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2) 동정녀 신드롬
동정 지키려 과부로 행세하며 함께 모여 신앙 공동체 형성
- 정순매 바르바라가 동정을 지키고자 신분을 위장해 거짓으로 머리를 올리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나도 아가타 성녀처럼
「사학징의」 속에는 동녀(童女)가 여럿 나온다. 동녀란 동정녀, 즉 신앙을 이유로 순결을 지켜 혼인하지 않는 여성을 말한다. 말하자면 수녀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그녀들은 어째서 동녀의 삶을 선택했을까? 동녀의 신앙적 근거는 어디에서 나왔나?
「사학징의」에 나오는 동녀는 윤운혜의 언니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정광수의 누이동생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 심낙훈의 누이동생 심아기(沈阿只) 바르바라, 이합규의 누이 이득임(李得任), 정분이의 친척 박성염(朴成艶), 조섭의 누이 조도애(趙桃愛) 아나스타시아, 강완숙 집에 살던 김달님(金月任), 강완숙의 딸 홍순희(洪順喜) 루치아, 이어린아기의 딸 김경애(金景愛) 등 얼핏 꼽아도 9명이나 된다.
홍순희의 공초를 보면, “제 어미가 평소에 제게, ‘작은 방에 사학을 잘하는 과부 여성을 불러두었는데, 그 사람들은 정결하기 짝이 없어 어린아이를 꺼리니 일체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강완숙이 안방 안쪽에 있는 협방(挾房)에 주문모 신부를 모셔놓고, 어린 딸이 엿보지 못하게 겁을 주어 다짐을 두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남자를 들여놓고, 딸에게는 사학을 잘하는 과부 여성으로 너무도 정결하니 범접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다. 간접적이나마 동정녀에 대한 강완숙의 평소 생각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위 9명의 동녀 중 윤점혜와 김달님, 홍순희 세 사람이 강완숙의 집에 함께 살고 있었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강완숙이 처녀들을 많이 모아 단단히 교육을 시켰고, 그 일은 집에 와서 살고 있던 동정녀 윤점혜 아가타의 도움을 받았다고 썼다. 윤점혜는 1795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상경했다. 그녀는 윤유일의 사촌 동생이었다. 이후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아예 강완숙의 집으로 들어갔다. 강완숙은 그녀에게 자기 집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처녀들의 신앙 교육을 책임지는 직분을 맡겼다. 윤점혜는 동정 성모의 발현을 보기도 했고, 자신의 수호 성인인 동정 성녀 아가타를 특별히 공경하여, “나도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던 신앙인이었다.
특별히 강완숙이 처녀들의 공동체를 실천에 옮기려고 윤점혜에게 역할을 부여한 것은 어찌 보면 조선 최초의 수녀원을 구상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들에게 교리교육의 책임뿐 아니라 정결한 몸을 지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추수의 일꾼으로 양성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그 배경에는 주문모 신부의 지도가 있었다.
동정녀 열풍의 진원
조선 교회에서 동정녀 열풍이 일어난 데는 무엇보다 「성년광익」에 실린 성인전의 영향이 가장 컸고, 여기에 더해 「칠극」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칠극」 권 6 「방음(坊淫)」을 보면, 동정을 지키는 일에 대한 예찬이 이어진다. [6.36]에서 성 암브로스는 “혼인한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고, 동정의 몸은 천당에 가득하다(婚姻滿世界, 童身滿天堂)”고 설명했다. 솔로몬은 “천주께서 세상에 강생하셔서 동정의 몸을 지니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자신도 또 동정의 몸을 지켰고, 또 정결한 덕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시자, 정결의 덕이 비로소 세상에 일어났다”고 했다. 동정을 지키는 일은 이렇게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일과 같게 되었다. “천주의 거룩한 가르침을 높여 따르는 곳에는 동정의 몸을 지키는 남녀가 마침내 많이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정결의 덕을 목숨보다도 중하게 보았다”고도 했다.
