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어판 『韓國을 强國으로 바꾼 "朴正熙"』의 저자 河信基가 쓴 후기 2가지를 번역한 것입니다. 첫 번째 후기는 책을 출간한 1996년, 두 번째 후기는 문고판이 나온 2004년에 각각 쓴 것입니다.
저자는 저서를 통해 박정희를 세계 최빈국의 조국을 세계적 국가로 일군 구국의 영웅, 영원한 경쟁자였던 김일성을 제친 승자로 칭찬하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소상하고도 진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후기에서도 그는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한국의 현상을 배경으로
- 민주화가 꽃핀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초석을 다진 박정희를 재평
가, 그의 시대에 대한 총결산이 이뤄져야 한다
- 그의 공과를 확실히 하여 확고한 역사적 자리 매김을 해주어야 한
다
- 그의 딸이 정치 전면에 등장, 그의 조명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촉
진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 향후 박정희 연구는 라이벌인 김일성과 비교 연구를 바탕으로 이뤄
져야 한다, 는 점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97년 한글로 번역됐습니다만, 교보문고에 확인한 결과 현재는 絶品,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반영하여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난 듯 일어판은 잘 팔리고 있다 합니다.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
으로 권해드립니다.
저자는 1946년 일본에서 출생하여 1970년 中央大學法學部를 졸업. 조총련계인 조선신보사 기자, 조선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평론가로 활약. 국제정치학회 회원. 저서로 『한국이 통일하는 날 - 盧泰愚 大統領의 挑戰』『金日成·密封國家의 權力構造』 등 다수.
韓國을 强國으로 바꾼
朴正熙
<① 저자 河信基 초판 후기, 1996년>
박정희는 승자
2强1弱의 동아시아가 3强 時代로 진입하고 있다. 통일이 된다면 한국은 일본,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부강한 근대국가, 이 끝없는 願望과 용솟음치는 민족주의, 권위주의적 대통령 중심제, 지역대립, 재벌중심경제, 그리고 복잡한 對日感情 등등, 오늘의 이 같은 한국의 原型은 朴正熙 시대에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朴正熙를 안다는 것은 한국을 제대로 아는 열쇠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심복에조차 이해되지 못한 채, 끝내 암살된 사실이 말해주듯 그의 사상, 행동의 軌跡은 너무나 복잡하다. 민족주의자, 친일매국노, 공산주의자, 반공주의자, 이렇게 정반대인 얼굴을 계속 바꿔온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극단적으로 양분된다. 하지만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헤겔)라면 朴正熙의 變節에도 상당한 이유 있음에 틀림없다.
저자의 청춘은 朴正熙나 그의 최대 경쟁자인 金日成과 함께 였다. 韓日條約反對 鬪爭 여운이 채가시지 않은 대학에서 反朴正熙運動에 가담하고, 졸업하자 親金日成系인 朝鮮新報社의 기자로 사회생활을 출발했다. 통일문제를 담당, 취재 중 들린 東京地裁 地下書店에서 金大中 납치뉴스를 들었고, 급거 발행된 『金大中救出運動』이란 신문에 배속되어 朴正熙를 비판하는 원고를 밤낮없이 써댔다. 기자로서 가장 충실하던 시기였지만 결국은 그 신문을 떠나 1979년 朝鮮大學으로 직장을 옮겼다. 朴正熙 암살사건은 그 해 일어난다. 첫 뉴스는 한적한 캠퍼스에 낙엽이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을 창 넘어 바라보며 北韓憲法講義를 하고 있던 때 터져 나왔다. 대학 안은 떠들썩해지고 강의를 듣던 학생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저자도 강의를 제쳐두고 암살사건을 다뤘다. 군사독재체제의 內部矛盾이 噴出했다,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고.
