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천국에도 있는 것이 이 세계에도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가,
이 세계에도 있는 것이 천국에도 있으면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아, 달빛은 메아리 같아. 꼬리가 흐려지고…… 떨리는…… 빛과 메아리. 달빛은 비밀을 감싸기에 좋다고 생각하다가,
달빛은 비밀을 풀어헤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달빛은 스르르 무릎을 꿇기에 좋은 빛, 달빛은 사랑하기에 좋은 빛, 달빛은 죽기에도 좋은 빛,
오늘밤은 천사의 날개가 젖기에도 좋은 빛으로 온 세상이 넘쳐서, 이 세계 바깥은 없는 것 같구나. 우리 도시의 지하에는 커브를 그리며 돌아다니는 열차가 있고, 열차에는 긴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긴 의자에 앉으면 천국의 사람들처럼 죽은 듯이 흰자위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속에서도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의 눈송이 같은 귀에다 뜨듯한 입김을 불며 속삭여주었다.
인간을 사랑하느냐고 나는 물었고, 그리고 오랫동안 대답을 기다렸다.
-시집 <에코의 초상> 수록-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귀를 틀어막는 천사를 언젠가 나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천사의 귀가 사람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이 아니라 꺼내놓지 않은 마음의 소리까지 전부 듣는다면, 그 귓가는 흡사 전쟁터 같을 것이다. 행복한 인간보다는 불행과 절망에 빠진 인간 곁을 더 오래 맴도는 것이 천사의 어쩔 수 없는 습성이라면, 그의 표정에 멜랑콜리의 정조가 깊이 배어 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가슴을 치며 허물어지듯 외투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던 천사를 언젠가 나는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베를린의 어느 고층 건물 옥상 난간에서 천사는 자살을 하려는 한 청년의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고 있었지만, 청년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훌쩍 날아가는 새처럼 삶으로부터 가볍게 뛰어내려버렸다. 그 가벼움은 날개를 가진 천사마저 돌덩이처럼 무겁게 주저앉힐 만큼 그렇게 무섭도록 가벼운 것이었다. 이 장면을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詩)>(1987)가 담았다.
천사의 손은 청년의 절망을 한 줌도 덜어낼 수 없었다. 천사의 품 속에서도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우리들의 천사는 그가 사랑한 사람들처럼 아프고 슬프고 피로하고 그리고 무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우울한 천사는 천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불행한 이웃들 주변을 내내 떠돌고 있다. 천국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그의 영혼이 이 세계의 슬픔에 젖어 너무 무거워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사람을 부리고 때리고 죽이는 이 잔혹한 세상으로부터 가볍게 발을 떼고 날아오를 수 없게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 천사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언제나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 세계가 흘리는 피와 눈물이었을 것이다.
헬조선의 천사들이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귀를 틀어막을 때, 멜랑콜리한 검은 외투 속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허물어져 내릴 때, 그 일그러진 천사에게 나는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래도, 이래도 인간을 사랑하느냐고. 그리고 오랫동안 대답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천사의 이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들끓고 있는지 귀 기울이고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천사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몸소 겪어내야 할 것이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로운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든 지속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다림의 어떤 자세를 만들어갈 것이다.
질문을 던진 그 순간부터 나는 심하게 흔들렸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썼던 비유를 빌리자면, 질문은 우물 안에 던져진 돌 하나였고, 그 우물은 내 영혼이었을 테니까. 우물에 던져진 돌 하나가 문득 우물의 깊이를 일깨우고 사방으로 번지는 메아리와 메아리와 메아리를 낳는다. “물음 안에 담은 모든 영혼의 힘이 대답이 되어 내 마음속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내 마음에서 시들어버린 천사가 깨진 무릎을 반짝이며 타박타박 걸어나올 때까지, 나는 들끓는 침묵과 불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것이 어둠이고, 이것이 우리의 밤이라면, 밤에 사랑하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천사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밤에 천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밤에 당신은 보이지 않는 천사를 닮고, 천사는 보이지 않는 당신을 닮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많이 가진 것이 밤이다.”(졸시, <밤에>)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 천사들, 우리의 희미한 사랑, 우리의 아스라한 희망을 믿고 꿈꿀 수 있는 시간이 밤이다. 별처럼 뜨거운 밤이다. 그것이 밤의 가능성이고 밤의 힘이다.
밤의 달빛처럼 천사가 당신의 지친 어깨에 투명한 손을 얹는다. 그 어느 날에는 당신의 어깨에서 천사의 날개가 돋아났을 것이다. 문득 당신의 마음이 가장 맑아졌을 것이다. 그렇게 맑아져서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그런 놀라운 순간이 누군가의 옷깃처럼 당신을 스쳐가고 있었을 것이다.
김행숙
김행숙 /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마주침의 발명> <에로스와 아우라> 등이 있다.