[6.38]에는 “정결한 사람은 반드시 본성을 이기고, 세속을 범하며, 삿된 마귀와 대적해야만 정결의 덕이 이루어진다”고 했고, [6.40]에는 “정결의 덕은 신체의 수명을 늘려주고 육신의 강함을 지켜줄 뿐 아니라, 죽은 몸이 향기로워 썩지 않게 해준다”고 적었다.
[6.43]에는 동정 부부의 얘기가 나온다. 성녀 체칠리아가 동정을 지키기로 맹세했는데, 부모의 강제적 명령에 따라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 첫날밤에 그녀의 발원에 의해 남편에게 천사가 나타나 정결한 사람을 보호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남편이 놀라 정결을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천사가 기묘한 꽃으로 관을 만들어 씌워주니, 1년 내내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고 색도 마르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만이 그 향기를 맡고 꽃을 볼 수가 있었다.
[6.8]에 실린 요한의 일화도 인상적이다. 그는 마귀를 복종시키는 능력이 있었으나, 어떤 사람에게 씌인 마귀는 너무도 강력해서 요한의 명령이 소용없었다. 얼마 뒤 한 소년이 왔는데, 마귀가 그를 보더니 그만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요한이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니, 소년은 천주를 섬기기 위해 정욕을 끊고 동정의 몸을 간직했고, 혼인 첫날밤에 신부와 함께 뜻을 같이하기로 맹세하여 10여 년간 함께 살며 서로를 형제같이 보아 더러운 행실을 짓지 않았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두 이야기가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또 이 동정 부부의 결합에 주문모 신부가 깊이 관여한 점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여기에 최필제 베드로 부부와, 후대이지만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데레사 부부도 있다. 조선 교회에 불어닥친 동정 열풍은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온 이후의 일로 보인다. 그것은 남자가 아닌 여성 신자들에게서 더 크게 일어났다.
처녀들의 과부 행세
「사학징의」 속 윤점혜의 형추문목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남에게 시집가지 않고 과부라 일컬은 것은 사학하는 여자들이 으레 이같은 버릇이 많다. 큰길을 떠돌다가 남의 집에 붙어사니, 처녀가 아니고 과부가 아니라면 어떤 꼴이 되었겠느냐? 부부가 한집에 사는 것은 사람의 큰 윤리이거늘, 일개 젊은 여자로 이러한 풍속을 해치고 어그러뜨리는 행동을 하는 것은 틀림없이 시집가지 않아도 시집가는 것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어찌 천지의 사이에 용납되겠는가?”
묘한 얘기다. 시집가지 않아도 시집가는 것과 같은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앞서 나온 9명의 동정녀 중에는 윤점혜 외에도 과부 행세를 한 처녀가 여럿 있었다. 여주의 정순매 바르바라는 허가의 처로 과부 행세를 했지만, 형조의 공초에서는 “나이가 올해 25세로 여태 출가한 일이 없다”고 했고, “동정을 지키기 위해 나이가 찼는데 시집가지 않았고, 거짓으로 허가의 처라고 일컬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합규의 누이동생 이득임과 조섭의 누이 조도애 아나스타시아, 김경애 또한 거짓으로 과부라고 일컬었던 경우에 해당한다. 공교롭게 김경애도 정순매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허가의 처라고 했는데, 형조의 문목 중에 “허서방의 처라고 한 것은 그런 사람이 없다는 말”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허(許)는 허(虛)의 뜻으로 끌어다 쓴 성씨가 아니냐는 추궁이다. 아무튼 이러한 과부 행세는 과년한 처녀들이 자신의 동정을 지켜나가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칠극」[6.32]에는 정결의 세 단계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하등은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가 절도를 넘지 않고 욕망을 끊는 정결이다. 중등은 홀아비와 과부가 배우자가 세상을 뜬 뒤 다시 결혼하지 않고 욕망을 끊는 것이다. 상등은 동정의 몸을 지키는 정결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기 전에 결혼했다가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을 때, 주변의 눈길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 신앙을 지켜가기 위해 과부들은 과부들끼리 모여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사학징의」 속 비녀 복점의 공초에는 “남대문 내창(內倉) 앞 손만호의 집 또한 여러 곳의 과부 7, 8명이 간간이 함께 모여 사서의 이야기를 강습”하였다고 했다. 7, 8명의 과부가 모여 규칙적으로 교리 공부 모임을 가졌다는 내용이다.
