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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7:1-16]
“어둠의 한복판에서 소망을 노래하라”
어릴 적 추석과 같은 명절에
시골 할머니 댁에 종종 갔습니다.
가는 동안 내내 기분이 설렜습니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바닷가도 갈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밤이 되면 화장실에 가기 어려웠어요.
화장실이 옛날 재래식인데다가
마당을 지나 15미터는 가야 했거든요.
보름달이 뜬 날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달이 점점 작아지고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되면 위험하죠.
앞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에도
영적인 빛이 사라진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합 왕 시대입니다.
그가 왕이 된 후부터 영적인 어둠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뒤덮었습니다.
전국에 몫이 좋은 자리마다
바알과 아세라 신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채
아합의 지시를 따라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만 섬기는 선지자들은
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그의 등장은
어둠 속에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엘리야가 누군가요?
그의 이름부터 특별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란 의미를 가졌죠.
구약에서 최고의 선지자를 한 명 꼽으라면
바로 이 사람이 뽑힐 것 같습니다.
그의 업적 중에 가장 유명한 일이
바로 ‘갈멜산 전투’입니다.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홀로 싸워서 이긴 사건입니다.
또한 그는 에녹과 더불어 죽지않고
천국에 올라간 유이한 인물입니다.
죽지 않고 천국에 갔다니,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뻐하셨으면
이런 은혜를 입었을까요?
이 엄청난 인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오늘 본문 1절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열왕기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성경에 보면 위대한 인물을 소개할 땐
보통 출신에 대해 길게 적어 놓습니다.
어디 지역 출신이며,
아버지는 누군지도 적어 둡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베들레헴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새’입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 중
세 명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엘리야는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라고만 나왔죠.
길르앗은 요단 동편을 의미합니다.
디셉도 길르앗이란
동네의 성읍 이름입니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출생 연도도, 출생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무명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성경 속에 등장하는
어떤 선지자들보다
더 임팩트 있는 업적을 남길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 엘리야는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소개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가 아합 왕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처음 보는 왕 앞에 서면
당연히 떨리지 않았을까요?
제가 군대 있을 때
공군 참모 총장님이
저희 부대에 오신다는 겁니다.
저희 부대는 방공포였는데,
화성시 남양에 있습니다.
화성시청이 있는 그곳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발전해서
신도시처럼 되었더라고요.
군필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별이 온다고 하면 부대가 난리납니다.
여기저기 쓸고, 닦고, 조이고,
부수고를 반복하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참모 총장님이
식사까지 하고 가신다는 거였습니다.
요즘 장병들의 식사가
궁금하시다는 거였죠.
그래서 각 계급별로
한 명씩 사람을 뽑았습니다.
6인용 테이블에 가운데
참모 총장님이 앉으시고,
옆에는 포대장님이 앉으셨습니다.
그 주위를 빙 둘러서
이등병, 일병, 상병, 병장이 앉았습니다.
그 테이블에 안타깝게도
제가 앉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있었던 어떤 일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뭘 먹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런 면에서 엘리야가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것도 역대 최악의 왕인
아합 왕이었습니다.
온 나라를 바알 천지로 만든 장본인이죠.
그런데 그 앞에서 엘리야는
이렇게 신앙 고백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긴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단어는
영어로 ‘serve’라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좀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한
NASB에는 ‘stand’라고 기록되었죠.
다시 말해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만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아합이 왜 바알을 신으로
떠받들었겠습니까?
바알은 비와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비는 꼭 필요한 것이죠.
그러니 바알 신에게 비를 간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가만 보니 주변에 잘 나가는 나라는
모두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합도 바알을 섬기고 나서
나라가 더 잘 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실제로 아합 왕은 22년이나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은
경제와 군대가 모두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죽어 있는 신과 같았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의 ‘여’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쟤가 제정신이야?
어디서 굴러 먹다 온 놈이야?’
황당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뒤이어 엘리야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비와 풍요의 신’인
바알을 무시하는 말 아닙니까?
우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바알은 무능한 신이죠.
어떻게 엘리야는 이처럼
용기 있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두렵지 않았죠.
하나님 앞에 서 있고,
그분만 섬기는 자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 시킨 사람입니다.
골리앗 앞에 다윗이 그러했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골리앗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왕 사울도 텐트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 없노?”를 외치고 있었죠.
바로 그때 다윗이 나타나 말합니다.
사무엘상 17: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윗은 알았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골리앗이라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 아니었겠습니까?
아무리 아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그저
작은 모기 한 마리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기가 윙 거리면 어떻게합니까?
손바닥으로 탁 쳐서 잡으면 됩니다.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향해 외친다해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보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처럼
하나님만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2) 두 번째로 엘리야는
인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떠나 그릿 시냇가에 가라.
거기서 너를 먹이리라”
그릿 시냇가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대략 요단 동편에 있는
작은 시내로 예상합니다.
히브리 말로 ‘와디’라는 건데,
이건 비가 오면 물이 흘러 시내가 되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마른 땅처럼 되는
‘간헐천’입니다.
이곳에서 엘리야는 까마귀를 통해
배달되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가 무료 배송되었습니다.
따로 주소를 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친히 까마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까마귀가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잡식성인데 썩은 고기까지 먹을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까마귀의 입맛을 뚝 떨어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엘리야에게 한곳 배송이야”
라며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상식적인 방법으로도 역사하지만,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지난 금요일에
교회 앞 계단 공사가 끝났습니다.
얼마나 예쁘고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작업자 한 분과 대화를 나눴는데
여기에 쓰인 나무들이
해외에서 온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가장 좋은 자재만 쓴 거라
적어도 50년은 끄떡없을 거라 하셨어요.
그만큼 자부심도 상당하셨습니다.
