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반룡사
절집 찾기의 목표를 108寺로 한 탓인지, 108사 찾기를 이루고 나니 마음이 많이 풀어진 듯하다. 절집 찾기를 시작하였을 때, 불교 산자가 아닌 우리임으로 108에 큰 의미를 둔 것은 아니다. 그냥 절이라니 108 숫자가 익숙해서 붙였을 뿐이다. 108사 답사로 멈출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발길이 뜸해졌다.
그래서 본래의 목적인 건강 챙기기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아예 절집 수를 정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로 했다. 승용차를 없애고 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걸음 수도 훨신 더 많아졌다. 절은 대체로 산자락에 있다. 우리가 찾아간 대부분의 절은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이런 산세가 명당이구나 하는 나름대로의 안목이 생겼다.
어쨌거나 젊은 날에는 유적지 답사를 다니면서 안면으로 익혀둔 절이 익숙하여 먼저 찾아갔다. 108사를 채우고 나니 답사 때 다녀서 안면이 있는 절은 거의 다녀왔다. 이제는 규모도 작고 낯선 절을 찾아나서야 한다. 이런 절은 교툥편도 많이 불편하다. 그래선지 금년은 봄이 ㅇ흐드러지게 무르익었는데도 절집 찾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자꾸 머뭇거리기에는 날씨도 맑고, 많이 따뜻해졌다. 절집 찾기를 다시 시작하자면서 선택한 절이 고령의 반룡사이다. 가야산 유역의 절집을 찾아가면서 지나치는 버스길에 ‘반룡사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가야산의 절을 몇 번이나 찾으면서 ‘반룡사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도 여러 번이나 보았다. 반룡사라는 절에 호기심이 생겼다. 고령에 사는 지인에게 반룡사를 물어보니, ‘그 절까지는 시내 버스도 다나는데.’ 한다. 교툥이 편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쉽게 다녀올 수 있겠다 싶어 절집 답사로 반룡사를 정했다.
4월 말의 날씨는 티없이 말고, 산천의 연초록 색깔은 한없이 싱그럽다. 고령까지는 시외버스로 갔다. 반룡사까지의 교통편을 알아보니 시내버스가 다니기는 하나, 거의 2시간 간격이다. 거리는 6km 쯤이라니---. 가는 길은 택시를 이용하고, 내려오는 길은 걷자고 했다. 내리막길 6km라면 감당할 수 있다.
택시를 탔다. 아내는 기사 아저씨의 명함도 받았다. 콜에 언제든지 응한다고 하니, 교통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한 셈이다. 우리를 절까지 실어다 주었다.
골짜기의 제일 깊은 곳이다. 절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 미숭산이다. 고려 말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 저항한 이미숭 장군을 기리는 뜻에서 붙인 산의 이름이리고 하였다. 반룡사는 미숭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큰 절보다는 규모가 작은 절이 더 마음에 든다. 우리 부부가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저절로 터득하였다고 할까, 절이 있는 곳은 산골짜기의 제일 깊은 쪽이고, 뒤는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매우 아늑하게 보였다. ‘아하! 이런 곳이 명당이구니, 저절도 터득했다. 절 이름의 반룡은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모시고 가는 반룡선에서 유래했다. 용이 이끄는 배란 뜻이다.
늘 해오던 대로 나는 절 마당에서 대웅전을 향해 세 번 합장 배례하고, 절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집 사람은 언제나처럼 법당으로 들어갔다. 절 마당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서 절 아래로 뻗어있는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부석사 답사기에 ’배흘림 기둥에 서서‘라는 글이 있다.나는 그 글을 떠올리면서 골자기 아래로 저 멀리 바라보았다.골짜기는 아물아물 멀어지면서 흐릿해진다. 나는 절집을 찾을 때는 골짜기 아래로 저 멀리 바라볼 때가 제일 즐겁다. 아득히 멀어져가는 정경을 바라보면 온갖 생각들이 떠오른다.
나는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에 미리 준비해간 불교 교리 책을 꺼냈다. 책을 갖고 오기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도 절집에 가는데 불교 교리 책을 가져가자 싶어서 였지만,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교리책을 읽는다고 하여 부처님 마음처럼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는다.