이별의 능력, 분열의 능력
김행숙은, 줄곧 부정적인 상실로 이해해온 일이 실은 우리가 지닌 특별한 ‘능력’임을 알려 주었다. 그녀가 쓴 시의 제목이자 2007년에 출간한 시집 제목이기도 한 ‘이별의 능력’이 그 예다. 이별은 사람과의 헤어짐만이 아닌, 매 순간 우리를 스쳐가는 상황과 사물과 감각 등과의 각기 일회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의미한다. 김행숙은 이별을 인간이 경험하는 불가피한 사건을 넘어, 인간이 수행하는 주체적인 능력으로 격상시켰다. 그녀는 이별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 수행한다. 이행하고 집행한다고 해도 좋겠다.
삶은 각기 단 한 번뿐인 이별들의 불연속적인 과정이다. 김행숙의 시에서 ‘나’는 방금 전의 나 자신(들)과도 줄기차게 이별한다. ‘나’는 너, 그것, 나 자신, 이름붙일 수 없는 익명의 무엇들과 끊임없이 이별하고, 이별한 만큼 더 많은 나로 분열된다. 무엇이, 어디까지가 ‘나’인지 알 수 없으며, 구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이별의 능력은 분열의 능력이다. 이별하는-분열하는 인간은 겹겹이 늘어나는 안과 밖, 왼쪽과 오른쪽을 갖는다. 여기저기 흩어져 타자와 뒤섞인다. 1인칭 서정적 자아의 특권을 해제하는 인칭과 언술의 다중 화법은 2000년대 시의 새로운 흐름이지만, 이 흐름을 이끈 김행숙은 ‘나’의 분열이 타자를 향한 공감과 사랑의 기원임을 보여준 점에서 각별했다. 즉 이별의 능력은 분열의 능력이고, 분열의 능력은 공감과 사랑의 능력이다. 마침, 심리학에서 공감은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생각하는 이심적인(double-minded) 집중으로 정의된다.
이별-분열-공감-사랑의 언술이 논리적이거나 평면적일 리 없다. 김행숙 시의 글자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줄로 쓰이지만, 단어와 문장들은 다각도로 번지고 튀어 나가면서 입체적인 의미와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에서 김행숙은 고통받는 인간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않는 천사와 조우한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한 모든 이별의 증인인 천사의 곁에서 다시 “깊고 부서지기 쉬운” 사랑을 시작한다.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인간의 시간’ 전문).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대담: 시인 김행숙을 만나다 글/ 한사유
김행숙의 시를 읽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산책하는 것과 같다. 느낌과 감각들이 출렁이고, 이상하고 모호한 질문들이 제출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산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발길 가는 대로 걸으며 살갗을 태우고 가로수의 너비를 동경해 본다. 잔디를 쓸어 보고 싶다는 쓸데없는 필요가 발명되기도 할 것이다.익혀왔던 언어는 낯설어지고, 무구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다면 준비가 된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녀처럼 감각의 도체導體가 된다. 나의 테두리는 허물어지고 당신과 나는 섞여 들어간다. 초월적인 날이 될 것이다.
<사춘기>
이상하고 반짝이는 슬픔의 세계로
<<사춘기>>는 묘한 슬픔이 지배하고 있는 시집입니다.여기에 나오는 '아이'들이 이런 정서를 만들어내는 한 요인인데요. 이상 시의 '아해'처럼 처참하다거나 슬프기보다는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분자 같다고 할까요. 아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김행숙:
(우리가) 잘 모르는 존재인 것 같아요. 아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체계 속에 있지 않은, 거기로 들어오려는 이들입니다. 언어를 자기 몸에 습득하지 못한 존재들이지요. 말로 소통한다는 건 어렵고, 말 이외의 것이 더 잘 통할 때도 있지만요. 이 언어적 규약에 포섭되지 않은 존재들이 매혹적인 동시에 공포스러웠어요. 아이의 언어 중 울음만 놓고 보더라도 그래요. 아이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울잖아요. 다양하고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렵고 난처한 것들을 모두 울음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해요. 그 표현 앞에서 어른은 어쩔 수 없어지고요.
제 기억에도 그런 '아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대상으로서의 아이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아이이기도 합니다.요즘도 '이유' 없이 기분이 좋거나 우울할 때 아이가 되는 느낌을 받아요. 감정이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때 '나를 표현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드는데, 그럴 때도 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현재의 나이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이기도 해요.
귀신이 많이 나옵니다. 김행숙 시의 귀신은 친구 같고 수호신 같고 심지어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상합니다. 시에 나오듯이, 시적 화자가 귀신에게 먹힌 것이 아니라 귀신을 먹었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귀신 들린다고들 하지만 사람에게 먹힌 귀신에 대해 들어봤니? <귀신 이야기2>
김행숙 귀신보다 내가 더 힘이 센 것은 아니고요. 인간이 더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인간의 공포가 표출되는 방식으로 귀신이 출몰하잖아요. 귀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내고 악몽 속에서 귀신을 출현시키는 것은 모두 인간입니다. 다정하고 좋은 점도 있지만 때때로 섬뜩한 인간한테 귀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 봤어요. "난 네가 더 무서워."라고요. 사실 귀신을 본 적은 없어요.
<신도림>이라는 시를 보면 뺨을 맞았던 모욕의 순간마저도 반짝이는 시적인 순간으로 재창조되고 있습니다.이런 질문이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실제로 겪은 일이신가요?