김희인(金喜仁)의 공초에도 청상과부 여러 명이 한방에 모여 지내며 사학에 깊이 빠졌고, 사서와 요화 또한 많은 양이 압수된 사연이 나온다. 김희인은 자신이 150냥을 마련하고, 김경애가 50냥을 보태서 군기시(軍器寺) 앞의 집 한 채를 사서, 시숙모 이흥임과 김흥년, 그리고 김경애와 그녀의 모친 이어린아기와 함께 지냈다고 자백했다.
「사서요화사서기」에 실린 김희인의 집에서 압수된 서목은 「묵샹디쟝셔(默想指掌書)」 3책, 「셩모ᄆᆡ괴경(聖母玫瑰經)」 1책, 「녀슈셩탄(耶蘇聖誕)」 1책, 「녀슈수란도문(耶蘇受難禱文)」 1책, 「셩경광익(聖經廣益)」 1책, 「공경일과(恭敬日課)」 1책, 「이에왕호심(?)」 1책, 「요리문답(要理問答)」 1책, 「셩녀 아ᄭᅡ다(聖女 아가다)」 1책, 「셩여수셩호(聖耶蘇聖號)」 1책, 「셩부마리아(聖婦 마리아)」 1책, 「셩톄문답(聖體問答)」 1책, 「텬쥬셩교도문(天主聖敎禱文)」 1책, 「언교(諺敎)」 1책, 「셩교일과(聖敎日課)」 1책, 「유시마리가(?)」 1책 등 16종 18책에 달했고, 낱장에 베껴 쓴 것만 456장에다 한글로 베껴 쓴 문건이 134건에 달했다.
이밖에 요화 족자 3개가 있었고, 그중 하나는 여상(女像)이라 한 것으로 보아 성모 마리아를 그린 족자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석으로 만든 납요상(鑞妖像)과 나무 십자가, 자주색 휘장까지 나왔는데, 이 물건들은 그녀들의 그 공간에서 미사 첨례를 드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같은 동정녀 모임과 과부 공동체의 형성은 당시 천주교의 교세가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신앙 형태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모색과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3) 기억의 착종과 기록의 사각지대
판결 전 고문으로 죽임 당한 순교자, 「사학징의」 명단에서 누락
-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신미년백서」. 가톨릭평화신문 DB.
「사학징의」에 누락된 「신미년백서」 속 순교자
스쳐 가는 기록 속에 보석이 박혀 있는 수가 있다. 한쪽에서 지워져 말소된 정보가 다른 기록을 통해 보정되기도 한다. 기록의 교차 검토가 반드시 필요한 까닭이다. 반대로 상이한 내용을 담은 두 가지 정보로 인해 실상 파악에 혼선이 빚어질 때도 있다. 특히 세례명의 경우 이같은 착종이 비교적 심하다. 본인의 기술과 뒷 시기 제3자의 기록이 엇갈릴 때는 본인의 진술을 따르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 중국의 세례명과 조선식 세례명이 엇갈릴 때는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인다. 어쨌거나 조각조각의 퍼즐이 하나둘 모이면, 좀체 가늠할 수 없었던 전체상이 언뜻 드러난다.
