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송시열과 화양구곡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3.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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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송시열과 화양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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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7. 22:25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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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송시열과 화양구곡
선유동에서 송면리를 지나 화양천을 따라 내려가면 화양구곡에 이른다.
『택리지』에는 화양동계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파곶 물이 여기에 와서는 더욱 넓어지고 돌과 바위도 또한 더욱 기이하다. 우재 송시열이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떠서 그 가운데다 집을 지었다. 또 주자가 대의를 회복하던 일을 모방하여, 이곳에서 명나라의 신종(神宗) 황제를 제사하다가 후일에는 사당을 세워 만동묘라고 이름 지었다. 송시열은 이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푸른 물의 숙덕거림은 성낸 것 같으니
푸른 산의 잠잠함은 찡그리는 것 같구나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으로, 황양목(회양목)이 많으므로 황양동(黃楊洞)이라 불렸다. 그러나 효종 때의 정치가인 우암(또는 우재) 송시열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현천리를 병합하여 화양리라 해서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하였다. 화양구곡과 만동묘 그리고 화양동서원이 있는 이곳 화양동계곡은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에 들어앉아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화양동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다. 입구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1곡부터 9곡이 펼쳐진다.
제1곡인 경천벽(擎天壁)은 화양천 건너편에 높이 치솟은 바위벽으로 큰 바위가 공중에 높이 솟아 마치 하늘을 떠받친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천벽 아래쪽에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 쓴 송시열의 글씨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다리를 넘어서면 화양구곡 중의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이다. 계곡에서 빠르게 흘러내려온 맑은 물이 잠시 고여 숨을 가다듬은 뒤 내려간다는 이곳 운영담의 바위 위에는 주자의 시인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의 뜻을 따서 ‘운영담’이라는 글씨 석 자가 새겨져 있다.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은 계곡을 향해 퍼져 누운 너부죽한 바위인데, 이 바위 위에서 송시열은 돌아간 효종 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에 엎드려 곡을 했다고 한다. ‘순임금이 죽은 후 신하가 칼과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읍궁암을 지나면 하마비를 만나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대기침을 당했다는 하마비 오른쪽에 그 이름 높았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화양동
화양동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온 나라에 걸쳐 44개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의 서원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서원이 된 화양동서원은 건립 당시 소론 측의 반대를 받아 공사가 중단될 뻔하기도 하였다.
노론 측의 강력한 요구와 임금의 특별 배려로 설립된 이 서원은 1696년 대사성 이여가 사액(賜額)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사액을 받았고, 영조 때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해져 국가의 물질적 지원은 물론이고 유생들이 땅을 기증하여 강원도를 비롯한 삼남 일대에 토지가 산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서원은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갔다. 제수전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하여 때로는 관령(官令)을 능가할 정도였다.
‘서원의 제수 비용이 필요하니 어느 날까지 얼마를 봉납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수령들에게는 통문을 보내 축출을 했고 복주호(福酒戶)와 복주촌(福酒村)을 운영하며 양민들에게 피역(避役)을 시켰다. 또 그 대가로 돈을 거두어들이며 이를 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사형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폐습이 심화되자 1858년 영의정 김좌근이 복주촌 폐지를 요청했고 1871년에는 노론 사림들의 반대에도 서원이 철폐되었다.
선유동에서 송면리를 지나 화양천을 따라 내려가면 화양구곡에 이른다. 화양구곡과 만동묘 그리고 화양동서원이 있는 이곳 화양동계곡은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에 들어앉아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그는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화양동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열과 화양구곡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