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9] 권우삼 (權佑三) - 말보다는 실천을 앞세우며 8. 경남 지역에서의 전도 생활 - 2
11 건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가졌기에 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처가에서나 온 집안에서 내 건강에 대해 많은 염려를 하였다.
12 그때 나는 ‘하늘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생명을 살려주실 것이요 필요치 않은 존재라면 하늘이 불러 가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생명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피를 토해 가면서도 여전히 승공 강의를 하였다. 내 주위에서 나를 항상 지켜보던 아내는 초조해하고 안타까워했음을 후일 알게 되었다. 13 창녕교회도 역시 전세가 아닌 월세로 얻은 것이었다. 애써서 전셋집을 마련한 후 아내는 화장품 행상을 시작하였다. 화장품 행상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집집을 방문하여 전도를 해보려는 뜻과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으려는 뜻에서였는데, 전도도 안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또 몸도 약하고 해서 1년 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14 나는 승공 강의를 많이 하게 되었다. 창녕여고에서는 각 학급에 들어가 승공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것을 통해 정진애라는 학생 외 몇몇 학생이 인연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진애(1800) 공성희(6000)만 축복을 받아 현재 뜻 안에 남아 있다.
15 어느 때는 전세로 지불해야 할 돈이 모자라 쫓겨나서 보따리를 마당 가운데 모아놓고 밤새워 통곡하며 집은 많으나 하늘 집이 없음을 탄식하기도 하였다. 나는 하늘 찾아가는 길은 외로운 길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16 창녕에서의 재임 기간 중 잊을 수 없는 한 분이 있다면 당시 영업소장이었던 임채율(1800가정)씨다. 헌금을 제대로 하는 식구가 없는 어려운 교회에서 희생적으로 교회를 받들었던 그 정성! 공기총 사업을 하여, 또는 새우젓과 게를 지게에 지고 사라고 외치며 사업을 하여 뜻 앞에 충성을 다하던 그 앞에는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17 처음 창녕에 갔을 때는 두세 명이 방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떠나올 때는 30여 명이 전셋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승공 활동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많이 하여 기관과의 유대관계는 매우 좋았다. 18 창녕을 떠나던 날 밤엔 식구 아닌 분이 떡을 해가지고 십여 리를 걸어 교회를 찾아왔다. 그 떡을 나누어 먹으며 아쉬운 작별을 하던 그 순간들, 늘 잊을 수가 없다.
19 떠나던 날에는 식구는 물론 식구 아닌 이웃사람들까지도 모두 버스정류장까지 전송을 나왔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큰소리들을 내어 울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20 눈물을 흘리며 아쉬운 작별을 하고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창녕을 떠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