1811년 11월 3일, 북경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 이른바 「신미년백서」에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능지처참에 처해지거나, 매 맞다 죽고 교수형에 처해져 죽은 사람의 수가 1백 수십 명에 달한다고 쓰고, 그들 중 살았을 때 공적이 탁월했고, 박해 당시 시종일관 굳세고 바른 자세를 견지해, 여러 성인 전기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조금도 없는 순교자 43명을 꼽았다. 앞쪽에 주문모, 강완숙, 윤점혜, 이순이, 정약종, 최필공, 황사영 등 7명의 자세한 행적이 있으니, 모두 50명의 행적을 실은 셈이다.
그런데 이 사형 죄인 명단 중에 공식 기록을 정리한 「사학징의」에 안 나오는 몇몇 이름이 있다. 조상덕(趙尙德), 마필세(馬必世), 신약봉(申若奉), 이명불(李明黻), 장재유(張在裕), 동정녀 이석혜(李碩惠)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이름은 어째서 「사학징의」 속 사형 죄인의 명단에서 누락되었을까? 이들 중 마필세, 신약봉 두 사람은 달리 교차되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나머지 조상덕과 이석혜, 장재유, 이명불 네 사람은 추정할만한 단서가 있어 이 글에서 찾아 살펴보겠다.
조동섬의 아들 조상덕 토마스
먼저 조상덕(趙尙德, 토마스, 1762~1801)은 양근 사람 조동섬(趙東暹, 1739∼1830)의 아들이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서는 조 토마스로만 나온다. 「한양조씨족」을 통해 그의 이름이 조상덕임이 확인된다. 「신미년백서」는 조상덕의 실명을 신유박해 순교자 명단에 올린 최초의 기록이다.
아버지 조동섬은 권일신의 가까운 벗이었다. 1801년 2월 11일에 양근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어 정약종과 대질 심문을 하고, 2월 27일 함경도 무산 땅으로 유배 갔다. 아들은 63세 난 늙은 아비의 건강이 염려되어 무산까지 따라갔고, 고문으로 중병이 든 아비를 봉양하며 지냈다.
당시 양근 군수 정주성(鄭周誠)은 양근 지역 서학 신자를 박멸하기 위해 작정하고 부임한 사람이었다. 권철신 집안을 때려잡으려는 과정에서 조상겸(趙尙兼, 1736∼1801)을 비롯해 관련자 50여 명이 죽거나 유배 갔다. 개인적인 원한까지 있었던 조동섬이 의금부에 의해 목숨을 건져 무산 유배에 그치자, 그는 1801년 8월 양근 포졸을 무산까지 보내 그 아들 조상덕을 붙잡아 오게 했다.
양근으로 끌려가게 된 아들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어찌 하려느냐?” 부자는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대답했다. “예, 한발 한발 주님의 십자가만을 따라가겠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잘 가거라. 후회 없이 보내마.”
이후 그는 양근 관아에서 두 달 동안 날마다 매질과 고문을 당했다. 잔혹한 고문 끝에 그는 1801년 10월 초에 3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죽었다. 그의 순교가 공식 기록에서 누락된 것은 지방 관아에서 벌어진 고문이었고, 판결이 나기 전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미년백서」는 그를 신유박해 당시 대표 순교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했고, 「사학징의」의 기록에서는 누락되었다. 달레는 그를 조 토마스로만 적었는데, 이후 족보의 기록에 따라 「신미년백서」 속 조상덕이 바로 조동섬의 아들 조 토마스였음이 확인된 경우다.
동정녀 이석혜는 이 아가타?
동정녀 이석혜는 따로 알려진 행적이 없다. 그런데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오는 동정녀 이 아가타와 겹쳐진다. 이 아가타는 양근 인근 이동지(李同知)의 딸로, 신앙을 지켜 동정의 삶을 살 결심을 했다. 집안 친척인 양근 동막골의 향반(鄕班) 유한숙(兪汗淑)의 도움을 받아, 서울 윤점혜 아가타에게 간 그녀는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녀의 삶과 죽음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달레는 “이 아가타에 대한 기억이 오늘까지도 그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의 특별한 찬양을 받고 있다”고 썼다.
