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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0-15
아간 / 김주한 목사.
순종과 불순종의 구도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점령에 도취되어 방심했습니다. 다음 목표인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여리고 성 같은 큰 성읍도 함락시켰는데 조금만 성인 아이성 쯤이야 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아이성 패전의 원인은 먼저 이스라엘의 교만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전투는 힘과 힘의 대결이 아닌 것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힘이 강하고 약하냐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이스라엘의 여리고성 함락은 자신들의 총칼로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승리를 선물로 받은 것뿐입니다. 마치 자신들의 능력으로 무너뜨린 것처럼 들뜬 마음에 고조되어 있다가 작은 성읍인 아이성을 보자 얕잡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크나 작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합니다.이스라엘 앞에 있는 가나안 7족속들은 불순종하는 무리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종하는 그룹입니다. 히11:31에서 “라합은 불순종하는 무리들과 함께 망하지 않았다!”라고 했는데 불순종하는 무리를 쫒아내고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됩니다. 이것은 신약의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함이라 했는데 한마디로 불순종의 세력과 그와 연합한 무리들을 지칭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불순종을 몰아내고야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이 오늘의 내 것이 되는 원리는 신구약이 일맥상통합니다.
견물생심
문제는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불순종입니다. 여리고 성 점령에 앞서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성을 점령하거든 그 안에 모든 탈취물들은 온전히 받쳐진 것으로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라 했는데 그만 ‘아간’이라는 자가 하나님의 제물에 손을 댄 것입니다. 아간이 자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비뽑기를 통해 정확히 집어내셨습니다. 21절에 아간이 실토하고 있습니다. 은돈200세겔과 금덩이와 모피코트하나를 장막 시트 밑에 감춘 것입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서 분명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유념하지 않고, 등한히 여기고, 나아가 무시하는 아간이 없기를 소망합니다.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처음에는 아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지만 우리가 늘 하는 변명처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불순종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아간의 죄악은 “견물생심”입니다. 보기 전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금덩이와 모피코트를 보는 순간 견물생심 즉 탐욕을 품게 된 것입니다.
탐욕
성경에는 탐욕에 관해서 몇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먼저는 창세기 3장에 하와가 선악과에 손대기 직전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탐스럽기도 하더라..”로 되어있습니다. 21절에 아간이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와 죄(불순종)가 들어오는 경로가 같습니다. 보고.. 탐내고.. 마지막에 손대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도 통합니다..우리의 죄는 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는 정욕.. 물욕.. 탐욕..명예욕을 품는 것입니다..그 탐욕이 죄(불순종)를 잉태하는 것이고 그 죄가 자라 사망을 낫는 루트도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십계명가운데 사람을 향해주신 계명이 결국은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6,7,8계명인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가 다 손대는 것입니다. 9계명인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6, 7, 8계명에 대해서 본 대로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10계명인 “탐내지 말라!”에서는 탐심의 뿌리부터 제거하라! 하신 것입니다.탐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내게 주신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내 것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는 쉽게 탐욕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정한마음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 삽비라’ 건도 결국 탐욕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때는 네 땅이 아니며 그 것을 판 후에도 네 맘대로 할수 없더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공명심에 이끌려 사람들에게 환심사려고 땅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땅은 바칠 수 있었는데 그 땅을 팔아 현금을 쥐게 되니까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현금을 보고는 견물생심이 생긴 것입니다. “판 후에 네 맘대로 할수 없더냐!”가 바로 그 말입니다.하나님은 한 가지 마음을 좋아하십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두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처음마음과 나중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땅이 다르고 현금이 다른 겁니다.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달면서 여기서와 저기가 다른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끊임없이 두마음을 품게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손댈 수 없다하면 그 마음을 끝까지 가지고 가야합니다..
공동체성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결정적 원인은 탐욕으로 인한 불신앙의 씨가 공동체 안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죄악을 마치 공동체 안에 자리잡은 누룩같이 보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 누룩이 퍼져 공동체 전체가 부패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진멸사상은 죄악을 하나도 남겨놓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진멸입니다. 처음부터 죄악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하나님보시기에 이스라엘공동체는 부분이면서 전체이고 전체이면서 또한 부분입니다. 선지서를 통해 하나님은 전체 이스라엘을 향하여 마치 한 사람을 부르듯이 “야곱아!”하고 부르십니다. 반면에 오늘 아간의 죄악을 이스라엘전체의 죄악으로 여기십니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온 피조계가 같이 타락한 것처럼 아간이 하나님의 금하신 금덩이에 손 댄 것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전체가 패전하게 된 것입니다.우리 육신의 각 기관이 연결되어 나의 몸이 되듯이 부분과 전체는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몸이 쓰러지는 것은 하나의 기관이 쓰러지는 것으로 몸이 쓰러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오늘까지 있더라!”