하지만 그 한편으로 저자의 腦裏에는 한 가지 의문이 싹트고 있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직후 남북은 동시에 '社會主義憲法'과 '維新憲法'을 각각 제정했었다. 저자는 이 두 헌법을 비교 연구한 바 있는데 그 결과 두 헌법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一卵性 쌍둥이 같은 獨裁憲法이란 사실을 확인했었다. 그리고 그 후 북한에 방문, 그곳은 정부비판조차 허용치 않는 남쪽보다 훨씬 심한 독재임을 절감했다. 그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儒敎 나라의 한민족은 정치가에 聖人君子像과 더불어 강력한 지도력을 요구하기 쉽다. 金日成은 항일투쟁출신의 애국자이고, 朴正熙는 滿洲軍 中尉 출신의 親日賣國奴라는 경력이 평생 그들의 평가에 投影됐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한 시기만으로 그 사람의 모두를 판단할 수 있는가? 바올은 殘虐한 迫害者에서 그리스도 使徒로 變身한 것이 아닌가? 정치가는 그 해놓은 결과로 가지고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金日成은 부강한 국가를 약속했지만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 朴正熙는? 의문은 점차 부푼다. 朴正熙 死後도 후계자들은 이 노선을 계승하여 한국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지금은 모든 면에서 북한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자의 관심은 저절로 朴正熙로 옮겨갔다.
작년(1995년) 6월, 취재를 겸해 양친과 한국을 찾았다. 智異山에 발원지를 둔 南江은 晋州부근에서 갑자기 바다와 반대편 방향으로 흐름을 바꾼다. 그 유역에 있는 아버지의 고향, 宜寧은 과거 南江범람으로 고통받던 가난한 농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풍요로운 드넓은 곡창지대로 바뀌고, 종형제들은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도시에 출근하고 있었다. 마을의 장로 격인 삼촌, 그는 晋州댐을 바라보며, "저것은 朴正熙 대통령이 만들었지"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경상도지방 농촌에서는 朴正熙는 治山治水의 大功勞者였던 것이다.
朴正熙는 여러 면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경주했다. 이러한 그의 개성은 그가 걸어온 역사적 배경을 외면하고는 알기 어렵다. 그가 태어났을 때의 조선, 당시는 일본의 니토베 (新渡戶稻造 : 명치시대 지식인)가 '朝鮮은 無氣力한 枯死國'이라고 야유를 퍼붓던, 그런 애달픈 식민지였다. 이 굴욕감이 그로 하여금 近代强國을 꿈꾸게 하고, 일생을 통해 그 투쟁에 매달리게 한다. 그는 삶에 집착하며, 이데올로기나 이즘은 단지 자신과 민족의 생존수단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그가 필요에 따라 얼굴을 바꾸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신의 본질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朴正熙는 저자가 해석한 인물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그간 평론만을 써왔기 때문에 처음은 評傳을 생각했지만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朴正熙의 變幻自在한 人生遍歷에 거듭 놀라고, 회고록조차 쓰지 못한 채 이승을 등진 그의 內面에 照明을 비춰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筆力도 헤아리지 않고, 감히 논픽션소설 형식을 빌어 쓴다. 필요한 범위에서 상상력을 동원했지만 객관성을 잃지 않도록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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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문고판 후기, 2004년>
이 글은 4.15총선 직전에 쓴 것임
朴正熙時代를 總決算할 때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 8년이 지났다. 한국이해에 불가결한 중심인물 중 한사람인 朴正熙 전대통령을, 강렬한 지도력으로 한국근대화를 이룩한 공로자로 인식하는 견해가 일본에도 확산되고 있음에 기쁜 마음 금치 못한다. 이 책을 근간으로 한 새로운 朴正熙像이 [비극의 대통령]이란 타이틀로 일본텔레비전 일요일 골든타임 인기프로그램 (1977년 6월 8일)에서 방영된 것도 一助한 것으로 본다.
