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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7,25-31>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오늘 여러분은 행복하세요?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라는 두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 선언은 현실을 넘어있고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 전환을 요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것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거나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거나,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며, 혹은 그저 오손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당신이 하신 것처럼,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6,22)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 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아들 때문에 행복하길>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를 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하여라."
그래서 젊은이는 큰소리로 외쳤답니다.
"머리 돈 여자!"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
‘머리 돈 여자!’ 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골로 3,2).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골로 3,9-10).
참된 행복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을 차지하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얻으려 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뿐입니다.”
(성 베르나르도)
'사람의 아들 때문에'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 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시편 1,1-3)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 청주교구 대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잊는 유일한 행복의 요건>
'금쪽같은 내새끼' 112회 ‘부모의 이혼과 재혼을 겪는 금쪽이, 불안과 구토 증세의 이유는?’에서 심하게 분리불안을 겪는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집에 들어와 엄마가 없으면 심하게 불안해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무조건 들어오라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펑펑 서럽게 웁니다.
그러다 먹을 것을 생각하면 금새 울음을 그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폭식합니다.
엄마를 찾는 행위가 분명 생존본능 때문임을 입증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음식이 떨어져갈 때 아이는 다시 급히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합니다.
결국 음식으로는 엄마를 대체할 수 없음을 몸이 아는 것입니다.
아이는 잠을 혼자 자지 못합니다.
옆에서 엄마가 손을 잡아주고 같이 자야만 잠이 듭니다.
안 그러면 기침하다가 또 구토합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아닌 아이와 같이 잠을 자야만 합니다.
금쪽이가 이렇게 엄마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아빠가 자신에게 신체 접촉도 안 해주고 놀아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금쪽이가 네 살 때 엄마와 결혼하였습니다.
엄마는 재혼이었지만 아빠는 초혼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남의 자식이라 야단도 칠 수 없고 신체 접촉도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아빠를 이상하게 여길까 봐 주저합니다.
금쪽 처방으로 아빠는 금쪽이를 하루 세 번 안아주어야 하고 자주 놀아주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빠는 피곤하지만 아빠의 역할을 다해줍니다.
그러니까 금쪽이가 너무 좋아합니다.
급기야 폭식 성향도 줄어들고 잠도 혼자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잠을 잘 때 부모가 지켜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압니다.
참 행복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부모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가 나의 참 생존을 책임져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아니면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지나고 어른이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았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게 됩니다.
자신은 인간이며 진화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존재로 믿습니다.
이제 자기 생존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과 먹는 것과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게 됩니다.
행복이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부모를 믿는 것이 아닌, 부모가 알아서 챙겨주어야 할 것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진복팔단과는 다르게 루카복음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쌓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곧 세속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육신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마귀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로 극복됩니다.
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모욕받고 중상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따르면 불행하고, 청빈-정결-순명을 추구하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복음이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돈을 행복이라 여기고 배부름을 행복이라 여기고 명예를 행복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요?
어린이 때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자신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들보다는 부모를 행복으로 여깁니다.
부모가 생존까지 책임져주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부모를 바랍니다.
아기가 음식을 씹어서 식물인간이 된 엄마에게 먹이는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자신도 창조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다는 교만함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더는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신으로서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목적이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를 생존시켜 줄 대상들로 바뀌게 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아기들은 아는데 어른은 모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 생존을 책임지려 하는 게 고통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일은 고통스럽게 보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부재를 잊기 위해 먹고 토하고 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삽니다.
그렇게 탈진해버립니다.
정 안 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어렸을 때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물론 생존에 관련된 것들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 더 공허하고 배고프고 행복에서 멀어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결국 그런 것들을 추구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신을 창조자로 믿는 방법뿐입니다.
나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의 출처인 창조자 하느님을 찾아냅니다.
그분이 아니면 결코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봅시다.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이 철학적인 작품은 초월의 경지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이 이 작품을 그릴 때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고갱은 타히티라는 낯선 곳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했지만, 그곳에서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습니다.
타히티에 온 지 6년째 되는 해, 딸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 무렵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그가 자살 결심 후 그린 대작입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다 밧줄을 메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엄습해 옵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이 작품은 오른쪽의 탄생을 시작으로 왼쪽은 죽음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고갱은 늦은 나이가 되어서 그가 죽고 싶은 이유는 실제로는 돈 때문도, 건강 때문도 아닌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존재의 행복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고 내 영혼의 창조자를 믿으려 노력합시다.