김행숙:
어떻게 아셨어요? 개인적인 경험을 시에 잘 쓰지 않는 편인데 이건 겪었던 일이에요. 재수 학원 옆에 조그만 공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곤 했어요. 어느 날 공원 벤치에서 자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더니 내 뺨을 때리고 갔어요. 몽유병 환자 같았어요. 우리한테 화가 났거나 적의를 품은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뺨을 때리는 기분으로 내 뺨을 때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 꿈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 뺨을 한 대 때리고 간 느낌인 거죠.
때리는 사람도 화를 내지 않았고 맞은 사람도 화를 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이상하게 세상의 모든 슬픔이 밀려들었다고나 할까요. 감정적 비약이 일어났던 거죠. 재수생 여자애들의 점심도 슬프고, 벤치에서 자는 남자도 슬프고, 그 남자의 꿈도 슬프고. 존재 일반에 대한 슬픔이 밀려오는 기분이었어요. 잊고 있었는데 그 시를 쓰다가 떠올랐어요. 매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기억이잖아요? 불현듯 왔고, 그 자리에 쓰이려고 왔다고 생각해요.웃음
끊어지거나 사라지는 계단에 대한 이미지들이 많이 나옵니다.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라고 느껴지는데요.
김행숙:
좋은 욕망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끊어진 계단은 해방감이랑 통하는 것 같아요. <미완성 교향곡>에 나오는 미완성의 느낌이랑 통해요.계단이 공중에서 끊어지지/건물이 웃지 아직 다 지어지지 않아서 2층으로 올라갔지만 2층은 아직 없는 그런 공간이랄까요? 완성되거나 완결되지 않은 자리에서 문득 느껴지는 해방감이 있었고요. 순식간에 썼고, 쓰고 나서도 가장 기분이 좋았던 시예요. 시원했어요.
김행숙 시는 종종 의문문으로 끝나곤 합니다. 이 물음표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김행숙: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게 느껴질 때 물음표를 쓰는 것 같아요. 질문 거리라고 누구나 생각하는 것은 잘 질문하지 않게 돼요. 갑자기 머리카락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없는 외계인이 본다면 얼마나 이상할까.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너무 이상하지 않느냐고, 느닷없이 질문을 하게 돼요. 질문이 생성될 때 이미 질문은 운동을 시작했어요.그 질문 속으로 독자를 함께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작용했으면 좋겠어요. 대답으로 안내하기보다는.
'신사초등학교', '선일여고 복도' 같은 구체적인 지명들이 첫 시집에 등장합니다. 이 장소들은 김행숙이라는 시인에게 중요한 화소들일 것 같습니다.
김행숙:
초등학교를 두 번 들어갔어요. 몸도 아팠고, 공포감도 있었고, 꿈에 거대한 복도의 소용돌이가 나오곤 했어요. 선생님, 아이들, 규칙이 있는 세계가 무서워서 몸도 아팠던 것 같아요. 한 달 정도 다니다 그만두고 다시 들어갔죠.그때의 두려움과 흡사한 증상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다시 찾아왔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 왔는데, 내가 말을 하면 애들이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았죠. 언어의 섬이 된 듯 거의 말을 안 했나 봐요. 졸업할 때 한 친구가 “네가 벙어리인 줄 알았어.”라고 말했으니까요.
고등학교 때는 병적으로 돼서 친구랑 얘기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고 그랬어요. 음악 실기 시간에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졸도를 하지 않나. 복도에서 떨어져 죽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했죠. '죽지 않고 병신이 될까 봐'<지하 1F에 대해서> 걱정도 하면서요. 재수할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요. 나는 항상 한 템포씩 늦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인가 봐요.웃음
<이별의 능력>
너의 얼굴은 끓다가 마침내 흘러넘친다
이 시집에는 사랑의 능력과 세상의 감각들을 일깨울 수 있는 권위자가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감각을 사용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준다고 할까요. 이 시집을 쓸 때 혹시 인생에서 아주 행복한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셨던가요?
김행숙:
그랬던 것 같아요. 좋은 우정들을 많이 만나고 또 누렸던 시기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타인'들을 많이 만났던 시기인 것 같아요. 안전한 우정이나 안전한 사랑은 없잖아요?사랑이나 우정에는 모험적인 요소들이 있고, 자기가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변화들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던 시기에 쓴 것 같아요. 산문집 <<마주침의 발명>>을 쓰던 때와 겹쳐지는 시기이기도 하고요. 산문집에 실린 글들을 2년 동안 계간지에 연재하면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시인들과 실컷 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호사를 누렸죠. '마주침의 발명'과 '이별의 능력'은 통하는 단어인 것 같아요. 저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생각을 많이 만났던 시기였어요.
<해변의 얼굴>에서는 치장하고 있는 여자의 행복감이 느껴집니다. 정신을 단장하고 있는 사람의 내밀한 즐거움이랄까요? 이 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궁금합니다.
