게 화상찬을 축두(軸頭)에 쓰도록 명했다.
○ 영조의 화상찬은 다음과 같다.
경연 중에 우연히 듣고서 / 筵中偶聞
유상을 가져다 보니 / 取覽遺像
그 화상 참으로 거룩하고 / 厥像偉然
목묘(穆廟 선조)의 명재상이었네 / 穆廟名相
백년이 지난 뒤에 / 百年之後
대궐로 들여와서 / 入于楓宸
특별히 그 명을 써서 / 特題其銘
영남 사람들 격려하노라 / 以聳嶺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