동정녀이고 이씨이며, 윤점혜 아가타와 함께 생활한 널리 알려진 동정녀는 「신미년백서」에서 적고 있는 이석혜 외에는 달리 없다. 달레의 기록 속 이 아가타는 이석혜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달레는 “가장 믿을 만한 전설에 의하면 1801년 4월에 양근에서 순교한 천주교인의 수는 모두 13명이었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이름은 지금은 모두가 잊혀졌지만 교우들은 그들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고 썼다. 관변 기록에는 7명의 이름만 있는데, 나머지 6명 중에 앞서 본 조상덕과 이석혜 아가타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지방민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사학 죄인을 출신지로 내려보내 그곳에서 처형하는 정책을 취했다. 양근의 기록에서 사망자 명단이 누락된 것은 결안(結案), 즉 선고 공판 이전에 이들이 고문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하버드 옌칭도서관 소장 백가보에 실린 연안이씨 족보 중 이명불과 이명호가 나란히 실린 대목. 이명불의 직계 또한 말소된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천주교 신자였던듯 하다.
이명불과 이명호
이명불(李明黻)과 이명호(李明鎬)는 기록상 착종이 심한 경우다. 이명호와 이명불은 모두 이정운(李鼎運, 1743~1800)의 아들이다. 셋째 아우 이익운(李益運, 1748~1817)이 아들이 없자 큰형의 아들 이명호를 입양해 대를 이었다. 그런데 이명호는 자주 이명불이란 이름과 뒤섞인다. 이명불은 족보에 이정운의 장자로 나온다. 이명불과 이명호가 동일인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장남의 장자를 3남에게 입양할 수 있느냐는 데서 막힌다. 두 사람이 혼동된 이유는 이제 와서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족보상으로 보면 이익운에게 양자로 들어온 아들은 이명불이 아닌 이명호(李明鎬, ?~1801)가 맞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송담유록」과 「눌암기략」과 「신미년백서」는 모두 이명호가 아닌 이명불로 적고 있다. 게다가 족보에서 이명불의 후대가 끊겼고, 일체의 기록이 말소된 점도 의아하다. 교회사 쪽의 기록에는 이명호 요한으로 나오고, 1801년 10월 26일 순조실록 기사에도 이명호로 나온다.
「송담유록」의 기록은 이렇다. “이익운이 입양한 아들 이명불(李明黻)(아명은 개불(介不)이다)이란 자는 어려서부터 서학을 배웠다. 사람들은 이익운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에서 배웠다고 하였다.”
이 기록 속의 이명불은 이명호에 관한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기록상 착종이 일어난 셈이다. 이명호는 본관이 연안(延安)이고, 이정운의 아들인데, 숙부인 이익운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1795년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했고, 격한 성격을 고치고 예수와 성인의 모범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이익운이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이명호가 듣지 않자 강제로 독약을 먹여서 죽게 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장재유는 장덕유?
「신미년백서」 속의 장재유는 따로 기록이 안 나온다. 다만 그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장덕유(張德裕)가 「사학징의」에 나온다. 이름을 두 가지로 썼거나, 「신미년백서」 기록자의 잘못된 기억에 의한 착오로 보인다.