전체적 분위기로 봐서 獨善的인 軍事獨裁者라는 그의 오랜 이미지가 완전 불식됐다고 보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한국의 제17대 총선 (2004년 4월 15일)을 목전에 두고 최대 야당인 한나라당이 당 재생의 마지막 카드로 국민적 인기를 모으는 朴正熙의 장녀 (정확히는 차녀)인 朴槿惠를 돌연 당총재로 추대하고, 그것을 보도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지금도 옅어지지 않고 있는 朴正熙의 不可思議한 存在感을 재인식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朴正熙가 波瀾萬丈한 인생 그대로 가장 신뢰하던 측근에 의해 암살, 극적인 최후를 맞은 지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에서조차 朴正熙에 대한 평가가 완전 상반되어 왔으며, 이 책이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시기 (1997년 말)를 전후하여 겨우 어떤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 당시 한국은 [6.25사변이래 最大國難]이란 금융?경제위기에 휩싸이고, 치열한 대통령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朴正熙의 政敵이자 민주화투사 출신인 金大中 후보가 국민적 지지를 위해 朴正熙 生家를 찾은 바 있다. 그는 그때 역사적인 화해를 제의했다. 金大中은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朴正熙에 대한 높은 평가와 더불어 國家的 總意로 기념관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실 朴正熙는 일본인들에게는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예컨대 지금 미국이 문제 삼는 북한의 핵미사일개발문제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朴正熙가 비밀리에 핵미사일개발을 추진, 완성단계에서 카터 정권이 그만 두게 한 사건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또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도 당시 첨예한 남북대립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함을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작년 (2003년), 한국인이 쓴 [친일파의 변명]이란 일어판이 출간, 일본에서 화제가 되면서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는 한국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일본사회 일각에서 제기된 적이 있다. 그런데 청년 朴正熙 역시 "친일에도 일리 있다"고 같은 말을 한 바 있는 것이다. 한일합병에 관한 평가는 향후 多面的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일본의 식민지화가 없었다면 근대화는 더욱 촉진되고, 적어도 분단국가의 비애만은 맛보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한편, 이 8년 간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문화에의 관심과 이해는 隔世之感이 있을 정도로 눈부셨다. 남북한 공작원의 비애를 테마로 다룬 영화 [쉐리]의 기록적 히트를 신호로 시작된 한국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의 日本流入, 이른바 [韓流]현상이다. 한국 KBS 인기 드라마인 [겨울 연가]는 NHK에서 재방송될 정도이고, 베스트소설로도 부상했다. 오직 첫사랑만 일편단심 연모한 히로인 유진, 그녀는 많은 일본여성들로 하여금 공감의 눈물을 쏟게 하고, 눈발이 큰 나무 사이로 희끗희끗 춤추며 떨어져 내리는 흰 겨울, 그 로케이션 현장을 찾게 했다. 일본에서 분 [겨울 연가] 한국 투어 붐이 바로 그것이다.
오직 한 마음, 일편단심은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특징짓는 컨셉으로, [韓流]는 많은 일본인에 그것을 일깨웠다. 이는 朴正熙에의 이해를 깊게 하는 데도 좋은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純粹하다 할까, 愚直하다 할까, 오직 일편단심, 국가나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 朴正熙였기 때문이다. 실은 이 책 부제인 [한국을 강국으로 바꾼 사나이]도 그로부터 따온 것이다. 朴正熙는 멸시받지 않는 [强小國]을 평생의 悲願으로, 일본의 植民地化, 해방 후의 南北分斷, 內戰 등 겹치는 비운에 직면하여 "아이고"하고 한숨만 내쉬던 국민을, 강렬한 지도력으로 일깨워 "한강의 기적"을 이끌며,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었다. 그리하여 "울음의 文化"에 氣槪를 되살리며 한국을 역동적으로 바꿔 나간 것이다.
[겨울 연가] 또한 그렇게 해서 일어선 중류계층 젊은 세대의 이야기임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일편단심 사랑은 정통적 국민소설 [春香傳] 주인공 春香의 대명사. 그러나 유진은 약동하는 현대한국의 여성을 상징이나 하듯 傳統이나 舊習에 전혀 묶이지 않고, 분망하며 자립의지를 보인다.
한국인의 朴正熙에의 欽慕는 그렇게 살게 만든 사회적·경제적 기반이 그의 시대에 구축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령층 일부의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한국도 과거 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파 산과 들을 헤매던 春窮의 時代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변모는 그칠 줄 모르며, 이제 朴正熙 시대를 뛰어넘고 있다.
미국중앙정보국 (CIA)이 各國의 實勢測定을 위해 작성한 [The World Fact-book 2003]에 의하면 購買力評價 기준으로 換算한 2002년 한국의 국내총생산 (GDP)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가맹국에서는 G7 멤버인 캐나다를 제치고 7위. 선진국 통신인프라스트럭처 기본적 지표인 브로드밴드 (broad-band : 高速大容量常時인터넷接續)의 경우, 국제전기통신연합 (ITU)이 발표한 2002년 말 보급률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0명 당 한국이 21.3명으로 단독 1위이며, 2위 홍콩, 3위 캐나다……, 일본 7.1명으로 10위, 미국 6.9명으로 11위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보급률은 한국이 제2산업혁명으로 불려지는 IT (통신혁명)혁명을 거쳐 세계 첫 브로드밴드사회에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뜻한다.