김행숙 :
일단은 제 개인적으로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예요. 거울을 볼 때, 뚜렷하게 윤곽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 윤곽을 넘어서 자기가 흐려지는 느낌이랄까요. 이런 건 산만하고 혼잡스러운 정신 상태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내 얼굴이 내 얼굴 같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내면이 들끓는 건 고체적인 것이 아니라 액체적인 이미지잖아요? 얼굴이 넘치는 이미지가 툭, 떠올랐어요. 이 시를 쓰고 나서 내가 쓰고 싶었던 무엇인가를 썼다는 생각을 문득 했어요.
이 시집에 많이 나오는 '해변'은 김행숙의 세계를 대변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또 하나의 '옆' 같습니다. 김행숙에게 '옆'이란, 또 '해변'이란 무엇입니까?
김행숙:
‘해변’이란 단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사람은 결국 가지고 있는 것을 쓰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 바다를 보고 자랐으니까요. 바다는 무한을 환기하지만 결국은 휘어져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수평선이나 지평선 같은 게 내가 속해 있는 테두리와 동시에 무한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해줬어요. 음, 그리고 앞이나 뒤보다는 옆에 끌리는 편인가 봐요. 옆을 보려면 시선은 사선이 되어야 하는데요, 옆은 내게 가깝다고 여겨지지만 잘 보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더 작은 사람>은 김행숙이라는 시인이 집중하고 있는 미시적인 세계를 보여줍니다. 화자는 점점 작아지다 못해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나는 끝까지 다 듣지 못했"의 상태에서 사라집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김행숙: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이곤 해요. 타인의 시선이 주는 불편함에서 시작된 욕망인 것 같기도 하고요. 투명 인간처럼 깨끗하게 싹 사라지고 싶을 때가 순간순간 있었어요.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작아지고 또 작아지기. 사람들마다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들이 있을 텐데, 사라지는 환상이 저한텐 이상하게 그런 방법 중의 하나인 거죠.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어느 곳에서 사라질 수는 있지만 존재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겠지요.
발과 손과 목이라는 부위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시가 많습니다. 각별한 느낌이 머무르는 장소인 듯합니다.
김행숙:
몸의 언어가 가장 잘 표현되는 곳들인 것 같아요. 무용수의 춤은 이런 부위를 사용해 느낌을 극대화시키죠. 말은 속일 수 있어도 몸은 속이기 어려워요. 느낌들이 예민하게 표출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발은 삶의 추위를 가장 잘 느끼는 부위라면, 손은 떨림이 가장 잘 느껴지는 부위죠.떨림이 가장 먼저 들키는 자리랄까요? 그리고 목은 감정의 동선을 가장 잘 드러내죠. 생선을 보면서, 갑자기 목이 없다는 게 특이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어요. 목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쩐지 인간적인 생각인 것 같아요. '인간은 목을 의식하는 동물이다.'라고 인간을 정의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코끼리, 돌고래, 오리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이 동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시들이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김행숙:
슬픔을 반짝이게 하고 싶었어요. 고통에도 빛이 있다. 기쁨과 다정함만으로 세계를 말하는 것은 분명한 기만이지요. 어떤 고통과 슬픔이 있어 그 고통과 슬픔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우리가 다정해질 수 있다면, 고통에도 빛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타인의 의미>
열렬하고 고독한 이별의 형식
어른의 시집이라는 느낌입니다. 격정적 감각을 이미 겪고 난 성인의 차분한 시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키스보다는 포옹에 가까운 시집 같습니다.
김행숙:
조금 더 진지해지고 치열해지자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조금 더 어렵게 긍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사랑의 곤경들, 우정의 고비들, 생의 이런저런 난관들 앞에서 "조금 더 어려워져야 해."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지요. 조금 더 무거운 느낌이 있을 거예요. 무거워지고 싶었던 시집이에요. 삶과 시를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건 오만한 것이었어요. 시가 삶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시가 삶을 바꾸기도 했으니까요. 어쨌든 더, 더, 더, 그런 태도로 밀고 나가고 싶었습니다.
촉감에 민감한 시인입니다. 시에 촉감을 사용할 때의 느낌들이 궁금합니다.
김행숙:
'뭔가 만지고 놀 게 필요해요.'<삼십세>라고 쓴 순간, 알았어요. 내가 촉감에 끌린다는 것을요. 무엇을 쓰는가는 내 의식이 아는 게 아니라 시가 어느 날 알려주는 것 같아요. 시각은 일정한 거리距離를 요구한다면, 촉각은 시각이 뭉개지는 곳에서 발생해요. 너무 가까워서 그 무엇도 보이지 않게 되죠. '가깝다는 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에 근접하는 건 아닐 거예요. 어떻게 보면 촉각은 감각적 오류들이 많이 발생하는 자리일 거예요. 누군가는 그건 오류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접촉점은 상호간의 주관성이 가장 강렬하게 운동하는 자리입니다. 상호성, 바로 그것이 내가 미학적으로 촉각에 끌리는 이유일 거예요.접촉의 순간은, 언제나 내가 너를 만지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네가 나를 만지는 사건인 거죠. 네가 나로 인해 뭉개지고 내가 너로 인해 뭉개지는 순간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순간 속에는 너도 참여하고 나도 참여하고 있는 것이죠.