장덕유는 총모장(驄帽匠)으로 남대문 밖 이문동(里門洞)에 살았다. 황사영과 연루된 인물로 조사받았다. 그는 황사영을 도피시킨 김한빈과의 인연으로 끌려가서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예수는 개 돼지라고 입으로 말하여 맹세의 말로 삼아, 이제부터 이후로는 바른길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공초를 바쳤으나, 황사영의 종적을 찾는 데 혈안이 된 형조의 고문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끝에 가서, 살기를 꾀해 마음에 없는 공초를 바쳤다 하고, 주문모, 정약종과 사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면서 “앞선 공초에서 예수를 욕하여 욕보였으니, 이는 교주를 배반한 죄여서 후회 하나 미치지 못합니다. 속히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신앙을 증거하다 용감하게 죽었다.나머지 두 사람 마필세와 신약봉에 관한 흔적은 끝내 찾을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짐작건대 양근 관아로 끌려가 죽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6명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례명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윤운혜는 「사학징의」에는 누재(樓哉) 즉 루치아라 했는데, 「신미년백서」에는 마이대(瑪爾大), 즉 마르타로 나오고, 19세에 동정녀로 순교한 심아기는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세례명이 바르바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의닉사(依搦斯) 즉 아녜스로 되어 있다. 윤운혜의 경우 본인의 진술인 루치아가 맞겠고, 심아기의 경우는 시기상으로 아녜스 쪽에 신뢰가 간다. 한편 「신미년백서」에서 정순매 발발아(發發阿)를 중국식 표기에 맞춰 파이발랄(巴爾拔辣)로, 정복혜 간지대(干之臺)를 감제대(甘第大)로 적은 것이 눈길을 끈다. 그 밖의 모든 세례명도 중국에 보고하는 글에는 모두 조선식 표기가 아닌, 원표기에 준하였다. 표기의 상이한 체계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는 뜻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4)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상지진(水上池盡)’론
이승훈의 ‘月落在天 水上池盡’, 출처 모호하고 전승 경위 불투명
-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에서 1988년 펴낸 오기선 신부의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 하권 307쪽에 실린 ‘한국종교인열전’의 제15화 「황사영」①의 삽화에는 이승훈의 사세시가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지지진(水止池盡)’이라 적혀 있다.
달은 져도 하늘에 있지만
이승훈의 사세시(辭世詩)는 1801년 2월 27일 서소문 형장에서 목이 잘리기 직전 자신의 심회를 토로했다는 두 구절,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상지진(水上池盡).” 여덟 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도 초기 교회사에서 이승훈의 호교(護敎)의 증거로 자주 회자되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두 구절은 전승 과정이 모호하고, 어떤 문헌적 근거도 없이 1960년대에 갑자기 돌출한 증언에 의한 것이어서 검토가 필요하다. 더욱이 중간 전승 과정에서 글자가 뒤바뀌기까지 했다. 이 글에서 살펴보겠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초기 교회사가인 주재용 신부는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의 101쪽에서 “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그저 있고, 물은 비록 치솟아도(증발해서) 그 못 속에 온전하다”로 풀이했다. 또 변기영 몬시뇰은 2004년에 펴낸 「한민족 조선천주교회창립사」(2004,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의 59쪽에서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아올라도 못 속에서 다할 뿐이다”로 풀었다.
두 해석이 같지 않고, 문맥도 어색하다. 물이 어떻게 하늘로 치솟는가? 또 물이 치솟았는데 어떻게 못 속에 온전할 수가 있는가? 물이 솟아올라도 못 속에서 다한다는 말은 또 무슨 얘기인가? 설명이 모두 요령부득이어서 가리키는 의미가 선명치 않다. 달이야 진다 해도 물이 중력을 무시하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는 수는 없다. 또 물이 솟아올라도 결국은 연못에 다시 떨어지고 만다니 연못 물이 무슨 분수라도 된단 말인가?
첫 구와 둘째 구는 대등 병렬 구문으로 보면 안 된다. 달은 비록 져도 땅이 아닌 하늘에 있다. 하지만 물이 증발하고 나면 못은 말라버리고 만다. 이렇게 밀고 당기는 구절로 풀이해야 맥락이 생긴다. 두 구절에 대한 내 해석은 이렇다.
달은 져도 하늘에 있지만
물 오르자 못은 다 말랐네.