그 화려한 성과는 정확하게는 金大中 정권이 탄생한 이후 나타난 것이지만, 朴正熙가 실현한 제1산업혁명 성공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란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한국은 지금 朴正熙 遺産에 의존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큰 전환점에 서 있다. 근대화를 과제로 삼았던 朴正熙 시대의 總決算과 포스트 近代에로 脫皮하려는 陣痛期에 접어들었다는 자리 매김이 가능한 것 같다.
따라서 朴正熙를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적 그랜드디자인이 요구된다. 그를 위해서도 韓國近·現代史에 한 시대의 획을 그으면서 핵미사일문제 등 북한과의 관계가 미묘한 단계에 있다는 점도 고려하여, 그간 한국에서는 터부시되던 金日成과의 관계 등 가려진 부분이 적지 않은 朴正熙와 그가 이룩한 시대가 새삼 물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朴正熙만큼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정치가도 드물다. 일본 식민지시대는 교사를 그만 두고 만주국군에 지원한 데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우고, 해방은 만주국 중위로 맞는다. 해방 후는 조선경비대 (한국군 전신)에 입대하여, 사관학교 교관을 거치면서 남조선노동당 = 공산당에 비밀 입당하여 軍內 工作의 중심에 선다. 肅軍運動에서 이 사실이 적발되자 1백80도로 轉向하고, 6.25 최절정기 복귀한 군에서 청년장교들의 人望을 얻어 실권을 장악, 드디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는다. 이후 일본과 국교를 열어 외자와 기술을 도입하며, 세기적 빈곤을 떨쳐버리기 위해 조국의 근대화, 경제개발에 엄청난 힘을 쏟아 붓는다.
그 다양한 얼굴 탓에 그에 대한 평가도 이것이 한 사람, 한 인물에 관한 것인가, 할 정도로 여러 갈래이며, 또한 모순에 찬다. 親日派인가 하면 民族主義者, 共産主義者인가 하면 反共主義者, 變節漢, 獨裁者, 그리고 信念에 찬 사람……,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얼굴은 나폴레옹을 동경하던 소박한 소년이 복잡한 시대상황을 뛰어넘으면서 근대화된 국가,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오직 이 외길만을 추구하는 가운데 궁극적으로는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택한 生存方式인 것으로 해석된다. 식민지화된 조국을 자신의 屈辱, 恨으로 간주하며, 그 復權을 위해 있는 모든 힘을 쏟으며, 전통이나 도덕의 틀조차도 무시함을 주저하지 않는 壯絶한 生涯, 그것이 朴正熙의 일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고집했던 민족이란 어떠한 것이었던가.
[우리 5000년 역사는 頹廢와 粗雜과 沈滯의 역사였다. 스스로를 약자로 비하하고, 남을 强大視한 비겁하며, 事大的인 思想, 이 宿弊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들에게는 자주나 주체의식이 결여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며 아첨하는 민족성이 몸에 베고 말았다. '우리의 것'으로 한글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경제의 향상에 창의적 의욕이 없고, 高麗磁器 등이 겨우 민족문화로서 남아있을 뿐이다. 民族中興을 바란다면 이 惡의 倉庫와 같은 歷史는 불살라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朴正熙選集]에 있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에 수록된 朴正熙 자신의 말이다. 의외로 꾸밈없고, 솔직한 어휘로 민족을 罵倒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마저 없지 않다. 그가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의 분노와 미움을 사고, 賣國奴, 國賊으로 규탄되는 이유도 알만 하다.
그러나 朴正熙가 살았던 시대상황을 직시한다면 무리도 아니다. 인간지식 (人知)의 극지 (極地)로 삼은 朱子學의 總本山, 문명의 중심을 자부하던 朝鮮도 서양물질문명의 規準으로 본다면, 불쌍한 세계 最貧國 중의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변혁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對象을 過激하게 인식하며 자신과 대중을 고무하는 수법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전혀 다른 메시지, 즉 분노와도 비슷한 憂國衷情과 이를 타파하고야말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과하지만, 항일 영웅으로 떠받드는 북한의 金日成도 [李朝 末 우리 나라의 봉건지배층은 부패, 무능했다. 개인이 事大主義病에 걸리면 바보가 되고, 나라가 事大主義에 젖으면 망한다]고 朴正熙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金日成이 북한의 건국이념으로 내건 주체사상도, 朴正熙가 [卑怯한 思想]으로 배격해 마지않던 사대주의의 반대개념으로 본 것이기 때문에 두 라이벌이 같은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시대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 다름 아닐 것이다.