뭔가를 감싸고 있는 것들에 대한 민감한 시선을 보았습니다. 감싸면서 동시에 안과 밖을 구분하기도 하는 것들이죠. 신발과 화분, 커피 잔이 그렇고요. 어찌 보면 '피부'도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시인에게 이런 것들은 비슷한 의미인가요?
김행숙:
양가적일 수 있을 거예요. <가로수 관리인들>에서 '저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세계를 느낀다.'라고 쓴 것처럼 테두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에 안정감을 부여하지만, 한편으론 테두리 바깥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상상하게 하고 그 바깥으로 나가게 하지요. 그 틀에 구멍을 내고 싶기도 하고 헝클어뜨리고 싶기도 하고요. 변동의 에너지라고 할까요. 그것들이 활성화되었으면 좋겠어요. 삶에서는 그 에너지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없지만, 시에서만큼은 더 용기를 내고 더 무모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과 꿈, 눈꺼풀, 몽유병, 악몽. <<사춘기>>에서 <<타인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소재들입니다.꿈을 둘러싼 것들이 김행숙 시에 많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김행숙:
진한 주홍색이 등장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꿨어요. 꿈에서 본 그 색깔을 <<타인의 의미>> 표지에 나오는 네모의 색깔로 드러내 보았는데, 그건 일종의 숨겨 놓은 혼자만의 표식 같은 거예요. 꿈의 버전은 두 가진데요. 하나는 주홍빛 모래사막이 펼쳐지는 꿈이에요. 어떤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데, 그 붉은 모래가 소용돌이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나는 그 꿈에 등장하지 않지만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요. 다른 하나는 햇빛에 내놓은 붉은 고추들이 검은 아스팔트에 쭉 깔려 있는 꿈이에요. 터지기 직전의 고추들. 그 버전의 꿈에도 사람은 등장하지 않고 역시 풍경만 있어요.
중학교 때까지 강박적으로 꾸었던 꿈이에요. 편도선이 좋지 않아서 고열에 시달릴 때 주로 꿨었는데, 이런 꿈을 꾸고 난 다음날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어딘가로 자꾸 나가려고 해서 말리기 힘들었다고요. 일종의 몽유병도 있었던 셈이죠. 그 꿈에서 죽음을 느꼈던 것 같아요. 죽음에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치려고 했던 거겠죠. 그 꿈을 이젠 꾸지도 않고, 또 몽유병적인 충동도 없어졌는데요. 어쩐지 아쉬운 마음도 있어요, 그 꿈들은 죽음을 연상시킬 만큼 공포스럽기도 했지만 무서울 만치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거든요.
무대에 대한 선망이 드러나는 시들이 많습니다. 무대는 김행숙 시에서 무엇인가요?
김행숙:
무대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어요.어렸을 때는 무대 공포증이 심해서 난감한 일이 많았고.그렇지만 무대라는 걸 생각해보면, ‘동경’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요. 언어와 몸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잖아요. 어떤 한계를 넘어가는 일이죠. 우리가 일상이라는 공간에서 철회하는 것들 이랄까. 더 나가지 못하는 지점들, 살아가면서 지켜내야 하는 것들, 나의 책임 등을 뚫고 솟아오르는 거죠. 일상의 한계 속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극적인 감정들, 이를테면 최대치의 절망이나 슬픔을 터뜨리는 배우들을 보면 어쩐지 부러운 마음이 들어요. 평생 겪어볼 수도 없는 것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페라나 성악, 연극의 이미지를 시가 불러내는 모양이에요.
말씀을 듣고 보니, 무대가 사라지는 계단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와 소설은 문자로 기록되지만 공연 예술은 고정되지 않잖아요?
김행숙:
사라지는 것이 자유를 주는 것 같아요. 나는 붙잡아 놓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물론 그 방식 안에서 달아나야 하지만요. 어떤 시를 한동안 쓰고 나면 거기에 머무르면 안 되고 떠나야 하고 이별해야 하는 게 시인의 일이지요. 작품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머무른다고 할까요? 나한테는 뺄셈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에 대해서는 더 미니멀minimal해지고 싶어요. 그런 욕망대로 살아지지는 않아서 일상은 어쩐지 점점 더 번잡해져 가는 것만 같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하여문학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의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행숙:
그 둘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쓰는 것도 일상적인 말에 가까운 편이고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상 언어를 쓰고 있어도 문학적일 수 있고, 문학적인 언어를 쓰고 있어도 문학적이지 않을 수 있어요. "문학 왜 하세요?"라는 질문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로 할 수 없는 것, 말로 되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 시의 언어는 그런 점에서 역설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다 쓰는 언어라는 재료를 사용하지만요. 말이 무력해지는 지점, 말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문학이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문학적 언어가 아닐까요.
어떤 것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행숙:
작가에게는 문체의 문제로 질문을 돌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우리가 대체로 합의하고 있는 좋은 문장이라는 기준에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좋은 문장이라고 배워 온 것들을 어그러뜨리는 방식으로 알파가 작용하기도 하고요. 중요한 것은, 좋은 문장을 쓰게 되고 나서야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작가에게 자기 문체라는 것은 자기 호흡이기도 하니 매우 중요하죠. 평생에 걸쳐 바꿔 가거나 단련하기도 하고요.호흡이 생명체의 삶을 실어 나르듯이, 문체는 한 작가의 세계를 실어 나르는 것일 테니까요.