일벌백계하는 차원에서 아간은 오늘 돌무더기 속에 묻히고 맙니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7:26) “오늘까지 있더라!”를 기록한 것은 교육을 위한 것입니다. 탐욕을 품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이렇게 된다는 후대를 향한 가르침입니다.흥미로운 것은 “오늘까지 있어라!”가 앞선 6:25에도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음으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여기도 오늘까지가 있습니다. 성경기자는 6장과 7장의 사건과 배치를 통해서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 무엇인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라합 될래? 아간 될래? 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이런 것이다!”의 샘플이 되어 후대에 이름을 남길래 아니면 “불순종하고 탐욕을 품은 댓가는 이런 것이다!”라는 샘플로 후대에 전해 질래..의 의미가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7: 10-15
승리를 향한 성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최대 장애인 여리고성을 하나님이 주신 방법, 믿음의 방법으로 점령하였습니다. 이 철 옹벽같이 튼튼한 여리고성을 점령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는 오를 대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주의 이름으로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사기가 충천한 만큼 때를 놓치지 않고 '아이 성' 공략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성은 이름이 아이성이듯 우리말로 해도 여리고에 비하면 어린아이에나 해당할 정도의 아주 적은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말하길, 모든 백성을 동원하여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한 3,000명만 올려 보내면 점령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아이 성 공략에 나선 3,000명이 그 작은 성, 별것도 아닌 아이 성 사람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을 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성서는 이 사건을 표현하길,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수7:5)"고 했습니다. 이건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앞으로 마주쳐야 할 강한 적들이 즐비한대, 작은 아이성 사람들에게 패했으니, 이후 다른 적들이 이스라엘을 얕보고 달려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며(수7:9), 게다가 적 같지도 않은 적에게 철저하게 패하여 이스라엘의 사기는 물같이 녹아버렸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난감하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이 난감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수 없는 때에,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머리에 티끌을 쓰고 옷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슬퍼 외치며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이유입니까?"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실패의 때, 감당할 수 없는 곤란의 때, 앞으로 닥칠 일이 캄캄해 질 때, 하나님 앞에 티끌을 쓰고 옷을 찢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실패의 이유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실패의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이 내가 명한 나의 언약을 어겨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하셨습니다(7:11).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과 마음의 움직임까지를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그 분의 시선을 피할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 구름 사이에 숨든지 아니면 깊은 계곡 사이로 가 숨을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찾아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바로 코 앞에서 하나님의 명한 언약을 어기고 "바쳐진 물건을 도적질하고 사기하여 거실에 감추어 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바쳐진 물건"이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말합니다. 이것에 걸림이 있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아이사람들에게 참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모든 사람이 죄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모든 사람이 전리품을 욕심 것 챙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지은 범죄로 인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모두의 범죄 아닌 한 사람의 범죄로 여러 사람이 고통받게 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기에, 한 사람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자살 싸이트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초등학교 아이가 자살 싸이트를 드나들더니 그만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이 아이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혼자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잘못은 여러 사람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의 황후 Marie Antoinette는 130만원 정도의 적은 돈에 나라의 한 부분을 저당 잡히고 그 돈으로 목걸이를 구했답니다. 이것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하니, 이 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한 사람의 시치와 허욕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실로 한 사람의 작은 죄이지만 그 죄가 초래한 일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습니까?
내 범죄로 인하여 가족이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나 습관으로 인하여 가족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 시간 회개합시다.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말씀하시길 "내가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는 듣지 아니하시리로다(사66:18)"하였고,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1-2)"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지시한 바, 성결한 백성이 되라 하셨습니다(12-15절).
여호수아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뜻은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성결케 한 후에 뜻을 펼치라는 것입니다. 성결하게 하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백성들이 제 각각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성결함은 영적으로 아주 단순한 성결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오락에 마음을 쏟지 않고, 부정하고 더러운 것을 가까이 아니하며, 하나님이 명하신 명령이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성결을 준비한 후, 모든 백성이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찾아내고, 범죄 하여 모두를 고통스럽게 한 당사자를 찾아내 벌주므로 다시는 이런 망령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라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모두 모으고 제비를 뽑게 하였고, 그 결과 아간이란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간은 "시날 산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오십 세겔을 장막에 감추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아간이 은닉한 물건을 찾아 불살랐고, 아간에게 딸린 모든 사람과 소유를 골짜기로 끌고 가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죽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후, 아간이 범죄하므로 벌을 받아 고통 중에 죽은 곳을 아골 골짜기(괴로움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무엇입니까? 범죄한 자는 반드시 그 대가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성결케 하였고, 백성들 중에 있는 죄악을 찾아 처리한 후, 그들이 아이 성을 치러 올라가니 아이 성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고, 잃었던 사기는 충천하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을 얕보던 가나안 종족들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 중에서 죄를 척결하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하는 자는 항상 성결해야 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를 성서가 증언하는 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들이 쓰는 관 전면엔 정금판을 붙였는데 그 위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 써 있습니다(출28:36-37).
스가랴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는 세상을 그리며 예언하길 "그 날에는 말 방울에 까지 '여호와게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다(슥14:20)"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란 동네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려 하실 때에 귀신에 지핀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사렛 여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갈 때,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묻길"너희도 가려느냐(요6:67)"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의 말이 무엇인지 압니까?
베드로는 말하길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6:68-69)" 하였습니다.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 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은혜를 얻기 위해 소원을 두고 하나님께 나아가시렵니까? 그렇다면, 그 분은 거룩한 분인만큼 여러분은 성결한 자로 준비되어진 가운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교인이라고 별 다르더냐?"하는 비난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기도는 크게 하는데, 착한 일도 많이 하는데 성결하게 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착한 일도 다 잊고 세상은 우리를 보고 "별 다른 것이 무엇이냐" 비난합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을 대하여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결한 자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으로 다 이룬 줄로 생각지 맙시다. 직분을 받은 것으로 다 이룬 것으로 생각지 맙시다. 좀 더 성결한 자가 됩시다. 성결케 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더해지며 속하게 되며,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창립자 윌리암 뿌드의 말을 기억합시다. 가치의 혼란과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구세군이 줄 수 있는 마지막 대답은 성결이라 한 점을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의 깨달음을 기억합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