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m1k_yexUE6s?si=E6nIDARvOByT6r9T
비발디는 초기에 오페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듯한데 이는 당시 사제로서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오페라 구조의 기초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곧 그는 극장 지배인들로부터 의뢰를 받게 되었다. 1715년 요한 프리드리히 아르만트 폰 우펜바흐(뒤에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이 됨)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비발디를 일컬어 '기업가'라 했는데 이는 비발디가 오페라 흥행사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가 몇 곡인지 이제껏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때 그가 작곡한 오페라가 50곡에 달할 것으로 여겨졌었고 비록 3번째 작품에 관해서만 실제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 발견된 편지에서 비발디는 그가 작곡한 94곡의 오페라를 언급하고 있다. 이 숫자 안에는 같은 오페라를 다시 쓴 것이나 개작도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으며 그 가운데 13곡은 한 작품을 구성하는 일련의 기악곡들로 출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협주곡과 소나타와는 달리 비발디의 오페라는 1번도 성공적으로 재공연된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비발디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성악 음악을 쓸 수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작품들의 음악적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가사에 나타나는 말하는 듯한 속성을 강조하는) 과장된 레치타티보는 극적 흐름을 방해하고 있으며 진부한 대본은 오늘날의 청중들에게는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종교음악 역시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714년 이미 오스페달레의 소녀들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비발디의 오라토리오 〈모이세스 데우스 파라오니스 Moyses Deus pharaonis〉를 연주했으며 2년 후에는 그의 걸작인 〈승리한 유디타 Juditha triumphans〉를 불렀다. 비발디의 많은 종교 음악 가운데 독창과 합창 부분이 교대로 등장하는 7성부 〈성모 찬가 Magnificat〉와 11개의 개별적인 부분들로 작곡된 〈영광송 Gloria〉이 있다. 다소 느슨하고 단순한 화성 구조를 갖는 협주곡들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종교 음악은 전통적인 베네치아 다성음악의 절대적인 통제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음악).
비발디가 오스페달레에 부임한 처음 10년 동안 관리자측과 비발디의 관계는 극히 좋았는데 그것은 오스페달레의 이름을 널리 알린 데 대한 그의 업적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오페라 공연과 다른 곳에서의 지휘 등의 일로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되자 그에 대한 불평이 일기 시작했는데 사실 어떤 때는 몇 년 동안 베네치아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비발디는 오스페달레측과 그가 자리를 비울 경우 1개월에 2곡의 협주곡을 작곡해주기로 계약했지만 관리자측에서는 그가 직접 그 작품들을 지도해주기를 원했다. 결국 교회 당국은 그의 모든 활동들을 너무나 세속적인 것으로 판단해서 반대하기 시작했다.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그는 어려서부터 앓아온 심장 질환(협심증) 때문에 미사에서 강론하는 것도 중단했다. 그는 또한 만토바에 체류했을 당시의 제자 안나 지로의 불륜 관계로 비난받았다.
소프라노 가수였던 그녀는 비발디의 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자매가 함께 비발디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집에서 그를 간호했다. 1737년 페라라에서 오페라를 제작하고 있을 때 교황의 대사로부터 중단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문에 경제적인 손실을 입었지만 그에게는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준 결정적인 일격이었고 그후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그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침체기
비발디는 이 충격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그의 음악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739년 프랑스 학자 샤를 드 브로스가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비발디의 인기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에 실망한 비발디는 빈으로 갔지만 불행하게도 1729년 트리에스테에서 만났던 후원자 카를 6세는 그가 도착한 후 곧 죽었으며 오스트리아는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 휩쓸렸다. 그러나 빈은 작품을 위해서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었다. 비발디는 그곳에서 죽었으며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비발디가 살아 있는 동안 출판된 작품들은 그의 명성을 온 유럽에 전파했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비롯한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계속해서 그의 후계자들은 또다른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비발디가 죽자 곧 그의 음악적 명성은 쇠퇴했다. 19세기 중엽 새로운 바흐판을 위해 작업하던 학자들은 '비발디의 12개의 협주곡, 바흐 곡 편곡'이라고 적힌 헌사가 포함된 필사본을 찾았는데 이 발견으로 비발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그는 가장 널리 연주되는 바로크 작곡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창설된 많은 실내 관현악단들이 특히 선호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현존하거나 추적할 수 있는 850여 곡에 달하는 비발디의 작품 가운데 96곡의 협주곡과 42곡의 소나타만이 그의 생전에 출판되었다. 출판된 작품수와 그가 작곡한 전체 작품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몇몇 작품들을 따로 소장하는 거장들의 관례를 생각한다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글 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b42vwZmG6k0?si=DuT4IcVyAMWjzI9l
A. Vivaldi: Concerto in E minor, RV 278 - Midori Seiler, Bremer Barockorche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