朴正熙를 조선 近?現代史에서 정확히 자리 매김 하기 위해서는 金日成과의 관련을 분명히 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유일하게 그것을 그리고 있는,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이해할 수 있을 법한데, 실제 물과 기름처럼 다뤄온 朴正熙와 金日成, 그 두 사람의 內面世界는 중복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8.15해방 전에는 滿洲 (현 중국동북부)에서 다섯 살 아래인 朴正熙는 滿洲國軍 중위로 金日成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을 토벌하는 입장에 있었고, 南北分斷 후는 각각 다른 편의 리더로서 격렬하게 다투긴 했지만, 서로 간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犬猿사이인 두 사람이 1972년 남북공동성명으로 손을 잡아, 세계를 놀라게 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역사인식, 민족관은 혁명가를 지향하는 엘리트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지닐 수 있는, 일종의 보편성을 띠고 있다. 혁명이란 파괴와 창조이기 때문에 민족과 전통문화를 [한심하다]며, 내팽개쳐도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북동아시아 전체로 시야를 넓힌다면 그것은 그 시대의 트렌드였던 것이다.
북동아시아에서 처음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의 明治維新 立案者들은, 維新元年 불교배척의 廢佛毁釋運動이 보여주듯 더 철저했다. 사카모도 (坂本龍馬)는 [일본을 지금 세탁해야 한다]고 했고, 이토 (伊藤博文) 등은 서양인과의 混血에 의한 民族改良까지도 고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근대일본은 천황의 絶對君主化 등 국가사회시스템이나 가치관까지 독일제국 그대로를 본 따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아편전쟁에서 중화문화권의 盟主 = 淸이 "南蠻"인 영국에 무참히 패하고, 산업혁명에 뒤쳐진 동양문명의 한계를 통감, 위기감에 젖게 된 북동아시아 지도자들이 갖는 공통적인 니힐한 시대 기분이었던 것이다.
脫亞入歐, 즉 하루라도 빨리 낡은 동양으로부터 탈피하여 압도적인 서양물질문명에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서자는 것 = 그리고, 근대화만이 생존전략의 기본이 됐는데, 變身이 빠른 섬나라 일본은 그에 성공했고, 攘夷思想에 발목이 잡힌 중국은 잘 풀리지 않았고, 사대주의의 조선은 실패했다 - 서양제국주의에 의해 격렬한 생존경쟁을 강요당한 북동아시아의 근대사란 어느 시기까지는 그와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寬容으로 이해한다면 최근 가끔 물의를 빚는 삼국의 역사인식 갭도 메워질 것이 아닌가.
金日成, 朴正熙. 두 사람 모두 그러한 시대 기분이나 목적의식을 共有하면서도 부모의 영향이나 자라난 환경 차이로 인하여, 전자는 침략자 일본에 반발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활로를 열려 했고, 후자는 거꾸로 일본으로부터 배워 근대화의 비밀을 찾아내려 함으로써 길이 크게 갈렸다.
그러나 이토 (伊藤博文) 등이 민족적인 아이덴티티와 타협하기 위해 '魂은 日本, 才는 西洋'으로 하자는 和魂洋才를 주창한 것처럼 金日成, 朴正熙, 다 함께 뿌리는 國粹的 民族主義者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아들을 후계자로 하여 가장 조선적인 "피 (血)의 觀念"으로 回歸한 金日成을 民族主義者로 간주하는 일에는 異論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다카키 (高木正雄)로 創氏改名하고, 일본육사시절 동기생들이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인처럼 행동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朴正熙 또한 그러하다.
그것을 가장 명확히 드러낸 것이 피 (血)와 더불어 민족의 기본요소가 되는 言語政策이다. 현재 남북한이 다함께 쓰는 문자는 고유한 문자 즉 한글로 통일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金日成이 해방직후 한자를 폐지했고, 남한에서는 朴正熙가 1970년대에 그것을 본 따 한글전용을 강행했다. 한국 역사상 한글만 쓴 시대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 함께 純化된 새로운 民族文化를 만든 셈이다.
