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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때 강함이 되신 주
마가복음 13:28~37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하였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4강 신화를 이루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런 결과에 대하여 온 국민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쾌거를 이룬 배경에는 네델란드의 축구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의 지도력이 크게 작용하였는데 그 골격은 ‘기본에 충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을 충실히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제가 부목사로 재직할 때에 담임이셨던 정진경 목사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 중에 인상이 깊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계의 상징적인 인물이셨던 한경직 목사님을 교계의 중진들과 함께 병문안을 위해 남한산성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화입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올 때 “저희에게 좋은 말씀 한마디 해 주세요.”라고 하자, 골똘히 생각한 후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평생을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노년의 목사님이 내린 결론은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며 기본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이 내게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막13: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무화과나무가 많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열매를 제공합니다. 예수님이 앉아 계셨던 감람산 주변에도 무화과나무는 쉽게 눈에 뜨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화과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유월절을 앞둔 4월, 곧 봄이었습니다. 이때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었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특징은 잎사귀보다 열매가 먼저 나온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먼저 설익은 열매를 냅니다. 그런 후에 잎사귀를 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설익은 열매는 점차 굵어지고, 또한 점차 익어갑니다.
바로 전날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나오셔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길가에서 잎사귀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무화과나무는 잎사귀보다 열매를 먼저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에는 잎사귀만 있었을 뿐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무화과가 아무리 푸르고 잎사귀가 무성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쓸모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마지막 종말의 때가 이르렀는데 정작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면 그간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헛되게 돌아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가 점점 그 윤곽을 드러내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시점에 사는 저와 여러분이 열매를 맺고 주님의 오심을 환영하기 위하여는 초대교회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주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늘 평강을 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가졌던 믿음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비유를 통하여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대하여 징조를 통하여 알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13: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이때의 너희는 일차적으로는 예수님를 따르는 제자들을 말합니다만 모든 시대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또한, 여기서 ‘이런 일’이란 표기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단수형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이런 일들’ 곧 복수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뜻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말씀하신 여러 가지 일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날짜를 꼭 집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재림이 깜깜하게 닫혀 있는 것은 압니다. 징조를 통하여 그때를 알 수 있고,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막 13: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 마냥 늦춰지는 것이 아니라 시급하게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래 세대라는 말은 부모와 그 뒤를 잇는 자녀 사이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평균적으로 말해서, 짧게는 30년에서 길게는 40년 정도의 기간을 뜻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이 세대’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이천 년이나 지났지만,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세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세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림의 모든 징조를 자기 눈으로 보는 세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에서는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라나타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마라나타입니다. 초대교회는 ‘마라나타’를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기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사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속히 오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서 속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속히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믿음이 있기에 세상에 휘말리지 않고 경건을 유지하며 믿음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막 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하였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마가복음 13:32-37에서 네 번씩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조금도 중단 없이 항상 깨어 있을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 는 말씀은 ‘깨어 있어 대망하라’, ‘깨어 있어 대비하라’ 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하심은 ‘경계심을 가지고 깨어 있어 대망하고, 대비하라’ 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라는 말은 원어로 ‘아그뤼프네오 ἀγρυπνέω’라고 하는데 ‘잠자지 않고 있다, 깨어 있다, 지키다’를 의미합니다. 즉, 나와 구원자 예수님의 관계를 분명하게 인식할 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구원자 예수님은 목자로 그리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양의 특성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양의 희생적인 이미지에 감동 받은 나머지 양을 무조건 예쁘고 순수하게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백성을 양이라 부른 것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입니다. 양은 약하고 모자라는 동물의 대표적인 존재입니다. 오랫동안 팔레스틴 베드윈 목자들의 삶을 관찰해 왔던 한 학자의 보고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어리석은 동물이 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돌아 보십시오!
아무리 깨어 있으라 해도 기억력이 약하고 우둔한 양처럼 우리는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오직 목자 되신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나를 순간마다 일깨워 주시고 다스려 주셔야 주님의 때를 기억하고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나의 약함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이것이 겸손한 성도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고후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주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늘 평강을 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지진과 기근같은 자연재해가 빈번합니다. 난리와 전쟁이 많아집니다.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무자비한 시대가 됩니다. 진리를 미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모습이 종말의 징조를 확연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무서운 재앙의 때를 피하거나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막 13: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수많은 약속 중의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앞두고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이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적으로 환호를 질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이를 외면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41절에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울다’란 동사 ‘클라이오’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는 단어의 ‘다크뤼오’ 와는 달리 크게 우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보면, 거기엔 결코 평화라곤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러 번 함락되고, 부서지고, 재건할라치면 또다시 함락되고 파괴되었었습니다. ‘평화의 성’이란 이름을 가졌지만, 평화가 없었고, 여러 번 정복되고 함락당하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사실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병아리를 길러 어미닭이 되게 하였고, 그 어미 닭으로 알을 품게 해서 병아리를 부화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미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마당에서 보이를 헤쳐 먹이고 있는 한편에서 솔개가 쓱 날아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 암탉이 깃털을 곤두세우고 ‘구~~구’거리며 병아리 새끼들을 품 안에 안고는 하늘을 향하여 푸드덕 거리며 솔개를 향하여 소리내며 물리치는 장면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미물(微物)인 닭도 제 새끼를 이렇게 보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자녀들을 얼마나 지켜 보호하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말의 때를 전무후무한 재난과 화난이 일어날 때 우리가 마음에 동요하지 않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사모하는 마라나타의 신앙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십시오!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인 신뢰를 가질 때 나는 비록 연약하나 강함의 주가 되시는 주님의 팔이 나를 안위하시고 어떤 상황과 여건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내가 강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할 때 나의 믿음은 커지고 온전히 주님께 나를 맡길 수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이 되신 주님을 철저하게 믿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