이 계단 공사엔 비밀이 있습니다.
제가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위험하다고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겨울철엔 너무 미끄러워서
넘어질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에 기도했죠.
‘이거 신도시 생길 때까진 버티게 해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게 역사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요청한 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위에 공원과 더불어
계단까지 깔끔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신뢰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엘리야는 시내가 마를 때까지
이곳에 숨어있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엘리야처럼
한 곳에 머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매일 아침과 저녁이 제공된다 하더라도
아무도 없는 시냇가에서
숨어 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식물도 죽어서
낮에는 살 수 없었겠죠.
저라면 당장 포기하고
살만한 곳을 향해 떠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라하신 자리에서
머물렀습니다.
다음 음성을 들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직장을
쉽게 그만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워도
꾹 참고 견디는 청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전과 달리 요즘 세대는
좀 더 인내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부모님 세대는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는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돈을 법니다.
그러니 ‘My Life’가 보장 되지 않는 직장은
인기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도 비슷합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 예전에는
‘은혜받으면 그만’이었다면,
이제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교회’를
선택하려 합니다.
그것이 꼭 은혜만은 아니죠.
인간 관계라던지,
사업적인 이익을 위해
교회를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이러면 신앙 생활을 하다가 문제를 만나면
쉽게 교회를 등지기도 합니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기고 맙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과의 약속도 쉽게 어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생명 값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입니다.
그 큰 사랑을 받은 자인데,
어떻게 쉽게 포기합니까?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눈 앞에서 시내가 말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언제쯤인가요?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까마귀가 오긴 오나요?’
그에게 하루하루는
생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움직이지 않았어요.
말씀하신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를 먹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삶에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아직 때가 아니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가장 놀랍게 일하실 줄 믿습니다.
그때까지 인내로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길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내해야 할까요?
엘리야처럼 인내했던 인물이
또 등장합니다.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수산 궁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국인 이스라엘이
완전히 패망했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으며,
성문은 불에 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반응이
느헤미야 1장 4-5절에 등장합니다.
느헤미야 1:4,5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비극을 듣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는 인내하며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인내할 때 기도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응답이 오기까지
그가 기도했던 시간은
최소 4개월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그를 불러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사실 제 고향 땅에
성문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벽 재건을 위해
다녀와도 되냐고 묻습니다.
왕은 흔쾌히 그의 부탁을 허락합니다.
그렇게 성벽 재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생각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는 왕궁에서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이 직책은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습니다.
왕의 측근만이 할 수 있었죠.
혹시라도 술에 독을 타면
즉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느헤미야의 역할을 중요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전에 한국 교회는
‘은혜받으면 장땡’이란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교회에 빠지면
믿지않는 가족이나 직장 동료가 싫어했습니다.
기도원 간다고 애들 밥도 안 챙겨 주는 분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직장에서도 예배에 간다고 하며
자기 할 일도 안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러지 않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은혜를 받아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더 열심히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됩시다.
목회자라면 성도를 더 사랑하고
교회와 가정을 같은 마음으로 돌봐야 하죠.
직장인이라면 주께 하듯이
회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학생이라면 공부하는 걸
게을리 마십시오.
하나님은 준비된 그릇을 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자성어 중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는 말씀이죠.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당장 내 뜻대로 사는 게 맞는 것 같아도
인내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면
더 좋은 길이 열립니다.
이 은혜를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3)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릿 시내가 말라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시돈에 있는 사르밧에 가서 거기 머물라.”
시돈이라는 땅은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항구 도시입니다.
바로 그 근처에 사르밧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의 땅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주어지자 엘리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10절에 보면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갔다”고 나왔습니다.
엘리야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떠올랐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창세기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곧장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런 순종의 자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순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9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께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고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는 말씀이죠.
정말 그랬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비가 다시 올 때까지
3년이나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의식주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똑같았습니다.
그가 이삭을 드리기로 결단하고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이미 예비하신 숫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 자리에
숫양을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두려움 아닙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생명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세요.
조급함을 버리길 축복합니다.
조급함 역시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뜀틀을 뛰어보셨습니까?
뜀틀을 잘 뛰기 위해선
발 구름판을 잘 밟아야 합니다.
멀리서 뛰어 오다가
발 구름판을 밟을 땐
잠깐 멈추며 몸을 움크립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발을 탁 튀기면
몸이 날아오릅니다.
그렇게 뜀틀을 넘어가죠.
이런 면에서 볼 때 인내는
순종을 위한 발 구르기와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인내는 순종과 연결됩니다.
인내하며 기다렸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말씀을
더 분명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순종은 거름과 같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 모두 순종함으로
믿음의 거목이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둠이 가득했던 시대에
영웅과 같은 주의 종을 세우셨습니다.
초대 교회가 네로 황제에게
엄청난 박해을 받았을 때,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습니다.
중세 시대 기독교가 변질되어
돈을 사랑하게 되자,
하나님은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을 부흥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도
과학의 발전과 이성주의로 인해
신앙에 균열이 일어났을 때,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등과 같은 인물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들은 영국과 미국에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죠.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1900년 대 초, 조선이 힘을 잃어가고
강대국들에게 치이며,
일제의 시퍼런 칼날이
목에 드리워졌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디 선교사와
길선주 장로와 같은 분들을 통해
평양에서 부흥 운동이 일으키셨습니다.
이처럼 어둠이 짙어갈수록
하나님의 사람은
더 반짝이며 빛이납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가
바로 이런 상황 아닙니까?
지금 주님은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비록 무명으로
평생 살아온 엘리야였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자
누구보다 가장 멋진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그에겐 평생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과
주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
그리고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통해 함께했던
사르밧 과부도 변화됩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의 한숨을 바꾸시고
새로운 기적의 도구로
만들어 가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