흘깃 눈길을 돌려보니 아내는 법당에서 나와서 절 마당의 기와불사하는 곳에서 글씨를 쓰고 있다. 아내는 우리 가족들의 복을 빌면서, 우리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쓰고 있을 것이다. 조금 있으니 내 곁에 와서 앉았다. 나는 방금 전에 읽었던 부처님 말씀을 이야기해주니 흥미롭게 듣는다.
절 바로 아래에 고령의 시내버스가 들어와서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걷기로 했다. 내리막 길이니 아무래도 수월하다. 우리가 절집을 다니는 이유도 걷기 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골자기의 이쪽저쪽으로 눈길을 주니 무르익은 봄의 정경이 곱고 아름답다.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비닐 하우스가 눈에 거슬렸지만 이 또한 오늘의 우리 모습이 아닌가.
산굽이를 몇 번이나 돌아가니 해인사로 가는 큰 길을 만났다. 농산물을 다듬는 아주머니가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버스가 온다고 하였다. 아직은 좀 더 걸을만 하여 그냥 걷기로 했다. 나의 계산으로 산굽이를 한 두 번만 넘어서면 고령 읍내가 보이리라 싶었다. 경치는 무척 좋았지만, 산 굽이를 몇 구비나 돌아도 고령 읍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는 좀처럼 먼저 쉬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아내가 피곤하다면서 쉬자고 한다..
길에서 쉬고 있으니, 작은 화물차에 와글와글 하는 아줌마들이 타고 왔다. 그들이 차에서 내려 안쪽에 있는 집으로 걸어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와글와글 한 것을 보니 농촌에 일을 하러 온 동남아 아주머니들이다. 그러고보니 고령의 읍내에도 외국인의 모습이 무척 많이 보인다. 농촌도 일손이 달려서 외국 일군들이 와서 일하나 보다. 우리나라가 잘 산다고 해야겠다. 그런데도 왜들 불평불만이 많을까, 우리 사회가 바뀌는 만큼 의식도 바뀌었나 보다. 그래서 우리같은 늙은이가 곧잘 하는 말인 ’요즘 젊은이는 ---‘하는 말을 자제해야겠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마지막 오르막 고갯길은 꽤 길었다. 땅 바닥만 보면서, 묵묵히 걸었다. 길이 지루하거나, 오리막길이면 내가 잘 하는 버릇이다. 고개 위에 올라섰다. 바로 눈 앞에 고령의 대가야 공원이다. 우리 부부가 힘을 짜내서 여기까지 걸어올 때는 대가야 공원까지만 가면 시내버스든, 택시든 탈 수 있다는 기대를 하였다. 그래서, 조금 만, 조금 만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집사람은 피곤하다고 하면서도, 대가야 공원의 박물관은 처음 와 봤다면서, 박물관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이것은 아내의 특기이다. 절집을 찾아가든, 답사를 가는 어디에서든 구석구석까지 훑어본다. 피곤할텐데, 라고 하면, 대답은 언제나 ’여기까지 온 김에 ---‘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아내가 박물관을 돌아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바로 아래의 길에 가면 버스도 택시도 있으리라 싶어서 피로도 많이 가셨다. 아내와 찻길까지 내려왔으나 버스도 택시도 올 기미가 없다. 아내는 가방을 뒤적거리면서 아침에 택시 기사가 주었다는 명함을 찾았다. 아무리 뒤적여도 찾아내지 못한다. 이것도 아내가 잘 하는 일이니 나는 그냥 묵묵히 지켜보다가 시외버스 정류소까지 걷자고 했다. 사람을 만나서 길을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먼데요‘라고 했다. 그래도 걷기로 했다. 내 생각으로도, 이 만큼이나 걸었는데 손바닥만한 고령 시내 쯤이야 싶었다.
시외 버스 정류장에 오니 대구로 가는 버스는 금방금방 있었다.
집에 와서 만보기를 열어보았더니 거의 2만 7천 보 였고, 거리는 17km 였다. 6km 쯤만 걷기로 계산하였는데 ------.
첫댓글 반가운 글 잘 읽었습니다. 절집 탐방 얘기도 좋고, 덤으로 걷기는 건강의 최고 비법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조금 아껴쓰면서 무릎보호 하시면 더 좋지 않나 생각됩니다.
선생님 참 대단하십니다
그리 걸으셔도 무릎이 괜찬으시나요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요
탐방 건강하게 오래오래 하셔서
탐방기 보여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