사대주의 근절과 주체성을 강조하며, 스스로 명명한 [한국식 민주주의]를 밀고 나가면서 '自國第一主義的인 나라만들기'에 온힘을 다한 朴正熙에 있어 한자는 외래어로 大 (중국)를 事 (섬기다)하는 事大主義의 溫床이자 민족정신을 더럽히는 근원이었던 것이다. 지나놓고 지금 생각해보면 한글전용정책은 너무나 극단적인 것으로, 한자 부활론이 제기되는 실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국민, 특히 한글세대로 하여금 외국에 비굴해지는 풍조를 없애고 자주, 자립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경제성장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키운 측면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개인이 역사를 만든다고 한다. 朴正熙 시대 역시 朴正熙가 생각했던 바가 현실화된 것, 즉 그의 뜻이나 비전, 상상력, 행동력, 프라이드 등이 자기 실현된 결과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최대 功績으로 꼽히는 한국의 근대화 = 공업화도 시대를 정확히 내다본 그의 개성을 빼고는 논할 수 없다.
사실 朴正熙와 같은 군인이 정권의 정상에 앉는 것, 그 자체가 文官優位의 과거제도가 실시된 한국역사에서는 고려 중기 100년간 있었던 [武臣政權」이래 없던 일이다. 그 이상으로 이례적이었던 것은 그가 士農工商으로, 商工人을 최하층에 두는 신분차별 풍조가 강한 유교나라에서 처음 경제를 중시하는 통치자가 됐다는 점이다. 전통문화와는 융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추진되면서, 필요 이상 의 마찰을 불러오고 朴正熙 정권의 독재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권력욕에서 비롯된 개인독재가 아니고 공업화를 단기간에 앞당겨 완성하려 한 국가목적에 따른 합리적인 독재였던 것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역사 이야기 쪽으로 잠시 발길을 돌려보면 朴正熙는 폭군으로 비방 받아온 고려 제4대 황제, 光宗과 많은 면에서 닮아 있다. 다 함께 大義를 위해서는 모략도 마다 않고 필요하다면 권력자에 아부하고 한번 권력을 쥔 다음에는 단호하게 初心을 관철했다.
이상하게도 光宗은 최근 몇 년 사이, 高句麗 = 高麗史 재평가 속에서 신라 1000년의 桎梏을 걷어내고, 地方割據의 大豪族을 숙청하고, 황제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과거를 실시하여 널리 인재등용의 길을 열어 국력을 키우고,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한 개혁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朴正熙도 그가 내뿜는 독특한 靈氣에 이끌린 것은 혁명에 동참한 청년장교 주변뿐, 오랜 동안 독재자로 규탄 받아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조차도 근대화의 초석을 쌓은 공로자로 평가하는 실정이다.
朴正熙의 합리주의, 현실주의는 철저하다. 결코 형식에 고집하지 않고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유연하게 또한 貪慾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예로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제1차 5개년계획 (1962-66년)은 북한의 계획경제에서 힌트를 얻은 것. 그러나 그는 폐쇄적인 자립적 민족경제를 추구한 金日成과는 달리 개방적인 일본형 경영에서 배운 대로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조선, 철강, 전자 등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전략산업에 物資, 돈, 사람을 중점 배분했다. 다른 한편으로 수출 진흥에 의해 국책기업이나 재벌기업 등 민족자본의 축적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怒濤와 같은 "漢江의 奇蹟"이 시작됐다. 그의 노선은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계승되며, 1980년대에는 중공업화와 더불어 경제 전반이 한 단계 더 발전하고, 90년대에는 반도체 등 첨단전자산업이 성장했다. 이리하여 1962년부터 96년까지 34년간, 연평균 성장률 8%대라는, 제2차대전 후 세계에서 가장 雄飛한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96년 12월에는 OECD 가입을 달성했다. 그 시점에서 朴正熙가 지향한 근대화의 역사적 과제는 달성됐다 해도 좋을 것 같다.