시는 전통적인 1인칭의 형식인데요. 김행숙 시의 기묘함은 사실 이 인칭의 형식을 파괴하는 데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언젠가 1.5인칭'이라는 개념을 쓰신 것으로도 기억하는데, 김행숙에게 1.5인칭이란 무엇인가요?
김행숙:
습작하던 시절의 가장 큰 고민이 '나'라는 화자의 문제였어요. '나'라는 주어를 쓰고 나면 어쩐지 시를 못 쓰겠고,또 쓰기 싫어지더라고요. 못 쓰겠어서 '나'를 안 쓰는 방식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나 그녀, 소년이나 소녀 같은 3인칭이 많이 쓰였을 거예요. 처음에는 "이것도 시냐?"라는 말도 들었는데, 제 고민이 제대로 설득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쩐지 그 고민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요. 어쨌든 '나'라는 주어 자체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다는 걸 저도 알게 되었고요. '나' 안에 섞여 있는 타인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1.5인칭' 같은 말을 빌리기도 했지요.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서 나는 수시로 체위를 바꾸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시를 쓸 때의 거짓말은 어떤 것일까요? 소설에서의 거짓말과는 다를 텐데요.
김행숙:
거짓말이라는 것에 대해 다소 역설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비밀이 감춤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밝히려는 시도들의 실패 속에서 완성되듯이 말이에요. 제 시에는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데, 그게 거짓말로 드러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의 심리가 문제인 거죠.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무엇인가가 거기에 개입하는 순간 어떤 진실이 그 안에 얼룩을 남긴다고 생각해요.
문학성이라는 것은 그 시대에 합의된 문학적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행숙:
제도도 변하고, 관념도 변하죠. 문학의 위상도 변했고 또 매체도 변하겠죠. 종이에 어울리는 구현 형태가 있는 것처럼 전자책에 어울리는 형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그런다고 해서 내가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아요. 문학 제도나 매체, 관념의 변화와 다른 차원에서 몸김수영식으로 말하자면, '온몸'의 변화가 따라야 하는 문제니까요. 또 제도와 매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는 문학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결국 '문학은 왜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스스로에게 정직해지고 충실해지고 모험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죠.
어떤 시인으로 살고 싶으신가요?
김행숙: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시인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적 고민 속에서 싸워 가며 쓰이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시적 고민을 계속 발생시키고. 다른 시를 쓸 수 있게끔 하는 물음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그리고 행운을 바라야죠.
김행숙에게 시란 무엇인가요?
김행숙:
시를 쓸 때에 가장 예민한 수신기가 됩니다. 외부의 자극이 내면을 깨어나게 하는 순간입니다. 그런 의미로도 시는 내면의 표현이라는 말로 결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죠. 그래서 시는 '사건'과 같은 것입니다. 새로움이나 개성을 시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면서 새로워지고 자기 개성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창밖으로 나뭇잎은 자지러지게 웃었고 나무는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 시간은 끄덕끄덕 흘러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시인'같지 않다고 말하던 시인은 달뜬 목소리로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시처럼 '나'라는 주어를 거의 쓰지 않았고, 직관적이었다. 고압 전류 같은 에너지가 흘렀지만, 지치지 않았다. 고열에 시달리며 반복되는 꿈을 꿨다는 소녀의 습기 어린 피로가 잠시 그녀의 얼굴 위로 차양을 드리웠다. 선홍색 사막의 소용돌이 속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잡아 놓고 싶은 꿈처럼, 그녀의 얼굴은 벌써 희미해졌다. 여운만이 스르르 공기처럼 떠돌고 있다. 김행숙이 감춘 지도 모른 채로 감추어 놓게 될 비밀은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가 그 비밀의 공모자가 될 때 그것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글_ 한사유 / 사진_ 김병관 / 감수_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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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영의 시인탐방
생명과 호흡하는 시인, 김행숙 시인
여행을 하다보면 새로운 풍경에 곧추선 감각을 무언가강렬히 후려칠 때가 있다. 그 섬광 같은 채찍을 인정하고싶지 않으나 너무나 강렬해서 자기 안에 빠져 여행자체를 잠시 잊을 때가 있는 것처럼 한 시집을 만나는일도 그러하다. 너무나 강렬해서 시집을 읽고 있는 순간자체를 잊을 때가 있다. 비밀히 감춰진 시의 숲속을 거닐때의 황홀함. 막 싹이 돋기 시작한 숲속의 생명체를 행여밟을까, 혹은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까 조마조마 하면서통과한 후 뒤돌아 봤을 때 그 품의 위대함.
가로수에 대한 관심을 시로 승화시키고 그 시는 산문을
가로수에 대한 관심을 시로 승화시키고 그 시는 산문을낳고, 또한 작은 식물에까지 관심을 옮겨가며 생명과호흡하는 시인을 만났다. 시인은 사물을 둥글게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동그라미 안에 시인의시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가 사라지자 바람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그를 바람의 아들이라 불렀다. 어른들은 후레자식이 라고 말했다.돌멩이가 구르지 않았다.