月落在天 水上池盡
그래도 물이 오른다는 말 때문에 의미가 여전히 석연치 않다. 이 두 구절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나온 말인가? 최초의 기록자는 누구인가? 주재용 신부는 앞글에서 1965년 11월 4일 이승훈의 묘소를 참배하러 갔을 때 직접 들은 말이라며, “달이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그저 있음 같이, 남이 비록 나를 아무리 떨어졌다(배교) 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저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못 위를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 같이 내 목숨을 아무리 앗아가도(죽여도) 내 신앙은 내 속에 변함없이 온전하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변기영 몬시뇰은 1980년 9월 30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달은 떨어져도」란 글에서 “이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사형장에서 순교자 이승훈 선생께서 칼 아래 목을 늘이며 읊은 명시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던 것이 「한민족 조선천주교회창립사」에서는 이 두 구절을 “이승훈 선생이 서소문 형장에서 칼을 받기 직전에 동생 이치훈이 따라가서,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답니다’ 하며 소맷자락을 잡고 애원하였으나, 이승훈 선생은 동생의 손을 뿌리치며, ‘무슨 소리냐! 월락재천 수상지진이니라’ 하시고, 칼을 받고 참수되셨다는 것이다”라는 소설적 부연을 추가했다. 그러면서 이 두 구절이 이승훈의 6세 종손 이병규 옹이 주재용 신부와 오기선 신부, 류홍렬 박사 및 자신에게 직접 전해준 이야기라고 적었다.
이어 변 몬시뇰은 “여기서 월락재천, 즉,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은 이승훈 선생께서 자신의 천주교 신앙은 칼로 목을 자른다고 해도 변함없이 항상 천주께 가 있다는 뜻이며, 또 수상지진이라는 말은, 지금 당장 칼을 휘두르는 세도가들이 득세를 하며 박해를 하지만, 마치 못 속의 물처럼, 물이 아무리 치솟아도 연못 속에 가라앉듯이, 혹은 물이 위로 증발하거나 상류로 역류하고 나면 연못은 끝나고 말 듯이, 박해자들의 세력과 칼날은 지상에서 끝난다는 뜻이다”라고 풀이를 단 뒤, 확고하고 진솔한 신앙인만 읊을 수 있는 거룩하고 용감한 순교자의 시라고 극찬했다.
물이 그치면 연못은 마른다
한편, 1988년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에서 펴낸 오기선 신부의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란 상하권 2책에도 이 시와 관련된 언급이 있다. 그런데 같이 이 말을 전해 들었다는 오기선 신부의 기록은 이와 조금 다르다. 하권 307쪽에 실린 ‘한국종교인열전’의 제15화 「황사영」①의 삽화에 위 구절이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지지진(水止池盡)’으로 달리 적혀 있는 것이다. 본문에도 “1801년 4월 8일 칼 아래 한 점 이슬로 사라져가면서도 이승훈 같은 이는 ‘월락재천, 수지지진’, ‘달이 지매 하늘가에 지고, 물이 떨어져도 연못가에 잦아진다’는 유명한 시 한 수를 읊고 장엄한 순교자로 승화하여 갔다”고 썼다. 그런데 ‘수상(水上)’이 아닌 ‘수지(水止)’라 했다. 물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표현이 영 걸렸는데, 이렇게 고쳐 읽으니, ‘물이 그치면 연못은 다 한다’, 즉 못에 새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연못은 말라버리고 만다는 뜻이 되어 의미가 선명하고 석연해졌다.
- 1968년 11월에 발표된 <사제생활 반생기>에 수록된 이승훈 묘소 사진.
또 상권 306쪽의 ‘사제생활 반생기’ 중에도 「한국의 첫 교우 이승훈씨 묘를 가다」(1968. 11)란 비교적 장문의 글이 보인다. 1967년 8월 29일 처음 이승훈의 묘를 방문한 뒤, 1968년 10월 24일 비석 제막식을 거행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글이다. 이 글 속에 부천군 남동면 만수리에 살다가 그곳에서 별세한 이신구 말구(마르코)라는 노인이, 이승훈과 절친한 친구였던 자신의 증조부와 조부에게서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라면서 들려준 전언이 실려있다.
