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하워드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시를 뒤집어놓습니다. 품절된 장난감 '터보맨'을 구하러 백화점을 헤매고, 퍼레이드장까지 쫓아가고, 다른 아빠들과 몸싸움까지 벌이죠. 우스꽝스럽지만 뭉클한 이 소동의 밑바탕에는 하나의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나는 좋은 아빠인가?"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하워드가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식이 아니라 원하는 물건을 구해다 주는 방식으로 그 답을 찾으려 합니다. 완벽한 아빠처럼 보이는 이웃 테드 앞에서 하워드가 느끼는 열등감도, 결국 "나는 그만큼 챙겨주지 못했다"는 감각에서 비롯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장면들이 여전히 재미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심리학자로서 많은 아빠들이 아직도 이 구조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을 자주 보기 때문일 겁니다.
아버지 역할은 원래 '제공자' 하나만이 아니다
아빠가 아이에게 좋은 존재가 된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심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연구해왔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설명이 있는데, 아빠의 역할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서 봅니다.
첫째는 아이랑 직접 놀아주고 대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고, 셋째는 아이한테 뭐가 필요한지 미리 생각하고 챙기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다 좋은 아빠를 이루는 조각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학자들이 여기에 하나를 더 짚었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걸 사주는 것"은 사실 이 세 가지와는 결이 다른, 별개의 항목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사주는 것과, 아이 옆에서 눈을 맞추고 반응해주는 것은 전혀 다른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갑을 열면 끝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과 마음을 계속 써야 하는 일이니까요.
이 기준으로 보면, 하워드가 그 난리를 치며 매달린 것은 딱 하나, 아이가 원하는 터보맨을 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이와 가장 덜 마주 앉아도 되는, 가장 손쉬운 항목이었던 셈입니다.
한국 사회의 아빠들에게는 더 익숙한 구조
국내 가족학 연구에서도 비슷한 지점을 짚습니다. 나성은(2014)의 맞벌이 아버지 연구는, 부양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리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도 많은 아버지들이 여전히 '부양'을 자기 정체성의 중심에 두고, 돌봄 참여조차 그 부양자 역할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구성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아버지 스스로도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역할 수행 방식으로 여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한편 영유아기 자녀를 둔 부모 585명을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에서는, 부모들이 실제로 바람직하다고 인식하는 아버지의 역할이 놀이 상대, 정서적 지지자, 상담자로서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힌 것은 다름 아닌 과도한 업무량과 늦은 귀가였습니다.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는데, 구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상황인 셈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코미디는 조금 슬퍼집니다. 하워드가 느끼는 감정은 사실 죄책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죠. 그런데 그 죄책감을 해소하는 방식이, 곁에 있어주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손에 넣는 것으로 흘러갑니다. 물건은 구매 여부가 명확하니까요. 반면 관계의 질, 정서적 반응성은 애쓴 만큼 눈에 보이는 성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한 사람일수록 더 쉽고 확실한 쪽으로 손이 가기 쉽습니다.
상담 현장에서도 비슷한 결의 이야기를 자주 만납니다. (아래 사례는 실제 상담 사례가 아니라, 여러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재구성한 가상의 예시입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한 아버지는 평일에 자녀 얼굴을 보기 힘들 만큼 바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신 그는 주말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아낌없이 사주었고, 스스로도 "내가 못해주는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정작 상담 중에 "아빠랑 그냥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필요한 건 다 해줬는데 뭐가 부족하다는 거지?"라는 반응이었죠.
이 아버지가 나쁜 아버지여서가 아닙니다. 다만 좋은 아빠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적으로, 그리고 스스로에 의해 '제공자'라는 한 단면으로 좁혀져 있었던 것뿐입니다.
아버지 역할을 넓힌다는 게 회사를 그만두거나 거창한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짧아도 아이와 눈 맞추고 이야기 나누는 순간,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아이를 향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것, 오늘 아이의 하루가 어땠는지 궁금해하고 물어봐 주는 것 — 이런 것들이 전부 '사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입니다. 영화 속 하워드에게 진짜 필요했던 건 아마 완벽한 터보맨이 아니라, 아들에게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묻는 몇 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지금 스스로를 "필요한 건 다 해주는데 왜 아이와 멀게 느껴질까" 하고 자책하고 계신다면, 그건 아버지로서 부족해서가 아니라 역할 자체가 좁게 학습되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지점은 혼자 고민하기보다 함께 짚어볼 때 훨씬 명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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