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천고사설
조선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가 서점(書店)의 개설여부이다. 문(文)을 숭상하던 나라로서 서점이 흥성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개국(1392) 후 140여년이 지난 중종 24년(1529)까지도 서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서점 설치에 큰 관심을 가진 인물이 어득강(魚得江)이었다. 중종 17년(1522) 사헌부 장령 어득강은 “중국에는 서사(書肆ㆍ서점)가 있으니 한양에도 서사를 설치하면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길 것”이라면서 서사 설치를 주장했다.서사(書肆)란 서적방사(書籍放肆)의 준말로서 오늘날의 서점(書店)이다. 중국처럼 조선에도 서점을 설치하자는 건의였다. 중종은 “지난 기묘년(1519)에 이미 절목(節目ㆍ법이나 조례)을 마련했다”면서 아직 설치하지 않은 이유를 해당 관청에 묻겠다고 답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중종 14년(1519) 7월조에는 실제로 “경성에 서사를 설치했다”는 구절이 있으니 이때 서점이 설치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광조 등이 피화(被禍)당한 기묘사화 이후 다시 없어졌는지 어득강은 사간원 대사간으로 있던 중종 24년 5월 다시 서점 설치를 주장했다.
어득강은 “세가(世家)나 대족(大族)들 중에는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서책도 혹 있고 하사(下賜)받은 서책도 있지만 거꾸로 쓸모없는 책도 많이 있을 것”이라면서 “서점을 세운다면 팔고 싶은 사람은 팔고, 사고 싶은 사람은 살 것이므로, 유생들이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책을 팔아 다른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게 됩니다”(중종실록 24년 5월 26일)라고 주장했다.
어득강은 조선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책을 파는 것을 그르게 여겨서 팔지 않으려 한다면서, “그러나 높이 쌓아놓기만 하고 읽지 않아서 좀만 먹는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중종 역시 “학문에 뜻을 두고도 책이 없어서 독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라면서 “내 생각에는 서점을 설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찬성했다. 임금까지 서점 설치를 찬성했지만 이때도 설립은 실패했다. 어득강의 건의 당일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심정(沈貞), 우의정 이행(李荇)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조선 풍속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유였다.
서점이 없다보니 조선의 책값은 크게 비쌌다. 어득강의 말에 따르면 대학(大學)ㆍ중용(中庸)의 가격이 상면포(常綿布) 3, 4필에 달한다는 것이다. 약 30여 년 후인 명종 6년(1551) 5월 26일 사헌부에서 “우리나라에는 백가지 물건을 다 시전(市廛ㆍ시내 가게)에서 매매하는데 유독 서적 파는 곳만 없다”면서 서점 설치를 주장했다. 그런데 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날 사헌부는 스스로 ‘서사(書肆)의 법’, 즉 서점설치법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만들어 아뢴 것이 아니라 중종 때 만들었다가 시행하지 않았다면서 번거롭게 다시 논의할 것은 없다고 스스로 철회했다. 송사(宋史) ‘여조겸(呂祖謙) 열전’에 이미 서점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에는 일찍부터 서점이 있었는데, 조선의 사대부들이 서점 설치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서적 구매에 대한 수요가 꾸준했으므로 공급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책쾌'라는 직업이 생겼는데, 쾌는 거간이란 뜻이다. 그런데 조선 영조 47년(1771) 청나라에서 들여온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유통시키다가 책쾌 이희천(李羲天), 배경도(裵景度) 등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인(朱璘)이 지은 명기집략은 조선 왕실의 선원(璿源ㆍ왕실 족보) 계보를 왜곡한 책이었다.
태조 이성계를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하고 인조에 대해서도 그 계보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8명이 종이 되어 흑산도로 유배 갔으니 역사상 최대의 서적상 탄압사건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서적에 대한 수요는 꾸준해서 전문적으로 책을 필사하는 직업이 생기고 이런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이 생겨났다.
그리고 필사만으로 수요를 대지 못하자 민간에서 목판으로 각서(刻書)해서 민간서점에서 판매하는 서적들이 생겼는데, 이를 가게 방(坊)자를 써서 방각본(坊刻本) 서적이라고 한다. 방각본 서적은 일찍부터 유통되었는데 현재 고사촬요(攷事撮要) 마지막 장의 간기(刊記)에 ‘만력(萬曆) 4년(1576ㆍ선조 9년) 7월’에 발행했다면서 “수표교 아래 북변 이제리(二第里)에 사는 하한수(河漢水)의 집에서 각판했으니 살 사람은 찾아오시오”라고 한 기록이 있다.
고사촬요는 명종 9년(1554) 어숙권(魚叔權)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인데, 불과 20여년 후에 방각본이 나온 데서 지식에 대한 수요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2014년 11월 21일부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있다. 침체된 출판시장에 대한 출판계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는데,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점이 있으면 보완해가면서 대한민국을 지식강국으로 만드는 견인차가 될 수 있을까 주목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도서정가제
2014년 11월 21일부터 도서정가제를 수정 시행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개정된 도서정가제는 과도한 가격 경쟁을 막고, 소형 출판사와 서점들의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것으로 모든 서적의 할인율을 15% 이내(현금 할인 10%+간접 할인 5%)로 제한, 무분별한 가격 경쟁을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할인폭에 제한이 없었던 기증도서와 실용서, 발간된 지 1년 반이 지난 중고책을 정가제에 포함하고 오픈 마켓도 가격 규제 대상이다.
비판
도서정가제는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도 실행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2년 이상 지난 도서에 대해서는 할인율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 이 법안을 낸 최재천 의원은 그걸 미시적인 부분, 세부적인 부분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의 말을 인용해 '책은 상품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관점이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통이나 출판, 독자의 입장에서 책의 상품적인 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세상엔 언제까지나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문학작품도 존재하지만, 6개월만 지나도 그 가치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최신 기술 서적들도 존재한다.
그 외에도 유럽과 한국의 도서구매력의 차이, 책 값의 거품이 정말 꺼질 것인가, 구간 도서들의 가격 재조정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가 등 비판의 여지가 많다.
도서정가제는 원래 2003년부터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