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겨울
석야 신웅순
공주 일락산 금학동 산골에 집 세 채가 있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공주교대 다니던 시절이었다. 나는 윗집, 부영이는 아랫집에서 하숙을 했다.
저녁이면 부영이와 막걸리를 마셨다.
“문학이란 무엇이며 시란 무엇인가.”
언제나 부영이와 나는 이 명제로 다투기도 하고 큰 소리도 치며 인생을 논했다.
우리는 술을 좋아했고 환경도, 성정도 비슷했다. 부영이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때 연탄 배달을 했고 나는 대전에서 고등학교 때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친구와 나는 교대 졸업 후 숭전 야간 대학교 국어교육학과에 편입했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밤 10시쯤이면 수업이 끝났다. 주막집에서 막걸리로 고단한 하루를 풀곤했다.
“웅순아, 우리 시 다시 쓰자.”
“나, 안 쓴다.”
부영이는 계속 나를 설득했다. 나는 시를 그만 둔지가 7년이나 되었다. 시는 내 곁에서 멀리 떠나있었다.
이듬해 선친께서 돌아가셨다.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마약 같은 시에 다시 손을 댔다.
나와 부영이는 의기투합했다. 동인지를 내자고 했다. 사람이 필요했다. 첫 번째 찾은 사람이 조완수 형이었다. 숭전대 영어교육과에 같은 해에 편입한 교대 선배였다.
추운 겨울밤이었다. 대전에 있는 산내 초등학교를 찾았다. 정부영, 조완수, 나 셋이 숙직실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선배님께 간곡히 청했다. 완수 형은 우리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숭전 대학교 옆은 경부선 기찻길이었다. 철도 건너편에 막걸리집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와 술을 마시며 쉬었다가는 곳이었다. 막 열차가 지나가면 우리는 거나하게 취했고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인지 명칭은 그 옛날 제천 의식인 무천(舞天)으로 정했다. 하늘을 향해 춤을 춘다는 뜻이다. 문학은 그래야한다며 모두가 좋아했다.
어느날 몇몇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에서 혼술을 마시는 키 큰 사나이가 있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자신만만했다. 그 친구와 합석했다. 그 역시 같은 국어교육학과에 편입한 친구였다. 산 넘고 강 건너 소식을 전해주는 우체부였고 문학을 하고 싶어 편입했다는 것이다. 이름은 육종관이었다. 호탕하고 멋진 친구였다.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바로 대답해주었다. 4명이 되었다.
얼마 후 백운관과 홍승관이 동참했다. 홍승관은 내가 아는 서정시를 잘 쓰는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고 백운관은 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같은 국어교육과에 편입한 열정이 대단한 친구였다.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있다. 김석환이다. 김석환은 이미 충청 신춘문예에 「심천에서」로 당선한 기성 시인이었다. 고등학교 후배지만 숭전대 국어교육과는 1년 선배였다. 함께 하자고 했더니 쾌히 승낙했다. 그 후배는 시를 참 잘 썼고 무천의 보배였다. 그리고 교대 동기로 나중에 교육감을 지낸 김신호가 우리와 함께 승선했다. 일단의 진영은 갖추어졌다.
무천 제호는 지금은 내로라하는 내 친구 서예가 송암 정태희가 썼으며 표지 그림은 화가 기산 정명희가 그렸다.
모든 것이 갖추어졌고 이젠 작품이었다. 그것은 자기 책임이었다. 다소 쳐지는 작품이 있기는 했다. 서로가 ‘그 작품은 된다, 안 된다.’ 토론은 거셌지만 결국은 무천호에 다 함께 승선 했다. 무천은 대전에서 백지, 시도, 도가니 등의 뒤를 이어 몇몇 안 되는 문학잡지 중 하나로 당당하게 출발했다. 1981년이었다.
정부영은 만나면 늘 내게 말했었다.
“너는 시를 써야한다. 시를 써야한다.”
극구 내게 설득했던 그였으나 수십 년 교사 생활 하면서 그 동안 무천에서 뜸했다. 나 역시 학문 연구로 적극 참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시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열정이 넘쳤던 우리였으나 떨어져 살다보니 무천과 멀어져 갔고 환경 또한 달라 만나기도 어려웠다. 세월과 인연은 참으로 묘하고 알 수가 없다. 친구도 정년퇴임하고 나도 정년퇴임하고 우리는 또 다시 늘그막에 문학으로 만났다. 아뿔사.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동안 못 다한 우정을 나눌까 했더니 그 친구는 아주 멀리 가버렸다. 정감 있는 따뜻한 친구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창간호에 참여했던 또 한 친구 백운관은 젊었을 적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재주 있는 두 시인이 문학으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이름 없는 별이 되었다.
김석환도 명지대 교수를 명예퇴직하고 늘그막에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안 되어 뇌출혈로 또한 세상을 떠났다. 칠십도 채 안된 아까운 나이였다. 8명이 함께 했는데 3명이 먼저 갔다. 인생은 참으로 무상하고도 무심했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 야속하기 짝이 없는 세월이다.
올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달빛 한 그릇,무천문학 제 42집,2024.
첫댓글 잔잔한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경부선 기찻길~ 철도 건녀편 막걸리집~~~" 그 풍경이 아련히 그려집니다. 교수님! 오래도록 건강하십시오()
그 때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읽어주셔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선생님.