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세존께서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付巖洞)에 올라 오셔셔 한동안 머무시다가 다시 인천을 거쳐 김제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로 가셨도다。 그리고 금산사를 떠나신 후 바로 공주 계룡산 갑사(甲寺)와 신원사(新元寺)를 거쳐 논산 관촉사(灌燭寺)의 은진미륵을 살펴보신 후 군산(群山)으로 가셨다가 다시 금산사를 둘러보신 후 조치원과 수원을 거쳐 무신년(一九六八) 가을에 안양(安養) 견불산(見佛山) 수리사(修理寺)에 이르셨도다。
39. 이때 김기태ㆍ김하정ㆍ김영진ㆍ이종식ㆍ이학녕 등은 세존께서 명하신 바에 따라 지방 도인들을 수습하는 한편 수시로 세존께서 순회하며 공사 행하시는 곳을 찾아와 시종하였도다。세존께서 안양 수리사(修理寺)에 공부실(工夫室)을 마련하시고 四十九일을 한도수로 정하여 불음불식(不飮不食)과 불면불휴(不眠不休)하시며 공부를 하셨도다。이때 김용수가 시종을 들고 안준순 등이 간헐적으로 모시었도다。
40. 세존께서 부산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거쳐 온 사찰은 모두 미륵불과 연관된 사찰들이었도다。 미륵세존이 이 땅으로 오시게 되는 연고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보살로부터 계시를 받고 금산사에 미륵전을 세우면서부터 비롯되니라。 진표율사는 十二세에 출가하여 금산사(金山寺) 숭제법사로부터 사미계(沙彌戒)를 받았으니, 이때 스승이 이르길 「미륵보살께 나아가 지성껏 구하며 참회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전하라。」 하니라。 이에 율사는 二十七세가 되던 상원(上元) 원년 경자년(庚子年)에 부안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보살상 앞에서 계법을 구하기 위해 정진하니라。 그러나 三년이 지나도록 계법을 받지 못하자 분에 차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니 홀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받아 바위 위에 올려놓는지라。 이 일로 용기를 얻은 율사는 다시 뜻을 세워 삼칠일(三七日)을 기약하고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온몸을 바위에 던져 참회하니 힘줄이 드러나고 피가 흘러 처참한 몰골이 되니라。 七일 째 되는 날 지장보살이 나타나 몸을 어루만지자 손발이 전과 다름없이 되었도다。 율사는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 정진하니 삼칠일(三七日)이 되어 드디어 천안(天眼)이 열리고 도솔천 천중(天衆)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니라。 미륵보살이 지장보살을 대동하고 나타나 율사에게 이르시길 「장하다, 대장부여。 이 계를 구하기 위해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지성으로 참회함이여。」 하고 계법을 일러주고 두 개의 표찰을 내리니 팔자와 구자가 적혀 있었도다。 율사가 금산 숲에 내려와 금산사를 중수하니 미륵보살께서 다시 내려와 이르시길 「사답(寺畓) 칠두락(七斗落)의 용추(龍湫)를 메워서 그 자리에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상하라。」고 이르시니라。 율사가 용추못을 흙과 돌로 메우고자 하였으나 이곳은 원래 구룡소(九龍沼)라는 전설이 전하는지라 깊이가 한정 없어 도저히 메울 수가 없게 되니라。 율사가 다시 미륵보살께 정성을 드리니 현신하셔서 「숯으로 메우라。」는 계시가 내려지니라。 그러나 이 넓은 연못을 어찌 숯으로 다 메울까 율사가 걱정하자, 미륵보살께서 「이제 세상에 눈병이 돌 터이니 너는 마을로 내려가 용추못에 숯을 한 짐 구워 넣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고 방을 써 붙여라。」고 이르시니라。 과연 며칠이 지나자 온 마을에 눈병이 돌자 율사는 마을로 내려가 방을 써 붙이게 되니라。 이를 믿으려 하는 자가 없었으나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도 낫지 않자 방법이 없는 병자들은 숯을 구워 용추에 넣고 눈을 씻으니 정말 씻은 듯이 낫는지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숯을 구워 넣으니 용추는 순식간에 숯으로 메워지게 되었도다。 율사는 쇳물을 녹여 미륵장륙상을 주조하고 금박을 입혀 금불(金佛)을 조상하고 돌로 된 석련대(石蓮臺)를 놓고 장륙상을 봉안코자 하였으나 하룻밤 사이에 번개로 인하여 십여 장이나 밀려나 버리니라。 다시 원 자리에 옮겨 놓기를 반복하여도 또다시 밀려나 버리니 율사는 잘못되었음을 알고 또다시 미륵보살께 정성을 드려 방법을 청하니 미륵보살께서 「숯 위에 무엇이 놓이겠느냐。 솥과 시루를 얹도록 하라。」고 이르시니라。 그리하여 율사는 연못을 숯으로 메우고 그 위에 시루와 솥을 좌대로 놓고 그 위에 미륵장륙상과 좌우 보불을 조상하여 미륵삼존불상(彌勒三尊佛像)을 봉안(奉安)하고 미륵전을 지어 남쪽 벽에 미륵보살이 하강하여 계를 내리는 모양을 그렸으니 이때가 통일신라시대 혜공왕 二년 병오년(七六六) 五월 一일이니라。
41. 도솔천(兜率天)의 천주(天主) 미륵보살은 인세에 있을 당시 아일다(阿逸多)로써 그는 석가모니불로부터 장차 불운(佛運) 三千년이 다하는 말법의 때가 되면 인세에 다시 하생(下生)하여 미륵불이 되리라는 수기(受記)를 받았다고 『미륵 삼생경』에 전하여지도다。 인간세상이 말법 때를 당하여 온갖 겁재에 휩싸여 진멸할 지경에 처하게 되자 원시의 신성ㆍ불ㆍ보살 등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게 되었으니 이때 신성ㆍ불ㆍ보살을 회집하여 구천상제(九天上帝)께 하소연한 주체자(主體者)가 바로 미륵보살이니라。
42. 세존께서 수리사(修理寺)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서울 구의동(九宜洞)에 거처를 마련하신 후 안준순(安俊淳)ㆍ서대원(徐大源) 등에게 도장 터를 알아보게 하시었도다。
