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武力은 더 큰 무력 앞에서 더할 나위 없이 무력無力하다.
철원에서 군대 생활 중, 동기 중에 광주가 고향인 하태성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유독 광주 사투리가 드센 그는 성격도 화끈했다. 내성적인 나는 그가 부럽기만 했다, 그런 그도 군대라는 조직은 편한 군대 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고참이 그를 미워해서 시시때때로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나하고 둘이 있을 때마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그 새끼 죽여 버리고 탈영 하고 싶어” 나는 그에게 참고 기다리는 것이 군대라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갈수록 말이 없어졌고, 사람들을 자꾸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을 설치고 있는 나를 하태성이 찾아왔다. “어쩌면 좋지?” “왜?” “오늘 보초를 함께 나가서 그 자식을 작살나게 패 버렸거든,” “그래, 그런데 아무개 상병은 어디 있어?” “몰라, 어디 있는지, 나 탈영하는 게 나을까? 이러다가 영창 가는 게 아닐까?”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 할 수가 없었다. 분을 못 참아 씩씩거리면서도 불안감에 떨고 있는 그에게 “좀 기다려 보자”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직결된 일이 아닌데도 그 밤이 얼마나 길었는지, 그러나 아침이 밝았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연병장에 모두 모였는데, 친구에게 매를 맞은 그 상병이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로 몸살이 나서 내무반에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생활하면서 부대 사람들을 고양이 쥐 다루듯 하던 그가 졸병에게 두드려 맞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몸이 아프다고 드러누운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무력武力은 더 큰 무력 앞에서 더 할 나위 없이 무력無力하다‘는 것을,
그 뒤로 그 고참은 하태성은 물론이거니와 부대 내 어떤 졸병도 괴롭히지 않다가 만기 제대를 했다.
그와 비슷한 경우를 또 한 번 겪었다. 부대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열시가 넘었고, 보초를 빼곤 모두다 깊이 잠이 들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막사 안이 소란했다. 관측장교로 재직 중이던 주번사관이 술 한 잔 마시고, 술에 취해서 ‘전 부대 완전군장해서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시달을 내린 것이다.
상명하복인 군대에서는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라면 쑤실 수 밖에는 없다. ‘군대 거시기 하다’고 마음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일어나 군장을 꾸리는데, 우리 분대 고참인 정석순 상병이 모른 체 하고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충청도 서산 출신으로 말이 없고 우직한 사람이었다. “어서 일어나라”고 아무리 채근해도 “알았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 주번사관이 우리 막사에 들어와서 누워 있는 정 상병을 보고 처음에는 어이가 없는지 가만히 바라보다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더니 다가왔다. “어떤 놈이 지금도 자고 있어?” 하고 정 상병의 침상 머리 부분을 군화로 걷어찼다. 그래도 아무런 미동도 않자, 다시 침상을 걷어 찬 순간, 정 상병이 웅크렸던 용이 용솟음치듯 일어났다. 그렇게 빠를 수가 없이 일어난 그가 눈을 반쯤 감고서 “어떤 놈이 지금 자고 있는데, 시끄럽게 해,” 하더니 주번사관을 다짜고짜 주어 패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작살나게 패는 것이었다. 흠씬 두들겨 팬 정 상병은 술이 덜 깬 듯 비틀거리며 다시 모포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렇다 저렇다고 말한 마디 하지 못 한 채, 복날 개 맞듯 대책 없이 얻어맞은 주번 사관은 한 참 동안 넋이 나간 듯 있다가 주번 사관실로 돌아갔다. 잠시 있다가 완전군장을 해제하고 평상시처럼 활동하라는 시달이 내려왔다.
그 날 밤 우리 부대원들, 어느 한 사람도 편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정 상병은 어떻게 될까? 고참도 아니고 장교, 그것도 주번사관을 심하게 폭행했으니, 상명하복인 군대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사단에 있는 영창이나 남한산성(군대 교도소가 있음)으로 가지 않을까?
그런데 그 이튿날 우리들이 미리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번 사관은 바로 관측소로 올라갔다는 후문을 들었고, 부대는 평온하기만 했다. “내가 약할 때 내가 한 없이 강하다.“
사도 바울의 말이다. 그 말을 나는 군대라는 특수종합대학교에서 절실하게 느끼고 또 느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2024년 3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