그래야 세속-육신-마귀의 집착에서 멀어져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집착이 사라져서 그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기반이 바로 그분이 참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요한복음의 이 문장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요한 13,3-5)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대한 독립의 소리가 들려 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고대하면서 책을 한 권 손에 들었습니다.
김훈 선생님의 하얼빈(문학동네)!
청년 안중근 토마스 의사님(1879~1910)의 거사와 순국(殉國)의 기획과 과정을 소상히 묘사한 흥미진진한 역사 소설입니다.
참담한 슬픔과 굴욕의 시기, 청년 애국자 안중근의 마음은 늘 찹찹했습니다.
처참히 짓밟히는 조선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 안중근은 기약 없는 떠남을 결심합니다.
황해도 진남포에서 신천으로, 신천에서의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함경북도 연추로, 연추에서 블라디보스콕으로, 그리고 마침내 하얼빈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늘 미안했던 부인 김아려, 어머니 조마리아를 뒤로 하고 어딘지 모를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가는 청년 안중근, 그 분위기는 참으로 처연했습니다.
아들이 품고 있는 큰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아들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마디만 하였습니다.
“거기는 춥다던데, 너는 한뎃잠을 좋아하니 견딜만 하겠구나.
네 처가 가엾게 되었구나. 성정이 고우면 속마음이 더 힘들다. 내가 잘 살필 터이니 그리 알아라.”
안중근은 신새벽에 길을 나섰습니다.
짐은 겨울옷 한 벌이 책 몇 권뿐이었습니다.
천주교 기도서도 보따리에 넣었습니다.
아내 김아려는 대문에서 남편과 작별했습니다.
이승에서 더 이상 남편과 해후할 수 없음을 직감한 아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직 대한 독립이라는 사명 하나를 가슴에 간직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물설고 낯선 머나먼 길을 떠나는 안중근의 뒷모습이, 한없이 나약하고 지조 없는 오늘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마침내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과 거사를 목전에 두고 하얼빈 시내로 나갔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들 마음이 얼마나 결연하고 엄숙했던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옷을 사러 가자.”
“옷이라니?”
“지금 입은 옷은 추레하다.”
“돈이 모자랄 텐데.”
“넌 돈 걱정을 하지 마라.”
“왜 갑자기 옷이냐?”
“쏘러 갈 때 입자.”
“머리를 깎자. 잡힐 때 깔끔한 게 좋겠다.”
“그렇겠구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과 러시아 접경 지역인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이 의거는 조선 통감으로 재직하면서 한일합방을 추진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을 응징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저격 30분이 지난 후 이토 히로부미는 6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러시아 경찰대 숙직실에 구금된 상태로 있던 안중근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건 다음날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뤼순으로 달려갔습니다.
뤼순에서 돌아온 그는 이토 히로부미 가족에게 위로금 10만원(현 시세 30억원)을 하사하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순종은 마지못해 재가했습니다.
더없이 나약한 순종 임금은 자칭 천황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습니다.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逆道)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삼가 위로를 보냅니다.”
취조 때, 그리고 재판 과정 내내 안중근 의사는 더없이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였습니다.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 의사는 동생들에게 눈물겨운 유언을 남겼습니다.
“독립 전에는 내 시신을 옮기지 마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들려 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모국어를 빼앗기고, 존재의 이유마저 빼앗긴 나머지, 혈혈단신 춥고 배고픈 이국땅을 떠돌던 한그루 청청한 소나무 같던 안중근 의사.
그는 비록 이승에서 가난했고, 굶주렸고, 슬퍼 울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자비하신 하느님 품에 안겨계시리라 확신합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더불어(together) 행복의 여정 - '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루카6,23)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 바로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책 이름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 바로 우리 모두의 행복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바 행복일 것입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제의 행복이, 내일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의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한 번뿐이 없는 삶,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야 합니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웃도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불어 행복하고자 엊그제 많은 분들과 함께 13년전 제 환갑기념 동영상을 나눴고, 오늘은 또 2012년도 '수도원 설립 25주년 기념 감사제' 때 폭소를 터뜨렸던 참으로 감동과 행복을 선사했던 동영상을 또 나누려 합니다.
흡사 강론 제목을 '행복 예찬'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입니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행복을 선택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훈련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제 행복기도 한 연이 생각납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행복한 날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이지만 동시에 '행복 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어제도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행복의 발견이요 이 행복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힌남노 태풍으로 내린 폭우로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따라 동요를 부르며 산책할 때도 행복했고, 엊그제 종일 비내린 날 다음 어제의 청명한 날은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연상케하여 행복했습니다.
“산을 보면
산처럼 살고 싶고
강을 보면
강처럼 살고 싶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을 살자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의 산을,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의 강을 살자.”