朴正熙의 경제개발 전략은 북한식 계획경제를 일본형 경영방식으로 합리화한 것으로 저자는 나름의 정의를 내린다. 그것은 이른바 개발독재로 불려지며,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모델이 됐다. 鄧小平의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후 그것을 개혁모델로 도입하고, 마하티르 말레시아수상의 룩 이스트 (look east)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공교롭게도 金日成 死後의 북한도 朴正熙에 배우려 한다. 朴正熙의 딸 朴槿惠가 2002년 5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 亡父의 宿敵의 아들인 金正日 總書記가 따뜻이 맞아 친밀한 회담을 가졌다. 세상의 변화를 실감시킨 순간이었다. 朴正熙가 없었다면 아마도 金日成은 한반도 통일을 이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勝者는 전략가로서 한 수 위인 朴正熙였다. 그것을 인정했던 것일까. 金正日은 현대그룹을 통해 朴正熙가 즐겨 마시던 막걸리를 남한으로부터 특별히 주문하여 가져오고, 朴正熙의 경제개발전략에 관한 자료도 입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국가나 민족이라는 抽象物로 치고 받고, 자기 한 나라만을 생각하면 끝나던,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1997년 말 靑天霹靂 같이 한국을 엄습한 금융?경제위기는 그 사실을 확실히 일깨웠다. 같은 해 10월 아시아金融不安이 한국으로 옮겨갔을 때, 2개월 남짓 사이 급속한 유출로 외화가 바닥을 드러내고, 디폴트 (債務不履行) 직전 IMF와 일본 등으로부터 5백70억 달러를 긴급융자 받아 겨우 급한 불은 끄고, 한국은 치욕의 IMF관리로 들어갔다.
직접적인 원인은 외화관리 허점에 있었지만, 근원적으로는 朴正熙 등 일부 엘리트에 의한 "위로부터 개혁"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보호주의적 경제운영, 국가보증에 의한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經營膨脹을 도모해온 재벌경영 등 朴正熙 시대에 구축된 사회경제구조가 시장경제의 글로벌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수정에 나선 것이 [경제대통령]을 自任한 金大中 대통령. 그는 강력한 민주화조치와 더불어 官主導의 왜곡된 경제를 民主導의 國際規準에 맞는 본래의 자본주의에로 전환시키는, 脫朴正熙 시대에로 개혁의 키를 잡았다. 이와 함께 지식정보강국이란 새로운 국가비전의 기치를 들고 불량채권정리, 시대에 맞지 않는 산업의 과감한 정리, 그와 함께 인터넷사회구축, 규제완화, 그리고 벤처기업육성을 바탕으로 하는 IT산업 기간산업 육성화의 E-코리아계획을 전략화했다.
이어 인터넷사회에로 急變貌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노무현 대통령. IT혁명의 기수로, 세대교체 붐을 타고 擡頭한 노무현 지지의 개혁세력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旣得權益層과 충돌하고 있다. 그 旣得權益層은 다름 아닌 國家社會改造의 기치를 높이 들고 궐기한 朴正熙 소장이 이끈 혁명주체세력이 장기집권하며 特權階層化한 것으로, 攻守의 자리를 완전히 바꾼, 실감나는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朴正熙 시대의 總決算, 그리고 포스트 近代化에의 모색은 이러한 노무현 체제하에서 본격 가동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이른 바 權威主義, 强權的 方法, 門閥主義, 政經癒着과 不正腐敗 등 朴正熙 시대 '負의 遺産'에 대한 淸算이다. 특히 한국정치의 癌적 존재인 地域主義의 근절 또한 그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4.15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민주당과 손잡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노무현대통령탄핵안을 강행 처리했다. 재벌의 거액 부정헌금문제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이 黨勢를 일거에 만회해보겠다는 정치적 대도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꾸로 "당리당략으로 국정을 농단했다"는 강력한 역풍에 부딪히면서 등장한 것이 朴正熙 딸, 朴槿惠 체제인 것이다. 지금의 한나라당은 朴正熙를 초대 총재로 한 민주공화당의 흐름을 면면히 이어오는 말하자면 保守本流로, 고 朴正熙 대통령의 위광을 업고 경상도 중심의 기반구축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민주세력의 총결집과 지역주의해소를 공약으로 내건 노무현 대통령의 여당, 우리당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는 가운데 총선거는 한국 정계의 세대교체의 촉진과 지역주의 해소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 확실하다<실제로 우리당이 승리했음>.
