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15년 1월,
왕은 대신과 6경 3사 관원들을 불렀다.
아직 뒤집기도 안 되는 어린 왕자는
원자로 명호가 정해졌다.
신하들은 불만이 많았다
"아직 백일도 안 됐는데, 그것도 후궁의 소생을..."
그리고 왕자의 생모 장씨는 정1품인 빈에 봉해졌다.
왕의 뜻이 워낙 완강해 신하들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지만 팔순의 나이에도 굽힐 줄
모르는 파이터 기질의 송시열이 소를 올려 반대했다.
그러자 왕은
"군주를 무시하는 무리가 잇달아 일어날 것이다.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하라"
이어 권대운, 목대선, 김덕원을 삼정승에
앉히는 것을 시작으로 남인을 대거 기용했다.
새로 대간이 된 이들이 청했다.
"송시열이 방자하게 소를 올려 민심을
혼란시켰나이다. 극변에 안치하소서!"
이어 서인들은 거의가 유배되거나 삭직되었다.
기사환국이다.
그리고 9년 전 경신환국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모든 것이 뒤집힌다.
이이, 성혼은 문묘에서 출향됐고,
허견의 옥사에 대해서도 재조사가 실시되었다.
일흔의 기익훈은 형신을 받다 죽고 김환,
이희 등의 당시 고변자들은 참형에 처해졌다.
죽은 김석주도 죄를 받았다.
그렇게 이번의 기사환국은 지난
경신환국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중전교체-
돌아온 남인의 핵심 표적은 송시열과 김수항.
먼저 김수항의 사사되었다.
송시열이 가장 중히 여겼다는 그의 이때 나이는 61세.
죽기 전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본디 덕이 없는 몸으로 은덕을 후하게 입었고,
지위를탐내 분수에 넘쳤다가 스스로 재앙을 불렀다"
아무리 희빈 덕으로 환국이 되었고,
중전이 서인 노론 출신이지만 신하로서 중전을
내치려는 왕의 뜻에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은 귀인 김씨가 김수항과 결탁해
임금의 동정을 알렸다며 폐서인하여 내쫓고는
중전 폐출의 뜻을 거듭 강력히 밝혔다.
연일 만류하는 대신, 대간의 청이 이어졌다.
이때 오두인, 박태보 등 86명이 연명으로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서둘러 대신들이 호출되고
한밤중에 인정전 앞에 국청이 설치되었다.
박태보는 형신을 받으면서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고,
대답도 시종 침착하게 했다.
"신이 비록 못났지만 대의는 알고 있나이다 "
이것이 왕을 자극했다.
가혹한 고문 아래서 오두인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극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박태보도
오두인도 유배지로 가는 길에 숨을 거두었다.
왕이 박태보를 친국하며 보여준 히스테리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데서 나온 행동이지만 상소를 가지고
국청을 열어 난리를 피운 것은 의도된 행동이었다.
남인 신하들에게 이제 환국의 이유는 선명해졌다.
더 이상의 반대가 없자
마침내 인현왕후는 폐비되어 친정으로 쫓겨났고,
희빈 장씨가 새로 중궁전의 주인이 되었다.
일개 궁인의 신분에서 빼어난 미모와 처신으로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고 국모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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