-2022.9.6
불암산 배경으로 강같이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읊은 시에 또 행복했습니다.
어제 화요일 3시경시 잠언의 성경소구도 생각납니다.
“행복하여라, 지혜를 찾은 사람!
행복하여라, 슬기를 얻은 사람!
지혜의 소득은 은보다 낫고, 그 소출은 순금보다 낫다.
지혜는 산호보다 값진 것, 네 모든 귀중품도 그것에 비길 수 없다.”
(잠언 3,13-15)
성전 안, 제 기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시편 성구도 볼 때 마다 행복을 상기시킵니다.
“행복하여라,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이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시편 1,3)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종말론적 분위기를 조장하며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살아야 하겠다는 의욕을 불러 일으킵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라, 허무에 목덜미 잡힐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흐르는 시간보다 앞서 가야지 뒤쫓다 보면 결코 행복하기 힘듭니다.
언제나 시간보다 앞서 갈 때 참행복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 7,29-31)
현실 무시나 현실 도피의 이중적 위선의 삶이 아니라, 집착없는 초연한 자유의 이탈의 행복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이런 종말론적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짙은 어둠의 구름 넘어 늘 빛나는 행복의 태양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샘솟는 참행복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시편 16,2)
이런 종말론적 삶의 초연한 자세로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이 한 세트로 제시됨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의 평지설교 서두 행복선언이 참 장엄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기뻐 뛰놀며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가난한 사람들, 낮은 사람들, 작은 사람들에 대한 우대는 하느님의 절대적 자비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의 은혜를 고대하라고 모든 이에게 보내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궁핍중에도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불행 선언은 바로 회개의 촉구입니다.
행복 선언에 뒤따르는 것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서로 연대하여 나누며 살라는 것이겠습니다.
혼자 부유하지 말고 혼자 배부르지 말고 혼자 웃으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이것은 저주도, 형벌의 선고도 아닌, 탄식이며 경고입니다.
회개의 촉구입니다.
행복 선언의 불행하고 불쌍한 이들과 연대하여 나누며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가진 자들이, 있는 자들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나라가, 정치가, 가진 자들이 즉각 실행할 일이기도 합니다.
행복하십시오.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훈련입니다.
행복은 발견입니다.
행복은 은총입니다.
궁극의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혼자의 행복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야 참행복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하느님과 함께 살면 참행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행복하게 하십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행복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류시화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분의 책 중에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말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2005년에 ‘ME’ 주말을 다녀왔습니다.
그 뒤로 엠이 모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엠이는 결혼한 부부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대화하며 보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모임입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미는 것도, 저처럼 사제가 되어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감사할 일입니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본당신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보좌신부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본당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당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20년이 지나서 안식년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순간을 감사드리고, 그 시간에 충실한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하느님나라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듯이 행복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행복 역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우리가 늘 추구하지만 그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욕심, 욕망, 출세, 성공,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불꽃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려 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허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행복은 소유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병중에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을지라도,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많은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하느님을 떠나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반면에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노래도 잘 하였고, 말도 잘 하였고,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제게 없는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이 적으면 무시당한다고 원망했습니다
상사에게는 대화가 안 된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젊은 직원에게는 예의가 없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늘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 곁에는 행복이 머물 수 없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감사의 문을 활짝 열면 됩니다.
계속 행복하고 싶다면 불평의 문은 꼭 잠가 놓으면 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렸을 때,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하늘 높이 날던 제비가 땅에 가깝게 비행하는 것을 보게 되면, 곧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제비가 날씨를 예측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재주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곤충 때문이지요.
제비는 곤충을 잡아 먹기 위해 날아다니는데, 비가 오기 전에 습도가 높아지면 곤충의 날개도 습기 때문에 무거워져 높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낮게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곤충을 잡으려는 제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곤충이 많은 땅에 가깝게 비행해야 할까요? 아니면 곤충이 전혀 없는 하늘 높이 날아야 할까요?
비가 오기 전, 습한 날에 땅 가깝게 비행하는 이유는 이렇게 ‘곤충’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단지 곤충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제비가 날씨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사람의 능력에 대해 과대평가합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능력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자기의 힘만으로 얻었다는 착각 속에,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4가지 행복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입니다.
뒤이어 오는 불행은 4가지 행복을 뒤집은 것으로,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이를 듣고 어떻게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것보다 주님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가난할 수 있고, 굶주릴 수 있고, 울 수 있으며, 세상의 반대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능력과 재주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덕분에 이루어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서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과 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과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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