제 생각으로는 한국은 극단적 경쟁사회인 미국보다도 유럽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정당과 보수당, 양당제도로 가는 것이 社會連帶意識이 강한 國情에 맞는다고 본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따라 朴正熙가 만든 국가보안법도 대폭적인 손질이 불가피, 좌익활동도 해빙기를 맞고 있으며 여당인 우리당이나 노동자 당을 自認하는 민주노동당은 국회에서 社民的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보수당. 朴正熙의 딸을 새로운 대표로 추대하여 再生을 노리는 한나라당으로서는 무엇보다 경상도 지역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옛 체질로부터 탈피하여 지역에 관계없이 보수를 총결집하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朴正熙 시대의 총결산, 그것은 朴正熙의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그를 바람직한 존재로 자리 매김 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랑하는 딸을 통해 다시 한국정치 전면 무대에 등장한 그는, 아무튼 향후 한국정치에서 保守總結集의 상징으로 기능할 것임에 틀림없다. 평생 革命家임을 자부한 그 사람은 지금 무덤 속에서 苦笑를 짓겠지만, 나라가 흔들릴 때마다 강렬한 지도력이 향수처럼 이야기되고 그의 비전이나 전략은 보수진영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매김 될 것이다.
특히 朴正熙의 國防理念인 [强小國]은 입장을 초월하여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수도 서울 일각에 자리 잡은 미용산기지가 2006년 말 시한으로 경기도 오산과 평택으로 이전되고, 군사분계선 부근에 배치되어 북한에의 전쟁억제력을 담당하던 미 제2사단 또한 한강 이남 이전이 확정됐다. 이 조치는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동맹을 종속으로부터 호혜평등 관계로 성숙시켜나간다"는 자주외교노선에 따라 실현된 것으로 향후 한미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학관계에 미묘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보수계인 [東亞日報]가 [强小國]과의 공통성을 인정하면서도 "높아지는 중국과 일본의 북동아시아 패권경쟁 틀 속에서 한미동맹 없이 국익을 지킨다고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가"고 의문을 던졌고, [朝鮮日報]는 "국제정세에 無知하여, 동맹을 택해 좌왕우왕하며 망국의 길을 걷던 것이 100년 전 한국의 역사였다"며 비판했다는 사실.
이러한 반응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공교롭게도 朴正熙의 자주노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보수이기보다도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마음은 없지만 제 생각으로는 지나친 對中, 對日 警戒心만은 지양해야만 할 시기라도 본다.
동아시아는 오랜 中華帝國 一極時代로부터 일본이 급부상한 근대의 2强1弱 時代를 거쳐, 지금은 3國 對等時代로 향하고 있다. 일본이 突出했던 것은 일시적 현상인 것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중국이 다시 突出하는 추세를 두고 아편전쟁 전 中華中心의 질서로 回歸한다는 회의적인 의견도 있지만, 역사는 螺旋形으로 발전해간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씹어볼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렇게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본다.
자유무역협정(FTA) 등 경제적 통합이 진전되는 북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어딘가. 緩衝地帶가 아닌 基軸國家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隨, 唐 등 역대 중화제국과 동아시아 패권을 격렬히 다퉜던 高句麗도 아니고, 面從腹背의 事大主義政策으로 평화를 지키려했던 李朝도 아니다. 역사의 교훈을 살린 대등한 新秩序의 구축이다.
朴正熙의 역사적 공과는 앞으로도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되겠지만, 차기 대통령선거를 엿보는 딸의 동향도 겹쳐 한국은 당분간 朴正熙 遺産 문제로 요동칠 것으로 본다. 世界 最貧國으로 추락한 조국, 그 '조국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를 스스로에게 짐 지우고 거기에 과감히 맞서 성공을 거둔, 孤高한 캐릭터의 足跡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넓고도, 너무나 깊다.
첫댓글 모든 국가가 박대통령을 추앙하고 배우려고 난리인데 유독 우리나라만 특히 정권을 잡은 집단들이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입니다. 아마 지나친 컴플렉스가 아닐지
정말이죠 .. 매번 느끼는거지만.. 정말 대단하고 멋있는분 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박대통령각하의 능력에 못미치니 그분을 어찌하던 헐뜻고 깍아내려야 하는 콤플렉스!. 자신이 위치도 파악못하는 우매한 군상들. 언제 그분의 뜻을 이해 하리요!~~
내 읽지읺고도 다안다.. 우리 박대통령님은 최고이고 노무현이는 죽일놈이다 ㅋㅋㅋㅋ 난 너무 똑똑해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