바람이 사라지자 그는 침을 뱉고 사라졌다.구름의 모양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름은 더 이 상 좋은 공상의 재료가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냄새를 풍겼다. 저녁마다 갈비를 뜯 었다.
사람들은 바람의 도움 없이 책장을 넘겼다.바람과 함께 그가 사라지자, 몇 몇 애들은 정말로 책 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책에서만 폭풍이 일고 운명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춘기 4 전문
<사춘기>
■ 김후영: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하셨는데 여독은 풀리셨는지요? 여행을 자주 다니시나요?
□ 김행숙: 여행을 자주 다니지도 않았고 다니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습니다. 쭉 그런 편이었는데, 요즘은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부쩍 커지네요. 아무래도 점점 내가 살고 생각하는 방식에 관성 같은 것이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행을 하고 싶다는 건 나의 방식이 이질적인 곳에 가서 어색하고 서툴게 돌아다니고 싶다는 거겠죠. 그러고 보면, 여행을 자주 다니지도 않았고 다니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던 때야말로 여행하는 자의 영혼 가까이에서 방바닥을 뒹굴고 골목을 서성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후영: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하셨네요. 첫 시집이 『사춘기』이고 「사춘기」 연작시도 몇 편 있네요.선생님의 사춘기는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 김행숙: 시집『사춘기』뒷표지에 썼던 글이 말하자면 사춘기 시절의 한 삽화인데요. 그걸로 대답을 대신할게요. “한때, 내가 되고 싶었던 건 투명인간이었다.선일여자고등학교 복도에서 뿌연 운동장을 내다보면서 이런 공상으로 뭔가를 견디곤 했다. 만약 내가 단 하루만이라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무조건 달리고 또 달릴 거야. 다만 멀어지기 위해. 내가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더 멀리에서 나타나고 싶었다.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 김후영: 선생님은 시와 평론, 산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하고 계시네요. 어느 장르에서 가장 신명을 느끼시나요? 천직이라고 느끼시는 장르가 있으신가요?
□ 김행숙: 시를 쓸 때가 제일 좋습니다.
■ 김후영: 시는 주로 언제 쓰시는지요?
□ 김행숙: 예전에는 밤과 이어지는 새벽에 주로 썼어요. 지금도 그 시간이 좋긴 하지만,특별히 시간을 나누거나 가리지는 않아요.언제든 쓸 수 있으면 좋지요.
■ 김후영: 선생님 시에서 화자는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포옹」) 나, “빨강과 검정 사이에서 너의 머리카락은 매일매일 자랍니다.”(「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처럼 종종 색을 말하기도 합니다. 색채를 통해서 화자의 욕망을 읽어낼 수도 있을까요? 특별히 색채를 사용하는 의도가 있으신지요?
□ 김행숙: 어떠한 단어를 시에 썼을 때 그것은 시 속에서 작용을 해야 하는 거겠죠. 어학적인 작동을 넘어 화학적인 작용을 해야겠죠. ‘의도’라는 말은 시에 앞서 있는 생각 같아서 피하고 싶은 말이긴 하지만, 시가 씌어지면서 형성되는 의도까지 피할 수는 없겠지요.어쨌든 특별히 색채에 대해서 예민한 편도 아니고 고민을 많이 해보지도 않았지만, 「포옹」에서의 ‘검정’이나「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에서 ‘빨강과 검정 사이’에 한해 말하자면, 그것은 포옹이 만들어내는 색채이고 머리카락의 색깔이면서 침묵과 혼돈과 욕망이 표현되고 환기되는 감정적인 색깔이라고 느꼈습니다.
이곳에서만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다정함의 세계」전문
<이별의 능력>
■ 김후영: 선생님 시에는 ‘포옹’이나 ‘키스’ 또는 ‘호흡’ 같은 삶의 역동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독하거나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분리의 상태에 있거나 또는 ‘옆’에 있는 것이거나 혹은 “늘 좋은 음식을 먹고 있어요. 음식과 헤어지지 않아요. 당신과 헤어졌어요.”(「말라깽이 L의 식탐」)처럼 제목과 시어가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적 주체의 감정은 보이지 않는데요,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김행숙: 제 나름의 방식으로 감정이나 정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역설’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 역설 안에서도 혹은 사이에서도 감정이나 정서는 태어납니다. ‘나’라는 시적 주체나 시인으로 소급되는 감정보다 시의 감정을 많이 생각합니다.
■ 김후영: 평론가들이 선생님 시를 ‘난해’하다거나,‘모호해서 해석 곤란한’ 시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과 소통하려는 열망의 선두”에 있었다는 평가도 있네요. 제가 느낀 선생님 시는 내용보다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시는 내용들이 퍼즐처럼 흩어져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내용을 해체시킨 이유가 있으신지요?
□ 김행숙: 내용과 방법은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을 해체시킨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해체적’이라면, ‘해체적’인 것 자체가 내용이겠죠. 해체적인 방법으로 내용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저로선 시에서 내용을 추출하는 독법보다는 시 자체가 내용으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시는 다른 언어로 풀이되지 않으려고 해요. 그것은 소통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하게 소통하려는 거예요. 시는 간접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것이에요.