43. 이에 안준순ㆍ서대원 등이 중곡동 용마산(龍馬山)에 와 각자 도장자리를 찾으니라。 안준순이 긴 고랑을 건너 산 중턱 복바위 쪽으로 가고 있는데, 홀연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의 주인(主人)을 모시고 오라。」 하는도다。 안준순이 놀라 황급히 물러나와 세존께 이 사실을 고(告)하니 세존께서 임원들을 대동하시고 용마산 중턱 지금의 중곡도장 자리에 이르시니라。 세존께서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시고는 「이곳이 바로 천장길방(天藏吉方)의 자리로다。」 하시고는 땅을 사들이게 하셨도다。
44. 예로부터 용마산 복바위 아래 부근은 근처 동리 사람들에게 신성시되던 곳이었도다。 이 복바위 아래 지금의 영대가 모셔진 자리에서 미륵불(彌勒佛)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는 모습이 주민들에 의해 가끔 목격되기도 하였다고 전해지도다。 세존께서 중곡도장의 자리를 잡으실 즈음에 중곡동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이 지역은 새 서울로 불렸도다。
45.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조선이 개국된 후 새로운 도읍지를 찾고자 이곳 용마산 아래까지 왔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도다。 백두대간을 따라 흘러오던 산맥이 금강산 북쪽 언저리에서 시작되어 북한강 상류를 타고 광주산맥을 이루었으니, 이 산맥은 도봉산ㆍ북한산ㆍ인왕산의 양(陽) 기운을 이루고, 또 한줄기는 수락산ㆍ불암산ㆍ용마산의 음(陰) 기운을 이루었도다。 태조 이성계의 부탁을 받은 무학은 먼저 당시 도읍지로 유력시되던 계룡산을 둘러보았으나 지기가 발음(發蔭)하기에는 시기가 맞지 않다고 하여 다시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느니라。 한강 아래에 있는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무학이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작은 산등성이를 넘자 청계천 옆으로 넓게 펼쳐진 들이 한눈에 들어왔도다。 이곳은 불암산에서 용마산에 이르는 산맥 아래에 넓은 평지를 이루는 곳으로 배산임수지(背山臨水地)를 이루고 있었도다。 지세를 살펴보니 용마산이 둘러쳐지고 한강이 돌아들어 오는 천하에 없는 명당이라, 도읍을 이곳에 정하기로 작정하고 용마산 기슭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도다。 그런데 무학의 꿈에 산신이 나타나 흙 한 줌도 건드리지 말라고 호통을 쳐서 꿈에서 깨어 다시 지세를 잘 살펴보니 이곳은 한 나라의 왕이 앉을 자리가 아니라 천자(天子)가 앉을 자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니라。 그때야 「아차, 실수했구나。」 하여 그 산 이름이 아차산이 되었다는 설이 전하여져 오고 있도다。
46. 산신에게 놀란 무학이 다시 도읍지를 찾아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한 노인이 소를 몰고 가며 말하길「이 미련한 소야。 미련하기가 꼭 무학(無學) 같구나。왜 바른길로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하며 채찍질을 하였도다。무학대사가 놀라 농부를 바라보니 농부가 다시 말하길「앞으로 십 리는 더 가야 하는데 여기서 머뭇거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하고 소를 보고 꾸짖는도다。 무학이 농부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십 리를 더 가니 과연 뛰어난 명당이 있어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전해지니라。 그때 농부가 십 리를 더 가라고 한 자리가 바로 왕십리(往十里)이며, 도읍 터가 바로 경복궁 터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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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는 수리사(修理寺) 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와 있다. ....
수리사(修理寺) 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으니 마저 볼 필요가 있다.(...요새는 공부하기 좋은 세상이다...)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wDArpOdys8k&t=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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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미륵전에 미륵으로 응해계시다가 인간계의 인간으로 강세를 박우당님께서 하셨다는것인가? 박우당님께서는 미륵전에 미륵으로 응해계시다가 인간계의 인간으로 강세를 하신것이 아닌 ~강증산 구천상제님께서 미륵으로 응해계시다가 인간계의 인간으로 강세를 하셨습니다 상도방면이나 상도에서 파생된 단체 상도에서 잠시 머무르면서 수도를 했던분들 미륵세존 하감지위로 밝혀 모셨지만 이것이 오류다는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원점에서 새롭게 박우당님의 원신에 신위를 제대로 밝혀 모셔야 합니다 강증산 구천상제님께서는 미륵으로 오셨고 두분 조정산님 박우당님께서는 미륵의 일을 완성을 하실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상도를 아시는분들은 이 미륵세존 하감지위에서 벗어나질 못하므로 ~종단대순진리회에서 박우당께서는 상도방면에 수임선감 이셨던 분에게 종통을 내려주신 것이라 착각을 한것일뿐 상도방면도 타 방면처럼 다 박우당님앞에 수도인들 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