형장에서도 배교를 권하였지만 이승훈은 꿈쩍하지 않고 천주를 위해 죽겠다고 했다.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묻자, 이때 이승훈이 바로 이 두 구절을 읊고 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이승훈의 6대손인 이병규씨에게 들려준다고 했다는 전언이다. 이어, “월낙재천(月落在天)이요 수지지진(水止池盡)이라 (달이 져도 하늘가에 지고, 물이 떨어져도 연못 속에 잦아진다) 하였지. 그건 그분의 최후의 각오는 내가 죽어도 천주님께로 간다는 뜻이었지. 배교니 뭐니 치명자 아니라니 하는 건 다 모르는 소리야. 내 증조부는 그하고 친구 간이고 당신 두 눈으로 보고 그 시의 구절을 듣고 내게 수백 수천 번 들려주신 걸. 내 조부도 똑같은 말을 하신 걸”이라고 썼다.
정리하면 이렇다. 사세시의 전언은 1960년대 초, 이신구 마르코에게서 처음 나왔다. 이 말이 오기선 신부와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 씨에게 전달되었다. 최초 전언 당시는 분명히 ‘수상(水上)’이 아닌 ‘수지(水止)’였다. 이것이 1965년 주재용 신부가 이승훈의 묘지를 방문했을 때는 이병규 옹이 ‘수상’으로 바꿔 전했고, 이후 이승훈의 묘가 1980년대 인천에서 천진암 성지로 이장할 즈음해서는 목격자 또한 전주 이씨가 아닌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으로 한 차례 더 윤색되었다. 실제로 ‘상(上)’과 ‘지(止)’는 단지 한 획의 차이다.
‘수지’가 ‘수상’으로 바뀐 것은 이병규 옹의 기억 혼란 탓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1984년에 간행된 「평창이씨세보」에는 “해는 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말라도 땅에 있다(日落在天, 水盡在地)”로 다시 바꿔놓아, 도무지 앞뒤 없는 글이 되고 말았다. 변기영 몬시뇰의 글을 보고 문맥이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자기들 생각으로 한번 더 고친 것이다.
사세시의 사료 가치
사세시는 정말 이승훈이 형 집행 직전에 그의 입으로 직접 읊조린 것이었을까? 처음 이 두 구절을 전한 이신구씨의 전언 외에는 신빙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이신구씨의 증조부가 당시에 직접 들었다는 얘기도 앞뒤가 없는 말이다. 이승훈의 후손 이병규씨가 이미 6대손인데, 이승훈과 절친한 벗의 후손 이신구씨가 고작 증손자일 수 있는가? 그의 증조부가 150살 이상 살았어야 가능한 얘기다.
그래도 굳이 이 두 구절을 이승훈의 죽음 장면과 결부 지어 해석해야 한다면, 내 생각은 이렇다. “달은 져서 보이지 않아도 하늘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연못에 새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연못은 얼마 못 가 바싹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이것을 다시 풀면, “지금은 달이 져서 보이지 않지만, 달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물이 끊어지면 연못은 고갈되어 마른 땅이 되고 말 것이다”가 된다. 한 번 더 풀면, “지금은 천주교 신앙이 탄압을 받아서 암흑의 세상이 된 듯하지만, 나는 천주의 임재(臨在)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내 죽음 이후 못이 다 말라버려 신앙의 못자리가 마른 땅의 폐허로 될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는 있겠다.
다만 말의 출처가 대단히 모호하고, 전승의 경위가 불분명하기에 이렇듯 행간의 의미를 지나치게 천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독법이다. 월낙재천, 수상지진! 이 여덟 글자를 이승훈과 관련해 유의미한 사료로는 쓸 수가 없고, 써서도 안 되겠다는 판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