■ 김후영: 선생님의 산문 「숨 쉬는 일에 대하여」나 「가로수원근법의 끝에서」를 보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삶에 대해서 철학적 관점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데리다’나 ‘들뢰즈’를 좋아하는 느낌이 들었는데요,문학을 철학적으로 풀어낼 때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 김행숙: 「가로수 원근법의 끝에서」라는 산문은 「가로수관리인들」과 「가로수의 길」이라는 시를 쓰면서 또 쓰고 난 후에 ‘가로수’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생겨서 몇 편의 산문을 썼는데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 즈음에「가로수 논쟁」, 「가로수-로봇 프로젝트」 같은 제목의 산문을 썼더랬죠. 어떤 분명한 생각이 있어서 시를 쓴다기보다는, 시를 썼기 때문에 생각이 의식되는 경우가 있어요. 「숨 쉬는 일에 대하여」는 시 「호흡」 연작에 뒤따라 씌어진 산문이구요. ‘호흡’을 사유하면서 유년의 기억과 사랑의 기억들을 다르게 말해볼 수 있었어요. 저에게 이 질문은 문학과 철학의 관계보다는 시와 산문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렇게 질문을 바꾸어놓고 보면, 이 질문은 더 오래 제게 머물러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간 시와 더불어 썼던 산문들을 모아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조만간 책의 꼴을 하게 될 것 같은데, 시와 산문이 주고받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자리에서 네가 표지가 될 때
성립하는
장소
너처럼 일어선 장소에서
너는 걸어 나갔는데
다음 날까지
서 있는
그것은
세찬 물살처럼 거침이 없는 행인들을
전폭적으로
맞이하면서
장소는
어떻게 붕괴하지 않는가
어떻게 호흡하는가
5미터 앞에서 4미터 앞에서
나는 더욱 가까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발을 밀어 넣으면
나는 좁혀진다
좁은 곳에서
나는 혼자 싸우는 것 같다
방어하지 않는
그것은
나를 다음 블록으로 보낸다
「투명인간」전문
<타인의 의미>
■ 김후영: 선생님의 글들은 인문학적 기초가 없으면 읽기 어려운 느낌을 받습니다. ‘대중성’보다는 ‘전문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여겨집니다. 자연적으로 독자층에도 제한이 따를 것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해 줄 말씀이 있으신지요?
□ 김행숙: 독자는 제가 상상하거나 구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런데 ‘대중성’이나 ‘전문성’이라는 구획은 상상의 틀이죠. 글은 상상하거나 구성할 수 없는 독자를 향해 있습니다. 글을 통해 어떤 만남들이 만들어질지는 알 수 없고, 저는 그 알 수 없음이 좋습니다.
■ 김후영: 20년대 동인지나 근대문학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책을 쓰면서 지금 여기로부터 백 년쯤 후에 서 있는 한 인간을 상상해보곤 하였다.” “그 백년을 가로질러 우리가 있는 여기를 이해하는 일이 미래의 백 년에 대한 상상력과 접속하기를...... ”이라고 하셨는데 근대문학을 연구하시면서 성취하신 것이 무엇인지요?
□ 김행숙: 박사논문을 정리해서 낸 책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서문에 썼던 말로 대신할게요. 그런데 근대문학 공부를 접고 있는지라, 이렇게 내가 쓴 것에서 빌려오는 말도 어쩐지 아득하네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과의 대결을 통할 때만, 그리하여 그것과 충돌하고 그것 바깥으로 튕겨져 나올 때라야 현재적인 의미에서 지금도 문제적일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넘어서는 자리에서 ‘문학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주어지지 않은 역사’를 향해 열릴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 놓인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해명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구성되는 어떤 것이다. 또다시 백 년쯤 후에 우리가 놓인 ‘여기’는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물음이 자리하게 되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은 내일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를 질문하는 일과 겹쳐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다시 옮겨서 말해놓고 보니, 결국 뭔가가 모자라서겠지만 대답이 남는 것이 아니라 질문만이 남아 있네요.
■ 김후영: 인터뷰어로 활동하시면서 인터뷰한 내용을『마주침의 발명』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하셨네요.인터뷰 하시면서 가장 보람되거나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 김행숙: 어려웠던 점은 녹취록을 풀면서 녹음된 내 목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것. 은근히 말이 많았더라구요. 좋았던 점은 동료 시인들과 시 이야기를 지칠 때까지 나눌 수 있었던 것. 그들과의 만남은 내게 ‘창조적인 우정’에 대해 숙고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주침의 발명』이라는 책 제목을 생각할 수 있었죠.
■ 김후영: 귀한 시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차기 작품들이 기대 됩니다.
책이나, 사물이나, 사람 등 몸의 감각으로 부딪쳐 왔던 것,좋아하는 것을 만났을 때 김행숙 시인은 호흡곤란을 느낀다고한다. 생각하게 하고, 반응하게 하는 것들과 부딪치는 것이 행복이며, ‘책도 사람과 같다’고 말하는 시인은 경계를 두지 않는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